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챨리와 함께(모던타임즈, 1936)


 

그러고 보니 정작 나는 혁명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것 같다.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할 수 없는 것인지 고르라 한다면, 나는 차라리 혁명,이라고 말해버릴 것이다. 그것은 챨리가 우연히 깃발을 움켜쥐고 '동'을 뜨게 되는 것보다는 덜 혁명적일 것이며, 피어나는 장미처럼 혁명이 발화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혁명은 말해질 것이니까. 그것은 챨리가 무성(無聲) 시대를 뛰어넘어 넌센스한 노래를 흑백필름에 담아내는 것보다는 혁명적일 수 없겠지만, 어쨌든 그와 같이 말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나면 혁명은 빛깔이 바래, 다만 음절부호를 지닌 혁-명이 될 것이나, 누군가 그것을 내게 원한다면 충분히 말해줄 수 있겠다.

 

깃발 하나로도 '동'을 뜨고 앞서서 나갈 수 있었던, 감히 콩글리쉬를 섞어도 된다면 모던한, 참으로 모던한 시절이 몇 십 년은 더 지났고, 챨리가 기억을 남긴 미래는 콘베이어벨트보다 빨리 돌아오고 훅, 지나치기도 하여 때를 놓치기도 하지만, 우리는 돌아가야 할 곳 또한 알고 있다. 챨리가 발견하고 기억한 모던타임즈에는 어떤 희망이 담겨져 있을지 모르지만, 모던타임즈나 또는 그 이후는 희망의 크기와 그 가능성이 반비례법칙이 관통하는, 챨리의 누더기바지같은 시간이다. 그 모던타임즈는 희망을 향해 따라 잡으려할수록 그 속도는 혁명적으로 나아가 끝내는 온몸이 빨려들어가도 막막할 뿐인, 그렇게 모던한 시간의 지속인데, 그러므로 모던한 공장 아가리에서 모던한 자동차를 뱉어낼 때 실은 시간 속에 빨려들어갔던 당신을 모던하게 다시 뱉어내는 것이다. 또한 이 모던한 시대는 희망의 언어들을 모던하게 재생산하지만 그렇지만, 이렇게 모던하게 돌아가는 당신의 시간을 쪼개고 합체하여 모던하게 되팔아 굴러갈 뿐, 희망을 생산하지는 않는다. Never say die? 챨리만큼의 익살은 없지만 그만큼 낙관주의자일 사람들마저 죽지 못해 산다는 그렇게 모던하게 살아가는 시간이다.

그러니까 눈물을 닦아라, 우리가 되돌아가야 할 챨리가 내다본 시간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챨리도 남달리 모던하게 살았을지 모르고, 저도 모던한 시간 속 사람인지라 무성 시대를 뛰어넘는 혁명에도 아량곳 없이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냥 여전히 말없이 걸어가는 걸 보여줄 뿐이다. 이런 모던한 희망을 향해 팽팽 돌아가는 속도를 따라잡지는 못해도 그만큼 모던한 시간을 거슬러 희망할 수 있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모던타임즈, Nonsense Song(채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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