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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한 말씀 올릴까요?

  

판도라, 그녀가 상자를 열었다.


 
1.
내가 비관주의자들의 '단결'을 호소한다고 해서, 언제나 칙칙하게 살아가는 건 아니다.  어떤 분노나 슬픔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날이 웃으면서 살아간다. 나는 나를 에워싼 관계들과(전부라고 결코 할 수는 없겠지만) '호혜의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이런저런 즐거움을 찾고 누린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관한다. 이 세계는, 아무리 나에게 비관주의를 뜯어고치라고 충고한대도, 정말이지 희망이 없다.
 
3.
희망은 영원히 상자 속에 갇혀 있어서 그런 것일까? 어쨌거나 내가 신화의 기원이나 의미에 대한 재해석을 둘러싸고 한마디 할 형편은 되지는 않지만, 이 세계의 재앙과 불운을 단지 그녀의 호기심(curiosity)에, 그녀가 상자를 열었던 행위에 원죄를 뒤집어 씌우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류의 오랜 역사 동안 형성해놓았고 또한 이 '모던한' 사회에서는 또한 '모던한' 재앙들을 재생산하고 축적하는 우리 모두가 어떻게 그녀에게 원죄를 물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여 상자 안에는 희망만이 남게 되었는가. 헤시오도스는 인간에게는 미래를 다스릴 힘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희망이라는 걸 상자에 남겨놓았다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희망이란 '악(evil)'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또한 나의 비관주의와 지극히 닮은 꼴이다. 이 세계에는 재앙이 가득하다.  희망은 없다.  또 많은 이들은 그 재앙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의, 어쩌면 단 하나의 위안, 희망이라는 걸 상자 안에 남겨두었다고도 한다. 글쎄, 이 설화에는 도대체 상자 안에 갇힌 희망이 문제이다.


달리 돌이켜보면, 판도라는 지혜롭다. 그녀는 이 세계는 온갖 재앙과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는 자명한 진리를 깨우친 사람이다. 그녀야말로 지혜의 여신이다.(오, 그녀가 신인지, 인간인지 아니면 중간 어디 즈음에 머문 존재인지는 넘어가달라).  그녀는 그 시대 지배자 제우스에 맞서 이 세계는 참으로 비관적이라는 걸 폭로했다. 그녀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지만) 참된 비관주의자이다. 이 세계는 절망적이다, 희망이 없다. 그녀는 희망이 아니라 그런 절망적 세계이해, 비관적 인식을 세계에 유포한 죄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4.
어떤 사람들은 그럼에도 희망을 가져달라고, 긍정의 바이러스를 퍼뜨려 달라고 자꾸 말한다. 그들은 판도라와 그녀 이래 무수한 비관주의자들이 열어놓은 세계인식을 가로막고 싶어한다. 그들도 또한 우리 시대 사람들이 지닌 고통과 난관을 이해한다는 투로 말한다. 그래도 자꾸 희망을 말해야 극복될 수 있는게 아니냐고.
그렇지만 그들은 사태가 절망적이라는 걸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절망에 대한 적극적 인식 없이 희망을 불러들이자고 한다. 오늘, 주어진 현실, 사태에 대한 부정 없이 긍정을 말한다. 그는 현실을 긍정한다. 그는 제우스처럼 기만한다.
 
5.
그러므로, 여전히 비관이 우세해야 한다. 부정이 긍정을 압도해야 한다.  곳곳에서 수많은 판도라가 상자를 열어야 한다. 그러면 희망은 어디에 있느냐, 어떻게 남아 있느냐, 나는 아직도 그것을 말할 수 없다.
헤시오도스가 잘못 생각한 것처럼 인간은 운명이라는 굴레에 수동적으로 갇혀 있지만은 않았다.  인간이 미래를 다스릴 힘이 없다는 점에서 희망을 '악'으로 남겨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그리고 비관주의자 동무들이 희망이 없다고 하는 일이 '기계적 시간'에 맞추어 미래를 맞이하려하기 때문이 아니다.   언제나 시대를 부정함으로써 미래에 닿았다. 상자를 열어서, 현실의 절망과 재앙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미래를 과거와 현재로 끌어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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