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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1970년대말, 당시 한국에서 영어의 몸으로 고생하고 있던 셋째 형이 "나에게 독서란 도락이 아닌 사명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 서재나 연구실에서 씌어진 말이 아니었다. 고문이 가해지고, 때로는 '징벌'이라 부르던, 수개월 간이나 계속된 독서 금지처분을 당하던 상황에서 써 보낸 편지였다.

나는 곧바로 형의 이 말을 나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으로 받아들였다. 항변의 여지가 없었다.

한 순간 한 순간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면서, 엄숙한 자세로 반드시 읽어야할 책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독서. 타협 없는 자기연찬으로서의 독서. 인류사에 공한할 수 있는 정신적 투쟁으로서의 독서.

그 같은 절실함이 내게는 결여돼 있었다. 꼭 읽어야 할 책을 읽지 않은 채,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시시각각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소년의 눈물/서경식 지음. 돌베개

 

요즘 열심히 책을 사 모으고 있다. 전에는 퇴근 후에 서점에 가서 책 구경을 하다가 책을 사곤 했었는데 요샌 책을 거의 인터넷으로 산다. 그러다보니 책 소개나 리뷰를 보고 책을 사게 된다. 한 번 살 때는 십만원어치 정도 사는 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거의 읽지 않고 있다. 그래도 직장 그만두면 책 읽을 시간이 있겠지.. 하고 있다. 요즘 조금씩 읽고 있는 [미시마 유키오 대 동경대 전공투]란 책을 읽다보니 당시 전공투H라는 이름으로 미시마와 격론을 벌였던 고사카 슈헤이의 방은 왼쪽 한 면이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책이 꽉 차 있었다고 한다. 논쟁이 끝난 뒤 미시마는 방패의 모임(일본 우익모임)에 가서 동경대 전공투는 아주 머리가 좋아 하고 기분좋게 말했다고 한다. 나도 요즘 들어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그런데 인터넷으로 구입한 책을 읽다보면 느끼는건데 거의 8할이 꽝이라는 사실이다. 돈이 아깝다. 샀으니까 어쨌든 읽긴 읽는데 어차피 내년에는 버릴 책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이런 책들의 대부분은 쉽게 읽힌다는 사실이다. 정독할 필요도 별로 없고 책을 읽고 나서 어.. 이 책은 한번 더 읽어봐야겠네 하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고대로 책장에 꽂는다. 돌이켜보면 내 생애에서 기억에 남을만한 책은 정말 몇 권 안되는것 같다. 그리고 그런 책들을 읽을 때 상당히 고통스럽다.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깨지기 때문이다. 하나도 슬프지 않은데도 슬플 때가 있다. 두서없이 이 책 저 책 손에 잡히는대로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는게 갑자기 허망해졌다. 예전에 아는 사람과 같이 술을 마시다가 그 친구가 난 리버럴이야 하면서 웃었다. 나는 그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부도 안하는 한심한 리버럴들.. 이라고 욕하고싶지만 나부터 공부를 좀 해야겠다.

 

전엔 책보다는 영화를 보면서 세상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했다. 영화감독 중에는 일생 고통이니 구원이니 하는 문제에 천착했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삶의 진실을 잘 포착하고 있었다. 요즘은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평일엔 거의 책을 읽지 않고 주말에만 책을 읽고 있다. 사람은 항상 자신을 가장 고통스럽게 했던 문제에서 시작하게된다. 그건 가족의 문제일 수도 있고, 노동의 문제일 수도 있고, 폭력의 문제일 수도 있고, 여성의 문제일 수도 있다. 항상 자신의 입장을 가지고 세상과 싸워야한다는것. 그것이 점점 중요해지는것 같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입장이 옳은지 항상 확인하는 작업, 그것이 독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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