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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10/15
    다문화사회, 그 서글픔(4)
  2. 2009/10/14
    나의 망상
  3. 2009/10/11
    내가 걷는 길
  4. 2009/10/10
    2001년 그해의 여름(2)
  5. 2009/10/07
    타인의 고통(4)
  6. 2009/10/06
    직장인은 괴로워
  7. 2009/10/05
    남자도 괴롭다
  8. 2009/10/03
    상념
  9. 2009/10/02
    한심한 정치평론(2)
  10. 2009/10/01
    여성적 글쓰기

다문화사회, 그 서글픔

얼마전 친구가 파리를 다녀왔다. 생각보다 도시가 너무 혼잡하고 지저분해서 실망했다고 하는데 놀란 점 중에 하나가 이주노동자, 특히 아프리카 출신 노동자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독일도 택시 노동자들은 터키 출신으로 알고 있다. 책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파리의 어느 공장노동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그들은 노동자라는 정체성보다는 이민자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소외된 자들 중에서도 소외된 자들이다.

 

현재 한국에서 이주민을 수입하는 방식은 크게 노동력과 신부 수입이다. 노동력은 다시 연수생과 불법체류자로 나뉘며 결론적으로 합법적인 신분의 노동력은 거의 존재하지 않다시피 하고 있다. 정부는 주기적인 강제추방으로 이들을 솎아내어 이들의 정착을 막고있다. 한국에 3년, 혹은 5년 이상 체류한 노동자에 한해서 합법적인 비자를 발급했을 경우 본국에서 가족을 데려오거나 한국인과 결혼하여 정착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정부는 이를 우려할 것이다. 그러나 여성 이주노동자의 경우 한국인과 결혼하면 주민등록증이 발급되며 한국에 정착할 수 있다. 한국에 수입되는 신부들도 한국인과 결혼하기 때문에 이들이 낳은 자녀는 한국인이 되고 이들의 2세는 한국인과 결혼할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에 숫적으로 봤을때 한세대가 지나면 혈통에는 큰 지장이 없다고 보는 것이 좋다. 한국은 많은 수의 국민이 해외로 이민을 가고 있으며 그에 따라 정부는 이민자들이 정착국에서 합당한 대우를 받길 바라면서 정작 본국에서 본국 경제를 위해 희생하고 본국의 국민과 결혼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방적으로 대하고 있다.

 

다문화사회라는 말은 어쩌면 듣기 좋은 허울 좋은 말일지도 모른다. 이동하는 사람들은 이동의 자유가 부여된 상류층과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 어딘가로 떠나야하는 사람들이다. 중간에는 대다수의 어디에도 가지 못하는 붙박이인생들이 있다. 우리는 이제 아무도 원치 않는 일을 대신 해 줄 사람들이 여기에 와 있다. 일본에서는 유흥가의 '삐끼'들도 아랍노동자들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제 도처에서 이주노동자들과 만날 것이다. 한국여성과 결혼할 수 없는 남성을 위해 빈곤한 세계의 여성은 계속 수입될 것이다. 필요해서 수입했다면 최소한 이들을 위한 대책은 세우는게 도리라고 하겠다. 그들은 오늘도 한국경제를 지탱하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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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망상

한동안 꿈같은 백수생활을 하다가 지옥같은 직장생활을 하고있다. 내 꿈은 백수지만 나도 남들과 다를 바 없이 소중한 돈때문에 직장에 다니고 있다. 몇년씩 조신히 한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집에서 노는게 주말이나 휴가때나 가능하지만 나처럼 밥먹듯이 수시로 직장을 그만두는 인간은 직장을 다닐 때와 집에서 놀 때가 확연히 다르다. 우선 직장에 다니면 밥을 많이 먹게 된다. 집에 있을땐 먹고 싶으면 아무때나 먹을 수 있기 때문에 한번에 많이 먹을 필요가 없지만 직장에 다니면 먹는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한 번 먹을 때 많이 먹어둬야한다. 나는 고기는 먹지 않는 주의지만 직장생활을 할 땐 고기를 먹는다. 선택의 폭이 좁아지기 때문이다. 나는 고기를 즐겨먹던 그 옛날부터 고기를 먹으면 소화가 잘 안되서 고기가 나한테 안맞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직장에 다닐땐 고기를 먹어야한다. 먹을땐 맛있지만 소화가 안되서 괴롭다. 퇴근후엔 화풀이로 주로 먹는다. 지하철 타기 전에 먼저 뭔가를 먹고 지하철에 내려서 또 뭔가를 먹을 때도 있다.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돈이 너무 많이 지출된다. 어젠가 옷이 좀 끼는 것 같아서 어~ 안되겠는데 하고 생각했지만 그 날 퇴근후에 또 먹었다. 집에 들어오면 또 망상의 세계로 달려간다. 나의 오랜 꿈은 돈버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결혼을 해서 남자는 돈벌러 밖에 내보내고 나는 남자가 벌어오는 돈으로 사는 상상에 잠긴다. 어차피 요새 직장인들은 아침은 안먹으니까 아침엔 그냥 나갈테고 점심은 밖에서 먹을테고 저녁은 먹고 들어올테니까 나는 그냥 나 먹을것만 챙기고 주말엔 모.. 단촐한 외식.. 어차피 내가 만든게 맛있을리 없잖아.. 청소와 빨래 정도하면 되지 않을까. 남의 노동에 기생해서 살아가려는 내 꿈은 아주 오래전부터인테 아무도 나와 결혼하겠다는 남자가 없어서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내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영악함이 마음에 든다. 왜 내 꿈은 실현되지 않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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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걷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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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그해의 여름

내가 그를 만난 것은 2000년 여름이었다. 당시 나는 4년째 하고있던 학원강사를 그만두고 관광안내원 자격증을 따려고 고군분투중이었다. 영어공부를 하려고 코리아헤럴드를 구독중이었는데 거기서 국내거주 외국인들을 위한 엠네스티 모임이 있다는 광고를 봤다. 한국인도 올 수 있다고 했다. 거기 가면 영어로 떠들 수 있으니 외국인 친구도 사귀고 돈 안들이고 영어공부를 할 수 있겠다아.. 이런 생각에 가보았다. 혜화동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햄버거를 먹으면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인신매매 얘기가 나오자 어떤 남자가(아프리카인이다) 자기가 몸파는데 그게 왜 문제야하면서 웃었다.(사실 나는 그 대화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이해하는척하면서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러자 한쪽에 앉아있던 필리핀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무도 몸을 파는걸 원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홍콩 주재 필리핀 대사관에서 고용인에게 맞아죽은 글렌다 로리오라는 여자에 대해서 말했다. 그녀는 domestic worker인데 그 집에서 도망쳐서 대사관으로 피신했으나 고용인이 대사관까지 쫓아와서 그녀를 폭행했다. 사람들이 방관만하고 아무도 말리지 않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죽었다고 한다. 엠네스티는 국내 인권문제에는 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고 하자 그는 낙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잘못 찾아왔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학생이냐고 영어로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한국말로 노동자라고 대답했다.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봤더니 컴퓨터 임브로이더라고 했다. 컴퓨터 관련직종이라고 생각했는데 더 물어보니 옷에 상표를 박는 재봉사였다. 모임이 끝나고 나는 그에게 전부터 이주노동자에 관심이 있어서 좀더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버스를 타면 종종 이주노동자들과 같이 탈 때도 있었지만 한번도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그는 혜화동 벤치에서 내게 열심히 설명을 해주었다. 그는 나에게 전태일 얘기를 해주었다. 영화를 봤는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일단은 책도 샀는데 읽을 수가 없어서 괴롭다고 한다. 필리핀에는 전태일처럼 용감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에게 전태일 얘길 처음으로 해준건 이주노동자다. 그를 따라서 혜화동에 있는 필리핀 공동체에 갔다. 허름하고 비좁은 집인데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다들 나에게 사장이 월급을 안준다며 전화 좀 해달라고 했다. 전화를 걸었더니 사장이 넌 누구냐고 했다. 친구라고 했더니 그냥 끊었다. 기분이 몹시 나빠진 나는 외노협에 전화를 했다. 체불임금상담하는걸 해보고싶다고 했더니 언제 찾아오라고 했다. 거기 갔더니 어떤 센터에서 일하는 활동가가 있었는데 주말에 아주 바빠죽겠으니까 와서 좀 도와달라고 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그 센터에서 주말에는 상담활동을 도왔고 주중에는 노동부 지방노동사무소에 갔다. 상근하시던 분이 노조를 만들겠다며 떠났고 빈자리를 내가 채웠다.

 

일요일이면 센터는 북새통이었다. 상담자와 피상담자의 관계는 결코 동등한 것이 아니어서 내게 상담을 받으러 오는 노동자들은 여자건 남자건 나를 무척이나 하늘처럼 우러러봤다. 자기들 문제를 내가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오자마자 공장에서 얼마나 수모를 당했는지 하염없이 말하곤했는데 나는 내가 묻는 사실에만 대답하라고 차갑게 말했다. 그 얘기 다 들어주다간 날 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 중 일부는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만 얘기하고 불리한 사실은 말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가고 난 다음에 사장한테 전화를 하면 완전히 다른 얘기를 한다. 보통 노동자 세 번, 사장 세 번 이렇게 확인을 하고난 뒤 사실관계가 정리되면 수순에 들어간다. 될 수 있으면 진정을 하지 않는 방향으로 일처리를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진정을 하게 되면 노동사무소에 가야한다. 사장은 보통 장부를 들고 오는데 완전 지꼴리는대로 썼기때문에 그건 볼 필요도 없다. 처음 노동사무소에 갔을때는 근기법을 잘 몰라서 감독관에게 당하기 일쑤였다. 노동사무소 화장실 유리를 박살을 내고싶을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어떤 노동자는 막상 사장이 나타나면 나한테 했던 얘기와는 정반대 얘기를 해서 그 싸움을 완전히 패배로 이끈다. 밖에 나가서 당신 왜 그랬냐고 부들부들 떨면서 물어보면 사장이 무서워서 그랬다고 한다. 그 다음부터는 좀 온순해보이는 노동자를 보면 들어가기 전에 그 사람은 이제 더 이상 당신 사장이 아니라고 몇번이나 다짐의 다짐을 받아야했다. 나는 정말이지 그 사람들에게 가혹하게 굴었다. 당신들이 원하는건 돈이잖아. 돈을 못받으면 노동자들은 울거나 분노하거나 굉장히 괴로운 반응을 보인다. 처음에는 나도 어쩔줄 몰라하면서 무슨 말을 해야좋을지 몰라 같이 괴로워했지만 점점 시간이 갈수록 상황에 맞게 문구도 매뉴얼화되어 적절한 말을 자동적으로 읊어주었다. 나는 거기서 라틴 아메리카 계열 노동자들 빼고 우리가 흔히 제3세계라고 부르는 곳에서 온 사람들은 거의 다 만나봤다. 부르키나파소에서 온 노동자도 만났는데 어떻게 한국을 알고 오셨습니까 하고 물어봤더니 친구가 여기서 일하길래 나도 왔다고 대답했다. 필리핀이나 파키스탄 노동자들은 한국에 거의 맨처음 유입된 노동자들이어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데 반해 아프리카(모로코, 알제리, 튀니지아 제외한)에서 온 노동자들은 한국에서 가장 가혹한 대접을 받고 있다. 한번은 어떤 아프리카분이 자기 작업일지를 들고 왔는데 나는 그걸 보고 내 눈을 의심했다. 두 달 동안 일한 시간이 빼곡이 적혀있는데 그는 두 달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24시간을 일하고 그 다음날 18시간을 일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날은 16시간. 이런식으로 그의 작업일지는 무지막지하게 이어졌다. 이렇게 일하고도 죽지 않은게 희한한데 더 이상 일못하겠다고 했더니 돈은 나중에 줄테니 그냥 가라고 하더니 아무리 찾아가도 돈은 주지않고 욕설만 한다고 한다. 내가 센터에서 일했던 그 2년 동안 지난 30년 동안 살아오면서 당했던 수모를 모두 당했다. 그 2년 동안 그 전해에는 보도 듣도 못한 끔찍한 일을 경험했다. 볼거 못볼거 다 봤다. 사장한테 임금을 지급하라고 전화를 했더니 사장이 야밤에 도망을 갔는데 어떻게 돈을 주냐고 고함을 지르길래 찾아가보면 그 공장은 틀림없이 택시만 들어가는 아주 으슥한 곳에 있는 공장이다. 좀 무서운 얘기지만 그런 공장에서는 불법체류자 한 명 죽여서 땅에 파묻어도 모르지 않을까. 근로감독관들도 그럴거라고 그랬다. 어떤 공장에서는 매달 산재가 발생하는데 가보면 노동자들이 새까만 먼지를 뒤집어쓰고 눈만 반짝이면서 일을 하고 있다. 내 눈에는 도저히 그들이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공단에 있는 병원들은 산재가 발생하면 돈벌이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아주 좋아하고 사장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다. 한번은 손을 심하게 다친 베트남 노동자가 있어서 찾아가봤더니 경미한 상태인 한국사람들과 같은 병동을 쓰고 있길래 사장에게 그 사람은 안정을 취해야하니까 독실을 쓰게해달라고 했더니 참견말라고 했다. 한번은 몽골 여성노동자가 손가락이 잘려서 같이 일하는 남자 상근자와 찾아가봤더니 시체처럼 누워있었다. 나와 같이 일하는 상근자는 카메라를 꺼내더니 사진기자처럼 자세를 바꿔가며 사진을 계속 찍었다. 그가 사진을 찍은 이유는 그 사진을 소식지에 올려서 회원들에게 돈을 뜯어내기 위함이다. 나는 의자로 그 인간의 머리를 쳐서 그가 피칠갑을 하고 뒹구는 상상을 했다. 산재다발공장에는 근로복지공단에서 내사가 들어오는데 기계를 좀더 안전한 것으로 바꾸게 한다. 그러면 생산성에 차질을 빚는 경우가 있는데 안절부절못한 사장은 망치를 들고 와서 안전장치를 부순다. 아까와 똑같아진다. 처음에는 순진해서 노동자들에게 프레스공장 다니면 손가락 다치니까 딴데서 일하라고 했는데 나중에 가구공장이나 얼음공장에서 일하다가 허리다친 사람보니까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다. 나는 체불임금상담만 했기때문에 산재의 세계는 잘 모른다. 하지만 산재다발공장에 가면 가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저 공장에서 다친 사람에게 보상금을 받게 해주는게 전부일까. 저 공장이 존재하는한 산재는 계속 발생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나는 점점 무기력함을 느꼈다. 급기야  어느 날엔가는 대대적인 강제추방이 벌어져서 이주노동자들을 전부 자기 나라로 돌려보내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남의 나라에서 기계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사는건 너무 끔찍한 일이다. 2001년엔 대대적인 단속추방이 벌어져서 한달동안 사무실만 지키고 있었다. 오뉴월 여름에 이주노동자들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애가 울까봐 애 입을 틀어막았다. 경찰이다 하는 소리에 맨발로 뒷산으로 도망치다 발에 피가 났다. 임신한 아내와 함께 병원에 갔던 남자가 붙잡혀서 아내가 그 자리에 쓰러져서 통곡을 했다. 내가 만났던 노동자들은 대부분 빨리 돈벌어서 집에 돌아가고 싶어했다. 어떤 중국 아저씨는 지갑에서 딸의 흑백사진을 보여주면서 자랑을 했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이 앨 못본지 벌써 오년째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가족에게도 이용당한다. 한국에서 송금하는 돈은 가족에게는 큰 돈이어서 가족이 풍족한 생활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지고 자식은 아버질 남대하듯이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돈을 보내지 않으면 본국에 있는 가족이 큰 곤란을 겪기 때문에 나는 체불임금을 해결해주는 것을 큰 보람으로 느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아무리 내가 그들을 대상화하지 않으려 해도, 그들의 삶에도 아름다움이 있다고 해도, 그들을 연민의 눈으로만 바라보지 않으려고 해도, 끔찍하다고 할 수밖에는 없다. 월드컵이 벌어진 2002년 여름 어느 날 손이 잘린 베트남 노동자를 만나러 병원에 갔다. 그는 한국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알았다한들 우리는 대화를 나눌 수 없었을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감당할 수 없어서 망연자실해 있었다. 그 날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신촌에 갔는데 붉은 티를 입은 사람들이 길거리를 가득채우고 있었다. 모두들 행복해보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똑같은 사람인데. 나는 결국 거길 떠났다. 2년이 채 안되는 그 시간은 알수없는 슬픔과 분노가 뒤엉킨 시간이었다. 나는 내가 삶의 비밀 중 하나를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건 도저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외설이었다. 나는 떠났지만 그들은 떠날 수 없다는 사실에 일말의 죄책감같은걸 가지고 살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괜찮아졌다. 거길 떠난 뒤 몇 달이 지나서 거울을 보았을 때 내 눈빛이 순해져 있는걸 보았다. 화난 표정을 지어보았는데 잘되지 않았다.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더 이상 그들의 불행은 내 불행이 아닌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있다. 언젠가 누가 예전에 다 끝난 일을 가지고 날 찾아온 적이 있다. 진정건이 사장의 지급불이행으로 검찰에 송치되어 완전히 끝난 사건인데 굉장히 힘들었는지 다시 그 사건을 진행해달라고 왔던것같다. 나는 안된다고 계속 설명했는데(뭐 달리 방법이 있긴 하지만 그 일말고도 일이 억수로 많았다) 그 사람은 끝도 없이 자기 얘기만 했다. 내가 화가 불같이 나서 노발대발하자 그걸 보고 있던 어떤 사람이 이 여자 도대체 뭐에요? 시골에서 왔어요? 하고 물었다. 엥? 그 사람 생각에 따르면 도시에서 자란 여자는 교양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삿대질을 하면서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자랐다고 했더니 나에게 체불임금 상담하는걸 가르쳤던 선생님이 쓸데없이 이 사람 저 사람과 싸우지말라고 했다. 그 일 때문인지 남과 다투기 좋아하는 내 성격은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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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중2때 별명이 펭귄이었다. 키는 작은데 발만 빨리빨리 움직였기 때문이다. 언젠가 언니가 집에 들어오려고 하는데 눈앞에 뭔가가 휙 지나가서 저게 뭐지 했는데 나였다. 집앞에 있는 가게에서 뭔가를 사가지고 쏜살같이 집에 들어갔던 것이다. 백미터 달리기도 아주 잘한다. 오래 달리기도 아주 잘한다. 예전엔 수영도 아주 잘했다. 그러나 운동부족과 흡연으로 요즘은 부진을 면치못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걸음은 빠르다. 사람들은 나보고 아주 씩씩하다고 한다. 그런데 내겐 걸음이 불편한 친구가 있다. 오래전에 그 친구와 걸어가다가 친구가 나한테 한마디했다. 다리 멀쩡하다고 티내는거야. 그 말을 들었을때 몹시 언짢았다. 난 원래 걸음이 빠를뿐인데. 그 친구를 배려하지 않은건 사실이지만 친구와 같이 있다보면 친구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 저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을텐데. 속으로 서운했지만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나서 바로 며칠 뒤 백화점에 갔는데 어떤 애가 에스컬레이터에 장난을 치다가 엎어질뻔 했다. 그러자 그 애 엄마가 소리를 질렀다. 야 너 병신되고 싶어, 어? 너 병신되고 싶어. 내 친구는 이런 세상에서 살고있는거였다.

 

전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을때 친하게 지냈던 선생님들이 고생많이 했다고 부산에 놀러오라고 했다. 부산엔 회의때문에 몇 번 간 적이 있었는데 맨날 일하러 오고 제대로 구경도 못했으니까 이번엔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해서 나는 직장을 그만두자마자 부산엘 내려갔다. 그런데 바퀴가 달린 가방을 들고간게 화근이었다. 그 가방때문에 계단을 만날때마다 괴로웠다. 왜 그렇게 계단이 많은지, 그리고 길바닥은 왜 그렇게 험난한지, 나중엔 선생님들도 다음엔 그냥 배낭메고 놀러가라고 하셨다. 서울에 올라왔을땐 너무 힘들어서 그냥 택시를 탔다. 택시에 타자마자 나는 기진맥진해서 가방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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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은 괴로워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느라 바쁘다. 나는 지금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몰래 이 글을 쓰고있다. 내게는 두 명의 윗사람이 있다. 둘 다 남자다. 한 명은 말수가 별로 없고 야단을 칠 때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말은 이런 식이다. "사무실에서 담배피지 마세요" "수식 어디 갔어요" "이걸로 인수인계는 끝났어요. 더 이상의 인수인계는 없어요" 필요한 말만 하기 때문에 그의 지시는 반드시 적어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아.. 이건 지금 얘기해봤자 00씨가 못알아들을테니까 나중에 얘기하고..

 

또 다른 한 명은 말이 너무 많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는 지시를 내리지만 필요 이상의 말을 너무 많이 하기때문에 어떤게 지시인지 분간이 안간다. 결국 또 혼이 난다. 항상 일을 시키고 나는 시키는대로 했는데 그 결과가 마음에 안들면 다시 하라고 한다. 이건 결국 자기 지시가 마음에 안든다는 소리다. 지금까지 조직관리 개판으로 해놓고서, 그것도 지난 5년동안!!! 이제와서 단 하루만에 단 이틀만에 회원명부를 다시 만들라니 이 조직이 망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자기는 5년동안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회원들에 대한 정보를 다 꿰차고있지만 나는 지난달에 왔는데 나보고 이 사람 메일주소가 틀렸다는둥, 이 사람 휴대폰 번호가 바뀌었다는둥, 지금 이 사람은 여기서 일하지 않는다는둥 하며 화를 낸다. 어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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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도 괴롭다

나의 오래전 친구의 아버지는 자신이 대단히 비범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고 정계에 진출할 꿈을 품고 있었지만 집안사정으로 교사가 된 것이 철천지 한이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부모의 중매로 결혼을 했는데 그의 아내는 국졸이었고(지금식으로 얘기하면 초등학교만 나오신 분이다) 부부싸움을 할때마다 무식하다고 하면서 기선제압을 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이 말이 너무나 상처가 되어 검정고시를 봐서 고등학교 수료증을 땄다고 하신다. 그리고 못배운 것에 대한 설움때문에 평소에는 굉장히 귀부인처럼 하고다니신다고 하신다. 내 친구는 교사가 되는게 꿈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남자는 무조건 정치학과나 경제학과를 나와야한다고 하셔서 그는 경제학과를 들어갔고 대학 4년 내내 아무런 보람도 느끼지 못했다. 그의 형들은 결혼을 할 때 부모의 심한 반대에 부딪혔는데 그 이유는 그의 아내들이 내세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형수들이 당한 어머어마한 수모에 대해 소상히 얘기해주었는데 그 이유는 나도 그 여자들처럼 내세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명절이 되면 집에 같이 내려가자고 했지만 막상 명절이 되니까 혼자 내려갔다. 명절이 되면 그의 형수들은 죽도록 일만 하는데 집에 돌아가면 끔찍한 복수극이 벌어진다고 한다. 아마 그 형수들은 시부모가 늙기만을 기다리지 않을까. 내 친구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감정을 보이는것은 여자들이나 하는 짓이며 싸움을 할 때 감정소모를 하지 않도록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야단을 맞을 때에도 울거나, 울다가 어머니가 달래주거나 하면 둘 다 몹시 심하게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보통 대화를 할 때는 몹시 예의바른데 상대방이 자기 마음에 안드는 소리를 계속하면 그 다음부터는 무자비해진다. 그는 무척 이성적이고 자제력이 강해보이지만 사실 그의 자제력은 대단한 것이 아니어서 내가 계속 시비를 걸면 웃으면서 생까는척하다가 이런 씨발 조까네 하면 그건 그의 인내심의 막대기가 분질러졌다는 뜻이다. 그 다음부터는 욕설을 섞어가면서 혼자서 뭐라고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그걸 보고있으면 걔 책꽂이에 있는 책을 다 걔 머리통에 던져버리고 싶어진다. 그는 평소에는 사람같이 말하다가 자기가 좀 아는 주제나 심사가 뒤틀리거나 하면 혼자서 뭐라고 뭐라고 말하는 이상한 습관이 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때는 싸워도 항상 내가 밀렸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승리는 나의 편이어서 나는 그가 나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소상하게 알려주었다. 왜냐면 그가 방에서 혼자 쉬고 있을때 나는 방구석에서 어떻게 하면 이길까를 궁리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너와는 도저히 행복해질 수 없을것같다는 통보를 받았다.

 

하나밖에 없는 내 동생은 결혼을 한 뒤 아주 밝은 성격으로 바뀌었다. 올케가 밝은 성격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 ^0^ 심지어 아빠마저도 동생을 보면 저 놈이 내 아들이 맞는지 하고 놀래신다. 엄마는 오래전부터 아빠와 헤어져서 미국에서 살고 계신데 몇년전에 동생 부부가 미국에 있는 엄마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다음에 올케가 나를 찾아와서 부들부들 떨면서 그 때의 일을 회상했다. 엄마의 아들 사랑은 유별난 것이어서 심지어는 어렸을때 언니와 나는 눈물, 콧물을 흘려도 약을 안주셨지만 동생은 조금만 캘록거려도 약을 먹여서 아무리 약을 먹어도 잘 듣지 않는 기질로 애를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동생 부부가 미국에 갔더니 엄마가 사람들 보는데서 올케는 사람 취급도 안하고 아들 자랑만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엄마가 올케에게 어떤 남자에게 받은 반지를 보여주면서 너 남자한테 이런거 받은적 있니 하고 자랑을 하시더란다. 내가 그 말을 듣자 엄마가 드디어 미쳤구나!! 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니까 올케가 식겁해서 놀랬다. 엄마는 미국에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올케가 미국에서 기분이 너무 너무 나빠서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손을 부들부들 떨고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훔치니까 내 동생도 말없이 가만히 있더란다. 그리고 집에서 끔찍한 복수극이 벌어졌다고 한다. 불쌍하다 내 동생.. 내 동생은 아무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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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념

여대를 다녔던 나는 입학하자마자 무려 다섯명의 친구가 생겼다. 항상 여섯명이 몰려다녀야하니 즐거울 때도 있었고 괴로울 때도 있었다. 미팅을 하거나 클럽에 가거나 술을 마실 때는 행복했다. 사람이 많을 수록 좋으니까. 하지만 평소에는 힘들 때가 더 많다. 1학년 때는 노는게 좋으니까 그냥 좋았는데 2학년이 되니까 내 생활에 회의가 생겼다. 친구들은 많았지만 그 중 내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그 뒤로도 어딜 가든 여자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 좋은 대접을 받았던 기억은 없다. 여자들과는 개인적으로는 친분을 맺었지만 아무래도 내 사회성은 여자들과는 안맞는것같다. 내 친구들은 주로 남자들이다.

 

지금은 친구가 고참주부가 되었지만 처음 결혼했을 때는 누구가 그러하듯이 남편에 대한 하소연을 많이 했다. 그 중 하나가 남편이 집안일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때 놀랍게도 친구 남편의 편을 들었다. 너는 하루종일 집에만 있으니까 관심사가 집밖엔 없지만 남편은 하루종일 밖에서 일만 하는데 집에 들어오면 쉬고싶지않을까. 친구는 넌 친구도 아니라고 막 화를 냈다. 왜냐면 그 때 나는 직장을 다녔고 언니는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내가 집에 들어오면 언니가 나한테 넌 집안일에 관심도 없다고 나를 들들 볶았기 때문이다. 가재는 게 편.

 

운동을 상당히 늦은 나이에 시작했던 나는 어느 조직에 있었는데 그 조직은 남녀비율이 대략 3:1이었다. 뭐 활동가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상당히 분위기가 좋았고 나는 그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물론 여기서도 나는 친구들이 주로 남자들이었다. 남자들과 주로 대화하다보면 결국 남자들의 하소연을 듣게된다. 그들의 하소연은 이렇다. 여자들의 판단이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한번은 어떤 여성활동가가 여자는 가슴이 빵빵해야돼라는 말을 하는 것을 분명히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말을 남성활동가가 하면 성희롱이 된다는 것이다. 아.. 그들의 피해의식은 말도 못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무서워서 술을 못마시겠단다. 물론 나는 남자들이 술을 마시고 저지르는 짓이 술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성적매력이 없기 때문에 사소한 말실수도 여자들이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섹시하면 여자들이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거란다. 흑흑..

 

얘기가 산으로 가는데 나는 논쟁을 할 때 논쟁의 당사자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논쟁하지 않을 때도 있다. 서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논쟁할 때가 있다는 뜻이다. 그럼 왜 논쟁을 하는가. 그 논쟁을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 논쟁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옮음을 주장하기 때문에 비판자가 아무리 자기 논리가 틀렸다고 친절하게 설명해줘도 잘 받아들이려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경우를 지난 십년동안 수도 없이 봐왔다. 사람들은 이해관계에 사로잡혀 있을때 주관적이지 객관적이 되기 힘들다.  우리는 선악이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스피노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에 따를 때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로우면 선이라고 하고 자신에게 해로우면 악이라고 한다. 선악의 기준이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부시는 이란, 이라크, 북한이 악이고 우리에게 부시는 악이다. 그람시의 [감옥에서 쓴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그때 잠깐 손만 대었던 그 주제를 <사심 없는> 관점에서, 즉 영원히 fur ewig 천착하고 싶습니다. 두번째는 비교언어학 연구입니다. 순전히 그것뿐이랍니다. 그보다 더 사심 없고 영원한 fur ewig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사심이 없다는 것은 이해관계를 벗어났다는 뜻이다.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틀릴 수도 있고 상대가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하지만 논쟁을 할 때는 전혀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비극의 시작이다. 나는 얼마전 누군가에게 헛소리로 도배하지 말라는 말까지 들었는데 이 말은 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다 개소리니까 입닥치고 있으라는 말이다. 나는 이 사람이 권력을 가지면 정말 무서워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추신. 남자들이 하소연하는거 들으면 나도 초큼 미안해져서 응.. 그렇구나.. 미안해.. 나도 앞으론 조심할께 그러지만 또 내 신경 건드리면 다시 악마근성 나온다. 정념에 사로잡힐 때 인간은 무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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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한 정치평론

나는 정치평론은 별로 쓰고싶지 않다. 현실정치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이다. 신문도 안 보고 테레비도 보지 않는다. 국회의원 이름도 잘 모르니 그 사람들 머리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있는지 알 턱이 없다. 그런 내가 왜 이런 글을 쓰고 있는가. 얼마전 <레디앙>에서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진보신당이 1.9%의 지지율을 얻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 정도면 존재감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3.9%의 지지율을 얻어 도찐개찐이지만 친박연대와 창조한국당보다는 높은 지지율을 얻었다는 점에서 축하할만하다. 도대체 우리의 진보정당은 악마같은 이명박이 통치하는 이 엄혹한 시기에 무엇을 하고있나. 슬프다.

 

어제 점심을 먹다가 어느 분이 한탄을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폴레옹은 인민은 이익과 공포에 의해서만 움직인다고 했다고 한다. 확인해보지 않아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또 어느 분은 자신이 노조위원장이었을 때 조합원들한테 파업하자고 해도 안하니까 저 XX놈들 더 당해봐야돼 그랬는데 사측이 더 탄압을 하니깐 아예 사측에 붙었다고 하신다. 이것도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기본적으로 정치는 통치의 기술이고 윤리와는 무관한 것이다. 민주주의가 꽃을 피웠던 고대 그리스에서도 자유인들은 정치에 대해 논했지만 어차피 정치에 대해 논할 수 없었던 여자와 노예들이 있었고 그들을 통치하는 기술에 대해서도 논하지 않았을까. 근본적으로 해방의 정치는 반정치를 지향해야지 정치에 대해서 말해서는 안된다. 미국에서는 이미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pc용어)이란 말은 냉소적으로 쓰이고 있다. 뭐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말해서 ~지.

 

미국은 진보정당이 아예 없다시피 하고 두 개의 자본당이 번갈아가며 통치를 하고 있는데 그건 미국에서 대선이 하나의 쇼이기때문이다. 미국은 선거인단제도가 있기 때문에 선거인단을 뽑아도 정당에서 매수할 수 있고 오직 관건이 되는 특정주에서의 대결이 판세를 가르는 경우가 많다. 근본적으로 이 선거인단제도는 17세기(아마도)에 미국에 처음 도착한 사람들이 직접투표를 했을 경우 정치가 급진적이 될 수 있다는 매우 계산적인 판단하에 고안한 제도로 알고 있다. 그래서 예전에 부시가 재선에 성공했던 그 대선에서 네이더가 출마했을때 한국의 좌파조직 중에서 네이더를 지지하고, 네이더를 지지하지 않고 민주당을 지지하는 미국 좌파들을 비판하는 글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것은 미국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네이더가 출마하는 것은 말 그대로 부시의 당선에만 도움이 될뿐이지 미국은 선거인단 제도를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진보정당 후보가 골백번 출마해도 당선되는 일은 없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악의 세력이라고 해도 자기들끼리 번갈아가며 집권하는게 좋지 집권세력이 자기 잘못에 대한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은 좋은게 아니다. 물론 부시의 재선이 네이더 탓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만큼 네이더는 대단하지 않다.

 

당시 부시의 재선은 근본적으로 깜빡이전술 덕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에서는 각종 색깔의 경보를 수위를 조절해가며 발동했는데(오렌지색 경보, 적색 경보 기타 등등) 이것때문에 미국인들이 느낀 공포감은 대단했다. 항상 전투태세였고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해줄 사령관이 필요했던 것이다. 민주당도 호전적이지만 공화당에 비해서는 야성적인 맛이 많이 부족하다. 실질적인 위협을 느끼는 민중의 정서를 이해하지 않고 부시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선전/선동하는 것은 사람들이 결국 자신들을 위협하는 세력과 동일시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을 뿐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민족해방과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전략하에 의회주의 전술을 구사하고 있는데 근본적으로 선거공약이라는 것은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일종의 상품과도 같은 것이고 유권자에게는 욕망이 있는데 그 욕망은 무상의료나 무상교육이나 용산 피해자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다. 좀 비참하게 말해서 강남에 이사갈 수 없으니까 자기 아이가 나중에 커서 피해보지 않도록 강남 버금가는 교육시설이 자기 동네에 들어오는 것이고 재개발이 되서 집값이 오르는 것이고  자기 동네에 무슨 시설을 설치해주든가 없애주든가 하는 그런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꼭 비난받아야 하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런데 평소에 진보정당은 용산집회에나 가 있고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면 사람들이 보기에 진보정당은 선거때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준다고 하지만 막상 집권하면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을 할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요즘 대학생들이 학생회 선거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고 나는 분명히 들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정치는 윤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고 힘이 없으면 그 세력 지지하지 않는다. 진보정당은 의회주의 전술을 구사하는 이상 힘을 길러야하고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적절히 자신의 의도를 숨기고 대중을 기만할 줄 알아야한다. 진보정당 당원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분열된 자신을 발견하고 양 극단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죽일듯이 싸우는것은 정력낭비라고 본다. 의회주의 전술은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을 택했다면 이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포장하는 방법을 연구해야한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이게 중요한 것이다. 나는 제발 의회주의 전술을 구사하는 진보정당이 고도의 세련된 기만술에 대해 공부하길 바란다. 집권하고 나서 엎어버려야지 집권하면 엎어버리겠다고 벌써부터 얘기하면 사람들이 무서워하잖아.

 

추신. 이명박은 그짓을 하고도 왜 40%의 지지율을 획득하는가. 그는 기만에 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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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적 글쓰기

얼마전 술자리에서 어떤 여성에게 마초적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건 내가 앞에 앉아있던 남자와 기염을 토했기때문이다. 나는 목소리가 큰 편이고 흥분하면 목소리가 더 커진다. 이건 상태가 심각하게 좋아진건데 예전에 아주 안좋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일에 대해서는 지금 얘기하고 싶지 않다.

 

오늘 우연히 뭔가를 보다가 사이버페미니즘이라는 태그를 발견했다. 예전에 사이버걸이라는 번역글이 있었던게 기억이 나서 그건가 하고 열어봤더니 다른 글이었다. 그런데 이 부분.

 

"웹이라는 공간에서조차 여성은 남성의 권위적이고, 논리적인 글쓰기 체계를 강요받는다. 이는 익명성을 담보로 여성에게 폭력적이며, 억압적 형태로 재현되기도 한다. 사회, 문화, 정치적 이슈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쓴 글에 대한 남성의 반응은 이슈에 대한 논의점을 찾는 것이 아닌 “논리적이지 못하다”, “체계적이지 못하다”로 귀결된다. 하지만 여성주의 웹진에서는 이러한 남성적 글쓰기에 대한 강박증을 지양하며, 여성적 글쓰기를 통한 담론을 추구한다.

현실에서 여성 간 대화는 딱딱하고 논리적으로 표현하려는 남성의 대화방식과는 다르다. 여성의 대화는 육하원칙 아래 정형화된 틀로 이루어진 남성들의 대화방식과는 달리 상대방을 배려한 친밀성을 바탕으로 한다. 여성적 글쓰기는 대화에서처럼 구어체적이며, 수사법을 무시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 그리고 이를 통한 공감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어렵다”고 표현될 수도 있는 남성적 글쓰기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난 여성적 글쓰기는 여성들에게 좀 더 많은 참여와 소통을 이끌어낼 수 있는 소통체계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여성적 글쓰기 방식은 사적이라 치부되는 여성의 경험을 좀 더 쉽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한다. 즉, 여성적 글쓰기는 남성중심적 체제에서는 불가능한 표현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 여성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곳, 여성주의 웹진 (1) 글쓴이 | 박명희

 

이 글은 아마 예전에 쓰여진 글인것같다. 이 글의 필자는 지금은 어떤 견해를 갖고있을지 좀 궁금하다. 인터넷이 대중화되었던(매트릭스 영화를 패러디한 두루넷광고가 나오던 그 시절) 그 때에는 실제로 여성들이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식으로 면박을 당했다. 물론 여기에 맞서는 여성들의 독설도 장난아니었다. 그리고 여성이 글을 많이 쓰는 공간에서는 내 글이 아무래도 여성적 글쓰기가 아닌것같다는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 여성도 심심찮게 발견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단적으로 말해서, 필자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여성적 글쓰기란 없다고 보고 있어서도 안된다고 본다.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남성이 여성에게 당신 글이, 혹은 당신 말이 논리적이지 않다고 한다면 정말 그런지 아닌지가 문제인 것이지 그 문제제기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도 논리적이지 않고 횡설수설하는 남성을 보면 짜증난다. 남자들이라고 다 논리적인가. 여성의 대화가 상대를 배려하는 친밀성을 바탕으로 한 것은 사실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하는 가치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아닌가한다. 타인을 배려하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이지 특별히 여성은 타인을 배려하는 친밀한 글을 써야하는건 아니다. 원래 글이란 개인적인 것이고 개성을 표현하는 것이지 특별히 남성적 글쓰기와 여성적 글쓰기를 나누는 것은 사회에서 규정된 남성성과 여성성을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다. 폭력적인 환경 속에서 자란 여성은 타인을 이해하기보다는 증오가 많을수밖에 없고 권위적인 부모밑에 눌려서 자란 여성은 글에도 남성 못지않은 엄격함이 배어있을 수 있다. 문제는 글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자신이 글을 통해 얼마나 자신을 표현하는지, 혹은 기만하는지, 자신에 대한 성찰을 얻는 것이지 여성적 글쓰기는 이런 것이다라고 규정하는 것은 또 하나의 구속일 수밖에 없다. 나는 때려죽여도 여성적 글쓰기는 쓸수도 없고 그게 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사회관계의 총체라면, 글에도 그 자신이 살아온 삶이 은연중에 배일 수밖에 없다.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개인이지 남성이나 여성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사족이지만 예전에 내 친구는 남자들이 쓴 글은 지겨워서 여자들이 쓴 글을 주로 읽는다고 했다. 왜냐고 물었더니 다들 자기랑 비슷하게 써서 재미가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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