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은 연구그룹 ‘붉은 루어 대학’(Rote Ruhr Uni)에서 활동중인 잉오 엘베의 글을, 자기이해를 목적으로 우리말로 옮겨 본 것이다. (이동금지, 수시수정) 세부 단락구별은 역자가 한 것이며, 저자의 강조는 여기에 표시되지 않았다.
원문은 아래에서 볼 수 있다. http://www.rote-ruhr-uni.com/cms/Holloways-Open-Marxism.html
(이 글의 요약본은 Z. Zeitschrift Marxistische Erneuerung 67 / 2006에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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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오 엘베
(Ingo Elbe,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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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러웨이의 “오픈 맑시즘” : 행위이론으로서의 형태분석과 혁명낭만주의에 대한 논평
(Holloways ‘Open Marxism’ : Bemerkungen zu Formanalyse als Handlungstheorie und Revolutionsromantik
- Übersetzung vom Deutschen ins Koreanis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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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cheiskra at 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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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내에서 가장 차별화된 접근들은, 그들이 사회적인 것의 형태이론과 물신이론의 혁명이론적 결과들을 ‘비관주의’, ‘구조주의’, ‘신비주의’, ‘기능주의’ 혹은 ‘경제주의’로 비판함으로써, “혁명의 결정적 불가능성의 딜레마”[본문 주1]를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그 때 그 때의 상이한 강도에서 그리고 상이한 정신사적 전통들로부터 ‘구조’에 대항한 ‘실천’, ‘통합’에 대항한 ‘투쟁’, ‘동일성’에 대항한 ‘모순’, ‘경제적인 것’에 대항한 ‘상징적인 것’, ‘체제적 한계’에 대항한 ‘정세적 밀도’가 호소되었다. 그와 동시에 그 스펙트럼은 고전적 오페라이스모(이탈리아 노동자주의)로부터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와 샹탈 무페(Chantal Mouffe)의 ‘포스트맑스주의’에까지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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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련의 새로운 맑스-독해[본문 주2]에서 또한 그러한 경향들은 정교화된 형태로 인식가능하다. 즉 무엇보다 워너 본펠드(Werner Bonefeld)와 존 홀러웨이(John Holloway)에 의해 대표되는 ‘오픈 맑시즘’에서도 그렇다. ‘오픈’ 맑시즘은 또한 여기서, 정치경제학비판의 저 허위의(vermeintlich) 폐쇄적 독해방식과 구별되어, ‘실천’, ‘투쟁’, ‘모순’ 개념들에 대한 형태이론적 범주들의 열림을 가리킨다.[본문 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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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에 물신개념은 무엇보다 비판적 사회이론의 중심적 기둥으로 간주된다. (오픈 맑시즘에 의하면) 물신개념은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이론들 혹은 헤게모니이론들로서 “부르주아 사회의 안정성에 대한” 본질적으로 더 비판적이고(anspruchsvoller) 더 타당한 “설명”을 제공한다.[본문 주4] 그리고 물신개념은 “각 혁명이론이 그 앞으로 제기되는 것처럼 보이는 중심적인 이론적 문제들”[본문 주5]로 입증된다고 한다. 신비화 개념과 결별하고 물신문제를 이데올로기적인 것의 단순한 조작이론에 대한 의지를 통해 회피하려고 시도하는 접근들과 반대로,[본문 주6] 홀러웨이는 또한 그의 혁명이론적 결론에서 “견딜 수 없는 곳까지 몰린”[본문 주7] 물신주의 개념 내에서, 혁명이론적 궁지로부터의 탈출의 가능성들을 발견할 요구를 공식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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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그램은 새로운 맑스-독해의 재구성에 대한 그의 견해를 흥미롭게 한다. (오픈 맑시즘에 의하면) ‘도구적’ 권력관계들[본문 주8]로부터의 해방의 사상을 포기하는 미시정치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관념은,[본문 주9]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와 (반동적) 부르주아지의 외재적(exterritorial: 치외법권적) 관계에 의거하고 혁명과정을 단순한 조직문제로 환원하는 노동운동맑스주의적(arbeiterbewegungsmarxistisch) 접근과 마찬가지로 거부된다.[본문 주10] 물론 홀러웨이는 비판적 이론이 “고정된 물신주의”[본문 주11] 모델을 포기하는 것에서만 탈출구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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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맑시즘에 의하면) 이러한 접근(고정적 물신주의 - 역자)은 (계급)투쟁을 통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본래적 구성을 승인하긴 하지만, 이 생산양식의 형태들과 그 결과로서 그것들의 자기신비화들을, 완료되고 종결된 사실들로, 사회적 관계들의 안정적 형태들로 이해한다. 즉 “가치는 다만 이행기에서의 투쟁에 관련해서만 ‘투쟁’으로 이해된다.”[본문 주12] 따라서 물신주의 개념의 형태이론적 의미는 부차적인 것으로 거부된다. (고정적 물신주의 때문에 - 역자) 즉 사회적인 것의 역사적으로-특수한 실천형태와 존재방식으로서 해독되는 것은, (행위자들의 행위[Handeln]가 그 속으로 부어지는) 고정된 구조들과 외적 형태들의 모습(Gestalt)으로의 사물화된 변형에 패배한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물신주의의 물신화”[본문 주13]에 따라서 구조로 존재하고, 구조화를 통해 완성된 것(Gemachtes)으로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견해로부터(aus dem Blick) 말이다. 그 때문에 계급관계 또한 자본에 뒤따라오고, 계급투쟁은 자본의 단순한 재생산계기로, 파생된 크기이자 내재적 모순으로 개념화된다. 맑스에 의해 물신주의비판적으로 의도된, 자립적 주체로서의 자본이라는 말은, “활동적이고(tätig) 스스로 구성하는 사물”[본문 주14]로서의 가치에 대한 관념으로의 그러한 신비화에 패배한다. 그리고 그것은 맑스주의를, - 정치경제학의 ‘완료된 현상의 관점’과 유사하게 - 단지 “선험적 크기”(transzendentale Größe)[본문 주15]로서 전제되고 구성된 형태들의 관계만을 연구하고자하는 과학주의적(szientistisch) 객관주의로 환원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오픈 맑시즘에 의하면) “구성화와 존재의 분리”[본문 주16]는 단지 자본주의적 형태관계의 시간적(자본주의의 시작 혹은 끝), 공간적(자본주의화되지 않은 영역, 제국주의적 사슬의 가장 약한 고리), 사회적 변두리들(배제자들[Marginalisierte])에서만 불안정을 이룰 수 있다. 그 분리는 “반(反)물신주의”[본문 주17]를, (신비화된 일상의 대상에 외적인 특권화된 비판가들에 의해 대표되고, 따라서 거짓이 아닌 의식의 담지자의 교육주의적인[edukationistisch] ‘레닌주의적 문제’의 귀환을 평범한 대중의 일상적 실천으로 불러내는) 비상한 현상으로 이해한다.[본문 주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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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해 “과정-으로서의-물신화”[본문 주19] 접근은 형태이론의 시종일관적인(konsequent) 끝까지의-사고(Zu-Ende-Denken)를 요구한다. 즉 이 접근은 전제된 구조들의 기능들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부형태와 강제형태를 특수한 사회적 관계들로 해독하고, 그것들(사회적 관계들)의 영구적 구성 혹은 특수성(Besonderung)을 사회적 적대들로부터 재구성한다.[본문 주20] 형태들이 다만 행위자의 행위를 통해서만 재생산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이러한 지시에, - 그 때에 정확히 물신이론은, 재생산이 모든 우연성에서도 안정된 완전한 새로운 생산과 혼동될 수 없다는 것을 지시한다. - 홀러웨이는 형태관계의 파열의 지속적 가능성에 대한 인식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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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서 이제 맑스의 형태이론의 혁명이론적 열림에 대한 사취(詐取)가 시작한다. 즉 홀러웨이는 (인간들이 그들의 노동의 사회화의 특정한 질문되지 않은 조건들 하에서 상품들로서의 사물들(Sachen)에 관련되고[본문 주21], 그 때문에 형태이론이 이런 자립화된 사회적 관계의 폐지의 가능성 또한 나타내는 한에서) 상품-화폐-관계가 사물들(Sachen)의 사회적 관계로 존재한다는 것에 당연히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추상적 가능성으로부터 직접적 현존(Anwesenheit)을 만든다.”[본문 주22] 즉 고유의 변증법에 의하여, 인간들의 자본 아래로의 포섭으로부터 “우리의 반란의 자본에 대항한 끊임없는 부정”[본문 주23]과 그래서 반(反)물신주의의 존재가 도출된다. 즉 “편재하는 권력(Macht)은 편재하는 모순을 의미한다.”[본문 주24] 이와 같이 변화된 전제들로부터 희망에 찬 결론들을 끌어내기 위해, 경제학비판의 특수한 범주들의 의미가 결코 눈에 띄게 변화되지는 않는다. 인간의 실천에 의한 사회적 형태들의 지속적인 재구성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가치, 화폐, 자본, 국가 형태들이 투쟁의 형태들이라고 결론 내려진다.[본문 주25] 그 때에 고전적 오페라이스모에서처럼, 노동력의 가치가 역사적-도덕적 요소를 포함한다는[본문 주26] 통찰은 (가치를 정말로 더 이상 사적으로 분리된 노동의 사회적 통일원리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 “격동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장[...]”[본문 주27]로 결정하기 위해) 이용된다. 자본이 한 때 특히 표준노동일의 쟁취를 통해 상대적 잉여가치생산의 형태로 강제되었다면, (갑작스런) 자본주의적 생산력들과 생산과정들의 전체발전은 노동력의 ‘저항’에 대한 자본의 반작용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이 노동력의 저항은 “모든 자본주의적 역동성의 자연적 중심부(Sitz)”[본문 주28]가 된다. 그리고 초과이윤을 위한 자본주의 내적인 경쟁의 의미는 차차 사라진다.[본문 주29] 그러나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형태들이 투쟁의 관점을 위해 개방되는 것이 아니다. 투쟁의 관점은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형태들에 다만 종속된다. 홀러웨이는 국가의 예를 사용해 이러한 작업(Operation)을 수행한다. 즉 그러니까 국가는 체제를 안정화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적대들과 갈등들을 조절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경제의 이러한 자기파괴적 잠재성은 - 사적소유자의 대립적 이해들을 통한 상품교환의 획득법칙에 대한 타격으로의 자발적인 경향과, 개별자본의 경쟁야기적 조치들을 통한 총자본의 물질적 존재조건들의 침식경향 - 그러한 언급된 것이 아니라, (국가적 조치들에 의해 통합되고 지배될[kanalisieren] 수 있는) “인간들의 반란의 발발들”[본문 주30]을 통해 당장 대리된다. 이미 국가는 체제를 초월하는 갈등들에 대항한 반작용형태로 변형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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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한(abenteuerlich) 해석학적 책략은 구성에서 투쟁으로 그리고 투쟁에서 반란으로 이동한다. 즉 가치가 실천형태라면, (이 실천형태는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고, 이런 투쟁은 다시 지속적인 문제제기[본문 주31]의 표현이고 갈등의 한 편으로부터의 이 형태의 중지[Zur-Disposition-Stellen][본문 주32]의 표현이다.) 형태이론과 물신이론에 대한 혁명이론적 추방은 깨진다. 따라서 물론 형태이론과 물신이론 자체가 또한 깨진다. 즉 오페라이스모에게서처럼 홀러웨이에게, 이미 모든 그러한 평범한 절도, 모든 게으름, 모든 노동유예, 국가권력에 대항한 모든 폭력적인 반란은 비난할 점이 없고 인간적인 원리의 ‘저항의 무의식적 표현’[본문 주33]으로, 그리고 “존재의 셀 수 없는 차가운 원자들”로의 그것(행위)의 파편화에 대항한 “행위(Tun)의 따듯한 서로의-엮임”[본문 주34]의 ‘저항의 무의식적인 표현’으로 간주된다. 어떤 방식으로 분업적 생산의 사회화강제가 조직되는지를 묻는 맑스의 형태이론은 (어떻게 소외되지 않은 인간성[Humanum], “행위의 사회성 [...] 그리고 그와 동시에 또한 상호적 인정과 사회적 승인의 과정”이 “산산 조각나고”[본문 주35], 어떻게 그 인간성의 “재결합”[본문 주36]이 달성될 수 있을지를 묻는) 규범주의적(normativistisch) 소외이론으로 전환된다. 서구 맑스주의[본문 주37]에서처럼 여기에서 인간의 생산의 사회적 성격은, 자연주의적인 잘못된 결론을 거쳐, 규범적으로 뛰어난 공통성(Gemeinschaftlichkeit)의 토대가 된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능력에 대한 단순한 사실은 창조적 힘(Macht)으로 찬양된다. 그리고 (원자폭탄 또한 의미할 수 있는) 유용한 대상성에 대한 범주로서 사용가치는 간단히 전복적 원리로 과장된다(überhöhen).[본문 주38] 홀러웨이의 이분법은 다음과 같이 잘 알려진 것처럼 단순하다. 즉 이쪽에는, 창조적 힘(Macht), 공통성, 인정, 자기결정, 사용가치, 비동일적인 것, 행위. - 저쪽에는, 도구적 권력(Macht), 고립, 억압, 낯선 결정(소외된 결정), 가치, 동일성, 생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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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해방에서 그 자체 무의식적인 노동의 역사철학적 토포스(진부한 표현), 즉 (만약 인간이 단지 정확히 충분히 살핀다면, 인간은 체제에 대항한 ‘반란’과 ‘투쟁’의 형태들을 도처에서 인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자위는 바로 신비화들에 대한 맑스의 이론의 중심적 통찰들을 무시한다. 즉 사회적 부에 대한 몫을 위해 투쟁된다는 것, 가치관계의 지배(Regeln)가 상처 입는다는 것, 사용가치가 가치에서 결코 싹틀 수 없다는 것은 맑스의 이론에 의해 논쟁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히려 맑스의 이론에, 이런 투쟁들과 갈등들이 어떻게 절합되는지(artikulieren)에 대한 질문이 중요하다. 그리고 여기서 자본주의적 일상실천의 신비화들이 욕구들, 불평등들, 갈등들에 대한 체제순종적 해석의 자연발생적(spontan) 사고형태들을 제공한다는 것이 확언될 수 있고,[본문 주39] 투쟁들의 목적들이 그것을 통해 본질적으로 결정되고 이런 목적들이 비판적 이론에 의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확언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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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욕망(Wunsch)이 사고의 아버지라면, 바로 그 사고가 발생한다. 그래서 홀러웨이는 일상실천과 비판의 단순한 연속성을 주장할 수 있다. 그것으로써 반체제적 의식의 형성과 계몽의 문제가 이미 어느 정도로 해결된다. 즉 비판이 항상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 “비판은 세계의 삶이다.”[본문 주40] - 비판의 이론적 모습(Gestalt)은 “인간적 토대 위에서의 사회적 관계들의 창조를 위한 일상적 투쟁의”[본문 주41] 입장의 단순한 체계화와 공식화로 이해될 수 있다. (홀러웨이가 맑스에 의해 분석된 “일상의 종교”[본문 주42]에 대한 도외시아래, 그것[일상적 투쟁]을 맨 먼저 행위자의 실제적 투쟁들과 목적들에 반[反]사실적으로 종속시켜야만 하는) 이러한 의심스러운 “일상적 투쟁”은 안타깝게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과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에 대한 불분명한 개념적 등가물에 다름 아니다. 홀러웨이는 경제학비판의 이데올로기비판적 결론들의 회피를 통해 그것(혁명의 사상)을 사취(詐取)하고, 그것을 결국 또한 스스로 인지하는 것처럼 보여서, “자기해방으로서의 혁명”[본문 주43]의 사상 또한 교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안이 없을 것이다. 반(反)물신주의의 허위의(vermeintlich) 존재에 대한 그의 상론에 따라 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 즉 “우리가 다른 한편으로 물신주의를 완전히 서서히 소실시키면, 주체가 다시 주인공이 된다.”[본문 주44] 이것은 아쉽게도 또한, 경제학비판의 정점에서 긍정적 혁명이론을 위한 그 자신의 노력들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읽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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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 개념과 물신주의 개념 자체는 오픈 맑시즘에서 이미 불분명하게 공식화된다. 본펠드뿐만 아니라 홀러웨이 역시 사회분석에서의 구조우위에 대항하기 위해, “빠리 수고”의 “사적소유(Besitz)는 소외된 노동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본문 주45]라는 맑스의 공식화를 언급한다. 그러나 여기서 맑스에게 아직 자본의 재생산과정에서 구조와 행위(Handlung)의 관계는 아직 익숙하지 않다. 또한 맑스의 초기저작에서의 이 부분에 관련되는, Thomas Meyer와 같은 해석가들은 최소한 이 문제를 보지만, 그것을 관념적으로 해결(및 전이[轉移])하려고 시도한다. 즉 그러므로 처음부터 사회적 소외의 원인일 것인 노동자들의 ‘판단력 착란’(Verstandesverwirrung)이 존재한다는 것이다.[본문 주46] 워너 본펠드는 이 길을 선택하지 않긴 하나, 그는 계급투쟁이 시초축적을 거쳐 (그것에 이어서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어야만 하는”[본문 주47]) 자본주의적 형태들의 발생을 근거 짓는다고 소박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투쟁들에 대해 여기서 특히 말하는가가 질문될 수 있다. 자본주의적 형태들을 발생시키는 ‘자본주의 계급들의 투쟁’이 의미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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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해 맑스는 (사회화조건으로서의 ‘다른 생산양식으로부터 폭력적으로 창조된 생산수단들로부터의 직접적 생산자들의 분리’에서, 계급들로 근거지어진)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투쟁은 노동력 상품과 자본 사이의 교환에서 권리적 박빙의 상황(rechtliche Pattsituation)에 기인한다는 것을 분명히 표명한다.[본문 주48] 사람들은 자신 있게 이것을, (거기에서 사람들이 “계급갈등을, 노동자들과 자본가들 사이의 관계들이 상품교환을 통해 매개된다는 사실에 논리적으로 [...] 근거 짓는 [...]”[본문 주49]) 계급투쟁의 도출(Ableitung)이라고 말해도 좋다. 요약해서: 구조 개념으로서의 계급관계(생산수단소유자 vs. 비소유자)는 보편화된 상품형태의 가능성을 근거 짓는다. (이것은 예를 들어 위기-관점[Krisis-Postion]에 대항해 이의 제기될 수 있다.) 구조에 의해 결정된(strukturdetermimiert) 행위 개념으로서의 계급투쟁은 생산관계들의 이러한 상품형태성(förmigkeit)으로부터 결과한다. (그것은 계급투쟁의 실천우위에 대한 순진한(undifferenziert) 테제[본문 주50]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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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맑시즘의 행위이론적 오만은 경제학비판에서의 구조우위의 서술전략적 의미를 무시할 뿐만이 아니다.[본문 주51] 형태들이 실제적으로 구성되긴 하지만, 첫째로 특정한 조건들 하에서 그리고 둘째로 (축복받은 전(全)인간성에서 싹트지 않는) 전제들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그 오만에서 경향적으로 시야에서 벗어날 뿐만이 아니다. 그 오만은 또한 가치에서의 사회적 관계의 실제적 자립화에 근거해, 구조우위의 이론적 강조를 인간의 낯선 결정(소외된 결정)에 대한 의사표시와 뒤섞는다.[본문 주52] 따라서 맑스의 성격가면의 범주는 도덕적으로 거부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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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신주의 개념의 의미 또한 불분명하게 남는다. (현실의) 형태와 (신비화된) 범주[본문 주53]에 대한 바로 그 고전적 혼동과 나란히, 주체와 객체의 현실의 전도가 항상 다시 물신주의와 동일시되어서, 노동자들의 사물을 통해 매개된 사회적 관계가 ‘인격적 지배의 형태가 은폐되어 있는 외관’이라는 그릇된 추측이 불러 일으켜진다.[본문 주54] 상품물신주의에 대한 그런 이해는 로버트 쿠어쯔(Robert Kurz)의 이해에 보완적으로 대립한다. 즉 쿠어쯔가 물신의 ‘역설적’ 현실성을 선언하기 위해 그리고 거리낌 없이 자립적(automatisch) 주체에 대해 말하기 위해, ‘물신’과의 ‘주체-객체-전도’의 동일성에 근거하는 반면,[본문 주55] 본펠드는 명백히 동일성 주장으로부터 생산관계들의 자립화의 환상성을 도출하려고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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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본은 둘 모두이다. 즉 자립화된 재생산역동성, 그리고 주체 없는 지배의 형태 때문에, (그리고 행위자의 의지 혹은 이해로 환원되지 않는 그러한 것으로서) 현실적인 자립적 주체; 생산관계를 통해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에 관련하지 않는 사물의 단순한 외관으로서의 자립적 주체.[본문 주56] 이 문제는 이미 『자본』의 소위 ‘물신장(章)’의 거의 이해되지 않은 구절들에 숨어있다. 거기에서 맑스는 한편으로 “인간들에게 사물들의 관계의 환상적 형태를 취하는”[본문 주57] 인간들 자신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들만이 존재한다고 강조한다. 다른 한편으로 맑스는 행위자들에게 “그들의 사적노동들의 사회적 관계들이 그 관계들이 (현실에서) 있는 그런 것(das was sie sind)으로” 나타난다고, “즉 사람들의 직접적 사회적 관계들로서가 아니라, [...] 오히려 사람들의 사물적 관계들로 그리고 사물들의 사회적 관계들로” 나타난다고 말한다.[본문 주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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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터 볼프(Dieter Wolf)는 ‘사물관계들의 사회성’, 따라서 ‘사용가치가 다른 이를 위해 생산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사물들의 교환가능성’, 따라서 ‘생산자의 사용가치 A는 다만 생산자의 사용가치 B를 획득하는 목적을 위한 수단을 나타낸다는 사실’ 역시 맑스에 따르면 상품소유자들에게 의식되어 있다고 언급한다. (볼프에 의하면) 상품소유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있는 것은 (그 속에서 상품들의 교환가능성이 근거되는) 바로 그러한 것, 즉 가치이다. ‘행위자들에게 항상 결과로 전제되는 제외된 상품’(예를 들어 금, 화폐 - 역자)의 사용가치에서의 가치의 대상적 현상형태에 근거해, 행위자들이 교환한다면, 그들은 사물들의 실질적인 사회적 관계를, 인간들의 노동의 특수한 사회화조건들 하에서의 ‘그들 사이의 사물적으로 매개된 사회적 관계’로 해독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사물들의 사회적 관계는 그들에게 그 관계가 (현실에서) 있는 그런 것(das, was es ist)으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그 관계의 무매개적 형태로, 즉 ‘환상적’ 형태로 말이다. 즉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들의 현상형태로서 그 관계[사물들의 관계]가 사회적 관계인) 사물들의 관계와 (사물들의 물질적 특성들에서 기인하는) 사물들의 사물적 관계의”[본문 주59] 차이는 그들에게 지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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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맑시즘의 여기에서 대강 고찰된 정리(定理)는 내 생각으로는, 맑스의 『자본』에서의 서술논리에 대한 다년간의 오해의 한 지류로 드러나고, 동시에 ‘경제학 비판의 형태범주에 대한 일면적인 행위이론적 해석들의 분야’를 위한 더 나아간 기여로 드러난다.[본문 주60] 또한 많은 수용자들에 의해 그렇게 소중히 여겨지는(geschätzt) 혁명이론에 대해 말한다면, 열려진(geöffnet) 맑스주의는 다만 전부터 알려진 이분법과 설명모델을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종류의 이론구성의 성공은 본질적으로 좌파의 안락문헌(Wohlfühlliteratur)에 대한 지울 수 없는 욕구를 통해 설명될 수도 있다. 여기서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이론의 본질적 목적으로 된다.”[본문 주61] 많은 좌파들이 “현재를 비판하고 비난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비판”[본문 주62]에 치우치는 한, 거기에는 또한 어떤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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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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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t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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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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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주1] Holloway 2002, S. 94.
[본문 주2] 참조. 특히 Holloway 2002에서 루빈(Rubin), 파슈카니스(Paschukanis), 형태이론, 물신이론에 대한 명백한 관련은 Holloway 2002, S. 95, 111ff.
[본문 주3] 참조. ebd., S. 108.
[본문 주4] Ebd., S. 67; 참조. 또한 S. 69.
[본문 주5] Ebd., S. 69.
[본문 주6] 참조. Meyer 1973, S. 207f.
[본문 주7] Holloway 2002, S. 70.
[본문 주8] 홀러웨이는 도구적(‘지배’) 권력(Macht)과 창조적(‘을 할 힘’) 힘(Macht)을 구별하고, 또한 지배와 (집합적) 행위능력을 구별한다.
[본문 주9] Vgl. ebd., S. 94.
[본문 주10] Vgl. ebd., S. 71, 95f.
[본문 주11] Ebd., S. 97.
[본문 주12] Ebd., S. 98.
[본문 주13] Ebd., S. 99.
[본문 주14] Bonefeld 1997, S. 63.
[본문 주15] Ebd., S. 60.
[본문 주16] Holloway 2002, S. 99.
[본문 주17] Ebd., S. 107.
[본문 주18] 참조. ebd., S. 99f., 107.
[본문 주19] Ebd., S. 107.
[본문 주20] 참조. ebd., S. 112f., 123.
[본문 주21] 참조. Heinrich 2004a, S. 73.
[본문 주22] Kettner 2005, S. 7.
[본문 주23] Holloway 2002, S. 110.
[본문 주24] Ebd., S. 96.
[본문 주25] 참조. ebd., S. 118f.
[본문 주26] 참조. MEW 23, S.
[본문 주27] Ebd., S. 110.
[본문 주28] Tronti 1974, S. 15.
[본문 주29] 참조. 또한 생산방식의 발전을 “자본과 자본 사이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에 대항해 열렬히 주장하는 Bonefeld(1997, S. 62).
[본문 주30] Holloway 2002, S. 115.
[본문 주31] 참조. ebd., S. 109.
[본문 주32] 참조. ebd., S. 121: “그 때문에 항상 형태의 존재에 관한 문제이다.”
[본문 주33] 참조. ebd., S. 109: “어린 아이가 사탕을 위해 돈이 교환에서 건네주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 없이 상점에서 사탕을 집을 때마다, 노동자들이 시장에 의해 명령된 공장폐쇄 혹은 일자리 상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때마다, [...] 우리가 우리의 자전거, 자동차 혹은 집에 접속할(anschließen) 때 마다, - 가치는 [...] 가치가 영원히 투쟁되지 않는 대상인가하는 질문을 받는다.” 또한 다음을 참조. ebd., S. 173, 216, 236. 자명종에 대한 저주에서부터 자살에 이르기까지, 녹색 머리칼에서부터 테러리즘에 이르기까지 - 모든 것은 자본에 대항한 거대한 은밀한 반란의 구성요소가 된다. 이에 대한 비판은 다음을 참조. Kettner 2005.
[본문 주34] Holloway 2002, S. 92.
[본문 주35] Ebd., S. 62(강조는 인용자).
[본문 주36] Ebd., S. 108(강조는 인용자). 또한 다음을 참조. ebd., S. 126.
[본문 주37] 참조. Fleischer 1975, S. 32, 55ff.에서는 경향적으로, 그러나 무엇보다 Kofler에게서 그렇다. 서구 맑스주의에서 인류학적 결정들이 무엇보다 단지 인간의 역사성의 형식적인 가능화조건들로 간주되긴 한다. (“인류학은 인간의 가변성의 변하지 않는 전제들에 대한 [...] 과학 [...] 으로” 간주된다.[Kofler 2000b, S. 188]) 그러나 인간의 행위(Handeln)가 본능적으로 이끌려지는 것이 아니라, 의식매개적으로 수행되고 사회적 관계들에서 수행된다는 사실은, 자주 즉자적으로(an sich)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규범적 진술들과 뒤섞인다. 특정한 행동(Verhalten)형태들에 대한 생물학적인 비(非)고정성, 근본적 사회성(Sozialität) 등은 그러면 “소외되지 않은 [...] 인간의 본원적 본질”(Kofler 2000a, S. 186)로 찬양된다.
[본문 주38] 참조. Holloway 2002, S. 58.
[본문 주39] 상세한 것으로는 다음을 참조. Sieferle 1979, S. 182-194.
[본문 주40] Holloway 2002, S. 119.
[본문 주41] Ebd.
[본문 주42] MEW 25, S. 838.
[본문 주43] Holloway 2002, S. 125.
[본문 주44] Ebd.
[본문 주45] Holloway 2002, S. 61 (FN); 또한 다음을 참조. Bonefeld 1997, S. 64, 80, 88.
[본문 주46] 참조. Meyer 1973, S. 100.
[본문 주47] Bonefeld 1997, S. 81.
[본문 주48] 참조. MEW 23, S. 249.
[본문 주49] Postone 2003, S. 479.
[본문 주50] 참조. Bonefeld 1997, S. 80, 87.
[본문 주51] 이에 대해서 다음을 참조. Neuendorff 1973, S. 124: “개인들 혹은 집단들의 행위(Handeln) [...] 에 의거하는 사회적 관련들과 관계들(Beziehungen und Verhältnisse)에 대한 분석에 맞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객관적 구성관계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전개되는 모순들에 대한 분석의 우위는, 주체들의 행위와 의식에 대한 ‘자본관계에서 고정된 추상적 가치대상성의 지배’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또한 칼 라이터에 대한 미하일 하인리시의 비판은 다음을 참조. Heinrich 2004c, S. 36.
[본문 주52] 참조. Bonefeld 1997, S. 61.
[본문 주53] 참조. ebd., S. 76f. 또한 다음을 참조. Holloway 2002, S. 63, 65: 본펠드와 홀러웨이는 대상이론적 의미에서 (곧 “비합리적이고 왜곡된 세계”[ebd., S. 63]로 번역되는) 자본주의의 ‘미친(전도된) 형태들’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맑스는 현실의 현상형태들의 자기신비화를 “미친 [...] 형태”(MEW 23, S. 90)로 가리킨다. 베르너 임호프 역시 홀러웨이에서의 소외와 물신주의의 뒤섞임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다(Imhof 2004, S. 7). ‘행위’(Tun)와 ‘행해진 것’의 범주들에 의한 맑스의 형태이론에 대한 홀러웨이의 빗나감에 관한, 임호프의 먼 길을 비추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임호프는 생산관계들의 자립화와 물신주의의 문제설정을 경시한다. 즉 그 때에 신비화는, 단순히 “그들(상품소유자들) 자신의 주관성”으로부터 귀착될 것인 생산양식의 “주관적 긍정”으로 희석된다(13). 임호프 역시, 행위자들이 어떻게 ‘그들이 지긋지긋한 사적-분리된 생산방식을 벗어나도록 하는’ 비판적 의식을 취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다.
[본문 주54] 참조. Bonefeld 1997, S. 68, 71.
[본문 주55] 참조. Kurz 1987.
[본문 주56] 참조. dazu Brentel 1989, S. 268.
[본문 주57] MEW 23, S. 86.
[본문 주58] Ebd., S. 87.
[본문 주59] Wolf 1985, S. 217 (Teil 3, Kap. 1). 또한 다음을 참조. Heinrich 2004a, S. 72.
[본문 주60] 이 접근들의 비판을 위해 특히 다음을 참조. Heinrich 2004b.
[본문 주61] Hirsch 2003, S. 7.
[본문 주62] MEW 23, S. 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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