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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 쓰는 라오스 여행기(2013.09.27.~10.11) / 9.29~30 이야기

입으로 쓰는 라오스 여행기(2013.09.27.~10.11) / 9.29~30 이야기

 

4. 시골버스 탑승기

결국 에어컨 바람에 4시쯤 잠이 깨었다. 다들 그래도 나처럼 누워서 가만히 있었을 터였는데 용감한 중국인 아저씨들의 수다 소리에 결국 여기저기서 짜증이 터져 나온다. 우쒸! 어제 괜히 몇 마디 중국말로 대화한 게 빌미가 되어 나보고 일행이냐고 묻는 애들도 생겼다. 난 억울하다. 그나저나 그 아저씨들 라오스어나 영어 한 마디 모르고도 아이폰 하나씩 들고 잘 다닌다.

팍세 북부터미널에 내려서 남부터미널까지 툭툭을 타고 이동하였다. 매표소에 가서 땃로 가는 살라반행 버스를 물으니 대충 뒤로 가보란다. 가보라니 가야지. 다행스럽게도 시골버스 같은 로컬버스 앞에서 할머니가 손짓을 하며 땃로, 땃로 외쳐준다. 버스에 올라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까지 만들어 주신다. 버스 안내원 역할을 하시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땃로가 작은 마을이라 이 분들이 알려주어야만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버스는 두 시간을 달려갔다. 비엔티엔 시내에서 교통신호가 엉망이어도 빵빵거리는 경적 소리가 없어서 참 좋았는데 오늘 버스 기사님은 자꾸 경적을 울리는 바람에 잠이 들다가 깨곤 했다. 그런데 이유가 있었다. 도로 위에 제 집 마냥 누워있는 소들과 개들 때문이기도 했고, 정류장이 따로 없는 마을을 지나면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어느 마을 시장 어귀에 도착하니 버스 기사님도 볼 일을 보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아침도 굶은 우리는 아이들이 파는 도너츠를 사먹다가 기사님에게 땃로가 멀었냐고 물으니 라오말로 말하시며 손가락으로 여기라고 가르킨다. 안내원 할머니만 믿고 있었는데 멀리 갈 뻔 했다.

 

5. Tim’s Guest House

Tim’s G/H는 인터넷 여행정보에서 유명한 숙소이다. 땃로 마을의 한 쪽 거리에는 홈스테이와 방갈로가 지어져서 여행자들이 묵을 수 있다. 우리는 배낭 무게에 지쳐서 한 곳을 보고나서 Tim’s G/H로 찾아갔다. 남들 다 가는 곳은 안 가려다 결국 안전한 선택을 한 셈이다. 트리플 침대가 있는 방갈로가 하루에 5만 킵이다. 우리 돈으로 7,000. 점심으로는 볶음밥과 간단한 탕(Soup)을 주문했다. 15,000, 2,200원이다. 음식 값은 고급 식당을 제외하고, 여행자들이 가는 곳은 대체로 비슷하다. 여행자 거리의 식당은 팍취라 불리는, 한국인들이 좋아하지 않는 야채 고수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주인장 Tim은 라오인으로 보기에는 50세가 넘어보였다. 오랜 기간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경제적 여유도 있어보였지만 차분한 매너로 우리를 응대하였고, 주방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Tim의 방갈로는 낡았지만 편하게 쉴 수 있었다.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우리는 어둑해지는 길을 따라 폭포를 보러 갔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 땃 항땃 로가 있었다. 이 두 개의 폭포는 거대한 폭포가 아니어도 유유히 흐르는 황토빛의 메콩강의 위력을 보여준다. 할퀴며 삼킬 수도 있고, 온갖 허위로 감춘 바닥을 드러낼 수 있는 그 힘 앞에 무력함을 느끼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스스로 경계함이 생기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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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땃로 마을의 첫 폭포 땃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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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땃로 폭포>

 

6. 노련한, 두 명의 어린 가이드

사실, 오토바이를 빌려서 볼라벤 고원을 둘러보고 싶었다. 비록 내가 무면허일지라도 오토바이와 지게차는 몰아보았으니 안심하라는 나의 설득에 아내는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결국, 우리는 걸을 수 있는 만큼 걸어 가보기로 하였다.

아침에 볼라벤 커피를 맛보았다. 호주 출신 남편은 목공으로 라오스식 의자를 만들고 있었고 태국 출신 아내는 커피빈을 볶고 있었다. 커피는 10000, 1400원이다. 묵직한 쓴 맛이 마음에 들었다. 오늘 우리가 가보려고 하는 소수민족 마을 반 나농(Ban은 마을이라는 뜻이다)은 걸어가기에는 너무 멀다며 땃소웅 폭포 정도 다녀오라고 걱정한다.

땃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 마을은 100여 가구와 초등학교만 있는 마을이다. 대부분 밭작물을 재배하는데 요사이 옥수수 수확기라 집집마다 옥수수 껍질을 벗기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관광은 비수기인지라 민박과 농사를 겸업하는 집들은 장사를 포기한 상태이다. 고개를 살짝 올라가니 건설공사를 하고 있었다. 아직 토목공사 중이지만 그 규모가 웬만한 리조트는 들어올 것 같은 기세이다.

조금 더 올라가면 폭포 수면과 같은 위치에 숙박 휴양시설이 있고, 코끼리를 탈 수 있는 곳이 있다. 길가에는 염소들이 풀을 뜯고 있는데 우리가 가까이가자 어디선가 개들이 득달같이 달려와서 경계의 태도를 취한다. 한참을 우리와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따라오던 개들은 나오는 길에 다시 보았을 때에는 아는 체도 하지 않더라. !

코끼리를 나는 좋아한다. 큰 힘을 지니고도 성격이 온순하고, 큰 위협에 대해서 불같이 들고 일어나는 이 순박한 큰 눈을 지닌 이를 나는 좋아한다. 라오스에서는 코끼리를 사람과 같이 32개의 영혼을 지닌 동물이라며 특별히 대우한다고 한다. 연암 박지원도 [열하일기]에서 코끼리에 대한 특별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 코끼리를 타보고 싶었다. 그런데 나 같은 놈들 때문에 코끼리의 야성을 길들이기 위해서 갈고리로 찍히면서 사육을 당한 코끼리라면? 그래도 남들의 여행기에 이곳은 그렇지 않다는 말에 혹해서 타보고 싶었지만 너 혼자 타라는 아내의 말 한 마디에 양심(?)을 지켰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을 따라 걸으니 멀리 땃소웅이 보이고 폭포 소리가 우렁차게 들린다. 도로 옆으로는 전력회사와 사택이 1에 걸쳐 늘어져 있다. 아스팔트는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발전소를 지나니 다시 진흙길과 마을이 나타난다. 키앙 마을이다. 마을은 가운데 신성시하는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집들이 배열되어 있었다. 마을 입구에는 850M를 더 가야 폭포를 볼 수 있다 써 있다. 앞의 땃로 폭포는 접근하기가 쉬웠기 때문에 별 걱정을 하지 않고 있는데 마을 입구에서 놀던 아이들 중 남자 아이 두 명이 가이드를 하겠다고 자처하고 나선다. 가이드를 마치고나면 아이들이 돈을 요구할 것이고, 왠지 그 모습이 꺼림칙해서 괜히 마을을 구경하며 시간을 끌었지만 아이들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내가 졌다고 생각하며 아이들을 굳이 떼지 않았다.

간단한 영어를 하는 열 살의 아이는 뒤에 서고, 코에 콧물을 묻히고 있는 여덟 살 아이는 신나서 앞장을 선다. 그냥 길동무다 생각하고 같이 나섰지만 아이들은 한 여름을 지나면서 가려진 산길을 찾아 주었고, 지난 밤 비로 진흙 뻘이 된 길에 길라잡이를 해주었다. 아마도 이 노련한 가이드들이 없었다면 나는 땃소웅을 멀리서만 바라보고 돌아갔을 것이다.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될 무렵에 폭포의 하단이 나타났다. 작은 가이드는 혼자 벌써 물속으로 들어갔고, 큰 가이드는 신발을 벗고 따라오라고 손짓을 한다. 물속의 돌은 미끄러워 가이드가 밟은 돌을 따라 들어갔지만 그만 헛디뎌서 물속에 빠져버렸다. 그래도 폭포를 내 앞 한 가운데서 마주하는 느낌은 마치 태산을 앞에 두는듯한 두려움과 호기로움이었다. 최고의 순간이다.

물에서 빠져나온 우리들은 더 높이 올라가보자는 가이드들을 따라 산행을 하였다. 길이 없어 더 이상 갈수 없는 중턱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은 너무나 미끄러웠다. 결국 두 번의 엉덩방아를 찧었고, 나의 불쌍한 카메라 렌즈는 줌이 헛돌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사진은 17광각으로만 촬영할 수밖에 없다.

마을이 다가오자 4명의 웨스턴들과 마주쳤다.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이 친구들은 저녁 식사에 다시 만나게 된다. 아무튼 조용히 앞길을 가던 작은 가이드가 갑자가 수줍은 얼굴로 말을 한다. 내가 가까이 다가서자 마치 못할 말을 하는 것처럼 “Money”라고 말한다. 아이들에게 돈이나 과자, 학용품 따위를 주는 것은 대체로 옳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아이들처럼 자신의 수고를 아끼지 않고 우리를 안전하게 다닌 수 있도록 해주었다면 그들의 요구는 정당한 것이 아닌가. 영어를 하는 큰 가이드에게 금액을 물으니 2만킵 이란다. 마음은 더 주어도 아깝지 않은 훌륭한 가이드였지만 동심을 돈으로 물들일 수 없기에 흔쾌히 2만킵을 주는 것과 연필, 포옹, 기념사진으로 마무리하였다.

갑작스런 비로 어느 집의 처마에 잠시 몸을 피했다. 아이들은 호기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겨우 할 줄 아는 라오스어로 몇 살이니?’, ‘이름이 뭐니?’를 서로 묻고는 침묵으로 웃을 뿐이다.

오던 길을 돌아 나와 중고등학교가 보여서 잠시 입구에서 보았다. 나무로 엮은 초라한 학교였지만 청소년들은 청소년이었다. 시간이 점심식사 때인지라 밖에서 담배피고 오는 아이들, 쉬크한 표정의 오토바이 타는 여학생, 호기심 많은 여드름쟁이들이 교문 앞을 가득 채운다.

반 나농 마을로 가는 길은 바나나 나무와 옥수수 밭으로 가득 찼다. 옥수수 밭 오두막에는 비를 피해 일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사바이디하며 인사를 건네니 머라 하는 것이 마치 이리 와서 비를 피하라고 하는 것 같아 오두막으로 갔다. 어린 여자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10명 정도 있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청년이 있어서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고 가지고 있던 약과를 나눠 먹었다. 정을 나누는 데에는 먹을 것이 최고 아닌가?

폭포 마을에서부터 시간 반 쯤 지나 반 나농 마을에 도착하였다. 마을 어귀에 만나 어른은 어디에서 왔냐고 묻는다. ‘까올리(Korea)’라고 하니 라오스 말로 뭐라 하시는 데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은 (3)’콘 까올리뿐이다. 처음에 한국 사람이 여기 산다는 말인가 하다가 다른 분의 여행기에 한국 교회가 봉사활동을 왔다는 걸 본 것이 기억났다. 한국 사람들이 세 번 왔다는 말인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거리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우리에게 ‘Pencil’, ‘Book’을 외치는 경우가 많았다. 잠시 쉬려고 들른 마을의 유일한 점방 아줌마는 세븐업 한 캔과 싸구려 오렌지 가루음료를 만 오천 킵을 달라고 한다. 세븐업이 오천 킵인거 아는데 왜 그래하는 표정과 말로 물으니 지나가는 아저씨가 거들어준다, 가루음료는 천 킵이라고. 결국 세븐업은 반납하고 가루음료만 두 개 팔아주었다. 적당한 사기는 눈감아주려고 했는데 이건 좀 심하잖아요. 아주머니!

저녁식사는 마을 어귀에 새로 생긴 방갈로에서 먹기로 했다. ‘Cooking Together’라고 쓰여 있어서 요리교실인가 했더니 여러 명이 같이 모여서 먹자는 것이란다. 시간에 맞춰 식당에 가니 젊은 독일 남녀가 먼저 기다렸고, 우리 뒤에 땃쏘웅에서 만난 4명의 프랑스 여성들이 참석하였다. 메뉴는 스프링롤과 치킨 후라이드, 찰밥과 감자치킨커리였으며 맛 역시 매우 좋았다. 식사를 하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마련인데 짧은 영어 실력은 한 마디 하면 스무 마디를 듣게 만들었다. 물론 그 중에 열 마디는 못 알아듣고 눈치로 따라갔다.

우리는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 직업과 휴가, 개고기와 싸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보다 젊은 나이인 독일 여성은 독일 내에 일자리가 없어서 독일의 라오스 원조기구에 인턴쉽으로 6개월 참여하고 여행하는 길이라고 하였고, 서른 살 즈음으로 보이는 프랑스 여성들은 모두 의사들로 지금 베트남과 라오스를 넘나들며 여행 중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내가 2주 계획으로 라오스 여행 중이라고 하니 한국의 휴가에 대해 물어보았다. 보통 1년에 6일 정도라고 이야기하였더니 매우 놀란다. 나중에 아내는 3일뿐 못 쉬는 사람도 많다고 나에게 정정해준다.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스프링롤 소스인 칠리소스가 맵다고 사람 좋게 생긴 프랑스인이 혀를 내민다. 프랑스에는 매운 요리가 없다고 한다. 우리는 한국 고추장이 있는데 맛이라도 보겠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매우 곤혹스런 표정으로 손사래를 친다. 아내는 나에게 얘들, 한국에서 동대문 엽기떡복이라도 먹으면 난리 나겠군하며 웃는다. 식사 중에 개가 식탁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라오스 주인이 합석을 하면서 개고기가 대화 주제로 올랐다. 라오스에서도 개고기를 일부 사람들은 먹는다고 하였다. 당연히 질문은 나에게 돌아왔다. 그것도 프랑스 사람이 물어보았다. 머 꿀릴 것은 없잖은가? 나는 1년에 두 번 개고기를 먹고, 특히 목이 아프면 먹는다고 하였다. 그들의 질문 공세는 이어졌지만 다행인 것은 그들의 표정에 어떤 문화적 수치심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내가 푸아그라에 대한 이야기를 안 꺼낼 수 없잖은가? 한 시간 반을 넘긴 식사 자리는 우리가 먼저 일어나는 것으로 파했다.

좋은 음식과 사람들의 대화로 땃로의 두 번째 밤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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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땃소웅 폭포, 핸드폰으로 찍어 화질이 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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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작은 가이드, 안보이지만 코 밑에는 콧물 자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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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듬직한 큰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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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땃로 마을의 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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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킹 투게더를 하는 방갈로, 다음에는 이 집에 머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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