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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 천 한 번째


 


동굴에서 사람들이  총알에 뚫려 스러질 때 제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직 만나지 아니한 때였습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끝내 살아남았습니다.

공화국의 섬세한 칼날이 그를 이슬처럼 섬세하게 베어낼 때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만났으나 아직 저를 낳지 않았을 때입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살아남았습니다. 

당신이 불을 질러 두어 발자국 떼어낼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살아남아 나를 낳고 어화둥둥 기를 때입니다.  내가 당신이 아니라 나의 스무 살이 그 때가 아니라 다행스럽게도 나는 살아남았습니다. 

그가 밀실 욕조에 빠져 익사할 때 나는 이제 갓 서울에서 꿈을 품었을 때입니다.  천만 다행스럽게도 운명은 제가 아니라 그를 선택하였습니다. 

그가 발을 헛디뎌 유원지에 빠져 퉁퉁 불은 얼굴로 떠올랐을 때 다행히 그는 내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끝내 살아남았습니다.

 

내가 처음 열어보기 시작한 당신의 죽음은 십 년도 더 지난날 창문을 열고 뛰어내려 한없이 추락하고, 공화국은 주검마저 도둑질한 일입니다. 그 때 나는, 당연히 끈질기게 살아있던 때였습니다.
다음 만난 당신은 스무 해도 더 지난 날  멀리 부산 앞바다에서 돌을 칭칭 허리춤에 감고 물에 뛰어들어 죽음의 무게가 돌의 무게를 누르고 떠올랐습니다. 그 때 나는 무엇이었을까요. 나는 결코 그 따위 죽음을 상상하지도 않을 때입니다. 상상보다 현실이 더 픽션처럼 들렸습니다. 나는 그런 픽션을 벗어나 당연히 살아 펄펄 뛰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나는  당신들처럼 그렇게 죽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대신하여 죽은 것도 아니고, 내가 당신들을 대신하여 남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며, 운명이 나를 대신하여 당신들을 선택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나는 생존자의 권리를 마땅히 누릴 것이며 날마다 평온한 저녁이기를 바랍니다.
그 저녁에 당신이 흠씬 두들겨 맞고 불을 지르고,  뛰어내리고 목을 건들, 나는 끝내 살아남고 살아남겠습니다.

그런데 나의 저녁을 위해 나는 사지(死地)를 얼마 더 피해 다녀야 합니까,

 

*

제가 이 제목을 달고 글을 쓴 천하고 한 번째 사람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결코 두 번째 사람은 아닐 거예요.

첫 번째 글이 나오고 나서 생존자로서 슬프다는 이들이 많았으니까.
어젯밤 또는 그저께 밤 꿈에 엄청난 폭풍우가 몰아쳐서 우리들 발밑으로 밀려들었어요. 두렵고 두려운 ‘쓰나미’가 밀려들었죠.
자꾸만 지구가 잠을 못 자고 뒤척거리는 열대야,  
저는 잠에 빠져들어 끝없이 높이, 높이 죽을 힘 아니 살 힘을 다해 올라갔고 마침내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살아남고 보니 제 '입지점'이, 발 디딜 틈이 심각하게 좁아졌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희한하게 반전하여 당신 또한 살아남아 나의 어깨를 감아 도닥거려 주었습니다.

정말 다행이라고 이제는 평온을 찾았구나 하고 다시 발 아래를 보니 아득하였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눈물겨운 시도 끝에 나는 나를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생은 돌아오지 않고 이생이 유일한 생일 것이므로 다행이다 싶어요. 살아남아서.

 

(2007. 8. 19, 사무실에서, 다시 평온한 저녁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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