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7/09/18

13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9/18
    잡지 글-친구가 사는 곳
    burma
  2. 2007/09/18
    난민 어린이글 4
    burma
  3. 2007/09/18
    난민 어린이 글 3
    burma
  4. 2007/09/18
    난민 어린이글 2
    burma
  5. 2007/09/18
    난민 어린이글 1
    burma
  6. 2007/09/18
    숑 들어왔습니다
    burma
  7. 2007/09/18
    첫번째 후원과 송금내역
    burma
  8. 2007/09/18
    <펌> 버마 사태 고조…스님들, 마침내 시위 대열 가담
    burma

잡지 글-친구가 사는 곳

Name  
   류은숙  (2004-11-18 13:33:32, Hit : 680, Vote : 84)
Subject  
   잡지 글-"친구가 사는 곳"
*'국경 없는 친구들'이 발간하는 잡지에 실린 글입니다.

"친구가 사는 곳"

어디에 제일 가고 싶냐는 질문을 받으면 당신은 어디를 떠올리나요? 가고 또 가도 결코 지겨워지지 않는 그런 곳 말이예요. 내게 그런 질문을 한다면, 내가 가장 가고 싶은 곳은 단연코 "Mae Hong Son"입니다.
그 마을이 아주 풍경이 좋고 작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다양한 소수민족의 풍부한 문화를 갖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Mae Hong Son"이라 하면 으레 떠올리는 상징은 "긴 목을 가진 카렌족(목에 고리를 끼워 길게 늘이는 종족으로 유명한 것이 카렌족임)"입니다. 사람들은 카렌족과 그들의 가족이 버마에서 온 난민이란 것을 모른채 관광객으로서 그들의 목걸이를 떠올릴 뿐입니다. 내가 Mae Hong Son을 아주 좋아하는 이유는 거기에 내 친구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고, 그 친구들 때문에 Mae Hong Son에 관광객의 관심을 끄는 일들 말고도 더 많은 얘기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한 친구를 여러분에게 소개하지요. 그녀의 이름은 빅토리아입니다. 빅토리아는 가족이 버마에서 도망쳐 나온 후에 타이에서 태어난 Kayah족 소녀입니다. 우리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녀는 버마군인들이 얼마나 잔인했는지와 Mae Hong Son에 살고 있는 만 명이 넘는 Karenni족이 도망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얘기합니다.

Karenni는 버마의 7개 소수민족국중에 가장 작습니다. Karenni는 많은 소수종족으로 구성돼 있는데 제일 많은 인구가 Kayah족이고, 그 다음이 Karen, Kayaw, 그리고 Kayan 또는 Paduang 족으로, 이들은 타이 사람들에게 "긴 목을 가진 카렌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Karenni 왕국은 Kayah족의 지도 하에서, 역사적으로 Lanna와 버마 제국 둘다와 외교적 유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영국이 버마에 대한 지배를 수립했을 때 Karenni국은 여전히 독립을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독립을 위해 성공적으로 분투하는 과정에서, 버마의 정치엘리트들은 버마연방을 만들었고, 이 연방은 소수민족 국가들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이후로, 버마군은 새로운 국민국가의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정당화하고, 타 민족들에 대한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소수민족의 영토를 느슨하게 통치했던 고대 버마 제국의 권리 주장을 해왔습니다.

소수민족을 향한 혹독한 폭력은 소수민족을 겨냥한 전쟁 뿐 아니라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전혀 청취하지 않는 많은 개발 프로젝트(특히 댐 공사)를 통해 이뤄졌습니다. 댐으로 인해 농사짓고 살던 땅에 악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쫓겨나거나 강제노동을 하게 됐습니다.

슬프게도, 그들이 타이로 이주하게 되자, 그들 중에서 "이국적"이고 뭔가 달라 보이는 사람들은(긴 목을 한 카렌족처럼) 타이 장사꾼들의 표적이 됐습니다. 이 장사꾼들은 이 사람들의 문화를 팔아서 이익을 볼 수 있다는 데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만약 버마정부가 헌법을 기초하기 위한 의회를 소집하게 돼서, 전쟁이 끝나게 되고, 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Mae Hong Son의 관광산업이 영향을 받게 될 것을 걱정하는 것이 이들 장사꾼들의 속내입니다. 빅토리아가 이런 뉴스를 읽게 된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빅토리아의 꿈을 생각합니다. 그 고향에서는 산 속에 마을들이 있고, 사람들은 소박한 삶을 살고, Mae Hong Son에서보다 더 아름다운 문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나에게도 빅토리아와 똑같은 꿈이 있습니다. 모든 난민 친구들이 고향으로 즐겁게 돌아간다면, 나에게는 방문하고 싶은 "친구가 사는 곳"이 하나 더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나는 희망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의 그들 사회에서는 더 이상 지역주민들을 싼 노동력이나 문화상품으로만 취급하는 개발 프로젝트와 관광산업을 볼 수 없게 되길 말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난민 어린이글 4

Name  
   류은숙  (2004-11-16 15:51:56, Hit : 793, Vote : 73)
Subject  
   난민어린이글 4
Saw Su Le (11살, 1학년)
빨간색 카렌족 셔츠를 입고, 미래를 향해 걸어간다. 선생님이 안 계시면 학생들은 배울 수 없다. 선생님이 안 계시면 우리는 읽는 것을 배울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학교 때문에 셈을 할 수 있고, 많은 것을 읽고 쓸 수 있다. 선생님은 우리를 밤낮으로 도와주신다. 전혀 불평하거나 소리를 치지 않으시고, 너무나 친절하게 너무나 인내심을 갖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신다. 우리 카렌족 아이들은 부끄럽지 않다. 우리가 노력하면 언젠가는 우리도 우리 친구들을 선생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도울 것이다.

******************************************************************************
버마 동부의 무력분쟁 지역에서, 전체 가족 중 단지 11%만이 제대로 열려있는 학교에 갈 수 있다. 휴전지역에서조차 예산의 부족과 정부의 지원이 없기 때문에 학교가 정기적으로 열리지 않는다.

전쟁은 인간에게 큰 상실이지만, 재정적으로·정치적으로·군사적으로 강력한 사람들에게는 얻어지는 것이 있다. 세계의 자원에는 분명 아동을 위해 쓰여질 것이 있는 것인데, 그 자원이 이윤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넘겨져서 무기를 만들고, 군사 지도자를 살찌우는 반면에, 아이들은 굶주리고 있으며 배우고 놀고 평화로운 환경에서 자라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은 단순히 읽고 쓰는 것을 배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교육은 마음을 치유하는 마음의 양식이다. 쓰고, 그리고, 노래하는 활동과 뛰어 노는 활동은 아이들이 경험한 전쟁에서 비롯된 긴장을 이해하고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자 방출구이다.  그러나 무력분쟁지역에서의 인도주의적 원조는 이런 교육 활동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학교에서의 수업이 전쟁 지도자들의 승리를 부각시키는 역사인식을 통해 폭력을 오히려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다.

어린 영혼들이 피와 총탄의 악순환에 끌려 들어가기 때문에 그 아이들과 함께 놀아야할 야생 나비들은 홀로 배회하고 있다.

지금까지 보여준 글들은 Ler Per Her 마을 아이들의 것이다. 약 120여명의 아이들이 거기서 학교에 다니는데, 18세에서 27세사이의 젊은 선생님들이 많은 고아들의 '사실상' 아버지, 어머니가 되었다. 여기서 교육은 아이들을 즐겁게 하고, 강하게 하고, 자유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아침에 선생님이 '사회 수학(social math)' 수업을 시작하셨다.
모래 한 더미에 다른 모래 한 더미를 더하면 얼마가 돼지? 둘이요.
맞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요. 만약에 두 더미의 모래가 하나로 섞여지면 어떨까요? 마치 우리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예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난민 어린이 글 3

Name  
   류은숙  (2004-11-11 12:12:02, Hit : 837, Vote : 85)
Subject  
   난민 어린이 글 3
Saw Mu(13살, 3학년)

우리 학교는 버마 쪽 Moei 강둑에 있다. 나는 학생이다. 매일 나는 빨간색으로 된 카렌족 전통 셔츠를 입고 학교에 걸어간다.

때때로, 나는 학교 근처에 서서 타이 쪽을 바라본다. 타이 쪽에 있는 학교는 근사하게 서있다. 아름답다. 거기 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있다. 때때로 나도 그 학교에 가고 싶다.

우리 학교건물은 대나무로 만들어졌고, 지붕은 마른 잎으로 돼있다. 땅바닥 말고는 우리가 공부하는데 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때때로 버마 군인들을 피해 숨어야 하고, 그럴 때는 학교 대신에 나무 밑에서 공부한다.

나는 이따금 이런 일 때문에 부모님에게 불평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작고 볼품 없는 학교지만, 좋은 선생님이 계시고 좋은 교육을 받고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서 학교를 졸업하겠다고. 언젠가 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의사가 되고 싶다.

*************************************************************************
버마독재정권과 다양한 소수민족 무장세력간의 전쟁으로 국경주변의 상당수 어린이가 납치되고, 다치고, 강간당하고, 살해당하고, 장애인이 됐다. 많은 어린이가 가난하고 참혹한 생활형편에 내몰려 군인이 되거나, 짐꾼, 하인이 되거나 정부와 반군을 위한 스파이가 된다. 추정하기로는, 버마군대에는 18세미만의 아동군인이 5만에서 8만명 가량 있다. 소수민족 무장세력 쪽에는 얼마가 있는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Shan족, Karen족, Karenni족, Mon족이 사는 지역에 있는 피난민에 대한 조사에서 15세미만의 어린이나 피난민의 40%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타이에 있는 Karen 난민캠프에서는 12세미만의 어린이나 십만명 인구중의 38%를 차지하고, Karenni 난민 캠프에서는 14세미만 어린이가 약 8천명으로 인구의 36%이다.

무력분쟁속에서 어린이들은 온갖 형태의 폭력을 경험한다. 이 어린이들은 더 이상 숲 속에서 나비들과 놀 수 없고, 죽거나 장애인이 된 부모를 대신하여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 그 결과 인신매매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인권침해의 피해자가 된다. 인신매매는 이 이 어린이들을 치앙마이, 방콕, 그리고 기타의 "문명화된" 도시의 어두운 뒷골목으로 데려간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난민 어린이글 2

류은숙  (2004-11-11 11:46:34, Hit : 679, Vote : 70)
Subject  
   난민어린이 글2
Naw Mu Jae (11살, 1학년)

나는 여기서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 고향은 평화롭지 않았다. 우리 마을은 불태워졌고 우리는 쫓겨났다. 그래서 여기 와있다. 내가 여기 왔을 때, 사람들이 쌀과 소금과 어묵과 옷을 가져다줬다. 나는 너무 좋았다.

여기 있으면서 나는 아주 행복하지만, 가끔은 아주 비참하기도 하다. 우리 학교와 마을은 연거푸 불태워 무너졌다. 나는 너무 무서웠고 정글에 숨었다. 나무 아래 땅바닥에서 모기와 벌레들에게 물리면서 자야했다. 공포와 걱정이 내 인생의 친구가 됐다.

이제 나는 학생이다. 아침에, 나는 학교친구들과 놀러간다. 학교가 문닫으면, 전혀 재밌는 일이 없을 거다. 집에만 있어야 하고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 나는 학교에 가고 싶다. 선생님은 친절하시고 나를 사랑해주신다. 나도 언젠가는 선생님이 돼서 우리 선생님이 아이들을 교육하는 일을 돕고 싶다.




**********************************************************************
힘센 사람들이 일으킨 전쟁에서 죽거나 다친 사람들의 90%는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이고, 이들 중 절반이 세계의 어린이다. 요즘에도, 적어도 50개 나라에서 어린이들이 어른들의 무력 분쟁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지난 10년동안, 세계적으로 적어도 6백만명의 어린이가 전쟁으로 인해 장애인이 됐고, 2백만명이 죽었고, 백만명이 넘는 어린이가 가족과 이별하거나 고아가 됐다.

매년, 8천명에서 1만명의 어린이가 대인지뢰에 희생되고 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3십만 명의 아동군인과, 1천3백만 명의 국내유민인 어린이와 1천만명의 난민 어린이가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난민 어린이글 1


Name  
   류은숙  (2004-11-09 20:07:56, Hit : 741, Vote : 72)
Subject  
   난민 어린이 글 1
*다음 글은 '국경 없는 친구들'이 발간하는 잡지에 실린 난민 어린이의 글입니다.

Saw Tu Lu, 14살, 3학년

나는 Ker Lee HLu Kee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농부였다. 내겐 누나 한명과 형 세명이 있다. 나는 막내다.

내가 어렸을 때, 버마 군부가 강제로 마을사람들을 짐꾼으로 데려갔다. 내 아버지는 너무 나이가 많으셔서 무거운 것을 감당할 수 없었고, 그래서 매를 맞으셨다. 아버지와 다른 마을 사람들은 도망치고 싶었지만, 고향과 땅을 떠날 수 없으셨다. 그때 우리는 견뎌야만 했다. 하지만 결국 버마 군인들은 우리에게 고향을 떠나도록 떠밀었다.

우리는 Swe Koh 마을로 도망쳤다. 그 마을에는 학교와 병원이 있었다. 나는 거기서 학교에 다녔다. 그후 얼마되지 않아, 아버지는 병이 드셨고 결국 우리를 남겨둔 채 돌아가셨다. 가끔씩 버마 군인들과 DKBA(Democratic Karen Buddhist Army)가 와서 우리 마을을 또다시 부쉈다. 우리는 Moei 강을 건너서 타이로 도망쳤다. 거기에는 타이 군인들이 있었고, 그 군인들은 우리를 Bae Gloh 난민 캠프로 데려갈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무서워서 그들의 자동차를 타지 않으려 했다. 어머니는 난민 캠프에서 사는 것을 무서워하셨다. 많은 마을 사람들도 그랬다. 그래서 우리는 강을 다시 되돌아 건너가기로 했고, 해방구에 있는 Ler Per Her 마을에 모였다.

Ler Per Her 마을에서는 학교와 병원을 다시 갖게돼서 행복했다. 하지만 평화로운 시간은 너무 짧았다. 군인들이 쫓아왔고 우릴 공격했다. 또 한번 나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타이로 도망쳤다. 군인들이 가버리고 나서 우리는 돌아갔다. 하지만 거기서 나는 우리 집과 학교를 다시 볼 수 없었다. 그들이 모두 불태워버렸다.

우리는 남쪽으로 좀더 내려갔다. 나는 마을 사람들이 집과 학교와 병원을 다시 세울 때까지 나무 아래서 공부해야 했다. 우리는 그곳을 New Ler Per Her 라고 불렀다. 형들과 누나는 결혼해서 나갔다. 그래서 집에는 어머니와 나만 남았다. 어머니는 아주 나이가 많으셔서 나는 어머니가 음식 구하는 일을 도와야 했다.

어느날 나는 친구들과 함께 새와 쥐를 잡으러 갔다. 어둑해질 때,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내 친구들이 앞장섰고 나는 뒤따랐는데 나는 지뢰를 밟았다. 친구들이 마을로 달려가 도움을 청했다. 마을 사람들은 타이에 있는 병원으로 나를 보냈다. 내가 회복되자 학교에 다시 보냈다. 하지만 내 다리는 더 이상 똑같지 않았다.

모든 선생님들이 나를 도와주신다. 난 더 이상 부끄럽거나 나 자신을 초라하게 느끼지 않는다. 매일 밤, 숙제를 하고 나서 잠자기 전에, 나는 기도한다. 우리를 모든 해악에서 보호해달라고, 공포로부터 자유롭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나처럼 피난 다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숑 들어왔습니다

View Articles

Name  
     (2004-11-09 18:35:25, Hit : 396, Vote : 68)
Subject  
   숑 들어왔습니다.
반갑습니다~~

사람들 많이 들어왔으면 좋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첫번째 후원과 송금내역

   류은숙  (2004-11-09 14:06:17, Hit : 635, Vote : 52)
Subject  
   첫번째 후원과 송금내역
이 모임이 만들어지기 전에 미리 후원금을 내주신 분이 계셔서 모임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1차 송금(400달러-456,708원, 잔액 43,292원)을 했습니다.

'국경없는 친구들'에서는 내 뜻대로 관둘 수 있는 일이 아님을 깨달았고, 무슨일이 있어도 활동을 계속하겠다며 정말로 고맙다는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답변과 함께 보내온 상황관련기사는 곧 번역하여 올리겠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펌> 버마 사태 고조…스님들, 마침내 시위 대열 가담

버마 사태 고조... 스님들, 마침내 시위대열 가담

<긴급기고> 군사 쿠데타 19주년... 총파업 잇따를 듯

 

지난 8월 이후 한 달째 계속되고 있는 버마의 시위 사태가 중대한 전기를 맞고 있다. (1989년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버마의 국호가 '미얀마'로 바뀌었으나, 민주세력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버마'로 부르고 있다. 편집자) 18일 버마 스님들의 전국적 총파업이 시작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번 총파업은 스님들은 물론 민주화운동가들, 학생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하는 전국적인 거리 시위로 이어질 전망이다.
  
  그간 버마에서 벌어진 시위는 연료값 폭등으로 인해 생활고에 시달리던 일반 시민 중심의 시위였고, 거기에 민주화운동가들이 시위에 동참하면서 고문 중단, 정치범 석방 등의 요구가 곁들여지는 정도에 그쳤었다. 그러나 지난 5일 이후 상황은 완전히 변했다. 바로 스님들이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 8888 항쟁 당시 버마 승려들의 시위 모습 ⓒ버마 정치범 지원모임(appb.org)

  처음에는 일반 시민들의 시위에 몇몇 스님들이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정도였지만, 5일 파콕꾸(Pakkhoku)시에서는 500여 명의 스님들이 집단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군인들은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허공에 총격을 가했는데, 이날 발포는 1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10명 이상의 스님들이 군인들에 의해 연행됐는데, 2000명 이상의 일반 시민들이 석방을 요구하는 항의 시위를 벌이자 3명의 스님들이 그날 저녁 석방됐다. 석방된 3명의 스님들 중 한 사람은 DVB(Democratic Voice of Burma, 버마 민주화의 소리) 라디오 방송국과의 인터뷰를 통해 "전봇대에 묶여서 개머리판으로 두들겨 맞은 후 연행된 스님도 있었다"고 밝혔다.
  
  전국승려회연합은 9일 나흘 전의 사건에 대해 군부의 공식적인 사과, 경제 문제 해결, 체포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전국승려회연합은 17일까지 이에 대한 답이 없으면 18일에 전국 승려들의 총파업이 있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현재 민주화운동을 지도하고 있는 태이 쫴(Htay Kywe) 또한 "모든 스님들은 총파업에 동참해 달라. 우리 시민들도 스님들을 따르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승려들의 총파업은 무엇을 의미하나
  
  과거 독재정권 시절 대한민국에서 교수나 지식인들이 그랬듯이, 불교 국가인 버마에서 스님들은 특별히 존경받는 존재다. 버마에서는 '경배해야 하는 다섯 가지 존재'가 있다. 부처님, 부처님의 말, 스님, 선생님, 부모님이 존재들이다. 여기서 스님들은 부처님의 아들이라고 불린다. 그러므로 스님들의 말은 절대적이다. 그래서 군부도 지난 5일 체포된 스님들에게 승복 대신 일반인들의 옷으로 갈아입히고 감옥에 넣었다. 스님들을 체포한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버마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에는 언제나 스님들이 있었다. 대영 독립투쟁과 항일 운동, 그리고 8888 민중항쟁(1988년 8월 8일 버마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를 군사정권이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 당시 최소 200여 명이 사망했다)에서 늘 스님들이 선봉에 서왔다. 시민들이 시주해준 양식으로 식사를 하는 스님들은 "나의 코는 시민들의 것"이라고 말한다. 숨 쉴 수 있는 것도 시민들 덕분이라는 뜻이다.
  
▲ 8888 항쟁 당시 버마 승려들의 시위 모습 ⓒ버마 정치범 지원모임(appb.org)

  지난 1990년에도 스님들의 파업이 있었다. 8888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1988년 3월 사건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행사가 90년 3월 13일 버마의 두 번째 수도 만드레(Mandalay)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군인들은 총을 난사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시민들과 승려들이 희생당했다. 이에 공개적인 사과를 요구하며 스님들은 총파업을 했다. 당시 군부 지도자인 서마웅(Saw Maung)은 이를 아무렇지 않게 여겼지만, 스님들의 총파업으로 인해 군부의 이미지는 더 나빠지게 되었다.
  
  군부가 버마 시민들을 통치하는 방식은 총과 불교 두 가지다. 버마 신문의 1면에는 절에 기원을 하거나 시주를 하는 군인들 사진이 매일같이 실려 있다. 시민들은 군인들이 싸움을 자주해서 싫지만 좋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니 헛갈리게 된다.
  
  그러나 승려들의 파업이 있자 시민들은 군인들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게 되었고, 군인들도 불교를 통해 시민들을 통치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서마웅은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 하나는 큰스님한테 가서 나라의 평화를 위해 파업을 끝내도록 도와주시라고 부탁하는 방법이었다. 파업 사건에 대해 잘 모르는 큰스님은 젊은 스님들에게 파업을 끝내도록 부탁했다. 하지만 군부는 뒤돌아 서서는 승려들을 체포하고 폭력을 가하는 등 평화와는 거리가 먼 방식으로 시위를 진압했었다.
  
▲ 최근 시위 사태에서 승려들이 당한 고문을 형상화한 그림 ⓒ버마 인터넷 신문 irrawaddy.org

  그러나 17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90년 3월에는 큰스님들이 상황을 잘 몰라 총파업이 실패했지만, 현재는 큰스님들이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다. DVB 등 현지 방송들이 전하는 소식에 따르면 큰 스님들도 "이런 상황이라면 총파업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버마 군부는 깡패들을 고용해 시위대를 저지하고 있다. 깡패들은 시민들을 대나무로 폭행하고, 여성들의 옷을 벗기고, 경찰 대신 시위자를 체포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른다. 뒤에서 경찰과 군인이 보호해주고 있기 때문에 마음껏 난동을 부리는 것이다. 일반 시민들은 군인과 경찰이 앞장서지 않고 깡패들만 나서는 상황이 혼란스러워 시위에 많이 참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통상적인 반정부 시위에 400~500명의 시민들이 참여하는데 비해 스님들의 체포에 대한 항의로 벌어진 지난 5일의 시위에 2000명 이상이 모인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스님들이 시위에 참여하는 것을 보면서 일반 시민들도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게 된 것이다.
  
  18일은 버마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지 19년이 되는 날이다. 스님들의 총파업에 맞춰 민주화운동가들도 시위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다. 군부는 총파업을 강력하게 탄압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그 와중에 스님들이 체포되거나 폭력을 당하는 보게 된다면 그동안 구경만 하고 있었던 일반 시민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지난 5일의 시위는 그 가능성을 보여줬다. 군부가 평화적으로 협상하지 않으면 '8888 민주항쟁'이 재현될지도 모른다.
  
▲ 마웅저 씨 ⓒ프레시안

  * 필자 마웅저(Maung Zaw) 씨는 버마 8888 항쟁 당시 고등학생으로 시위에 참가한 후 버마 민주화운동에 투신해왔다. 1994년 군부의 탄압을 피해 버마를 탈출, 한국에 왔고 2000년 이후 현재까지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 위한 소송을 진행중이다. 버마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 결성에 참여했고, 현재는 한국 시민운동에 관심을 갖고 시민단체 '함께하는 시민행동'에서 인턴으로 활동 중이다. 블로그 <마웅저와 함께(http://withzaw.net)를 운영중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