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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 쓰는 라오스 여행기(2013.09.27.~10.11) / 10.06~10.08 이야기

입으로 쓰는 라오스 여행기(2013.09.27.~10.11) / 10.06~10.08 이야기

 

13. 루앙프라방을 걷다.

10월 6일, 여행도 벌써 10일째가 되었다. 이동 후에는 휴식을 충분히 취한다고 했음에도 여행의 피로가 쌓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나보다. 아침부터 아내의 컨디션이 별로이다. 아침 식사로 라오스식 바게트 샌드위치를 사서 숙소로 들어왔다. 오전 나절 휴식을 취하고 루앙프라방의 여행자거리를 중심으로 한 강변과 옛 왕궁 자리에 있는 국립박물관을 다녀와서 쉬기로 하였다.

아침시간에 홀로 주위를 돌아볼 겸 산책으로 나서니 우리 G/H 주변으로 G/H가 몇 개 더 있고, 조금 더 지나가면 BAR들이 모여 있다. 숙소와 식당을 겸업하는 다른 지역과 달리 숙소에는 식당이 없는 곳이 많았고, 로컬 식당도 거의 보이지 않아 조금 의아하다. 숙소-식당 분리는 G/H가 몰려있는 여행자거리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하니 나는 이것을 지역주민들의 자발적인 ‘다 먹지 말고, 나눠 먹자’의 정신일 것 이라고 혼자 상상해보기로 하였다. 물론 숙소와 식당을 겸업하는 곳도 있다.

우리가 머문 푸시산 뒤편은 루앙프라방의 중심지와 걸어서 8분 거리이다. 지역주민들이 자주 간다는 다라마켓(상가)을 지나면서 둘러보았다. 관심이 가는 곳은 배낭 가게였다. 우리는 45ℓ 여행용 배낭과 휴대용으로 15ℓ배낭을 가져왔다. 짐의 무게는 휴대용과 합쳐서 아내가 10㎏, 내가 15㎏ 정도 되었다. 여행에서 짐을 줄이는 것은 피로를 줄이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크지 않은 배낭을 준비했지만 조금 더 큰 배낭에 눈길이 자꾸 가는 것은 배낭에 짐을 구겨 넣을 적마다 드는 아쉬움 때문이다. 배낭가게에는 유명 브랜드도 있었고, 우리가 잘 알지 못하지만 어느 중국 브랜드의 배낭이 특히 많았다. 구매에 욕심이 생기다가 중국에서 샀었던 배낭의 아픈 추억 때문에 국내에 필요하면 사는 것으로 마음을 단속하였다.

여행자 거리는 한산하였다. 메콩강변으로 이어지는 내리막의 골목마다 G/H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지만 중국인 여행객들만 간혹 눈에 띄고, 자전거를 타며 길을 누비는 서양 여행객들 외에는 자동차마저도 간혹 눈에 띌 뿐이다. 강변의 선착장에는 남부에서 볼 수 없었던 큰 배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손님을 기다리는 유람선 관계자들이 일몰을 배에서 보라며 지금 예약하면 십만킵(14,000원)에 해준다고 손짓을 한다. 루앙프라방에 보는 메콩강은 한강의 폭보다 두 배 가량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부의 메콩강을 경험한 우리에게 지금 눈앞의 강은 청계천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니 그 장엄한 일몰의 추억은 여기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요일 루앙프라방이 한가한 이유는 개천절과 주말을 낀 한국인 단체 여행객이 대거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북부 도시인 루앙프라방에서 중국으로 바로 넘어가는 중국인들만이 고색창연한 루앙프라방을 지키고 있다. 여러 번 듣는 이야기이지만, 중국인들은 강변에서 식사를 하다가 우리 부부가 지나가면 나를 빤히 쳐다본다. 같은 중국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다. 라오스인들에게 그러 질문도 여러 번 받았고, 드물게 서너 번은 라오스인과 똑같이 생겼다는 소리도 들었다.

길모퉁이를 돌아 국립박물관으로 가려하는 참이었다. 코코넛을 가득 실어 즉석에서 잘라 주스를 내어주고 있었다. 모퉁이 작은 가게의 여주인은 이미 두 개를 사서 주전자 가득 즙을 내고, 잘라서 열매의 안쪽을 긁어 젤리와 같은 것을 긁어내었다. 잠시 가게 앞 테이블에 앉아도 되냐고 묻자 그러라고 하더니 테이블에 있는 체스 판에 맥주 병뚜껑을 앞뒤로 15개씩 배열한다. 그러더니 자신과 2:1로 게임을 하자고 한다. 대각 방향으로 앞으로 한 칸씩 전진할 수 있다고 알려준다. 먼저 말을 움직이기에 따라 움직였다. 내가 상대의 말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되자 말을 움직여 잡는 법을 알려준다. 말 하나를 잡았다. 그러자 이 아줌마 자신의 말을 움직여 내 말 두 개를 잡는다. 게임의 요령은 게임 중에 말을 뺏기면서 배웠다. 물론 물러주지도 않는다. 차분히 게임을 이어갔지만 두 수 차이로 지고 말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선방한 거 아닌가? 이 젊은 아주머니 덕분에 배낭여행을 와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게임 외에 다른 이야기는 별로 나누지는 않았지만 이 분도 나보고 라오스 사람 같다며 아내보고는 아내가 가게를 둘러보느냐 없는 틈을 타서 중국인 닮았다고 한다. 여행을 가면 현지인처럼 생각하고 그 상황으로 몰입하는 것이 좋다. 여행가서 굳이 한국음식점을 가지 않는 것도 그 이유인 것이고, 간단하게라도 인사말과 단어를 외우거나 적어가는 것도 조금이라도 현지인들과 소통해보고 싶어서이다.

생각해보라. 아무리 어눌해도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안녕하세요’하며 인사를 건넨다면 당신은 그를 대하는 마음이 다를 것이다. 최소한 우리 언어와 문화가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간단한 라오스어지만 몇 마디라도 이야기를 나누면 그들은 엄지를 들어주며 라오스어를 배우냐고 묻는다. 발음을 교정해주는 수고도 아끼지 않고 말이다.

루앙프라방 국립박물관은 1975년까지 유지된 라오스왕국의 왕궁을 개조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라오스는 14세기에서 17세기까지 통일 란쌍왕국을 유지하다가 17세기 내내 비엔티엔 왕국, 루앙프라방 왕국, 참파삭 왕국으로 분열되고 1893년까지 샴의 속령으로 지내다가 이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다. 이후 프랑스는 1949년 형식적인 독립을 인정하고 라오스 왕국을 세운다. 이 라오스 왕국의 수도는 비엔티엔과 루앙프라방 두 곳이었다. 박물관은 왕국의 유물과 왕족들의 생활상을 주로 전시하였다.

사회주의 국가라고 해서 과거의 유산을 모두 지울 필요는 없다. 사회주의도 겨우 100년 남짓 된 역사의 실험과정이니 장구한 역사 앞에서는 스스로 겸손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나는 영화 ‘마지막 황제’의 만주국처럼 프랑스의 괴뢰국이나 다름없는 왕조의 역사는 당시 생활상을 보는 것으로만 만족할 것이다. 그들은 아뉴봉왕처럼 샴 왕조에 의해 책봉되었어도 독립을 위한 투쟁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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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루앙프라방의 만남

새벽 탁밧을 보기로 했는데 몸이 무겁다. 탁밧은 우리말로 탁발이다. 수도자들이 식량을 구하는 행위로 종교를 넘어 동서양에 널리 행해졌다. 탁밧은 수도자에게는 자신을 낮추는 수양을 하는 행위이자 시주하는 신도들에게는 수도자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는 행위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루앙프라방의 탁밧은 참여 규모가 크기 때문에 여행 코스처럼 포함되어 있다.

뒤늦게 나서 우리는 탁밧에 직접 참여하기보다 멀찍이 떨어져서 그 느낌을 느끼기로 하였다. 카메라의 줌 기능이 망가져서 생생한 느낌을 사진으로 담을 수 없었지만 수도자의 길을 걷는 젊은이들을 나는 응원한다. 아무리 승려가 존경을 받는 나라라고 하더라도 이제 막 자본주의의 물결이 넘쳐나고, 문화의 변화를 겪고 있는 이곳에서 라오스의 정신을 지켜줄 이들은 이 젊은 수도자들이기 때문이다.

수도자들을 찾아 잠시 따라 들어간 사원에서 누군가가 반갑게 손을 흔든다. 중국인 여자 여행객을 네 번째 다시 만났다. 상당히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던 그녀는 내일 중국으로 다시 들어간다며 자신이 다닌 루앙프라방의 좋은 전경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기념사진을 서로의 카메라에 남기고 헤어졌다.

그리 높지 않은 푸시산은 루앙프라방을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나 아침에 오르면 안개가 아직 걷히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대신 산 위에서 조용한 시간을 갖고자 할 적에는 아침이 좋을 수 있겠다.

아침 식사로 국수 한 그릇을 먹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내 몸이 무겁다. 침대에 누워 오전 나절을 자고나니 그래도 많이 좋아졌다. 여행 일정을 짤 때 일주일에 하루는 비워두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

우리는 점심나절에 숙소를 나서서 두발로 루앙프라방 돌아다니기를 이어갔다. 어제 가보지 못한 동쪽 지역을 걸어가는데 여행자거리의 메콩강변을 카페와 여행자들에게 빼앗긴 라오스 청춘들은 메콩강의 지류인 뒷강 둔치에 삼삼오오 모여 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소박하고 정겨운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걸었지만 이내 다시 강변은 여행자를 위한 식당 테라스로 뒤덮인 채로 나타났다. 관광 수입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이들의 삶을 뒤로 밀어낸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다.

루앙프라방 동쪽은 도로와 접한 곳은 예쁜 G/H가 자리 잡고, 그 뒤로 주택가가 있는 골목이 이어지고 있었다. 라오스의 집들은 지붕이 맞닿는 서까래 주변에 건축연도를 적어 놓는다. 내가 본 것 중에 제일 오래된 집은 1935년에 지어졌다. 오래되고 낡은 집들이지만 집 주변을 화단으로 꾸미고 있어 허름하다는 느낌보다는 전통이 잘 보존되고 있다고 느끼게 해준다.

오늘 저녁식사는 한국인 여행자들과 같이 하기로 하였다. 여행 카페를 통해 연락처를 주고받아 루앙프라방 일정을 같이 하기로 하였으나 우리 부부의 컨디션 문제로 그러하지 못해서 아쉬움으로 만들어진 자리였다. 기실 어제 늦게 연락이 되어 나 혼자 강변에서 나가서 맥주잔을 같이 기울였는데 오늘은 불고기의 변형인 신닷 요리를 같이 하기로 하였다.

같이 자리를 한 두 분의 여행자들도 여행 카페를 통해 처음 만나 10일 동안 동행하는 것이었는데 나와 연락을 주고받은 경◯씨는 삼십대 후반의 단단한 체격을 지닌 이였다. 신닷 뷔페에 들어가니 오늘 꽝씨폭포를 동행한 다른 여행자들이 있다고 해서 같이 자리를 하였다. 비엔티엔을 떠난 이후에 이렇게 많은 한국인을 만난 것이 처음이다. 중국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분과 장기 여행을 하면서 블로그에서 유명한 여행자, 휴가를 내어 5일의 아쉬운 휴가를 온 처자들까지 우리 여덟 명은 식당이 닫을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좋은 자리를 함께해서 좋았지만 식당에서 너무 소란하지는 않았는지 스스로 반성해본다.

한국인과의 만남 중에 아쉬운 만남이 하나 더 있다. 다음 날, 루앙프라방의 마지막 밤을 커피와 함께 달래며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한 아가씨가 ‘한국분이세요?’라며 묻는다. 집 나온지 10개월, 6개월은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고 4개월째 배낭여행중이란다. 엄마가 걱정하셔서 전화할 적마다 우신다면서도 이번 기회 아니면 언제 할까싶어 여행을 이어간다는 이 당찬 젊은 아가씨는 우리의 격려 몇 마디에 헤헤하며 ‘감사합니다’를 연발한다. 돈을 아끼기 위해 2만킵(2800원)짜리 도미토리에서 지낸다는 아가씨를 보내고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후회했다. 내일 아침 국수라도 한 그릇 먹여서 보낼건데, 우리에게 남은 라면이라도 싸주었어야 하는데 싶었다.

어느 곳에서도 그 긍정의 힘으로 잘 여행하고 돌아오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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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꽝씨폭포 가는 길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서 아침시장을 보겠다고 나섰다. 야시장이 서던 대로의 안쪽에는 아침마다 장이 들어서는데 여행객들은 별로 없는 현지인들의 시장이다. 시장을 두어 바퀴 둘러보는데 장사를 하면서 식사를 하시는 한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사바이디’하며 인사를 하는데 어디에서 왔냐고 묻는다. ‘콘 까올리(한국사람)’이라고 하니 찹쌀밥을 녹색의 젓갈 같아 보이는 반찬에 묻혀 드시다가 나보고도 먹어보라고 내미신다.

‘이상한 냄새나면 어쩌지?’

속으로 생각하다가도 권하시는 마음에 손가락으로 찹쌀밥을 뭉쳐 반찬을 찍어서 먹었다. 젓갈이 아니었다. 무엇이냐고 묻는 나의 질문에 아주머니들은 대답을 해주었지만 발음이 쉽지 않았다. 그렇게 두 번을 더 시식하고 돌아섰다. 따로 사먹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현지인처럼 먹어봤으니 체험은 한 셈이다.

오늘은 꽝씨폭포를 가기로 하였다. G/H를 통해 예약한 미니밴은 호주 출신 노부부와 이탈리아 아저씨를 태우고 우리를 맞아주었다. 다른 손님을 태우러 시내를 빙빙 도는 사이 60대의 호주 아주머니는 한국인 친구가 있다며 남편과 같이 장기 여행 중이라며 서울에도 왔었다고 하였다. 나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묻기에 ‘Subway’에 다닌다고 하였더니 지점을 운영하냐고 묻는 것이다. 샌드위치 회사로 잘못 알아 들으셨던 것이다. 아저씨가 바로 정정해주셨지만 우리는 한참을 같이 웃었다.

이 아주머니는 우리 다음에 영어를 잘하는 인도네시아 여성들이 차 안의 대화를 주도하는 덕에 입을 다물고 있는 우리를 위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요약 정리해서 간단한 영어로 설명을 해주셨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픽업차량들이 시내를 너무 빙빙 돈다는 말에 ‘중국에서도 똑같아요’라고 맞장구를 쳤는데 하필이면 앞자리에 중국 여성들이 타고 있었다. 그것도 영어 잘하는…….

꽝씨폭포에 이르렀다. 야생곰을 구조하여 보호하는 곳을 지나 만나 물은 처음으로 보는 옥색 물이었다. 물론 물안의 석회질로 인해 그리 보이는 것이지만 열흘넘게 황토빛 메콩강물만 보다 보니 또 다른 감흥이다. 노부부와 우리, 이슬람교도인 인도네시아 아가씨들은 옥빛의 물을 보며 감탄만 하고 있고, 브라질과 중국 아가씨들은 수영복을 갈아 입는지 벌써 보이지 않는다.

호주 아저씨는 삼각대와 카메라를 들고 다양하게 사진을 찍으며 나에게도 보여주며 자랑을 하신다. 나도 무거워도 삼각대 가져올 걸 후회해보다가 아저씨가 찍는 구도로 따라 사진을 찍어본다. 아저씨는 정상을 올라가보자고 하신다. 우리가 쫒아갔지만 호주 야생 사나이같은 아저씨는 재빨리 산을 올라가버리셨다. 아저씨는 아주머니를 신경쓰지 않고 사진을 찍고, 아주머니는 그런 아저씨를 두고 나 혼자 본다며 웃으면서 따로 노신다. 참 보기 좋은 관계이다.

돌아오는 길에 운전기사는 우리를 몽족 마을에 내려주었다.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란다. 아이들은 공터에서 놀다가 ‘우리를 위해 이것을 사주세요’라며 높낮이도 없는 영어를 반복해서 읊조린다. 잠시 마을 어귀까지 들어갔다가 어른들은 뒤로 물러나있고 아이들이 관광객을 따라 이동하면서 파는 모습에 마음이 불편해져서 도로 나와 버렸다. 아이들은 미니밴까지 따라와서 작은 목소리로 돈을 달라고 한다. 아! 몽족의 슬픈 역사를 고산지대의 오지를 가지 않고도 마주 해버렸다.

묘족이라고도 불리는 몽족은 중국 남부부터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 반도에 분포되어 살고 있다. 베트남전쟁 당시 베트콩이 미국의 폭격을 피해 물자를 나르던 호치민루트가 라오스를 넘나들며 형성되자 미국은 몽족을 부추키어 용병으로 삼아 내전을 일으키게 하였다. 비밀 전쟁 또는 조용한 전쟁이라 불리는 이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라오스인들이 죽었고, 아직도 불발탄으로 인해 목숨을 잃고 있다.

인도네시아 아가씨가 초콜릿 하나를 나누어주려고 빼들었다가 몰려오는 아이들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다가 그냥 친구 입에 넣어버린다. 나는 아이들을 말없이 바라보면서 속으로 말했다.

‘아이들아. 오늘의 슬픈 기억을 잃지 마라. 그래서 더 단단해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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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어가는 이야기 – 숙소

라오스에서 머문 숙소는 주로 게스트하우스(G/H) 급이다. 비싼 호텔은 한국과 같은 시설에 어울리는 값을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숙소는 잠을 자는 공간이므로 숙소에 비싼 돈을 지불할 의향이 없었다.

첫날 묵은 숙소는 미싸이파라다이스이다. 수도 비엔티엔의 숙소들은 요금이 전반적으로 비싸다. 늦은밤 도착하기에 20달러로 사전 예약하였다.

다음은 땃로마을의 팀스이다. 2박을 한 방갈로는 5만킵이었고, 화장실은 유일하게 외부에 있었다.

돈뎃에서는 달몬에 하루 있다가 더위에 지쳐 리틀에덴으로 옮겼다. 6만킵인 달몬은 겉보기와 달리 방충망과 모기장이 다 엉망이었다. 리틀에덴은 돈뎃 최고의 시설로 우리 돈으로 3만4천 정도이지만 우리를 편하게 쉬게 해주었다.

참파삭의 옹빠슷은 그야말로 싼 맛에 가는 숙소이다. 4만킵.

루앙프라방의 숙티웡은 가격대비 최고의 숙소였다. 냉장고만 없어 살짝 아쉽지만 7만킵에 이런 숙소는 없을 것이다.

방비엥의 쑥솜분은 한국에서 이주하신 분들이 운영한다. 6만킵에 싸게 머물렸지만 숙티웡에 머물다가 가서 그런지 살짝 아쉬움이 남는 숙소였다. 그래도 한국인이 그리운 분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는 숙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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