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은 잉오 엘베의 글을 자기이해를 목적으로 우리말로 옮겨 본 것이다. (이동금지, 수시수정) 세부 단락구별은 역자가 한 것이며, 원문의 강조는 여기에 표시되지 않았다. 원문은 아래에서 볼 수 있다.

http://www.rote-ruhr-uni.com/cms/Vergesellschaftung-von-Arbei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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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오 엘베

(Ingo El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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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을 통한 노동의 사회화 : ‘Moische Postone의 맑스의 가치이론 재구성’에 대한 논평
(Vergesellschaftung von Arbeit durch Arbeit :
Bemerkungen zu Moishe Postones Rekonstruktion der Marxschen Werttheorie - Übersetzung vom Deutschen ins Koreanis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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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cheiskra at 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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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말에 독일어로 번역된 그의 책 『시간, 노동 그리고 사회적 지배』에서, 포스톤(Moishe Postone)은 자본주의적 사회화의 일반적 구조와 역학에 대한 이론의 토대로 복무할, 맑스의 경제학비판에 대한 새로운 독해 및 전통 맑스주의(traditioneller Marxismus)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전개할 것을 요구한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그런 이론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대한 특수한 징후를 자본주의 생산양식 그 자체와 동일시하고, 그에 따라서 사회적 발전의 특정한 국면을 더 이상 경제학비판적 범주들에서 이해할 수 없는 ‘고전적 오류’를 예방해야 한다. ‘국가개입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이론’이, 그리고 신자유주의적으로 지구화된 자본주의에 대해 문화주의적인 포스트구조주의가 시범을 보였던 그런 오류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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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서는 포스톤의 전체 주장이 상세하게 그대로 이해되는 것도 아니고, 그의 저작의 진가가 전체적으로 시험되지도 않을 것이다. 맑스의 가치이론에 대한 그의 재구성의 적지만 중요한 면들이 상술되고 그것의 타당성에 대해 질문될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는, 이 상론은 일면적이고 불완전하다. 즉 이 상론은 내 견해로는 문제적인 혹은 틀림  없이 불분명한, 포스톤의 서술의 특성에 포괄적으로 제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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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운동 맑스주의적인(arbeiterbewegungsmarxistisch) 포스톤-비판(Bashing)[1]의 편으로부터 미리부터 갈채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전통 맑스주의에 대한 포스톤의 수많은 비판점들(예를 들어 ‘노동의 입지점으로부터의 자본주의 비판’에 대한 그의 거부, 체제를 초월하는 역사적 주체의 짐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지우는 것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철학에 대한 그의 비판[2], 혹은 『자본』의 서술방식의 역사주의적 해석에 대한 그의 거부[3])을 공유한다는 것이 언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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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독해방식의 패러다임-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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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톤에 의하면 전통 맑스주의의 패러다임적 핵심은 (노동을 즉시 사회적 관계와 사회적 부의 원천으로 이해하고, 이와 반대로 자본주의적 사회화의 형태들을 이런 특성들에 원리적으로 외적인 분배범주들로 이해하는) 노동의 존재론, “초역사적으로 이해된 노동개념”(28)[4]이다. 그것에 따라서 특히 맑스에 의해 비판적으로 이해되고 역사특수적으로 설정된(ausgewiesen: 입증된) 범주들 - 추상노동과 자본주의적 생산과정 - 은 전통 맑스주의에 의해 탈역사화되고 긍정된다. 실제로 포스톤은 맑스의 경제학비판을 ‘정치경제학의 발전된 변종’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것에 대한 일련의 - 거의 임의로 증가시킬 수 있는 - 예들을 든다. 그 때에 그런 근본적인 노동존재론적 입장들은 다양한 지평들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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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전통 맑스주의는 가치형성적 노동 개념에 대한 스미스와 리카도의 초역사적 규정에서, 그들을 따른다. 예를 들어 모리스 돕(Maurice Dobb)은 맑스의 이론을 생산적 노동의 입지점으로부터의 비생산적 노동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한다. 리카도를 넘어선 진보는 비생산적 계급들을 결정하는 데에서의 맑스의 확장에 있다는 것이다. 돕에 따르면 다만 중립적 기반으로 이해된 가치이론에 의거해, (그것[잉여가치이론]이 이윤이 오로지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을 보임으로써, 맑스의 자본주의비판과 이론적 혁명을 특징짓는) 잉여가치이론이 존재한다. 그런 자연주의적 전통노선은 추상노동을 생리학적으로 동일한 노동 또는 “구체적 노동 일반”(konkrete Arbeit im allgemeinen)(263)으로 정의한 폴 스위지(Paul Sweezy)에 의거해 예시된다. 그에 반해 포스톤은 이미 노동의 형태이론이 맑스를 리카도로부터 근본적으로 구별한다는 것을 보인다(vgl. 98-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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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가치이론의 중립성 테제는 (가치법칙과 『자본』의 1, 2, 3장을, 전(前)자본주의적인 ‘단순 상품생산’에 대한 ‘방해되는 중요치 않은 것들(우연성)로부터 면제된’ 묘사로 이해하는) 『자본』의 서술방식에 대한 역사주의적 독해와 자주 결합된다. 이것은 한 번은 역사적 사실(엥엘스)로, 한 번은 자본주의적 전유에 대한 비판을 위해 구성된 모델(Ronald Meek, Andreas Wildt)로 이해된다. 맑스가 논리적인 내포관계로 이해하는 것(‘가치법칙의 통용[Gelten]과 자본주의적 전유’, ‘단순유통과 생산’ 등) 및 본질과 현상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가치와 가격)은, 이 경험주의적 독해틀에서 역사적으로 잇달아 일어난 것(선후관계 - 역자)으로 장치된다(vgl. 202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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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힐퍼딩(Hilferding)과 다른 이의 예에서, (구체노동들의) 사회적 관계 및 역사적 역동성을 만드는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의 역사적 특수성’이, 초역사적인 노동개념으로 가려진다는 것이 보여 질 수 있다(vgl. 104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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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결국 사용가치 지평 위에서, “직접적 인간 노동”(104)이 물질적(stofflich) 부의 보편적 원천이라는 것이 주장된다. 그에 반해 포스톤은 물질적 생산성은 “직접적 노동의 지출”(299)로부터 상대적으로(relativ) 해방될 수 있다는 것, 상승된 생산성과 노동시간량은 어떤 직접적 관계도 없다는 것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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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1: 노동의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사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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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이 개념들이 통상적으로 네오맑스주의적 논의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대한 짧은 논평을 하겠다. 즉 노동의 직접적인 사회화는, 행위자들이 강권(Gewalt), 규범들, 언어들 등에 의하여 ‘직접적인’ 지배관계 혹은 소통관계에 있기 때문에, 인간들의 노동들이 항상 이미 사회적 총노동의 부분들로 승인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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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간접적 사회화가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것처럼, 노동의 간접적 사회화는 (사회적 관계가 행위자들의 노동들을 사적으로-고립되어 지출된 노동들로 결정하고, 그런 식으로 사적생산자들로 정해진 이들이 그들의 노동들을 우선 사회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그들의 노동생산물들, 즉 특수한 사회적인 사물들로서의 상품들을 경유해(über)’ 항상 불안정한(prekär) 사회적 관계에 서로 제공하는) 그런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가 행위자들에게 미리 규제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의 그런 사적-분업적 사회화조건들에서 구성된, 노동생산물들의 가치는 사회적 종합의 자립화된 매개이다. 그리고 가치의 실체는 (노동들의 체계적 분리의 조건 하에서의 노동들의 통일의 형태인) 추상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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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노동과 가치를 간접적 사회화의 형태로 보는 비고츠키(Wygodski), 만델(Mandel) 스위지의 정의들에서(vgl. 83ff.), 포스톤은 다만 이들이 가치를 “시장을 통해 매개된 분배의 범주”(84)로 축소한다고 볼 뿐만 아니라, 그렇기에 전통 맑스주의적 가치결정이 또한 직접적 사회화의 입지점으로부터의 간접적 사회화에 대한 비판으로서 해독될 수 있다고 본다. (포스톤에 의하면) 이 관점(전통 맑스주의)에서 사회주의는 노동의 직접적인 사회적 성격을 통한 사회화의 매개적 형태들의 지양으로 이해될 수 있다(vgl.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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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제로 맑스에게서는 사적으로-고립된 노동과 직접적인 사회적 노동 사이의 대립은 상호 조건관계이자 보완관계이다(vgl. 87, 89). 전래의 독해방식이 노동이 “자본주의 사회 이외의 모든 사회들에서 직접적으로 사회적”(88)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맑스에게 노동은 자본주의에서만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차원을 가진다. 그 때문에 ‘맑스주의적’ 비판의 입지점은 (오히려) ‘맑스’의 비판의 대상이다. 즉 전통 맑스주의가 해방적 약속으로 실현하고자 한 것은, 맑스에게는 소외된 사회화의 이미 현실적인 불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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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람들이 포스톤에 의해 들어진 정의들을 더 정확히 바라본다면, 서술의 이 지평에서 그의 주장들은 정말로 타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 그렇다. 포스톤은 용어 ‘노동’에 대한 그의 무차별적 사용을 통해, 완전히 구체적인 노동과 그것의 사회적 차원을 사적인-분업적인 생산관계들에서의 구체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형태와 뒤섞고, 게다가 이 혼동을 반대입장들에 전가한다. 예를 들어 비고츠키가 “‘모든 노동이 사회적일지라도, 그러나 노동은 사적소유의 조건들 하에서 직접적인 사회적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85)고 말한다면, 여기서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구체노동은 사회적 총노동의 선험적 계기가 아니라, (구체노동이 추상적 형태를 취하고, 그것의 생산물이 결국 화폐와 교환됨으로써) 그러한 것(사회적 총노동의 계기)으로서 우선 입증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포스톤은, 비고츠키와 다른 이들이 ‘노동’이 단지 사적으로 “나타”나지만 실제적으로는 말하자면 본래 사회적이라고 주장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는 인용에 따라(zitatmäßig) 증명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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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주장하는 것은, (노동이 다만 자본주의에서 추상노동으로서 가지는) 사회적 매개의 기능을 날조하여 구체노동에 덮어씌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이에 대해 더 많은 것은 Punkt III를 보라.). 혹은 노동의 사회화의 방식에 대해 어떤 것을 표명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특정한 유용노동들이 특정한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그렇게 총노동의 부분들로, 노동의 사회적 분할의 자연적인 체계의 부분들로 입증되어”[6]야만 한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분업적 사회들에서 항상 사회적 욕구를 위해 생산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포스톤이 구체“노동은 모든 사회형태들에서 사회적 성격을”(233) 지닌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이 다른 곳에서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이 구체노동들의 사회화의 형태에 대해서 어떤 것도 표명될 수 없다. 그런고로 자본주의에 대해 맑스는 노동의 “이중적인 사회적 성격”[7]을 말한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노동이 부가적인 사회적 차원을 부여받기 때문이다.[8] 따라서 포스톤은 결과적으로 비고츠키가 구체노동의 사회성을 노동의 직접적 사회성과 혼합하고, 동시에 (노동이 다만 자본주의에서, 추상노동으로서 그러한 종합하는 특성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 같은 오해를 한다고 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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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오독 이상으로 포스톤은 다만 ‘직접적 사회화’라는 용어를, (규범들, 물리적 강권, 의식적 결정들 등에 의한) 구체노동의 “명백한” 혹은 “투명한” 사회적 매개를 통해 대체한다(vgl. 233). 그러면 직접적 혹은 매개되지 않은 사회화는 또한 “단순한 매개의 지양”(89)과 같은 것을 의미할 수 없다. 게다가 무매개성의 그런 개념 뒤에 숨어 있을 수 있는 것은, (포스톤의 이 책에서 다른 많은 것들처럼) 불분명하고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한편으로 포스톤은 사회적인 “상호의존이 [...] 항상 매개적”(89)이고, 다른 어떤 것은 생각될 수 없다고 옳게 주장한다. 다른 한편 그는 그 개념(무매개성)을 국가주의적(etatistisch)이고 공동체주의적인(kommunitaristisch) 입장들과 결합한다(vgl. 89f.). 포스톤에 의해 구성되고 거부된 모델은 다만 어떤 매개물의 지양과 관계가 있을 것인가? 그것은 ‘다만’ 대표기관들 혹은 민주적 의견형성과정 같은 제도적 매개들을 의미하는가? 혹은 완전히 (부르주아적 비판가들이 그것을 맑스에게 부당하게 무고하듯이) 자연강제들 및 심지어 대상적 매개 그 자체에 대한 극복의 모든 형태를 의미하는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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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 사회화의 입지점으로부터의 간접적 사회화에 대한 전통 맑스주의적 거부’에 관한 (내 견해로는 다른 더 타당하게 근거 지워진) 포스톤의 비판은, (결국 조직적 및 윤리적으로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대립에 이르는) 형태-특수적이지 않은 것으로 표상된 기능상의(betrieblich) 분업과 무정부적이고-자본주의적인 것으로 표상된 사회적 분업의, 거기(전통 맑스주의)에서 개봉된 ‘대립’과 관련된다(vgl. 490-532). 그에 반해 포스톤은 자본으로의 노동과정의 실질적 포섭의 과정을, 양 영역의 근본적 비(非)동일성에서의 가치차원의 ‘물질적 구체화(소재적 물질화)’로 설정(증명)한다. 따라서 생산력들과 생산관계들 사이의 관계는 “두 가지 자본차원들의 변증법”(527)으로 인식될 수 있다. 사회주의적-계획적 사회화의 구체적 선취로서 산업적 생산과정의 치외 법권(Exterritorialität)의 수용은 그래서 수상쩍은 것이 된다.[10] 그것에 따라서 초월적 모순은 단지 생산양식의 현실성과 잠재성 사이에서만 확립될 수 있다(vgl. 59). 포스톤에 따르면 맑스의 비판은 실제로-존재하는 생산력구성들(Gestaltungen)에서가 아니라 이 점에 근거한다. 맑스의 비판은 ‘긍정적-내재적’ 비판과 반대로 ‘부정적-내재적’ 비판이다. 긍정적-내재적 비판은 “존재하는 것을 어떤 또한 존재하는 것의 토대에서 비판”(110)하고, 따라서 - 공장체제의 계획적이나 집단주의(집산주의)적-전제적 성격이든지, 프롤레타리아트의 소위 보편적 계급이익 혹은 단순 유통에 대한 부르주아적 공상들이든지 -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의 계기에 고착되어 있고, 거기에서 ‘상상적으로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것으로 형태결정된 것들’로부터 다른 계기들을 부정한다. 포스톤에 의해 그런 비판은 “사회학적으로-제한되지 않은 의미”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의 실현을 의미하는 사회주의의 비전”[110]을 함의하는) ‘부르주아적 비판’으로 옳게 특징지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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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2: ‘내재적 서술’ 혹은 양가성들(Ambivalenz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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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포스톤은 맑스의 가치이론에 대한 그의 재구성의 틀에서 『자본』에서 추상노동의 사회적으로-특수한 결정과 보편역사적-생리학적 결정 사이의 대립을 인식하기는 하나, 보편역사적-생리학적 결정을 격렬히 거부한다. - 그는 루빈(Rubin)과 더불어, 추상노동이 생리학적 결정이거나 역사적으로-특수한 범주라고 (양자택일적으로 - 역자) 주장한다(vgl. 225f.). - 그러나 이 모순에 대한 그의 평가는 불분명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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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포스톤은 무엇보다 『자본』에서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이중성에 대한 “내재적 서술”(224)의 전략을 인식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에 따라서 맑스는 상품분석에서 “(사회에 특징지어진, 그리고 그가 그것[사고형태들]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적 형태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사고형태들을”(221) 제시한다. 그것을 통해 정치경제학비판의 최초의 범주들은 “이미 신비화된 형태로 나타”난다(ebd.). 예를 들어 추상노동의 출발점결정들은 초역사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에서 역사적으로 특수한 것 - 노동의 종합기능 - 이 존재론적인 것으로 -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과정으로서의 노동의 특성으로 - 표현되기 때문에(이에 대해 더 많은 것은 Abschnitt IV를 보라.), 포스톤에 따르면 “자본주의 자신의 개념들에서의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으로서 맑스의 서술은 생리학적-존재론적 결정을 서술과정에서 파괴하기 위해, 우선 생리학적-존재론적 결정을 취해야만 한다. 이 내재성 때문에, 정치경제학비판은 쉽게 실증적-긍정적(positiv-affirmativ) 정치경제학으로 오해될 수 있다(vgl. e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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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에 의해 거의 그 이상 증명되지 않는 이 테제들과 나란히, 포스톤은 그러나 “맑스가 『자본』 1장에서 추상적 인간노동을 상술한 대로의, 추상적 인간노동의 규정들을 극도로 문제적인 것으로”(224) 생각한다. 물론 그는 『자본』의 실제적 모순들과 양가성들에 대한 주장에 이를 수 없다. 그 점에서 (포스톤에게는 - 역자) 추상노동의 최초규정들을 “극도로 문제적”이고 경제학비판의 체계적 의도들에 역행하는 것으로 평가하고, 동시에 그 최초규정들을 객관적 사고형태들에 대한 고안된 비판의 필수적 요소로 가정하는 것은 모를 일일 것이다. 포스톤 스스로가 확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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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국 그는 이제부터 그에게 맑스에게서의 가능한 양가성들의 요술적 사라짐(Eskamotierung)을 위해 복무하는, 내재적 비판의 정리(定理)를 결정한다. 즉 (포스톤에 의하면) 최초의 범주들은, 후에 (맑스가 - 역자) 매우 비판하는 범주들로서, 맑스에 의해 기본적으로 의식적으로 전도되어 서술된다. 모든 다른 가정은 그(맑스 -역자)에게 “불일치(Inkonsistenz)의 수수께끼 같은 정도”(264)를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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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톤이 ‘경제적 범주들에 대한 비판-으로서의-서술에 관한 맑스의 프로그램’에 대해서 그의 설명을 그 이상 수행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이 독해방식이 “의식적으로 주제화되고 유발된 오해들”[12]로서의 정치경제학비판의 최초범주들에 대한 헬무트 브렌텔(Helmut Brentel)의 테제와 포괄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이 독해방식의 타당성에 대한 문제는 브렌텔의 예로 토론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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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텔의 잘 증명된 기본테제는, 『자본』의 서술 진행이 결코 역사적 발전에 대한 개념적으로 논리적인 모사(模寫)가 아니라, (그로써 범주들의 자기근거성[Selbstbegründetheit], 자연성, 직접성, 조화의 거짓 외관을 잃는) 최초의 범주들의 토대로의 논리적-형태비판적 회귀라는 것을 말한다. 형태분석은 “단순하고 자립적인 것으로 이해된 정치경제학의 범주들을, (전체관계를 통해 추상들 그 자체가 다만 규정될 수 있는) 전체관계의 추상들로 제시한다.”[13] 예를 들어[14] 이것은 (- 따라서 교환가치 개념이 직접적 일상경험에 나타나고 특히 사무엘 베일리[Samuel Bailey]의 국민경제학에서 부상하는 것처럼 - 1장 1절에서[15] 우선 사용가치들의 단순한 양적인 수량관계로 도입되고, 이미 다음 페이지에서 계량가능성 주장[Kommensurabilitätsargument]과 더불어 베일리의 논리적 불일치로 입증되는) ‘교환가치 개념’에서 증명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러면 내재적 가치의 범주들의 도입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16] 그러나 맑스가 그의 용어선택을 통해 이미 교환가치의 모든 최초결정의 환상적 성격에 주의를 환기시켰고(“우선 ~ 로 나타난다.”, “그 때문에 ~처럼 보인다.”), 직접적으로 그것에 이어서 “사물을 더 가깝게”[17] 고찰하고 옳게 나타낸다는 것이 중요하게 언급될 수 있다. 이제 브렌텔은 포스톤처럼, 이런 방식이 맑스에 의해 또한 의식적으로 가치실체 즉 추상노동의 결정에 관해서 적용된다고 주장한다.[18] 이어서, 포스톤에 따르면 무엇보다 물신장(章)(vgl. 95, 264)에서, 이 ‘실체’의 순수히 사회적인 특수성과 역사성을 밝히기 위해서, (브렌텔에 의하면) 여기서 우선 리카도와 푸르동의 실체주의적 노동가치이론이 증거로 인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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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맑스가 1장 2절에서의 사물화된-국민경제학적 가치실체-정의에 대한 ‘도입’에서, “모든 노동이 ... ‘처럼 보인다.’”라고 쓰는 대신, “모든 노동은 [...] 생물학적 의미에서 인간의 노동력의 지출‘이다.’ 그리고 ‘이런 특성에서’ 노동은 상품가치를 형성한다.”[19]라고 쓴 이유는, 그리고 첫 수십(erst zig) 페이지 후에[20] 이 절에 어떤 관련도 없이 비-자연주의적 결정을 제시하는 이유는 불분명하게 남아있고, ‘의식적으로 야기되고 주제화되었으며 비판되는 오해’에 대한 나쁜 우연으로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 특히 『자본』 1권과 3권의 계속되는 진행에서 또한 실체주의적 찌꺼기들이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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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3: 추상노동의 발생과 추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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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추상노동과 가치는 포스톤에게 얼마나 결정적인가? “상품형태적(förmig) 사회에서”(231) 생산자의 노동은 다른 이에 의해 생산된 재화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21] 그것을 통해 생산물은 상품이 된다. 생산물이 다른 이를 위한 사용가치를 표현하고 생산자 자신을 위해서는 교환가치를 표현함으로써 말이다. 그 때문에 생산자의 노동은 이중성을 지닌다. 즉 “한편으로 노동은 다른 이를 위한 특수한 생산물을 생산하는 특수한 종류의 노동이다.” - 그것은 구체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형성하는 것이다. - 다른 한편으로 “노동은 노동의 특수한 내용과 독립적으로, 생산자와 독립적으로, 다른 이의 생산물들을 취득하는 수단으로 복무한다.”(231) 그것(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존재가 이러한 서술에 전제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vgl. 230), “노동은 완전히 특수한 방식으로 재회를 획득하는 수단이 된다.”(231) 즉 “판매자들이 자신들의 노동 덕분에 획득하는 생산물들에 관해서, 생산물들은 생산자들의 노동의 특수성을 추상한다. 지출된 노동의 특수한 성질과 (이 노동에 의해 획득된) 생산물의 특수한 성질 사이의 어떤 내적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ebd.) 사용가치들을 생산하는 노동으로서 노동은, 구체적인 목적결정적 활동(konkretzweckbestimmte Tätigkeit)으로,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에 반해 “사회적으로 매개하는(vermittelnd) 활동으로서의 노동의 기능”(233)은 추상노동의 개념에서 이해된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노동의 구체적인 유용한 차원을 넘어, 사회적 매개의 매체이고, 상품은 사용대상일 뿐만 아니라 수단 - 사적생산물의 사회적 형태이다. 가치는 순수한 사회적 매개범주, “스스로 분배되는 부의 형태”(239)를 표현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사회화된 것(구체노동)으로서 그리고 동시에 사회화하는 것(추상노동)으로서 규정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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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노동을 통한 (구체)노동들의 이러한 종합과 반대로, 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는 “노동과 노동의 생산물들의 사회적 분배가 아주 다양한 관습, 전통적 조건들, 투명한 권력관계들 혹은 [...] 의식적 결정들의 토대에서”(231) 발생한다. 생산적 활동들의 “명백한 사회적 관계(자본주의처럼 추상노동에 의해 매개된 사회가 아니라, 투명한 인격적 관계 혹은 직접적 관계 - 역자)의 [...] 매트릭스”(232f.)로의 이러한 삽입을 통해, 노동들은 단지 “질적으로 특수한 것”으로 “결정”되고(233), 상징적으로 부과되며(aufladen)(vgl. 266f.), 노동의 자연형태에서 직접적 상호작용의 형태들을 통해 그 자체 사회화되어 있다. 따라서 구체노동의 결과로서 물질적(stofflich) 부는 그 자체 사회적 관계를 구성하지 않는다(vgl.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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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이제 다양한 문제들이 부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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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스톤은 추상노동과 상품형태의 구성으로 이끄는 ‘노동의 구체적인 사회화조건들’을, 즉 생산수단을 가진 이들(Besitzer/Eigentümer)과 노동력 이외에 어떤 것도 가지지 않은 이들(Besitzer/Eigentümer)의 계급대립의 형태의 사적-분업적 생산관계들을 거의 무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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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대신에 사람들은 “상품형태적(förmig) 사회에서” 생산물들이 상품들로 되는 유형에 대한 ‘설명’을 발견한다(vgl. 231). 이것은 아마도 모든 경제적 형태들의 존재를 사적소유와 시장의 개념들로부터 분리시키려는, 그리고 ‘(보편화된) 경제적 형태인 가치의 토대로서의 계급관계들에 대한 의지’를 ‘인격적 지배의 유형으로의 허용되지 않는 환원’으로 폭로하려는 그의 노력에 기인한다(vgl. 190, 237f.). 그 속에서 사회화조건들에 대한 ‘분석적’ 진술과 그 속에 함의된  (우선 첫째로 사회적 지배의 익명의-상품형태적[förmig] 매개를 산출하는) 구조적 강제들을 보는 대신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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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포스톤이 자본주의에서 익명의 지배의 “출발점결정”을 “개인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생산하고 상품을 교환하기 위해서 강제되어 있다”(246)는 사실로 든다면, 그는 도대체 그런 강제들과 다른 어떤 것을 묘사하는 것인가? 그 스스로가 밝히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이것은 우선 “노동력 그 자체가 상품이 된 이후의 경우”(230)이다. 그러면 언제 노동력이 상품이 되는가? 직접적 생산자들이 그들의 생산조건들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고, 이 생산조건들이 소수의 사람들의 손아귀의 소유(Eigentum)로 되었다면, 그렇게 된다. 곧 계급개념의 (차원의) 그런 형태분석적 설명과 더불어,[22] 포스톤이 옳게 언급한 것처럼(vgl. 476), ‘맑스가 『자본』에서 가장 적게 수행하고자 했던 경험적 사회구조분석’으로의 계급이론의 환원이 예방될 수 있다. 계급투쟁이 ‘노동’과 ‘자본’ 사이의 상품형태적(förmig) 매개의 불특정성에 기인한다는 것은(vgl. 478), 어느 모로 보나 그런 형태분석적 계급개념과 결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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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추상노동은 역설적으로 어떤 때는 “사회적으로 매개하는 활동으로서의 노동의 기능”(233)으로 결정된다. 그러면 다시 “노동을 일반적으로 ‘만드는’” “노동의 사회적 기능”(235)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23] 어떤 때는 노동의 종합기능은 (추상노동과 동일하기 때문에) 피설명항(Explanandum)이고, 다른 때에는 매기기능은 설명항(Explanans)이고, 노동의 추상성은 피설명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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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포스톤의 기고는 또한, 더 새로운 맑스-논의가 몰두하게 만드는 질문(정확히 어디에서 구체노동들의 실제추상이 발생하는가? 교환에서 그리고/혹은 직접적 생산과정에서?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바람직한 명료성을 놓치도록 한다. 위에서 언급된 사회화기능으로서의 추상노동에 대한 설명은 추상노동의 사회화기능으로부터 바로 충족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가치추상이 존-레텔에게 “노동의 추상이 아니라 교환추상”(275)을 표현한다고 알프레드 존-레텔(Alfred Sohn-Rethel)이 비판되기 때문에, 포스톤은 오히려 직접적 생산과정을 추상원천으로 선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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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노베르트 트렌클(Norbert Trenkle)이 주장하듯이 “노동 그 자체의 지평에 시종일관”[24] 머물러 있는 이러한 접근에, 가치가 인간과 사물 사이의 직접적 관계에 근거되어야만 한다는 문제점이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내 견해로는 주관적 가치이론의 여러 가지의 변종들로 이끈다. 그래서 생산자들이 그들의 노동들의 특수성으로부터 추상되었다는 것(vgl. 231 – 위의 인용, 279)과 같은 공식화는 또한, 마치 그 때에 추상노동이 의식적 (혹은 마찬가지로 행위자들의 머리에서 발생하는 무의식적) 추상활동의 결과로 환원되는 것처럼, 따라서 사회적으로 강제된 명목추상으로 환원되는 것처럼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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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특히 또한 로버트 쿠어쯔(Robert Kurz)에 의해 시도된다. 최소한 본래의 생산과정이 “‘생산자들에게’ [...] 추상노동”[25]이라는, 다른 생산자들의 재화가 “‘생산자들에게’ 추상적 가치대상성”[26]이라는, 노동들이 이미 생산과정에서 “‘생산자들에게’ 추상적”[27]이라는 것과 같은 공식화들은 이 결론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쿠어쯔는 『자본』 1판의 서술의 진행에서 가치개념의 분석적 상태에 관련하는 용어를[28] 물화하면서(reifizierend) 이해하고, 가치를 인식적 현상으로,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머리에서 존재하는 것”[29]으로, “사고물(Gedankending)”[30]로 이해한다. 그 정도로까지 포스톤은 - 운 좋게 - 감히 할 용기가 있지는 않다. 그러나 많은 것이 그것에 대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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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4: ‘사물화된 범주들’로서의 추상노동과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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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톤에 따르면 ‘본질’과 ‘현상’은 (그 범주들의 사용이 다만 사회구성들과 관련해서만 의미가 있고, 그 범주들의 특수한 사회적 관계가 전도되고 비사회적인 형태로 경험적으로 나타나는) 상호 전제하는 범주들이다. 따라서 노동의 매개의 명백한-사회적 형태들의 분석의 특성에서, 포괄적으로 불필요한 것으로 입증된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본질 - “노동의 역사적으로-특수한 사회적 기능”(258) - 은 필연적으로 대상적이고 초역사적-존재론적인 현상형태 - 노동 그 자체의 형태 - 을 취한다. 따라서 추상노동은 구체적인 노동으로, “사물화된 형태로”(259) 나타난다. 노동의 종합하는 기능은 노동의 특성으로 직접적으로 나타날 수 없다. - 단지 ‘명백한 사회적 관계’만이 그것이 존재하는 그러한 것으로서 나타날 수 있다. - “왜냐하면 노동(추상노동이 아닌 노동 - 역자)이 즉자적이고 대자적으로 사회적으로 매개하는 활동이 아니기 때문이다.”(260) 상품 그 자체의 모순으로부터, 상품들이 “동시에 특수한 재화로서 그리고 일반적인 매개로서 기능”할 수 “없다”(261)는 사실로부터, 상품 B의 교환가치형식(Gestalt)에서의 상품 A의 가치성격의 “외면화”(Externalisierung)가 뒤따르고, 개별 상품의 사용가치와 가치의 내적 모순의 필연적 운동형태로서의 가치형태가 뒤따른다. 결론적으로 상품들은 순수히 ‘구체적인 것’, ‘화폐’로, 즉 ‘본래 추상적인 것으로서의 가치’의 적합한 존재방식으로 나타난다. 즉 상품은 “[...] 순수히 ‘사물적인’ 대상으로, 화폐를 통해 사회적으로” 매개되는 “재화로 나타난다.”(261) 이에 반해 화폐는 “상품의 (그리고 노동의) 추상적 일반성의 구체화(물질화)된 외면화로서가 아니라, [...] 즉자적이고 대자적인 보편적 매개로서, 사회적 관계들에 외적인 매개로서” 나타난다(ebd.). 추상적인-사회적 노동과 구체적인-사적 노동의 뒤섞임/전도는 포스톤에 의해 결국 “자본주의적 물신의 본질핵심”(263)으로 규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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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물신주의에 대한 고전적이며, 높은 추상수준에서 착수될지라도, 가치형태분석의 개념적인 발전경로를 한 번도 피상적으로도 언급하지 않는 ‘해석’이다. ‘가치’와 ‘가치의 실체’의 대상적 현상형태들에 구성적인 물신주의에 결합되어(vgl. 260), 이 해석은 물론, (“교환가치 혹은 [...] 가격과 이윤 같은 그것들[가치와 추상노동]의 [...] 현상형태들만이 아니라”[226], 이미 가치와 추상노동을 사물화된 범주들로 입증하려는) 쿠어쯔의 물신에 대한 주제화[31]를 상기시키는 목적(Programmatik)을 완수할 수 없다. 이것은 또한 원리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가치와 가치실체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상품의 대상적인 표현방식과 독립적인 개별 상품’에서, 결코 행위자에게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 이것은 추상노동과 가치에 대한 전(前)화폐적(prämonetär)이고 경험주의적 생각을 전제하는 것일 것이다. 우선 포스톤이 ‘그런 환상적 프로그램의 이행은 경제적 형태들의 비(非)자연성을 밝히기 위해 결정적이다’라고 주장한 이유가 그의 비밀로 남아 버린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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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관점에서 나에게 포스톤의 비판적인 근본의도들은 쓸모 있는 것으로 그리고 때때로 심지어 그 이상인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그의 구체적 시간, 추상적 시간, 역사적 시간의 복합성에 대한 그의 주제화 혹은, 이종적 전체(Ganzes)와 동종적 총체성(Totalität)에 대한 그의 구별이 그렇다. 그러나 그의 논거들은 위에서 스케치된 문제점들이 보여주듯이, 대개 불명료하고 피상적으로, 빈번히 모순적으로 머물러 있다. “맑스의 비판이론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이해”(40)는 그 논거들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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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t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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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entel, Helmut (1989): Soziale Form und ökonomisches Objekt. Studien zum Gegenstands- und Methodenverständnis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Opladen
-Breuer, Stefan (1977): Die Krise der Revolutionstheorie. Negative Vergesellschaftung und Arbeitsmetaphysik bei Herbert Marcuse, Ff/M.
-Elbe, Ingo (2002a): „Umwälzungsmomente der alten Gesellschaft“. Revolutionstheorie und ihre Kritik bei Marx.

http://www.rote-ruhruni.org/texte/elbe_revolutionstheorie.shtml
-Elbe, Ingo (2002b): Marx vs. Engels? Werttheorie und Sozialismuskonzeption. 
http://www.rote-ruhr-uni.org/texte/elbe_marx_vs_engels.shtml
-Ellmers, Sven (2003): Die formanalytische Klassentheorie von Karl Marx. 
http://www.rote-ruhr-uni.org/texte/ellmers_klassentheorie.pdf
-Gallas, Alexander (2003): War Marx Monist? Versuch einer Kritik der Wertkritik.
http://userpage.fu-berlin.de/~stuetzle/Monist.pdf
-Heinrich, Michael (1999): Die Wissenschaft vom Wert. Die Marxsche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zwischen wissenschaftlicher Revolution und klassischer Tradition, 2. überarb. und erw. Aufl., Münster
-König, Helmut (1981): Geist und Revolution. Studien zu Kant, Hegel und Marx, Stuttgart
-Kurz, Robert (1987): Abstrakte Arbeit und Sozialismus. Zur Marxschen Werttheorie und ihrer Geschichte. In: Marxistische Kritik Nr.4, S. 57-108
-Marx, Karl (1983):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1. Band: Der Produktionsprozess des Kapitals (Erstauflage von 1867) = MEGA, II/5, Berlin
-Ders. (1993):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1. Band: Der Produktionsprozess des Kapitals = MEW 23, 18. Aufl., Berlin
-Ders. (1987): Brief an Ferdinand Lassalle, 22.2.1858. In: MEW 29, 6. Aufl., Berlin, S. 549-552.
-Postone, Moishe (2003): Zeit, Arbeit und gesellschaftliche Herrschaft. Eine neue Interpretation der kritischen Theorie von Marx, Freiburg
-Reitter, Karl (2004): Ein Popanz steht Kopf. In: Grundrisse. Zeitschrift für linke Theorie und Debatte, Wien, S. 15-27.
-Trenkle, Nobert (2004): Ein Frontalangriff. In: Jungle World Nr. 24
-Wolf, Dieter (2002): Der dialektische Widerspruch im Kapital, Hamburg 2002
-Ders. (2004): Kritische Theorie und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In: Berliner Verein zur Förderung der MEGA-Edition (Hg.), Wissenschaftliche Mitteilungen, Heft 3: Zur Konfusion des Wertbegriffs, Berlin, S. 9-190.
-Wolf, Dieter/ Jung, Dorothee (2003): Abstraktionen in der ökonomisch-gesellschaftlichen Wirklichkeit und in der diese Wirklichkeit darstellenden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http://www.marx-gesellschaft.de/Texte/JungWolfAbstraktio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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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신의 예로 다음을 참조. Gallas (2003) 혹은 Reitter (2004).
[2] Vgl. Elbe (2002a).
[3] Vgl. Elbe (2002b).
[4] 계속되는 텍스트의 페이지 지시는 모두 Postone (2003)에 관련된다.
[5] “‘[...] 추상노동은 <노동 일반>(Arbeit im allgemeinen)에 대한 동의어를 [...] 의미한다. ; 추상노동은 모든 생산적인 인간의 활동들에 공통적인 그러한 것이다.’”(Postone [2003], S. 227.에 따른 인용)
[6] Marx (1993), S. 87.
[7] Ebd..
[8] “그것들(사적노동들)은 다른 한편으로 다만 그것들 자신의 생산자들의 다양한 욕구들을 충족한다. 각 특수한 유용한 사적노동이 각 다른 유용한 사적노동과 교환될 수 있고 따라서 그것과 동일한 가치가 있는 한에서 말이다.”(ebd.)
[9] ‘사물적으로 매개된’ 사회화의 비판이 맑스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가는 디터 볼프(Dieter Wolf, 2002, S. 436-472)에서 엄밀한 형태로 상술된다.
[10] 이미 Stefan Breuer(1977)와 Helmut König(1981)는 물론 숙명론적인 혁명이론적 결과들과 더불어 일지라도, 그것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11] Vgl. Marx (1987), S. 550.
[12] Brentel (1989), S. 281. 물론 포스톤은 브렌텔을 언급하지도 않고, 대체로 70-90년대의 대다수 중요한 가치이론적 문헌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포스톤이 ‘실제로는’ 계속해서 (이미 자신의 책 영어판이 출판되었을 때인 1993년 이전에 알려졌던) 증명되지 않은 관점들에 보고할지라도, 그가 지겹도록 하는 것처럼, 자기 저작에 결코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의 특색을 주기가 쉽다. 이것은 헤겔-맑스 관계에 대한 부(Teil)에서 가장 분명하다. 
[13] Ebd., S. 279.
[14] 브렌텔은 이것을 무엇보다 단순유통과 생산의 관계에 의거해 인상적으로 서술한다.
[15] Vgl. Marx (1993), S. 50.
[16] Vgl. ebd., S. 51.
[17] 모든 인용은 ebd., S. 50f.
[18] Vgl. Brentel (1989), S. 281.
[19] Marx (1993), S. 61(‘ ’ 강조는 인용자).
[20] Vgl. u.a. ebd., S. 88: “다만 이러한 특수한 생산형태, 상품생산에 대해서 타당한 것은, 즉 서로 독립적인 사적노동들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이 사적 노동들의 동등성에서 인간노동으로 이루어지고, 노동생산물들의 가치성격의 형태를 취한다는 것[...]이다.”
[21] 물론 이것이 소위 ‘생산자들’의 결정적 계급(eine entscheidende Klasse sogenannter ‚Produzenten’)에 적용되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이러한 형태로 오히려 소유(Eigentum)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 구성되고 재생산된다는 단순유통의 외관을 동반한다는 것을 포스톤은 최소한 언급할 수 있었을 것이다.
[22] 이에 대해 다음을 참조. Brentel (1989), S. 267-271, Heinrich (1999), S. 263f. 그리고 Ellmers (2003).
[23] 강조는 인용자. 또한 Postone (1993), S. 237: 노동의 추상적-일반적 성격은 노동의 종합기능에 “근거한다.”
[24] Trenkle (2004).
[25] Kurz (1987), S. 85 (강조는 인용자).
[26] Ebd., S. 86 (강조는 인용자).
[27] Ebd. (강조는 인용자).
[28] 맑스의 “사고물”(Marx [1983], S. 30)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의 진술을 참조. Wolf (2002), S. 128f.와 159f.
[29] Kurz (1987), S. 89.
[30] Ebd., S. 94. 이에 반해 다음을 참조. Heinrich (1999), S. 210 (FN) 혹은 Wolf/ Jung (2003), S. 41 (FN): “노동의 사회적 형태들은 ‘뇌의 자연적 작용’에서도, ‘상품소유자의 자연적 본능’에서도 발생하지 않는다. 사회적 관계들의 창조에서, 교환행위들의 수행에서, 의식적으로 발생하는 모든 것에서, 의식적이지 않은 그러한 것은 머리 밖에서 출발하는 사회적인 발생에 대한 비(非)의식이다. 가치개념의 인식주의적인-심리학주의적 환원에 대한 상세한 비판은 (헬무트 라이셀트[Helmut Reichelt]의 예를 드는) Wolf (2004), S. 29-33, 55, 84-87, 94.에 있다.
[31] 쿠어쯔에게 추상노동과 가치라는 사회적 형태들은 한편으로 “실제로 물질적인 과정”([1987], S. 96), “실제로 [...] 소모되는 노동”(ebd.)으로 체계적으로 허물어진다. - 그것으로써 그는 자신의 주장과 반대로 추상노동을 실체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 그리고 추상노동과 가치라는 사회적 형태들은 다른 한편으로 단순한 사물적 “외관”, 가상의 “추상적 ‘상징’”(ebd.)으로 허물어진다. - 그것으로써 가치는 생산자들의 뇌 속으로 용해된다. 그들의 생산물들의 “환상-속성”(ebd., S. 100)으로의 그들의 과거 노동의 무의식적 투영으로서 말이다. 쿠어쯔는 당연히 왜 생산자들이 그런 정신착란들(Verrücktheiten)을 저지르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을 위해 형태분석 대신 미심쩍은 심리학을 필요로 할 것이다.  
[32] 여기서 또한 쿠어쯔는 포스톤이 그것에 대해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의 명료화를 위해 고려될 수 있다. 쿠어쯔는 다음과 같이 아주 진지하게 주장한다. 즉 만약 사람들이 (쿠어쯔가 그 동일화를 수행하는 것 같은) 가치와 물신주의적 외관의 동일화를 포기하고, 그에 반해 물신(혹은 가치의 대상적 표현형태들)을 통해 전도된 ‘가치의 실제적 존재양식’에 대해 말한다면,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화폐를, 경험주의적으로 이해된 가치의 경제적 ‘실제세계’의 단순한 은폐로 간주하는) 실체주의적 가치이론들에 이른다는 것이다([1987], S. 103). 그러나 실제로 그런 입장들은 자연화된 질의 양적 차원, 전(前)화폐적(prämonetär)으로 이해된 가치의 양적 차원만을 주제화한다. 그에 반해 가치를 실제적인 사회적 형태로 말하는 것은 결코 그런 자연주의를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가치)을 사적노동들과 사적생산물들의 역사특수적인 사회화양식으로, 그러나 인간들의 머리 밖에서 존재하는 그런 사회화양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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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7 05:19 2008/09/17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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