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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8/26
    기리는
    펼쳐라

클레+나+당신+천사 그리고 견뎌내기

 

 

The mask with little flag, 1925

 

Angelo povero, 1939

 

 

 

Angelos novus, 1920

 

 

"나는 이 세상의 언어만으로는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죽은 자와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와도 행복하게 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 사람보다 창조의 핵심에 가까와지긴 했으나 아직 충분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오래 동안 쓰지 않았던 웹메일 아이디에 들어가 보았더니 그곳 프로필에 

"다만 견디기 위해 꿈을 꾼다 ."고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솟대도 아니고 깃대도 아닌 작은 그림도 있었는데

아마 뜻하는 바를 실현시켜준다는 부적이었지 않나 얼핏 떠오르고

이 말에 영감을 준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런데 부적이 놀라운 힘을 보여주리라고 기댔다면

높고 엄청난 꿈을 꿀 일이거늘, 다만 견디기 위해서라니.

 꿈꾸기 위해 견딘다고 썼어야 할 것을 뒤바뀌지는 않았나.

돌이켜보면 그 때나 이제나 견뎌내는 일로 나를 자각하고

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보이는 그 너머를 보지 않더라도, 당신 생의 선을 추상화시켜보지 않더라도 

 상처받지 않은 목숨들이 있을까.

그렇지만  내가 남겨놓은 흔적들은 더 간절히 아프고

아픈 선들이지 않으냐,고 되물어보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작은 깃발을 들고 다만

견디어내면서  당신이나 나나 슬픈 존재들이기도 하거니와

그것에 공감할 줄 안다는 것으로

시절을 거쳐 왔다고 보면

우리 자신이 곧 '존재론적 사건(진중권이 '새로운 천사'에 대해서 한말)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니

"고통에 울지 않으려 창조"를 한다던 사람들이나

견디기 위해 꿈을 꾸고 또 그것으로 견뎌왔고 꿈을 꾸어왔던

우리들이 다르지 않구나, 푸덕,푸덕, 슬프게 날개짓하면서,

비록 이 시절 고통이 무겁기가 만만치 않은지라 그렇게 고통에 붙잡혀 있다해도,,

당신은 없고 거기에 있으며 나는 거기에 없고 여기에 있다는 게

그와 같은 현존이 달라질 수는 없고 기억될 뿐이라 해도,

서로 푸덕,푸덕, 푸드덕 날개짓하다보면 그래, 우리는 이렇게 날개짓하고 있구나,

견뎌내고 있구나,하는 공감이 또한 견뎌낼 힘이 되어주지를 않겠나.

 

그러고 보면 그와 같이 날개짓하는 대지에 붙잡힌, 슬픈 천사들이

 꼭같이 시체가 널부러진 땅에서 쫓겨나거나야 했던 벤야민이나 클레 자신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일 수도 있고

나아가  여기에는 없으나 저기 어딘가에서 나와 같이

시절을 견뎌내며 꿈을 꾸는 당신일 수도 있겠다,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 당신이, 설마 내가 아프다고 달래줄 것도 없고

저 사람은 왜 다른 이들 못지 않게 아프다고만 하는가

물어볼 이유도 없으며

언제나 그래왔듯,  당신이 누리는 아픔이 나나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가끔 떠올려주기만 한다면 충분할 것이다.

 

당연히 나도 그러할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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