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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사전

리히텐 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만화같은 그림' 운운하면서 어떻게 715만 달러를 주고 사들였는지 궁금하다.

 

   
 

삼성SDI하이비트 비정규 해고노동자들의 눈물.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coolmedia&id=1662 )

 

 

 이 나라 정치인들은 대개 이해력 결핍증이 치유 불가라서 죽음 앞에서나 겨우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기는 하지만, 그들이 존경해마지 않는 국민 중 과반수가 겪는 불안정한 삶에 대해서 그들도 말로는 인정하는 분위기다.
몇몇 매스미디어들은 이와 같은 불안한 삶을 풍자적으로 다루고 있는 어떤 누리집의 ‘불안사전(
http://jisiknet.com)’ 이야기를 하고 있다(한 번 가보시라). 나는, 이 사전이 매우 외롭고 쓸쓸하게 웃기는 한편, 내게도 잠시 불안감을 주기도 하여서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이를테면 ‘스펙(spec: specification)에 대한 정의를 보자: “자신을 조직의 부품으로 낮추어 생각하고, 상품화해 소개하는 특·장점. 스스로를 불안사회의 저가품으로 인식하여 나타나는 현상.”

각 개개인의 인격이 사회·집단·조직의 원자로 부품 또는 상품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별 거 아닌 듯싶다. 그런데 이는 최근 ‘불안사회’에 이르러서 개인의 인격과 개성이, 학력·토익점수·자격증 같은 현대인의 필수교양(지식)과  미모·출신성분·가정환경 따위  전통적인 요소들을 잘 결합하여 매우 단순해진 ‘스펙’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고도문명사회 특징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더욱이 이 ‘불안사회’ 구성원들은, 자기에게 운명처럼 예정된 불안한 삶을 떨쳐내기 위해서 각자 ‘스펙’을 높여내는 일에는 집중하지만, 선거 때마다 이 불안사회를 끝장내겠노라고 약속하는 자들의 ‘스펙’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늙은’ 언론인들이 자기들 ‘보수주의’는 애써 눈 감은 채, 요사이 젊은 세대들이 사회적 문제는 젖혀 두고 ‘스펙’ 올리기에만 열중한다고 꾸짖는 일은 오늘날 이 ‘스펙’이 지닌 유용성에 대한 무지 탓이다(또 샛길이다. 샛길로 잘 빠지는 것이 나의 특·장점이다).
내가 이 사전에서 눈여겨 본 것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를 먼저 말해 보면, 정규직을 “잠재적 비정규직, 혹은 備非正規職(준비된 비정규직)”으로 정의내리는 것이다.

이 나라 통계청이 내놓은 통계상 오류를 통계하면 기상청의 기상예보 오류와 엇비슷하다는 학설들이 있기는 하나, 최근 그곳서 내놓은 것만 보더라도 비정규 노동자는 전체 고용자 가운데 40% 안팎이다(많은 사람들은 피고용인 가운데 절반 이상이 불안정노동에 종사하고 있다고 본 지 오래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정의는 나머지 절반, 곧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보이는 정규 노동자들도 언제든지 잘리거나 비정규 노동자로 내몰리는 불안지대에 있다고 날카롭게 또한 불편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현대사회 ‘실존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전지전능함이 말로서야 창조주에 버금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꼭 자기를 선택해달라고 한다.

 

*
그들은 대체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외국인들이 대한민국에 투자하면 이윤을 잘 남길 수 있겠구나 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젊고 싱싱한 세대의 노동자들을 헐값에 맘껏 쓰고 버리고, 저항하면 부수어버리는 일이 대한민국에서는 가능하다는 것을 ‘국가CEO’로서 널리 알리겠다. 기업이 이윤율을 높여내고 독점을 가로막는 규제를 축소, 완화하겠다(실제로 전경련은 대통령 당선자에게 출자총액제한제 등 경제력 집중  규제를 폐지하는 등 대대적인 규제개혁을 제안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앞서 말한 불안정한 삶을 더욱 재생산하는 일은 아닌가? 
이 나라 정치인들이 자주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이유가,  ‘논술 시험’이 없어 논리의 기초를 배울 수 없었던 불운한 시대에 태어나서 그렇다는 학설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틀렸다. 그들 역시 ‘실존의 문제’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옳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말하다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 건지 망각하는 극도의 분열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들끼리야 상대방 ‘스펙’을 깎아내리는 네거티브 전략과 자기 ‘스펙’을 높여내기 위한 포지티브 전략을 구사하면서 경쟁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모두 공동의 입지점에 서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는 데서 이 분열증 정도는 더욱 심각하다.
지금에 와서 친애하는 국민들 앞에서 당신들을 불안한 삶에서 건져주겠다고, 마치 자신들이 초인이라도 되는 양 말하지만 그들이야말로 어깨를 걸고 ‘불안사회’를 일구는 데 앞장선 장본인들이다. 바로 ‘경제 살리기’를 위해서 말이다.


그들은 많은 비정규 노동자들이 곧잘 ‘경제 살리기 = 노동자 죽이기’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몸소 겪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다가 이제는 동정하면서 마치 구세주 행세를 한다. 어제까지는 말로만 친애하는 국민이었지만 오늘은 한 표라는 막강한 권력을 쥔, 조금은 더 친애하지 않으면 안될 '국민'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네가 진짜 권력을 움켜쥐게 될 내일에는 친애하는 마음도 많이 수그러들 것이다(이 나라 정치인들은 이와 같은 ‘모른 척 하기’를 반복하다 보니 자기가 한 말이나 행위를 지속적으로 지워가면서 점차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어버리는 지우개가 머릿속에 비대해졌다는 ‘누가 한 말인지 나도 몰라라 보고서’도 있다).
통계청에 의하면 비정규직이 지난 4년 동안 109만 명, 지난 한 해 동안에는 24만 명 늘어났다. 한마디로 불안한 삶은 더 늘어났다. 그들이 손에 손을 마주잡고 신-노사관계 로드맵을 몰아붙이고 비정규 법률을 입법화하는 동안에 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기업주들에게 더 많은 힘과 권리를 주었다. 그래서 비정규노동자들은 그들이 지금 떠들어대는 것처럼 부자로 만들어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마땅한 생존의 권리를 보장하라고, 더 쉽게 말해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워야만 했다. 그리고 이들이 처절하게 패배하고 눈물 흘릴 때 저들은 무엇을 했을까? 국민의 절반이 아직은 그다지 친애하는 국민들이 아니었을 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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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불안사전’에서 주목한 두 가지 가운데 하나는 ‘자유’에 대한 정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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