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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2

당신이 끝내 입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나는 문병을 미루고 있었지. 두려워서였어. 당신의 아픔이 내게로 건너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나도 슬프지 않으면 어쩌나. 그런 적 많았지. 하나도 슬프지 않은 내가 슬펐던 때. 나는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인(囚人), 당신에게로 전향할 줄 모르는 장기수. 그래서 문병 가는 일은 늘 두려워. 문병(問病)은 ‘병을 묻는’ 일이지. 어디가 어떻게 아프신가. 때로는 물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니까. 그러나 진짜 문병은 그런 것이 아니지.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문병은 이런 것.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가재미’ 부분)

물어볼 힘도 대답할 힘도 없지. 그럴 때는 그냥 옆에 누우면 돼. 가재미처럼 누워 있는 그녀 옆에 나 역시 가재미가 되어 눕는 문병. 그리고 그녀의 파랑 같은 삶을 힘껏 생각해보는 것이지. 이 문병의 끝은 이렇지.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읽을 때마다 눈물을 참아야 하는 구절. 건강한 내가 아픈 그녀를 적셔주는 게 아니라 그 반대지. 지독해. 진짜 서정이란 이런 것이지. 마지막 사랑의 몸짓조차 그녀에게 양보하는 것, 나는 늘 받기만 했다고 생각하는 것.

“그대는 엎질러진 물처럼 살았지/ 나는 보슬비가 다녀갔다고 말했지/ 나는 제비가 돌아왔다고 말했지/ 초롱꽃 핀 바깥을 말하려다 나는 그만두었지/ 그대는 병석에 누워 살았지/ 그것은 수국(水國)에 사는 일/ 그대는 잠시 웃었지/ 나는 자세히 보았지/ 먹다 흘린 밥알 몇 개를/ 개미 몇이 와 마저 먹는 것을/ 나는 어렵게 웃으며 보았지/ 그대가 나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으므로/ 그대의 입가에 아주 가까이 온/ 작은 개미들을 바라보았지”(‘문병’ 전문)

새로 나온 시집 <그늘의 발달>(문태준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2008)을 읽어나가다가 이 시 때문에 잠깐 책을 덮어야 했지. 어쩌면 이 시는 ‘가재미’의 이전 이야기를 다룬 속편일까. 이 아름다운 시에는 문병의 모든 것이 들어 있지. 나의 마음, 그대의 마음, 그리고 죽음의 마음. 나는 그대에게 보슬비와 제비를 말했으나 초롱꽃에 대해선 말하려다 말지. 아름다운 세상으로 빨리 나가자는 말이었는데, 그대 없이도 세상은 아름답다는 말이 돼버린 건 아닐까 싶어 나는 멈추었겠지. 그대는 나를 다 알고 있지. 그래서 웃어주는 거지. 이제 이 시는 침묵에 잠기고, 마치 “아주 가까이 온” 죽음의 마음인 듯 개미들, 개미들만 있네.

나는 ‘문병시’(問病詩)라는 시의 한 갈래가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해보았지. 이 시인처럼 문병시를 잘 쓰는 이도 드물다는 생각도 해보았지. 막스 피카르는 오늘날 진정한 침묵은 병실에만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침묵의 세계>), 아마도 문병시는 바로 그 침묵을 담아내야 하는 것일 테지. 사람의 말로는 다 잴 수 없는 그 침묵 속에 이 세상의 모든 아픈 사람들을 보는 시인의 마음이 묵묵히 흘러야 하지.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은 다 건네지 못한 후략의 말.”(‘백년’ 부분) 그리고 이 ‘후략의 말’들이 나중에 저런 아름다운 시가 되는 것이지.

아니지. 존 버거는 시의 일은 부상당한 이를 돌보는 일이라고 했는데(<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그렇다면 문병시라는 게 따로 있을 이유가 없는 거지. 그래서 나는, 시인의 직업은 문병이라는, 그런 엉성한 생각을 해보았지. 나는 시인이 아니지만, 미루고 미룬 문병을, 당신이 다 낫기 전에, 이제는 가보아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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