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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17
    고대 이집트의 노동
  2. 2009/10/17
    공장

고대 이집트의 노동

 

그뿐 아니라, 우리는 바로 이 이집트문명을 고찰할 때, 선사시대의 암흑상태로부터 솟아나오자마자 지극히 짧은 시기 동안 혜성과도 같이 상승하여 인류 최초의 대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던, 그리하여 그로부터 3천 년 이상에 걸쳐 지속하게 되었던 고도의 문화를 눈앞에 대하게 된다. 이 대국가는 성립된 후 처음 1,300년 동안에는 외부로부터 거의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오로지 독자적인 상태로 존립하고 있었으며, 그 다음에 이어진 1,300년 동안에도 역시 - 기원전 332년에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정복되기 전까지는 - 대단히 자족적인 상태를 유지하면서 외부로부터 오는 온갖 것을 다 통합하여 <이집트적인 것>으로 변형시키고 있을 정도였다.

 

이집트에 대해서는 언제나 이와 같이 편협할 뿐 아니라 실상과는 엄청나게 거리가 먼 고정관념이 적용되어 왔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이 고정관념이 너무나도 쉽사리 적용되는 바람에 사람들은 피라미드를 마주 대하고서는 어김 없이, 아주 훌륭한 <노예소유자들의 국가>를 발견해 냈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러한 가정은 실상, 이미 고대의 몇몇 저술가들에 의해 맨 처음으로 그 결정적인 자료가 제공되었으며 그 후 온 세계에 널리 퍼지게 되었던 설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의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초기의 인류역사가 지니고 있던 가능성을 보여주는 실례로서 다름 아닌 이집트가 선정되었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그 타당성을 부여해 주는 근거가 명백히 존재한다. 그 근거란 것은 곧, 역사적인 총체적 발전과정의 내부에서 대규모의 협동노동이, 그리고 이것과 밀접하게 관련된 현상인 분업이 최초로 실시되었던 한 단계가 바로 이 이집트에서 도달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 같은 협동노동은 공동으로 작업을 실시해야만 비로소 성취될 수 있는 단일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동원되고 있었는데, 이처럼 벌써부터 엄청나게 큰 규모로 추진되고 있던 이 협동노동이야말로, 점점 더 명백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던 여러 계급 및 계층의 형성으로 연결되었을 뿐 아니라, 개별적인 노동영역 및 직종의 광범위한 분화라는 현상까지 아울러 초래하였으며, 이에 따라 대단히 복합적인 전체사회를 성립시키게 되었던 요인이다.

 

그런 데다가, 문서들은 대부분 왕의 행동반경 안에서 작성된 것 내지 고위관리들의 수중으로부터 나온 것이어서, 말하자면 지배계층의 대표자들은 거의 독점적이다시피 발언권을 얻고 있음에 반해, 노동하는 사람들 자신은 <문맹자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사정까지 겹쳐 곤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지금까지, 이집트에서 진행되는 온갖 생활의 전제조건을 형성하는 자연적 여건에 대해 그리스인 헤로도토스보다 더 적절한 문귀로 특징을 지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상을 두루 여행하고 다녔으며, 기원전 450년 경에는 이집트를 방문한 적도 있었던 이 사람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리스인 청중들 앞에서 바로 이 고전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럴 만도 하겠거니와 언제나 되풀이하여 인용되곤 하는 귀절을 표명하였다. 곧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다"라고. 아스완 저수댐의 웅장한 시설이 이 부문에 관한 한 당대의 거창한 금자탑을 이루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관개시설은 끝없는 향상을 거듭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 일체의 관개 시설조치는 바로 이 나일강이 있음을 전제로 하여 마련된다.

 

"이집트의 범람경영에 있어서 증수기, 파종기, 그리고 수확기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이다. 이는 각기 엄청난 양의 물의 밀려드는 때, 그리고 대규모의 작업이 주민들에게 부과되는 때이다. 성과는 이 두가지를 어떻게 극복해 내는가에 달려 있다.

 

더 나아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무리가 중앙통제 아래 협업을 한다는 일 자체는 벌써 다음과 같은 사실, 곧 기존의 기술공학적인 역량을 총동원하여, 적합한 공동의 사업에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경우에 한해서 수행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성의 향상은 기술 한 가지만의 문제는 아니며, 여기에는 또 다른 요소, 예컨대 사회조직이나 협업의 상황 또는 노동과정에 대해 생산자가 맺는 개인적 관계 등과 같은 요소들도 함께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가내공동체는 말하자면 서로 비슷한 목표와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이며, 생산수단을 소유하면서 가내공동체 성원(살아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어떤 의미에서는 죽은 사람들까지도 포함하여)의 수요를 충족해 주는 일을 보장하기 위해 편성된 경제공동체이다. 이집트의 가내공동체는 바로 이집트식 범람경영의 특수성으로부터 커 나온 것이며, 지속적인 사회적 조직과 결속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집트인식 가내공동체의 살림살이는 대단히 폐쇄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서 초기 이집트인의 경제적 활동을 포괄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한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정서적으로 그리고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경제적인 기능 및 사회적인 기능을 결합하는 하나의 조직체, 곧 통제된 가부장제적 조직체 속에 그를 깊숙이 편입시켜 넣는 역할을 하였다. 이 조직체는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나 노령에 이르렀을 때에도 초기 이집트인의 생존을 보장해 주고 있었다."

 

두말 할 나위도 없는 일이겠지만, 이와 같이 전지역에 걸쳐 조직이 스며들어 가기 위해서는 그 전제조건으로 반드시 문자가 확립될 가능성이 마련되어 있어야만 하였다. 실제로 이 같은 필요성으로부터 촉발되어, 그리고 짐작컨대 메소포타미아에 근거를 둔 수메르문화와 상업상의 접촉을 함으로써 자극도 받고 하였던 덕분에, 왕국 통일 직전에는 상형문자가 발전해 갔다.

 

분업의 진전, 전문가 계층의 형성 및 이와 결부된 개별직종의 성립 등과 같은 것은 이미 그 이전 시대부터 나타나고 있던 현상이었거니와, 문자가 발전하자 이는 즉각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를 초래하게 되었다. 특히, <서기>는 상형문자를 터득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누가 보더라도 공공연하게, 통례적인 직업으로부터 뚜렷이 구분되고 있던 존재였으며 - 그들은 수적으로도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 <정신노동자>로서 특수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과 스스로의 정신적, 지적 능력 덕분에 이와 같은 엘리트적인 위치를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 특징을 대단히 잘 나타내 준다고 할 수 있는 현상, 다시 말해 고대 이집트에서는 상형문자를 <신의 말>이라고 지칭하였다는 사실에서도 그들의 지위는 잘 표현되고 있다. 말하자면 이집트인들에게는 이 문자를 통하여 지고의 힘, 즉 신성과 특히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관념이 생겨났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여기에는 이미, 글로 씌어진 것 일체는 어느 정도 내재적인 <합법성>을 가진 것이라는 생각까지 암암리에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당시 사람들에게는 글로 씌어진 것은 신적인 세계질서와 공명하고 있다고 느껴졌던 셈이다.

 

요컨대, 선사시대 말기에는 이미 뚜렷한 발전, 즉 생산력과 잉여생산을 엄청나게 증가시켰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정치적인 중앙집권화를 낳을 정도로 현저한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 우리는 이 당시의 눈부신 문명의 진보와 이에 일치하는 분업이 진전되고, 전문가계층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영역에서 그네들의 위치를 확고히 뒷받침받고 있던 사회의 상류계층은 원시공동체적인 민주주의의 유제를 보잘것없는 생활권으로 밀어내버리고는 그 대신 그들 자신의 이해관계를 보호할 목적으로 국가장치를 확립하는데 성공하였다."

 

바로 초기의 이집트에 있어서 종교는 다른 어떠한 나라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체의 것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면서, 개인적인 차원이거나 사회 전체적인 차원이거나를 막론하고 거의 일체의 생활표현을 규정짓고 있는 요인이었다.

 

인간이 아직 자연의 힘 앞에 거의 무방비상태로 놓여 있었던 시절,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견고한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자기의 존립을 확보하고자 하였던 시절인 저 까마득한 옛날에는, 특수하고 탁월한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갖춘 한 개인이 특수한 임무를 맡음으로써 나머지 사람들로부터 뚜렷이 돋보이는 존재가 되곤 하였다. 민중을 영도하는 수장으로서의 역할이든가, 이적을 행하는 마술사로서의 역할이든가, 아니면 주문을 외는 능력을 갖춘 사제로서의 역할이든가간에, 위에서 말한 특수한 역할을 맡게 된 이와 같은 사람은 공동체에 대해 특별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아니, 보다 명백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는 권력을 쥐고 있었다. 그런데 개개인의 복리를 위해서는 이러한 권력을 실제적으로 이용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딴 사람의 조력을 받을 수밖에 없기도 하였거니와, 또한 권력을 보유하게 된 사람에게는 자기가 일단 도달한 지위를 보존하고 확대시켜 나가려는 욕심이 생겨나게 마련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더욱더 많은 개인들이 권력의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복장이나 예의범절에서, 또 권력의 상징을 과시하는 면에서 이러한 사람들과 나머지 사람들 사이의 간격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왜냐하면 <권력>을 갖춘 그 통치자는 자신이 자연에 대해 작용을 가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자신은 남들은 파악할 수 없는 힘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을 통해>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통치자는 죽음을 초월하는 힘까지 획득하게 되는 셈이었다.

 

말하자면 이 같은 예술은 통치자가 최고 지배자임에 틀림없다고, 그러니까 앞에서 말한 두 가지 목표에 봉사하는 존재임에 틀림없다고 확인해 주는 역할을 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선 오늘날과 같은 식의 <노동자> 개념이 고대 이집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해 두어야 하겠다. 그 원인으로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고왕국시대와 중왕국시대에는 특별명령에 의해 이러한 봉사수행을 면제받지 못하는 한, 원칙상 누구나 다 육체적 활동, 그러니까 노동에 동원될 수 있었다는 사실읻다. 이러한 일 가운데서도 개개의 작업종류별로 따져 볼 때, 주민들에게 주로 부과되는 것은 경작노동이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돌을 깨는 작업, 건축작업, 그리고 전쟁에의 출정 등과 같은 데에도 모든 주민들이 다 동원될 수 있었다. 이집트말로 <노동> 및 <노동자>를 가리키는 데 쓰이던 단어는 원래 <일을 맡아 함> 내지 <일을 맡아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제3왕조로부터 시작되었던 고왕국시대를 거치는 동안, 이집트의 전체 인구는 네 개의 주요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었던 셈이다. 그 첫째는, 왕의 권력 가운데 일정한 몫을 차지하고 있던 관직자들이고, 두번째는 특별법령에 의해, 주로 사자사원에서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지내면서, 단지 죽은 통치자에게 봉사할 의무만을 지고 있던 면역자계층, 세번째는 수공업자 내지는 숙련노동자계층, 그리고 마지막이 예농들이었는데, 이들 가운데 압도적인 다수는 농업노동자들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노예란 것은 고왕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권리가 전혀 없거나 또는 딴 사람들보다 더 적은 권리만을 가진 사람, 매매의 대상이 되기도 할 뿐더러, 딴 경우 같으면 어느 정도나마 참작의 여지를 인정받을 터인데도 이를 전혀 무시한 채 이용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의 계층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 피라미드와 관련하여 노예에 관한 이야기가 무수히 오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상황이 이와 같은 한 <노예>는 전혀 동원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 - 실제의 노예라면 당연히 그러한 존재가 되었으리라 - 을 부려서는 결코 그와 같은 성과를 완수하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명히 다음과 같은 명제, 즉 이와 같은 노력이 투입되는 과정을 통하여, 실제로 포괄적인 조직과 행정을 동원함으로써 어떠한 개개인이라도 모두 포섭할 수 있을 만큼 막강하고도 강력한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이 사업의 목표였다고 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아닌게아니라, 고왕국의 주민들은 등록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 그것은 대규모의 국가부역사업을 수행하는데 주민들을 끌어냄은 물론, 이러한 노동이 진행되는 동안 물품을 공급하는 데도 동원할 수 있게 하려는 목적에서 실시된 것이었다는 사실 등은 밝히 알려져 있는 터이다.

 

본격적인 대중동원은 매년 3개월에 걸치는 범람기간 동안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때는 일체의 경작지가 물 속에 잠겨버리는 시기인지라, 딴 계절 같으면 토지경작이 이집트인들의 으뜸가는 생업활동이 될 테지만, 이 시기에만은 그것이 전혀 불가능해지는 바람에 노동력이 크게 남아돌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수련을 쌓은 인적 자원, 즉 숙련노동자, 서기, 계획입안자, 행정가 기타 온갖 종류의 <상급자>에 대한 수요가 지금까지는 예측도 할 수 없었던 정도로 <상승하였으며> 확실히 "인구 가운데 상당한 비율에 달하는 사람들이 <전문가>가 됨으로써 생산으로부터 이탈하게 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는가 하면"

 

"(파라오의> 후계자들이 더욱 광범한 농장들을 새로 건립함에 따라 전 인구는 즉각 이 농장 안에 빈틈 없이 편입되었다. 이로써 오랜 전통을 지닌 촌락경제는 치밀하게 조직화된 국영농장 경영에 길을 물려주고 사라지게 되었다."

 

한 이론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평가해 볼 때 "이집트 전체가 단 하나의 농장이었다."

 

도시의 발전은 주로 피라미드 도시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왜냐하면 피라미드 축조가 계속되는 동안 피라미드 건축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다닥다닥 붙은 연립주택에 거주하면서 이곳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죽은 왕은 관리들이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이들을 돌보다 주어야 한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리들을 위해서도 왕의 분묘시설과 흡사하게 분묘 옆에 사자추모관이 건립되었으며, 왕을 위한 시설과 꼭 마찬가지로 역을 면제받는 사자관리사제가 배치되어 이를 돌보고 있었다. 이러한 관행이야말로 바로, 고왕국 말기에 이르면서, 한때는 거의 전능이다시피 했던 국가가 점점 더 수입과 권력을 잃어버리고 마침내는 완전히 혁명적인 격변 상태에 놓여 붕괴해 버리고 마는 결과를 초래한 요인이었다.

 

개인의 해방과 더불어 출현하였던 불안한 상태가 더욱 더 심화되어 가자, 사람들은 현세에서의 환멸스러운 체험엗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런 체험 때문에, 내세에서는 영구불멸한 삶을 확보하기 위해 더욱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배려에서 출발하여, 현실은 회화에 의해 대치될 수 있다는 확신이 점점 더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이제 사람들은 현실세계의 덧없음을 막기 위해 농장과 제품생산장의 모습을 거의 지워지지 않는 그러한 재료로 묘사하게 되었다.

 

노동을 묘사한 자료에 대해 논의를 할 때에는 특히, ... 이집트인들이 노동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던 방법에 대해 마땅히 언급을 해야 한다. ... 사람들이 주고받은 말까지도 그대로 재현하려고 하였던 노력, 다시 말해서 음성을 매체로 하여 진행된 사태경과의 영역까지도 붙들어 매두려고 하였던 노력을 말한다. ... 이 같은 방식은 우리 시대의 <만화>에서 애용되는 말 묶은 주머니 표시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이다. ... 이 주목할 만한 혁신은 <현실>의 전체적 면모를 가능한 한 사실적으로 영원한 시간 속에 <동결시켜 잡아두려는> 시도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말이며 외침이며까지 한데 보여주고 있던 이러한 묘사도 결코 그 당시 생활의 <진정한> 모사라고 할 수는 없으며, 실은 노동의 긍정적 측면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는 현실미화적 성격을 띤 증언임에 틀림이 없다.

 

특별히 수공업자라는 직업집단에 촛점을 집중시켜 보자. 여기에서 이들을 다른 집단, 예컨대 <노동자>들과 명백하게 금을 그어 분류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농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다시 말해 <농민>들만은 아마도 하나의 독자적인 사회집단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무릇 이집트의 농민들은 짧은 과도기 동안을 제외하고는 자기 자신의 토지를 전혀 소유하지 못하고 있던 존재거니와, 이들은 전 주민 가운데 수적인 비율이 가장 높은 부류였으며, 그들이 하는 일도 다른 일과는 특별히 구분되어 취급되고 있었다. 어쨌든 필자가 생각하기에, 수공업자들은 원칙적으로 자기 소유의 원료도, 자기 소유의 생산수단, 다시 말해 수공업도구도 전혀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하는게 중요한 일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수공업자들은 <국가> - 다시 말해 왕과 신전에 봉사하거나, 아니면 고위관직자의 가계 안에 전속되어 있었다. ... 그런데 피라미드의 축조가 끝나면 그들은 <자유로이 풀려난 사람들>이 되어 국가의 강권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으며, 그렇게 되면 딴 사람들에게 품을 팔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수공업자들에 대한 임금지불은 현물임금의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이제 여성들의 노동력 편성에 관해 살펴보자. 우리는 이집트에서 여성들은 주로 방적공, 직조공, 제분공 등의 일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잇다. 그 밖에도 그들은 <가사>노동 즉 부엌에서 빵을 만들고 음식을 굽는다거나 또는 빨래하는 일을 하고 있었음을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선사시대에만 하더라도 술 빚는 일은 여인들이 담당하였다고 하는 지적, 즉 나중에 가서는 반죽하는 일의 어려움 때문에 여인들이 하는 법이 거의 없게 되었다고 여겨지는 이 작업을 당시에는 그네들이 주로 맡아 하였었다는 지적이 있는데, 이는 퍽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헬크의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사실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선사시대에는 곡물경작이 전적으로 여성의 수중에 놓여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주는 셈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후대에 이르면 여성들은 거의 예외없이 가사노동에만 전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원칙적으로는 여성들 또한 남성드로가 대체로 동등한 권리를 누리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 관직자계층에 속하는 여성들의 경우에조차 읽고 쓰는 법을 터득한 예는 정말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그러니까 일체의 <대외>지향적인 직업은 남성의 손아귀에 장악되어 있었던 것이다.

 

"맞은 편에서 몰아치는 높은 물결, 곧 개인의 자유를 획득하고 토지 소유를 보다 확실하게 보장하기 위해 기울여지는 열렬한 노력도 더욱더 확대되어만 갔다. 관리들은 사자추모관에 부속된 농경지의 경작자라는 명목을 내세워 사실상으로는 신전토지를 자기네가 소유하고 있었고, 지방관구의 관리들은 향토신의 <예언자들을 주재하는 이>라는 자격을 내세워 신들에게 바쳐진 농장을 가로챘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왕이 지방에 있는 신전에 자기의 조상을 모시기 위해 건립했던 농장을 이 농장의 <지배인>이라는 구실 아래 자기네 수중으로 인수해 버리고 있었다. 이로써 분배체제는 완화되고 말았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한데 뭉쳐 사는 거대한 집결지인 피라미드 도시도 중앙행정도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곤궁에 빠지게 되었다. 마침내 개인적 자유라는 생각은 들에서 일하는 예농들의 뇌리에까지 굳게 스며들어 갔다. 그들은 이제 개인적 토지소유를 요구하며 봉기할 것을 외치면서, 거센 물결처럼 몰아 닥치게 되었다."

 

이 같은 맥락에서, 고왕국시대에 작성된 문학작품으로 가장 중요하면서도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의 하나인 이른바 [이푸베르의 예언]이라고 불리는 책에서는 고왕국 말기 혁명적 상황을 대단히 유창하고 화려한 필치로, 마치 눈에 보이듯이 그려내고 있다. ... 우리가 가진 텍스트는 봉기에 가담한 인구계층을 열거하는 문구로 시작되고 있다.

 

"문지기는 말한다. '우리, 가서 닥치는 대로 뺏읍시다.'고. 세탁하는 이는 맡겨진 일 처리하기를 거부하고... 새잡이들은 싸움꾼 무리를 이루었느니..."

 

이에 덧붙여 빵 굽는 사람과 술 빝는 사람도 함께 지칭이 되고 있는 것을 볼 때, 봉기는 본질적으로 하층민들로부터 출발했던 것 같다. 그런 다음 텍스트는 현상을 일일이 열거하는 서술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 서술마다에는 꼭 <정녕 그러하도다>라는 단정적 귀절이 되풀이하여 첨부되어 있다.

 

"정녕 그러하도다. 나라는 도적떼로 뒤덮여 있느니. 밭 갈러 가는 이는 방패로 무장한 모습... 정녕 그러하도다. 나일강 물 넘쳐 흐르나 이것 보고도 땅을 가는 이는 하나도 없음이여. ... 일찌기 샌들 하나 자기 것으로 못 가졌던 사람이 이젠 재산깨나 만지는 처지... 정녕 그러하도다. ... 피는 도처에 흘러 넘치나니... 정녕 그러하도다. 가진 자는 서러워하고 없는 자는 기뻐하는구나... 정녕 그러하도다. 집무실은 휑하니 열어젖혀져 주소록이 이곳에서 빼내져 버렸음이여.... 재판소의 법전이 길거리에 내팽겨쳐지니, 사람들은 이 위를 짓밟으면서 도시의 구역마다를 돌아다니고, 폭동 일으킨 천민들은 법전을 찢어 길거리에 흩뿌리는구나...."

 

두번째 절에는 몇 귀절마다 되풀이하여 <보아라>라는 정형문귀가 따라다니고 있다.

 

"보아라, .. 천민폭도가 주군을 폐위시켜 버린 것을. 보아라, 묻힐 때는 매(파라오)였던 이의 시신이 관에서 꺼내져 산산이 찢어지고, 피라미드의 밀실은 휑뎅그렁 비어 버렸음을... 보아라, 나라 안, 가진 것 없던 뱅성은 부자가 되어 있으나 가진 자는 빈털터리가 되었음을. 보아라... 얼굴을 비춰볼 거라곤 물밖에 없던 이들이 이제는 청동거울을 가지게 되었음을... 지옥이 가까와졌음이여...."

 

제1과도기 이래 자기네 권리를 유지해 오고 있던 농민적 소생산자들은 제12왕조 초기에만 하더라도 아직, 대체로 가족경영으로서의 자기의 경영을 독립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있지 않아서 즉각, 너무나도 과중한 노동의무 및 납세의무를 수행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농민들은 도주함으로써 국가의 강권적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국가는 상비군을 동원하여 정규적인 인간사냥을 펼침으로써 이 같은 사태에 대응할 만한 능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또한 분명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형을 부과할 수 있는 역량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도주자에 관한 사형부과는 "자기의 작업장소를 버리고 떠나는 자에 관한 법령"에 근거를 두고 법적으로 규정된 것이었다.

 

제12왕조의 파라오들이 장악하고 있던 막강한 군사력은 드디어는 군사적 정복사업을 위해서도 동원되었다. ... 그뿐만 아니라 이 정복사업에 힘입어 이집트는 대규모 황금산출지역까지 수중에 확보하게 되었다. 누비아에는 ... 매장량이 풍부한 금광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황금산출지는 금을 채굴하고 세광하는 작업에 대체로 원주민들이나 전쟁포로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였으며 신왕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집트가 누리는 세력의 핵심적 근간을 형성하고 있었다. ... 신왕국시대에 이집트는 세계적 강국으로 떠올랐지만, 이 같은 일은 누비아의 광대한 금광이 없었다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중왕국시대의 사회는 고왕국시대의 사회와는 현저하게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때부터는 노예도 존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노예는 맨 처음에는, 전쟁이나 상거래를 통해 획득되어서 당시의 공식명칭대로 하자면 <왕에게 속한 몸>이 된 사람들, 즉 이집트인의 소유물이 된 외국인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또한 이 당시에는 관리들을 통치자에게 확고히 결속시켜 고분고분한 신하로 만들기 위해, 그들의 직책과 업적에 부합되게 토지를 분배해 주는 방식이 채택되었으며, 이로써 그들의 재산은 늘어나게 되었다. " 이 같은 토지의 용익권이 소유권으로 바뀌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관료장치 내지 행정장치느 크게 팽창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서기>야말로 다시금, 모든 것 위에 군림하고, 모든 것을 수중에 장악하는 존재가 되었다.

 

다음에 보기위해 정리해둔 것인데 너무 많아서 더 이상은 못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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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어릴 때 우리집은 공장을 했다. 아버지는 직원이 열명이 채 안되는 작은 공장을 운영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잘 이해하기 힘들지만 우리집이 공장이었다. 집에 공장시설이 있었다. 당연히 일을 하는 시간에는 집이 시끄러웠다. 나는 시끄러운 집이 싫어서 학교에 갔다오면 거의 대부분 동네를 산책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쯤엔 공부에 지장이 있다고 해서 공장을 딴데로 옮기고 우리는 이사를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다닐 땐 집에 오면 항상 사람들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엔 나이가 어린 오빠들도 있었다. 그 오빠들은 집이 지방이어서 우리 집에서 숙실을 해결했다. 쉬는 시간에는 나와 만화책을 같이 보기도 했다. 그 오빠들 중엔 직장을 옮겨서 다른 데로 간 뒤에 내게 잘 지내냐고 편지를 보낸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과는 달리 어릴 때는 애교가 많고 붙임성이 있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답장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난 그때 편지 내용을 잘 이해하지도 못했다. 언젠가 이주노동자와 압류를 하러 갔는데 집행관이 집 안으로 들어가고 그 사람은 자긴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다. 사장과 부딪치기 싫어서 그런가보다 했더니 하는 말이 그 집에 나이 어린 딸이 있는데 마주치면 안된다고 한다. 그 사람은 그 소녀가 자신을 반가워할까봐, 자신이 여기 왜 왔는지 그 이유를 알까봐, 그 소녀가 상처받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집행관들이 나오자마자 사장이 달려나와 우리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우리는 성급히 집행관의 차를 타고 거길 빠져나왔다. 내가 예전에 만난 사장들은 인간말종들도 있지만 대부분 돈없는 사장들이다. 이주노동자때문에 몇 백만원짜리 원단을 손해봤다는 둥, 말도 없이 그만둬서 손해를 엄청 봤다는 둥 하면서 괘씸해서 돈을 못주겠다고 하면 돈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니까 끈기를 갖고 기다려야 한다. 저도 사장님 심정 이해합니다. 하면서 이해하는 척 하다가 사장님 임금 지급안하시면 검찰에 가서 조사받습니다. 하고 사무적으로 말했다가 이 두개의 설득과 협박을 반복해서 하다보면 사장도 결국 탈진해서 괘씸해서 다는 못준다고 한다. 그러면 노동사무소에 가셔야겠네요 하면 또 그때부터 내가 범죄자냐고 내가 왜 노동사무소에 가냐고 노발대발한다. 그러길 또 한시간. 보통 이런 사장 만나면 공장에서 나올땐 녹초가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장들은 돈이 없어서 못준다고 한다. 나는 그가 정말 돈이 없는지, 없는척하는건지 알 길이 없다. 다만 내가 상대하는 사장들이 못배우고 돈없고 힘없는 사람들이라는건 사실이다. 언젠가 찾아갔던 공장에선 임금을 못줘서 직원들이 다 떠나가고 사장 혼자서 힘겹게 일을 하고 있었다. 사장님이 힘들다고 그 사람까지 힘들어야하는건 아녜요, 임금 지급하세요. 하고 말하지만 저런 사장들 상대로 싸워야 하는 내 처지가 서글플 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장들은 난 아가씨처럼 배우질 못해서.. 라고 항변하다. 그런 말 정말 듣기 싫다. 나도 한 때 조직가가 꿈이었던 적이 있다. 조직화를 할 수 있는 사업장에 들어가려고 했고, 친구들이 일자리를 알아봐주고 있었다. 그 땐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경제가 어려워서 그런지 폐쇄하는 사업장은 있어도 새로 사람을 뽑는데는 별로 없었다. 얼떨결에 어떤 노조에서 상근하게 되었다. 그 노조가 있는 사무실은 서울에서도 보기드문 노동자구역이다.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져서 미로처럼 되어있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작업장들이 있었다. 점심 때는 노변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직도 그 곳에선 차꾸러미를 들고 가는 여종업원이 있고 퀵서비스 오토바이들이 질주를 하기 때문에 아무 생각없이 걷다간 다칠 수 있다. 나와 함께 사업장을 둘러보러 같이 다녔던 부지부장은 기계나 작업공정에 대해 세심히 설명해주었다. 부지부장은 기계를 가리키며 저걸 보라고 했다. 안정장치가 벗겨져있었다. 화학연맹에 가입해도 될 정도로 화학약품이 많아서 머리가 좀 아프다고 했더니 어딜 가면 시야가 뿌옇고 골이 뱅글뱅글 돌아서 처음 간 사람은 쓰러진단다. 여자들은 거의 대부분 단순노동을 하고 있었다. 일하는데 손이 보이질 않을 정도로 손놀림이 빨랐다. 얼마나 하면 이렇게 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일년, 아무것도 안하고 이 일만 일년하면 이렇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여자들은 이렇게 십년 일해도 한달에 80만원 넘게 받기 힘들다. 토요일은 당연히 저녁 6시에서 8시까지 일한다. 일요일에도 바쁘면 출근해야하고. 내가 그 노조를 그만두었을 때 부지부장이 일을 좀 배우는게 어떻겠냐고 해서 한동안 고민했는데 나는 결국 내 모든 꿈을 접었다. 되도 안는 영세사업장 조직화를 위해 하루종일 그 지겹고 끔찍한 단순노동을 해야한다니. 정말 노동자 조직이 필요한 저 사람들에게는 조직이 없었다. 사장의 지급능력의 한계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 노동자들은 잉여가치를 나누어달라고 할 수 있지만 아마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은 자기가 다니는 공장이 문 안닫고 임금 안밀리고 일하다 사고 안나고 안정되게 직장 다니는게 꿈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죽도록 일만 하고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나이가 될 때 그들 손에 돈 몇 푼이나 쥐어지며 그들 삶을 누가 보상해줄까.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여의도에서는 어디 가서 밥을 먹든 술을 마시든 모두 주식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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