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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 쓰는 라오스 여행기(2013.09.27.~10.11) / 10.04~10.05 이야기

입으로 쓰는 라오스 여행기(2013.09.27.~10.11) / 10.04~10.05 이야기

 

10. 참파삭, 왓푸

10월 4일, 여행 8일차의 아침이다. 이제 돈뎃을 떠나 팍세 근처의 작은 마을 왓푸로 가야한다. 배를 두 번 타고, 차로 이동하는 3시간 거리이다. 11시에 출발하는 작은 배는 돈뎃을 떠나 캄보디아나 태국으로 가려는 서양 아이들로 가득 찼다. 반나카상 마을에서 갈아탄 미니밴은 잠시 돈콩 건너 선착장인 핫사이쿤을 들러 다른 여행객을 태운다.

반가운 얼굴이 밴을 기다리고 있었다. 첫날 비엔티엔에서 슬리핑버스를 타고 팍세로 내려올 때에 같은 버스를 탔던 중국인 여성이다. 혼자 여행을 하고 있는데 돈콘에서도 마주쳤고, 이번이 세 번째 만남이다. 인연은 다시 루앙프라방에서 이어져 네 번째 만났을 때에 이 여성은 자신의 여행 경로와 사진을 보여주며 루앙프라방에 대한 설명을 친절하게 해주었다. 여행지에서 서로 마주치는 일은 흔한 일 일수 있다. 그래도 반가운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또 얼마나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일인가?

이처럼 좋은 인연과 달리 나쁜듯한 인연도 있게 마련이다. 돈뎃에서 나가는 배는 둘이 나란히 앉으면 꽉 차는 작은 배라 큰 가방은 앞쪽에 놓고 앉아야 한다. 우리는 제일 안쪽에 탔는데 다음으로 타는 스페니쉬 여성은 가방을 앞에 놔두라는 말을 무시하고 굳이 부여잡고 있어 그 앞 사람은 짧은 시간이지만 불편한 자세로 배를 타야만 했다. 그런데 이들이 왓푸로 가는 유일한 동행객이 된 것이다.

무뚝뚝한 표정에 줄담배를 피는 이 여성과 달리 친구는 예의바른 모습이었다. 나는 왓푸로 들어가는 모래밭 선착장에서 왓푸까지 툭툭이를 같이 빌려서 비용을 나누자는 제안을 하였다. 당연히 비용을 아끼는 일이니 이들도 좋다고 하였다.

라오스는 통일되기 이전에는 세 개의 왕국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참파삭 왕국이었고, 일주일째 머물고 있는 남부 라오스가 참파삭주이다. 왓푸는 힌두교 사원이 있던 곳으로 건축양식은 왕코르왓의 사원의 양식과 같다. 강을 건너기 전부터 왓푸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신령한 기운을 감싸고 있는 듯이 낮고 평평한 제단마냥 둘러쳐져 있었다.

건너편에서는 뚱뚱한 아저씨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게스트하우스로 가면 툭툭이로 공짜로 모신다며 호객을 한다. G/H 이름을 물으니 옹빠슷라고 한다. 한국에서 미리 확인한 G/H이다. 이 지역은 대체로 허름한 편인데 개중에 괜찮다고 소문난 곳이다. 1박에 4만킵(6천원)이니 스페니쉬들도 좋다고 한다. 짐을 풀고 바로 왓푸로 이동하였다. 툭툭이 비용은 8만킵으로 4만킵씩 나누었다.

왓푸에 이르니 태국인들이 단체로 관광을 와서 시끌벅적하다. 많은 이웃나라끼리 그러듯이 동남아의 강자였던 태국과 라오스는 경제적으로는 밀접하면서도 정서적으로는 거리감이 있다고 한다. 툭툭이 기사의 몇 마디에서도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왓푸의 입장료는 사원 입구의 3만킵과는 달리 3만 5천킵으로 올랐다. 그렇고 잠시 타는 관람차 값이 포함된 5만킵 티켓을 먼저 내밀다가 다른 것으로 달라고 해야만 내어준다.

해발이 높은 지역도 아닌데 구름은 산허리를 꿰고 있고, 짙은 녹음은 왓푸의 신령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공원처럼 잘 꾸며 놓은 호수를 지나 돌로 만든 나가 상과 남근 모양의 기둥들은 앙코르왓의 그것과 똑 같다. 과거 참파삭 왕국의 종교가 불교가 아닌 힌두교였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무너진 돌들의 사원을 보면서 내가 밟고 있는 돌 하나하나가 다 유적임을 생각하니 발걸음이 조심스러워 진다. 돌들마다 새겨진 섬세한 조각과 믿음의 표상들은 영원한 것에 대한 인간의 소망과 함께 그것의 덧없음을 함께 보여준다. 어찌 보면 앙코르왓과 마찬가지로 왓푸 역시도 완벽한 복원이 아닌 지금의 상태가 우리에게 더 많은 생각을 던져주는지도 모르겠다.

계단을 가쁘게 올라가면 불교 사원이 나온다. 다른 나라 관광지의 장사치들과 달리 라오스 상인들은 조용히 기념품과 제물을 권할 뿐, 큰 소리를 내어 장사하지 않는다. 이 나라를 다시 오게 될 때에도 저 모습이 변치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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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무척 더웠던 팍세, 그리고 딩딩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팍세로 나가는 7시 차가 2만킵이고, 그 이후에는 5만킵이라고 하였다. 1톤 트럭만한 성태우에는 이미 많은 라오스인들이 타고 있었고, 우리를 포함한 외국인 6명이 타니 자리는 이미 만석이었다. 그러나 시내로 나가겠다는 사람들을 안태울 수 없으니 나중에는 무려 35명이나 올라탔다. 라오스인들은 큰 소리 한번 없이 자리를 좁혀주면서 다른 이들을 배려하였다.

시장에 내린 우리는 툭툭이 기사들의 호객을 뚫고, 시장 노점에서 식사를 하고 시장구경을 넉넉히 했다. 특별히 볼거리 없는 팍세 시내에서 유일하게 눈에 띈 박물관이 열려면 1시간 이상 남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커피의 본고장 팍세의 아이스 모카커피를 비닐봉지에 담아 마시면서 박물관까지 한참을 걸어갔으나 박물관은 굳게 닫혀있었다. 박물관을 보고 나면 여행사에 가방을 맡기려했는데 여행사도 보이지 않는다. 어쩌지?

도로에는 공사 중이라 먼지가 폴폴 나고 있었다. 잠시 앉을 곳을 찾아 샛길로 들어섰다. 테이블 두 개가 놓인 노점식당의 젊은 주인이 와서 앉으라고 손짓을 한다. 그는 우리에게 보리차 같은 차를 권하면서 얼음이 필요하냐고 묻는 것 같았다. 손님이 없는 아침나절이라 라오스 단어와 몸짓으로 우리는 대화를 하였다. 서른다섯 살인 그는 시장에서 5년간 장사를 하였고, 식당을 연지 채 2년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내 이름을 그냥 ‘손’이라고만 소개하듯이 그도 이름을 외국인이 발음하기 좋게 ‘딩딩’이라고 소개하였다. 딩딩은 가게에 잠시 들른 아내를 소개해주었고, 어제 머문 왓푸가 자신의 고향이라며 팍세의 날씨가 무척 덥다며 한국은 시원할거라고 몸짓을 한다.

가방을 맡길 곳이 필요한 우리는 가게 뒤의 G/H에 가방을 맡길 수 있겠냐고 물었다. 딩딩은 그냥 자신에게 맡기라고 하였다. 우리는 잠시 망설였다. 현지인들의 호의를 그냥 호의로만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침 딩딩의 쇠사슬이 난간에 걸려 있어 내 자물쇠로 가방 두 개를 엮어 묶고, 보관료를 달라고 하지 않았지만 1만킵을 보관료로 주고 사진을 찍어두었다. 우리는 이제 팍세 시내를 가볍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잠시 사원에 들렀다. 라오스에서는 사원마다 사진이 붙은 탑들이 있다. 아마 화장을 하여 모시는 봉안탑인 듯하다. 사원에는 아직 10대의 스님들이 작업을 하다가 쉬고 있었다. 팍세나 남부 라오스에 한국 관광객은 거의 없지만 커피 농장을 하는 한국인들이 제법 있어서인지 한 스님이 중국어로 인사를 하다가 내가 ‘커이 뺀 까올리(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하니 한국어로 ‘안녕하세요’하며 웃어준다.

팍세 시내에는 특별한 관광지는 없었다. 일부러 골목길을 걸으며 사는 모습 구경하다 눈 마주치면 ‘사바이디’하며 인사를 건넨다. 그러면 모두들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인사를 받아준다. 화장실을 핑계로 팍세에 제일 큰 병원에도 들어가 보고, 현지인들의 시장에 들러 옷 구경, 쌀 구경, 반찬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더운 날씨에 길을 걷는 사람은 우리 둘 뿐이었다. 다들 오토바이나 자전거로 이동하고, 그늘에서 쉴 뿐이었다.

우리는 두 시간 만에 딩딩의 노점으로 돌아왔다. 더 볼게 없다는 핑계였지만 솔직히 마음에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방은 무사했고, 딩딩도 그 자리에 있었다. 무안한 마음이 얼굴을 화끈하게 만든다. 딩딩에게 점심을 달라고 했다. 딩딩은 땀막홍에 자신 있다며 꼬치구이와 밥을 내왔다. 비어라오를 시키니 옆 가게에 가서 두 병을 사온다.

딩딩은 비어라오가 최고하고 엄지를 치켜세운다. 라오스에는 남콩이라는 맥주가 새로 생기기도 했지만 비어라오만 하지 않다. 나중에 유명한 태국 타이거비어를 비교해서 먹어보아도 비어라오를 따라오지 못한다. 땃로에서 만난 독일 청년은 비어라오는 동독 공산당이 전수해 준 것으로 안다고 조심스레 이야기하였다. 나도 그 말을 들었다며 동독 공산당이 한 유일한 잘한 일이 그것 아닐까 싶다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또한 좋은 점은 라오스에서 맥주 값은 미니마트나 식당이나 거의 같다는 점이다. 대개의 음식점이 가게에서 사는 가격에 그냥 내어준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딩딩에게 5만킵을 주면서 1만킵 정도 남는 잔액을 그냥 두라고 하였다. 딩딩은 ‘컵 짜이’하며 고맙다며 우리가 말리는데도 비어라오를 더 사오는 것이다. 박지성과 축구를 좋아한다는 딩딩, 그가 없었으면 덥고 먼지 나는 팍세를 기억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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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내부 이동 경로 : 버스로 1,500Km, 항공으로 850Km를 이동하였다.>

 

 

12. 그 자체가 문화유산, 루앙프라방

우리는 팍세에서 루앙프라방까지 라오항공을 이용하여 이동하였다. 비행시간 1시간 30분, 99달러의 프로모션 가격이다. 항공 이동을 가능한 피하고 싶었지만 굳이 변명하자면 너무 멀었다. 지난 일주일간 이동거리가 1,150㎞이었는데 팍세에서 루앙프라방을 버스로 가기 위해서는 이틀 밤에 슬리핑버스를 갈아타고 970㎞를 가야만 했다. 비용도 대략 40달러가 드니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비행기를 선택했다. 참고로 라오스에서 버스를 이용한 도시간 이동 거리는 총 1,500㎞ 정도로 추산된다.

라오항공의 프로펠러 경비행기는 대략 100여명을 태울 수 있었는데 승객은 총 7명으로 승무원 4명과 함께 전세기의 느낌으로 올 수 있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낮이라 라오스를 한 시간 반 동안 눈에 넣을 수 있어 좋았다. 남부의 평원과 달리 북부는 산악지형으로 완전히 다른 풍경을 보여주었다.

과거 란쌍왕국의 수도였던 루앙프라방은 도시 자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시이다. 공항의 외관부터 그러한 자부심은 넘쳐났고 일주일 만에 도시다운 도시로 온 우리는 도시에 온 촌놈처럼 처음에는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숙소는 숙티웡G/H로 골랐다. 골목에 있는 숙티웡G/H는 찬사왕G/H에서 접객업무를 맡아서 진행한다. 넓은 트윈베드의 방이 7만킵(1만원)이다. 우리가 묵은 라오스의 모든 숙소에서 가격 대비 제일 훌륭한 방이었고, 정원 역시도 훌륭했다.

루앙프랑방에 왔으니 만킵 뷔페를 가봐야 한다. 야시장의 풍경을 옆으로 하고 들어간 골목은 야채요리를 단돈 만킵(1천4백원)에 한 접시 가득 담을 수 있다. 몇 군데 가게가 있지만 다 비슷하다. 그러나 음식은 너무 기름졌다. 채식 뷔페라는 말이 무색하다.

루앙프라방의 야시장은 시내 중심 거리를 야간에 차량 통제를 하며 상인들에게 내어준다. 다음날 가보니 자리가 바뀌는 것으로 보아 따로 지정되어 있지는 않은 듯 하다. 이날, 나는 몸빼 바지라고 불리는 월남 바지-요새 인터넷에서 에어컨 바지로 불티나는- 하나를 샀다. 한국에서 아내가 입기로 하고, 잠시 입었는데 놀랍게도 편하다. 바지의 코끼리 문양도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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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어가는 이야기 - 사람들

여행을 가면 풍경만이 아니라 사람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

그러나 단지 말이 안통한다는 이유로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고 사진기를 들이밀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래는 사진기를 들어보여 찍어도 되냐는 동의를 구한 사진들이다.

라오스 사람들이 모두 선하거나, 순박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교민의 말처럼 여행자들에게 돈뜯으려고 덤비지 않는 곳은  라오스뿐이다.

나는 이들이 무표정한 것은 보았지만 단 한번도 화를 내는 것은 보지 못했다. 큰 소리로 싸우는 모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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