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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김명희 선거운동본부 평가자료집 투고

 

 

 

김명희 민주노총 노동자후보의 선거투쟁을 하며. 

   

 

언뜻 보기에는 지배체제의 균열로 보이던, 그리하여 민주적(?) 4당 체제가 형성될 것 같은 선거 가 끝났다. 노동자계급에게는 누가 몇 석을 얻었는지 따위에 대한 관심은 개싸움에서 어느 개가 이겼는지, 어느 개가 똥물을 뒤집어썼는지에 대한 관심 같은 가십거리 외에 딴 것이 아니다. 이러한 개싸움을 끝내려면 싸움장에 물을 뿌리고, 몽둥이를 들고 개들을 쫒아내야 한다. 이러한 개들을 ‘계급의 이름으로’ 싸움장에서 우리가 사는 골목골목에서 쫓아내기 위해 나선 노동자 민중후보들이 있다. 뒷집 개를 대신하여 앞집 개와 붙어보겠다던 이들, 옆집 개를 응원하며 떡고물이라도 얻으려는 이들과 달리 이들은 가진 자가 판치는 총선정국을 몽둥이 하나들고 나섰다는 의지만으로도 반운 것이다. 그러나 의지만으로 되는 것은 없다. 올바른 정치세력화의 계획과 준비 속에서 궁극적 승리는 돌아오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들의 대권 레이스의 몸 풀기 운동인  총선정국에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라는 과제는 이번 선거를 계기로- 이전의 좌우파를 막론하고-정당 건설 등의 현실적 과제로 나타났다1). 주지하다시피, 노동자의 정치세력화가 체제 재생산적인 선거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선거는 자본가 정권이 자신들의 폭력적 지배양식을 ‘국민의 선택’이라는 이유로  합법성을 부여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가와 노동자계급이 가지는 권력과 부와 정치적 영향력의 심대한 불평등을 은폐하는 일인일표제식의 의사적 평등이 얼마만큼이나 다수의 노동자민중의 정치적 진출을 보장하겠는가?  가진 자들이 언론을 장악하여 자기들의 논리로 다수 민중의 입과 귀를 가로막고, 오랜 세월 돈과 권력으로, 또한 ‘그들만의 법’으로 억압하는 현실에서 민중적 과제를 공유하고 의회연단에서 선전이라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능한 일일까?

선거는 겉으로 보이기에는 특수시기의 특수투쟁인 것 같지만, 그것 역시도 자본의 질서를 깨고자 하는 노동자의 계급투쟁의 일환으로 복무되어질 때만이 투쟁적일 뿐이다. 

 

15대 총선을 평가하는 모든 글들이 말하듯이 이번 선거에서 우리 노동자, 민중진영은 공동의 총선투쟁과 조직적 대응들을 수행하지 못했다. 기간에 사상적, 조직적 과정을 달리해온 분파들이 갑자기 모여 선거투쟁의 기조와 내용, 그리고 이후의 공동의 전망을 내오는 가운데 선거를 치러 낼 수는 없겠지만 그나마 독자후보전술을 구사한 선본들 간에도 2차례 정도의 언론 플레이적 합동기자회견을 제외한 공동의 투쟁과제를 만들어 가지 못한 것과 자신의 조직대상에 대한 일상적 정치투쟁사업을 배치하지 못하고 이번 선거를 계기화 해낼 수밖에 없었던 것2)이 바로 그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단위노조의 결의로, 또한 정치세력화를 위해 기간 투쟁해왔던 서울지역의 대오들이 모였던 선본이 있다. 김명희 선본이다. 김명희 선본은 서울지하철노조의 민주적 토대, 후보자신의 정치적 입장, 여러 대오들의 지원 등으로 인해 단위노조만의 결의와 정치적 사업수행의 초보자(?)라는 몇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심이 집중되어진 선본이었다.

이 글에서는 글 쓰는 이의 타 선본에 대한 이해의 부족 등으로 김명희 선본의 선거투쟁과정에서 느낀 몇 가지 단상을 나누고자 한다.

       

 

먼저, 후보전술결정의 배경을 살펴보자.

94년 전지협 6월 총파업을 힘차게 벌여 나갔던 서울지하철노조는 파업투쟁의 과정 속에서 정치적 엄호세력의 필요를  절실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또한 96년  지자체선거 국면에서의 임투과정에서도 역시 자본과  정권, 그리고 보수야당의 농간에 다시  한번의 정치적 패배를 경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정치세력화의 상에 대한 논의를 구체적으로, 하부에서부터 힘 있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정치세력화’라는 화두는 이미 던져진 것이다.

1월 31일 전지협 3기 대의원 대회의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독자후보전술을 적극 지원한다.’라는 결의를 지해투가 2월 28일 총회에서 ‘지해투 동지의 출마시 적극참여한다’로 구체화시켰으며, 지하철 노조 내에 해고자 동지들이 중심이 되어 정치위원회가 꾸려져서, 3월 4일 노조 2대 위원장, 전지협 초대 사무처장이셨던 김명희 동지가 노동자후보로 성동을 출마가 결정되어졌다. 조합운동과 정치운동의 균등한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단위노조가 비록 해고자 중심이지만 정치위원회를 꾸리고, 후보전술을 계기로 정치세력화의 전면에 나선 것은  노동운동의 진일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들이 지하철 현장단위의 토론과 실천으로 나타나지 못한 것, 그리하여 선본에 한번이라도 방문한 조합원 수가 백여 명을 조금 웃돈다는 사실은 단사 내에서의 공유 작업등의 실제적 실천의 모자람을 말한다. 또한, 노조 본조의 위치 등을 배경으로 한 출마 지역구의 선정, 중동부 지역 노조들과의 실천적 연대모색의 부재 등은 노동자 후보로서 전국적 범위에서의 실천이라는 선본기조에 맞지 않는 모습이었고 더 많은 조직노동자들과의 공동실천을 저해한 요소였다.

 

 후보전술을 상당히 늦게 결정한 관계로 시간적 긴박함속에서 기조를 논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역시도 참여성원과 단위들의 구체적 토론을 하지는 못하였지만, 실천의 통일성 등은 유지해 내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선거투쟁과 다른 양상이었다.  여기서는 선거투쟁의 기조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겠다. 다만 한 가지, 선거투쟁의 목표와 기조 역시도 투쟁의 연속에서 그 특수한 지위를 갖는 것이지 만루홈런식으로 준비되어져서는 안 된다.

 

이번 선거에 있어 김명희 선본에서는 합동유세 2회, 개인유세 2회, 거리유세 180여회 등을 진행했다. 인지도가 낮은 무소속 후보로서 접촉면을 최대한 넓히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낮 시간에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이들은 약간의 마찌꼬바 노동자들과 주로 인근 상인이었을 뿐이다. 자연히 그러다 보니 후보의 멘트에 ‘우리 노동자, 서민, 중소상인’이라는 잡다한 인칭사가 들어가고, 폭로의 내용들이 구체성을 띌 수 없게 되었다. 유세의 주 내용은 시간이 지날수록 열사들의 이어진 죽음에 대한 애도로부터 시작되어, 재벌경제의 문제점, 여야당의 부패상등이 주를 이루었으나 ‘노동의 정치’의 미래에 대한 전망과 과제는 생산되지 못하였다. 혹자는 이것을 ‘권력의 상이 부재하다’라고 하는데, 그것은 노동자정치운동의 조직적 현실이 아니가? 합의되어 나갈 수 있는 강령적 연구나 공동의 실천이 결여되어진 상황에서 몇 마디의 선언으로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나 계급의 정치가 현실에 이미 존재하며 노동자를 억압하고 있는데, 새로운 정치의 주체형성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분명히 폭로되어져야 했다. 또한 준비과정에서 후보자의 정치선동훈련을 강화해내고, 다양한 입체적 프로그램을 준비해 들어가는 것이 기술적 측면에서 요구되어진다.

또, 한 가지 성동을 지역은 5인 이하 사업장 밀집지역이다. 애초 준비 단계에서부터 중동부 지역노조와 ‘ 5인 이하 사업장 근기법 적용을 위한 연대모임’등과의  연관성을 가지면서 조직적 대응을 하지 못하고 동 책임자들과 유세단원의 의지에만 맡겨진 것은 노조단위와 후보전술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분명히 제기되어야 할 문제이다.    

 

이번 김명희 선본의 특징은 서울지역의 좌파단위라는 곳은 거의 다 모였다는 점이다. 애초 지원대책위라는 형태로 묶였지만, 그 위상과 역할이 불분명한 관계로 초기의 결의와 다르게 인자파견과 재정지원단위가 되어졌다. 정치적 방침의 생산과 선거이후의 조직적 실천을 위한 단위들 간의 공유의 장이 되지못한 것은 시기적 한계만이 아니라, 비교적 동일한 정치방침을 가지고 있는 좌파진영 자체의 통합력내지는 구심력의 부재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선본은 선거초기에는 20명, 중반을 넘어가면서 30명 정도의 상근자를 가지게 되었으며, 자원봉사자들 역시도 편차가 있지만 동일한 수준으로 모였다. 이러한 숫자는 적은 수가 아니다. 그러나 선거기간 내내 가진 막연한 의혹과 미리 준비되어야할 내용있는 단계별/부문별 기획 등의 부재는 대부분을 차지하는 젊은 활동가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다국적 연합군’의 질을 뛰어넘는, 그리하여 ‘그나마’라는 기대 속에서 갖는 비주체성을 넘어 정치적 조직적 통일을 이루어 낼 수 있는 조직전망을 내오지 않는 이상, 이러한 문제는 항상 남지 않을까?            

 

선거 기간 중 노수석 학생의 죽음 후 대중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선본은 영안실 방문과 기자회견을 실시하였다. ‘선거투쟁과 대중투쟁이 겹치면 대중투쟁을 중심에 두고 사고 해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운동 간의 유기적 수준을 가늠하여 조절을 해야 하는 문제이다. 전국적 정치투쟁체가 없는 상황에서 일개 지역선본이 가지는 위상은 별 볼일 없는 것이다. 투쟁의 수위가 낮을 경우 오히려 그 내용을 가지고 자신이 속한 곳에서 폭로해 들어가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그러나 선거초기, 공공부문 해고자들의 연 행등으로 선본이 인적 구성이 안 되고, 투쟁사안에 대한 결합이 미비했던 점은 상호 투쟁을 대립물적인 것으로 일면 파악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4.11선거는 끝났다. 기술적인 부족, 중장기계획의 부재 속에서의 선거투쟁은 많은 실수와 한계를 노정했다. 조직된 노동자 대중들에게 강제 받지 못하고 새로운 노동정치의 방식을 개발해내지 못한 것은 뼈아픈 반성이어야 한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대중조직 내에서 정치세력화를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까지 모색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주체적 측면에서 올바르게 평가되어져야 한다.

후보전술은 노동자정치세력화의 한 전술에 불과할 뿐이다. 이후의 일 상속에서 노동자계급의식의 제고, 정치적 훈련은 정치세력화의 근거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이번 선거에 결합한 노동자동지들은- 비록 한 단사에 국한되어 있지만- 민주노조운동과 함께 성장한 이들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지하철은 물론 서울지역의 여타 조직 사업장을 근거로 한 정치세력화 계획이 있어야 한다. 정치적 경험이 아니라 구체적, 공세적 실천을 위한 일 단초로서 이번 4.11선거가 위치 지워져야 한다. 노동의 정치, 계급의 정치라는 전략적 과제 속에서 실천적 투쟁의 지표로서 구체화시켜내야 한다. 선노들의 현장정치활동가로서의 자기정립이야 말로 자본의 입체적 현장장악음모에 맞선 현장권력의 사수투쟁의 가장 적극적 실천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선거이후 선본은 얼마간의 빚을 안고 대단한 아쉬움 속에서 임시 사무실을 지해투내에 두고 ‘4.11 동지회’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사업의 과제들은 다시금 지하철 노조의 정치위원회로 돌아가게 되었다. 4년을 준비하는 단위가 아니라 일상의 계급투쟁을 노동자계급의 눈으로 보고, 계급대중들과 함께 해나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친다. 


1)이것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구로의 아침] 창간 준비 1호, ‘4.11총선에 대한 민중운동 진영의 대응방침’을 참고하라.


2). 조직대상이 지역대중일 수도 계급대중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다. 지역적 조직화는 일정정도의 정치세력화의 조건들을 만들어낸 후, 일 계획으로써 나올 뿐이다. 특히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선언을 배경으로 출마한 3곳의 노동자후보 선본은 성장한 조합운동의 바탕에서 노동자 계급의 미래의 전망과 과제를 공유하는 작업부터 실천했어야 했다. 이러한  공유 작업의 생략, 민노총 중앙의 통일적 총선투쟁방침과 지원의 부재 등은 역량과 시기적 한계의 문제만은 아닌 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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