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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그해의 여름

내가 그를 만난 것은 2000년 여름이었다. 당시 나는 4년째 하고있던 학원강사를 그만두고 관광안내원 자격증을 따려고 고군분투중이었다. 영어공부를 하려고 코리아헤럴드를 구독중이었는데 거기서 국내거주 외국인들을 위한 엠네스티 모임이 있다는 광고를 봤다. 한국인도 올 수 있다고 했다. 거기 가면 영어로 떠들 수 있으니 외국인 친구도 사귀고 돈 안들이고 영어공부를 할 수 있겠다아.. 이런 생각에 가보았다. 혜화동에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햄버거를 먹으면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인신매매 얘기가 나오자 어떤 남자가(아프리카인이다) 자기가 몸파는데 그게 왜 문제야하면서 웃었다.(사실 나는 그 대화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이해하는척하면서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러자 한쪽에 앉아있던 필리핀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무도 몸을 파는걸 원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홍콩 주재 필리핀 대사관에서 고용인에게 맞아죽은 글렌다 로리오라는 여자에 대해서 말했다. 그녀는 domestic worker인데 그 집에서 도망쳐서 대사관으로 피신했으나 고용인이 대사관까지 쫓아와서 그녀를 폭행했다. 사람들이 방관만하고 아무도 말리지 않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죽었다고 한다. 엠네스티는 국내 인권문제에는 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고 하자 그는 낙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잘못 찾아왔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학생이냐고 영어로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한국말로 노동자라고 대답했다. 무슨 일을 하냐고 물어봤더니 컴퓨터 임브로이더라고 했다. 컴퓨터 관련직종이라고 생각했는데 더 물어보니 옷에 상표를 박는 재봉사였다. 모임이 끝나고 나는 그에게 전부터 이주노동자에 관심이 있어서 좀더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버스를 타면 종종 이주노동자들과 같이 탈 때도 있었지만 한번도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그는 혜화동 벤치에서 내게 열심히 설명을 해주었다. 그는 나에게 전태일 얘기를 해주었다. 영화를 봤는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일단은 책도 샀는데 읽을 수가 없어서 괴롭다고 한다. 필리핀에는 전태일처럼 용감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에게 전태일 얘길 처음으로 해준건 이주노동자다. 그를 따라서 혜화동에 있는 필리핀 공동체에 갔다. 허름하고 비좁은 집인데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다들 나에게 사장이 월급을 안준다며 전화 좀 해달라고 했다. 전화를 걸었더니 사장이 넌 누구냐고 했다. 친구라고 했더니 그냥 끊었다. 기분이 몹시 나빠진 나는 외노협에 전화를 했다. 체불임금상담하는걸 해보고싶다고 했더니 언제 찾아오라고 했다. 거기 갔더니 어떤 센터에서 일하는 활동가가 있었는데 주말에 아주 바빠죽겠으니까 와서 좀 도와달라고 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그 센터에서 주말에는 상담활동을 도왔고 주중에는 노동부 지방노동사무소에 갔다. 상근하시던 분이 노조를 만들겠다며 떠났고 빈자리를 내가 채웠다.

 

일요일이면 센터는 북새통이었다. 상담자와 피상담자의 관계는 결코 동등한 것이 아니어서 내게 상담을 받으러 오는 노동자들은 여자건 남자건 나를 무척이나 하늘처럼 우러러봤다. 자기들 문제를 내가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오자마자 공장에서 얼마나 수모를 당했는지 하염없이 말하곤했는데 나는 내가 묻는 사실에만 대답하라고 차갑게 말했다. 그 얘기 다 들어주다간 날 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 중 일부는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만 얘기하고 불리한 사실은 말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가고 난 다음에 사장한테 전화를 하면 완전히 다른 얘기를 한다. 보통 노동자 세 번, 사장 세 번 이렇게 확인을 하고난 뒤 사실관계가 정리되면 수순에 들어간다. 될 수 있으면 진정을 하지 않는 방향으로 일처리를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진정을 하게 되면 노동사무소에 가야한다. 사장은 보통 장부를 들고 오는데 완전 지꼴리는대로 썼기때문에 그건 볼 필요도 없다. 처음 노동사무소에 갔을때는 근기법을 잘 몰라서 감독관에게 당하기 일쑤였다. 노동사무소 화장실 유리를 박살을 내고싶을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어떤 노동자는 막상 사장이 나타나면 나한테 했던 얘기와는 정반대 얘기를 해서 그 싸움을 완전히 패배로 이끈다. 밖에 나가서 당신 왜 그랬냐고 부들부들 떨면서 물어보면 사장이 무서워서 그랬다고 한다. 그 다음부터는 좀 온순해보이는 노동자를 보면 들어가기 전에 그 사람은 이제 더 이상 당신 사장이 아니라고 몇번이나 다짐의 다짐을 받아야했다. 나는 정말이지 그 사람들에게 가혹하게 굴었다. 당신들이 원하는건 돈이잖아. 돈을 못받으면 노동자들은 울거나 분노하거나 굉장히 괴로운 반응을 보인다. 처음에는 나도 어쩔줄 몰라하면서 무슨 말을 해야좋을지 몰라 같이 괴로워했지만 점점 시간이 갈수록 상황에 맞게 문구도 매뉴얼화되어 적절한 말을 자동적으로 읊어주었다. 나는 거기서 라틴 아메리카 계열 노동자들 빼고 우리가 흔히 제3세계라고 부르는 곳에서 온 사람들은 거의 다 만나봤다. 부르키나파소에서 온 노동자도 만났는데 어떻게 한국을 알고 오셨습니까 하고 물어봤더니 친구가 여기서 일하길래 나도 왔다고 대답했다. 필리핀이나 파키스탄 노동자들은 한국에 거의 맨처음 유입된 노동자들이어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데 반해 아프리카(모로코, 알제리, 튀니지아 제외한)에서 온 노동자들은 한국에서 가장 가혹한 대접을 받고 있다. 한번은 어떤 아프리카분이 자기 작업일지를 들고 왔는데 나는 그걸 보고 내 눈을 의심했다. 두 달 동안 일한 시간이 빼곡이 적혀있는데 그는 두 달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24시간을 일하고 그 다음날 18시간을 일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날은 16시간. 이런식으로 그의 작업일지는 무지막지하게 이어졌다. 이렇게 일하고도 죽지 않은게 희한한데 더 이상 일못하겠다고 했더니 돈은 나중에 줄테니 그냥 가라고 하더니 아무리 찾아가도 돈은 주지않고 욕설만 한다고 한다. 내가 센터에서 일했던 그 2년 동안 지난 30년 동안 살아오면서 당했던 수모를 모두 당했다. 그 2년 동안 그 전해에는 보도 듣도 못한 끔찍한 일을 경험했다. 볼거 못볼거 다 봤다. 사장한테 임금을 지급하라고 전화를 했더니 사장이 야밤에 도망을 갔는데 어떻게 돈을 주냐고 고함을 지르길래 찾아가보면 그 공장은 틀림없이 택시만 들어가는 아주 으슥한 곳에 있는 공장이다. 좀 무서운 얘기지만 그런 공장에서는 불법체류자 한 명 죽여서 땅에 파묻어도 모르지 않을까. 근로감독관들도 그럴거라고 그랬다. 어떤 공장에서는 매달 산재가 발생하는데 가보면 노동자들이 새까만 먼지를 뒤집어쓰고 눈만 반짝이면서 일을 하고 있다. 내 눈에는 도저히 그들이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공단에 있는 병원들은 산재가 발생하면 돈벌이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아주 좋아하고 사장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다. 한번은 손을 심하게 다친 베트남 노동자가 있어서 찾아가봤더니 경미한 상태인 한국사람들과 같은 병동을 쓰고 있길래 사장에게 그 사람은 안정을 취해야하니까 독실을 쓰게해달라고 했더니 참견말라고 했다. 한번은 몽골 여성노동자가 손가락이 잘려서 같이 일하는 남자 상근자와 찾아가봤더니 시체처럼 누워있었다. 나와 같이 일하는 상근자는 카메라를 꺼내더니 사진기자처럼 자세를 바꿔가며 사진을 계속 찍었다. 그가 사진을 찍은 이유는 그 사진을 소식지에 올려서 회원들에게 돈을 뜯어내기 위함이다. 나는 의자로 그 인간의 머리를 쳐서 그가 피칠갑을 하고 뒹구는 상상을 했다. 산재다발공장에는 근로복지공단에서 내사가 들어오는데 기계를 좀더 안전한 것으로 바꾸게 한다. 그러면 생산성에 차질을 빚는 경우가 있는데 안절부절못한 사장은 망치를 들고 와서 안전장치를 부순다. 아까와 똑같아진다. 처음에는 순진해서 노동자들에게 프레스공장 다니면 손가락 다치니까 딴데서 일하라고 했는데 나중에 가구공장이나 얼음공장에서 일하다가 허리다친 사람보니까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다. 나는 체불임금상담만 했기때문에 산재의 세계는 잘 모른다. 하지만 산재다발공장에 가면 가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저 공장에서 다친 사람에게 보상금을 받게 해주는게 전부일까. 저 공장이 존재하는한 산재는 계속 발생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나는 점점 무기력함을 느꼈다. 급기야  어느 날엔가는 대대적인 강제추방이 벌어져서 이주노동자들을 전부 자기 나라로 돌려보내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남의 나라에서 기계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사는건 너무 끔찍한 일이다. 2001년엔 대대적인 단속추방이 벌어져서 한달동안 사무실만 지키고 있었다. 오뉴월 여름에 이주노동자들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애가 울까봐 애 입을 틀어막았다. 경찰이다 하는 소리에 맨발로 뒷산으로 도망치다 발에 피가 났다. 임신한 아내와 함께 병원에 갔던 남자가 붙잡혀서 아내가 그 자리에 쓰러져서 통곡을 했다. 내가 만났던 노동자들은 대부분 빨리 돈벌어서 집에 돌아가고 싶어했다. 어떤 중국 아저씨는 지갑에서 딸의 흑백사진을 보여주면서 자랑을 했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이 앨 못본지 벌써 오년째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가족에게도 이용당한다. 한국에서 송금하는 돈은 가족에게는 큰 돈이어서 가족이 풍족한 생활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지고 자식은 아버질 남대하듯이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돈을 보내지 않으면 본국에 있는 가족이 큰 곤란을 겪기 때문에 나는 체불임금을 해결해주는 것을 큰 보람으로 느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아무리 내가 그들을 대상화하지 않으려 해도, 그들의 삶에도 아름다움이 있다고 해도, 그들을 연민의 눈으로만 바라보지 않으려고 해도, 끔찍하다고 할 수밖에는 없다. 월드컵이 벌어진 2002년 여름 어느 날 손이 잘린 베트남 노동자를 만나러 병원에 갔다. 그는 한국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알았다한들 우리는 대화를 나눌 수 없었을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감당할 수 없어서 망연자실해 있었다. 그 날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신촌에 갔는데 붉은 티를 입은 사람들이 길거리를 가득채우고 있었다. 모두들 행복해보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똑같은 사람인데. 나는 결국 거길 떠났다. 2년이 채 안되는 그 시간은 알수없는 슬픔과 분노가 뒤엉킨 시간이었다. 나는 내가 삶의 비밀 중 하나를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건 도저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외설이었다. 나는 떠났지만 그들은 떠날 수 없다는 사실에 일말의 죄책감같은걸 가지고 살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괜찮아졌다. 거길 떠난 뒤 몇 달이 지나서 거울을 보았을 때 내 눈빛이 순해져 있는걸 보았다. 화난 표정을 지어보았는데 잘되지 않았다.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더 이상 그들의 불행은 내 불행이 아닌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있다. 언젠가 누가 예전에 다 끝난 일을 가지고 날 찾아온 적이 있다. 진정건이 사장의 지급불이행으로 검찰에 송치되어 완전히 끝난 사건인데 굉장히 힘들었는지 다시 그 사건을 진행해달라고 왔던것같다. 나는 안된다고 계속 설명했는데(뭐 달리 방법이 있긴 하지만 그 일말고도 일이 억수로 많았다) 그 사람은 끝도 없이 자기 얘기만 했다. 내가 화가 불같이 나서 노발대발하자 그걸 보고 있던 어떤 사람이 이 여자 도대체 뭐에요? 시골에서 왔어요? 하고 물었다. 엥? 그 사람 생각에 따르면 도시에서 자란 여자는 교양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삿대질을 하면서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자랐다고 했더니 나에게 체불임금 상담하는걸 가르쳤던 선생님이 쓸데없이 이 사람 저 사람과 싸우지말라고 했다. 그 일 때문인지 남과 다투기 좋아하는 내 성격은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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