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한 도전인가



1.명분 없는 대중의식의 후진성


스타그래프트게임을 봤다. 테란 저그 프로토스라는 3가지 종족간의 전투 또는 같은 종족간

의 전투를 하는 전략게임이다. 해본적도 없고 할 생각도 없지만 재밌게 보았다. 프로게이머

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상대방을 무조건 이기고 명성을 높이 쌓여 갈수록 높은 상품

가치로 인정을 받아 연봉을 높게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게임에서는 승리만을 강조

하고 승리를 위한 바탕을 강조하면서 오로지 승자만을 기억한다. 자원을 풍부하게 먹고 유

닛의 조합을 최종유닛으로 조합을 해도 마인드컨트롤과 피드백이라는 무기를 가진 다크아콘

이라는 유닛으로 정신을 개조당해 내편에서 상대편의 유닛으로 바뀌어 내편을 공격하여 자

신을 몰락시켜 승리를 이끌어 내는 장면도 나타나고, 전투에서는 승리를 하지만 전쟁에서는

패배를 하는 모습도 종종 나타난다. 프로게이머들은 아직 어리지만 당당하게 스포츠라는 형

식을 빌어 무한 경쟁을 하며 발전과 도태가 같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른 사람보다 앞서서

시작하면 승리를 할 수 있고 느린 발전은 잊혀져가는 선수가 되어 상품의 가치가 없어진다.

게임 속의 선수와 팬들은 하나이면서 서로의 견해를 가지고 있고, 서로 다른 객체이기 때문

에  다른 모습으로 투영된다. 프로라는 게임의 기본은 자보주의 생리를 현실에서 그대로 답

습한 엘리트위주의 경기운영방식이다. 기량을 쌓기 위해, 명성을 쌓기 위해서는 상대편을

이겨야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자신의 가치를 상품으로 인식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엘리트

차원의 게임은 자본주의를 담당하는 커다란 문화의 한축이다. 보고 즐기고 느껴라 수동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프로는 너희와는 다른 선택받은 사람이다.



진보나 보수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기본적으로 바꾸지 않고 현재 있는 그대로에서 이익을

얻어 그것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보수라고 할 수 있고, 세상을 바꿔가거나, 변화되었을

때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오기 때문에  바꿔갈려고 노력하는 성향을 진보라고 할 수 있는 것

이다. 독점자본시대에 자유경쟁체제로 변화를 하고자 하는 것은 진보와 보수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고 자본주의체제와 사회주의체제간의 각자의 색깔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무엇을 기

준으로 보수와 진보로 나눌 수 있을련지는 개인과 집단간의 암묵적인 합의에 의해서 도출될

것이다. 민주노동당도 보수와 진보라는 색깔속에서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집단에서 볼땐 아

무리 판단을 미룬다고 하더라도 이미 보수적인 색깔로 물들어 가고 있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미 태생의 한계가 자본주의체제 내에서의 개혁을 통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강령에서부터 그들의 변화는 더 이상의 변화가 아니며 그들의 변화는 체제유지와 자신들의

잔치를 열기위한 집권만을 꿈꾸는 것이기에 계속적인 비판을 제기해왔던 것이었고, 때문에

그 안에서의 변화를 추구하는 집단 및 개인은 피지배계급을 위한 진보가 아니라 자신들의

안정된 생활과 노후를 염려해서 진보가 아닌 진보로 꾸며지기를 바라고 권력을 누리고자 하

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실용적인 의식은 대중의 혁명의식을 희석화 시키며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존속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대안 아닌 대안으로서 보수에게로 권력을 집중

시키는 역사적 사명을 본분으로 여기며,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에게 표를 몰아주기를 갈망하

는 제비새끼들 마냥   떠들어 대고 있는 것이다. 독점자본을 옹호하는 지배계층은 민노당이

진보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을 하지만,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쁘띠부르조아 정치

집단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대중의 의식은 진보적인가 후진적인가하는 문제는 선진노동자들에겐 상당히 중요(?)한 문

제이다. 자신이 무엇을 대중에게 보여줄 때 대중이 진보적일 것이라 판단 할 수 있으며 보

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그들의 개량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행동에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대중의 의식이 어떠하다라고 판단을 해서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근거인

가. 아니다. 대중의 정치적 의식은 낙후되어 있거나 후진적이지 않는다. 대중의 의식적인 행

동이 비록 삶의 일차적인 의미에서의 투쟁을 시작했고 그 안에서 매몰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었다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 인식을 하지 못하거나

안하는 대부분의 선진노동자라는 부류의 사회주의자들은 언제나 대중의 의식의 후진성을 이

야기 한다. 스스로의 인식의 부족을 객관이라는 명제라는 이름을 자신의 주관으로 끌어들여

문제점을 대입 한다. 뫼비우스의 띠라는 절대 진리가 등장 한다. 대중의 낮은 의식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대중이 할 수 있는, 즉 투쟁해서 쟁취할 수 있는 목표를 강령으로 하는 이행

기 강령을 가지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노동자국가 건설의 대의에 이바지해야만 한다.



겉과 속이 어느 부분인지 인식하지 못하는 잠결에 전술의 뼈대는 사라지고 모래성을 쌓아가

는 불안감은 겉모습은 언제나 당당하게 대중에게 보여주고 있지만 삶속에서 그들의 모습과

자신관의 괴리감을 감성적으로 터득하여 서서히 격차가 벌어져 가는 것이 민주노동당의 지

지율에서 아주 극명하게 들어난다. 명확한 인식이 자리 잡지를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인식의 후진성이라고 하는 의미는 아니다. 대중의식의 한계성과 능동성을 파악하고자 유물

론의 기본을 잊어버리고 심리주의에 빠진 전형적인개량주의자들의 줄거리다. 대표적으로 사

회주의운동을 말아먹은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주체사상 등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혁명은

대중이 의식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동요 속에서 지배계급에 대한 울

분이 터져 나오는 시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각성의 시기이며 행동의 시기이다. 혁명에

서 강력한 대중의 힘은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자칭 선진노동자들하고는 전혀 다르게 나

타난다. 지금 조용하게 살고 있어 행동하지 못한다면 언제나 보수적이고 의식이 후진적이다

라고 판단을 하는 근거는 자가 당착속에 빠진 배덕자의 모습임을 알아야하는 것이다. 대중

의 의식은 대안을 찾아가지 못하고 부르조아의 사상 속에서 자신의 대안 보여주고 있을 뿐

이며 대안없는 투쟁은 활화산처럼 분출되고 난 후의 허무감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려 자생

적인계급의식이 퇴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 잘난 쁘띠부르조아 정당인 민주노동당에서의

전형적인 계급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관계로 한나라당이라는 차선이 아닌 차선으로 표를 몰

아주는 모습은 무정부적인, 즉 자생적인 계급적인 한계상태로의  변화로 봐야하는 것이

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사고방식은 지배계급의 얼굴 바꾸기에 질려버린 한탄에서 시작된

다. 투쟁의 상황과 전망을 제대로 가지지 못하고 대중과 함께하고자 한다면 보수진영은 어

부지리를 얻을 수밖에 없다. 대중의 심리적인 모습은 혁명적인 시기와 그 여타 부분에서의

모습과는 차이가 낭 수밖에 없고, 자신의 행동에서 배우고 익히는 관계로 혁명적인 전망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한 부분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안하는 사상가들은 언제나 미꾸라지가 용

이 되기만을 기다리는 고고한 학이 될 것이다. 미꾸라지가 용이 되기를 바라기 보다는 로또

에 목숨을 거는 좋을 것이다. 8백만분의 1의 확률이 더 높지 않은가!    


전술의 의미는 평상시엔 혁명에 대한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중의 계급의식 향상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며, 최후의 승리를 위한 기본바탕을 마련하는

것이다. 눈앞의 이익과 현실의 충실함-비조직적이고 간헐적이며 즉흥적, 감성적인 대중의

행동을 계획과 목적 지향적이며, 현실에서의 물적인 대안과 최후의 안착을 위한 것임을 보

여주는 것이다.  전술의 핵심은 대중의 계급의식화다. 계급의식화는 대안을 제대로 보여줄

때만이 가능하다. 자본주의세상의 대안인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노동자국가, 사회주의세

상을 보여주는 강령이 전술의 대안인 것이다. 구체적인 모습을 잃어버린 대중에겐 강령이

아름답게 느껴질 것이며, 강령의 영도로 찬란한 미래로 그들이 상상하는 세상으로 가는  모

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강령에서 물적인 혜택, 즉 개량을 거부하지 않는다. “사회개량

은 혁명적 투쟁의 부산물일 뿐이다. ”라는 일반적인 맑스주의 테제가 중요한 의의를 갖는

다. 개량을 거부 하지 않는다. 부분적인 경제적인 요구나 비정규직 철폐, FTA반대 등의 투

쟁에서 나타나는, 지배계급에게 청원하여 의회주의적이고 합법적인 부르조아 지배질서의 온

존을 전제로 하는 전술은 언제나 쁘띠부르조아 사상의 발전에 영향을 주어 자신들을 과학으

로서의 길에서 무장해제 시켜버린다.



노동자국가가 추구하는 것은 대부분이 잘먹고 잘살자 하는 내용이다. 생산과 생산물에 대한

분배를 민주적으로 운영하고자 하는 것은 노동자국가가 추구하는 것이다. 강령으로서의 내

용을 운영으로서 제시하지 못하는 한 언제나 대중에 대한 배신으로 계급적인 차별성을 말로

만 내세우면서 결국을 배반을 하는 민주노동당내의 좌파그룹과 대부분의 사회주의를 추구하

는 조직에서의 모습은 서러운 남한의 현실을 말해준다. 전술은 전략적 목적에 봉사를 하며

전투에서의 패배를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발판으로 만들어 갈수 있어야한다. 계급의식과

계급의식적 활동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전술의 핵심으로서 대중에 대한 행동, 경험, 의

식에 따르는 일련의 발전단계를 매도하는 상황에 청하게 된다.  노동계급정당이 없는 현실

에서 대중의 의식과 더불어 무엇이 또는 어느 명분의 정치단체가 그들의 벗인가에 대한 인

식도 힘께 공유되어야 한다. 대중이 자신의 친구가 누구인가에 대해 알았을 때의 환영인사

와 배반의 모습에선 복수의 명분으로 확연히 돌아선다. 대중의 친구, 그들과 함께하는 명분

의 정치 단체가 필요하며, 그 정치 단체는 혁명에서의 중핵을 맞게 될 것이다. 대중에게 한

결같은 모습, 투쟁과 삶이 같이 공유하는 대의적기관의 형성은 현재의 민주노동당이라는 이

름뿐인 노동당의 허물을 던져버리게 만들 것이며, 진정 계급의식을 가진 진보적정치조직의

모습인 노동자정당의 위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계급정당의 필요성은 대의명분과 더불어

서 공개적이며, 공유할 수 있는 강령으로서 대중의 혁명 활동을 활발하게 목적 지향적으로

견인해 나갈 것이다. 하지만 계급정당을  만들고자 노력하기보다는 민주노동당내에서 기대

여 살아가고자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노동자국가는 먼 훗날의 꿈으로 남을 것이다.



대중은 혁명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각인하며, 권력을 향한 한발의 진보는 개인으로서는

작지만 전체에게는 커다란 발자취로 나타난다. 대중의 자생적인 폭팔은 그것이 비체계적이

고 즉흥적이라는 점에서 경제적 욕구에 쉽게 굴복을 하고, 투쟁이후의 후유증에 심각한 영

향력을 받기도 하지만, 승리를 위한 또 다른 초석으로 가는 길이다. 대중의식의 한계성은

기회주의 개량주의 세력들이 봤을 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계급사상으로 무장된 사회주의자

들에겐 더없는 기회다. 쁘띠부르조아의 사상에 휘말려 봉착된 한계성은 대안을 찾기 전까지

의 모습으로서 질적인 발전을 위한 축적을 이루는 것이며, 이를 통한 자본주의 모순을 극명

하게 표출되어 질것이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은 현실에서 노동자계급의 경험과

하나로 이루어지는 그 순간은 혁명의 새로운 시작이 되는 것이다. 봉건제하에서의 농민전쟁

이 반란에서의 특징은 대부분이 지방영주의 학정이지 자신들의 대표자라고 여기는 왕은 잘

못이 없다라고 여겼다. 반란의 끝은 대부분이 왕에게 자신의 마을의 처지를 바르게 해달라

고 청원하는 것으로 끝나고, 대표자들은 처형당한다. 자본주의하에서의 대중투쟁의 수준은

어떠한가? 실제적인 차이는 없다. 부르조아들의 애용하는 사상인 민족주의, 국가주의 등등

의 사상에 오염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발전의 질적인 차이는 존재하지만 당시의 지배적인

사상을 뛰어넘는 의식을 피지배계급은 가질 수 가 없었다. 사상은 경제력을 가진자들이 독

점을 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의 대중투쟁은 봉건제사회에서의 투쟁과는 틀리게 전

개 되어야 한다. 봉건제에서의 투쟁은 부르조아를 위한 들러리에 불과했지만, 자본주의하에

서의 노동자투쟁은 자신의 권력을 위한 투쟁이다. 또 다른 것은 경제력을 가진 계급이 다음

사회를 위한 초석이 되었고 자신들의 사상을 전유했지만 쁘띠부르조아의 일부가 가진자의

틈에서 벗어나 프롤레타리아트와의 합류를 통해서 피지배계급의 사상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현재 지배적인 사상은 아니지만, 다음 사회를 위한 밑거름으로서 피지배계급을 선도할 때,

대규모적인 노동자군대의 모습은 강력한 부르조아의 언론, 사상, 국가권력의 장악을 뛰어넘

어 자신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다른 사람과의 비교 속에서 동등하거나 더 낳은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빈곤함은 노

동운동의 시발점이다. 초기의 계급의식은 고통스런 현실에서 시작된다. 존재는 의식을 규정

한다. 유물론적 분석과 평가를 현실에 적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진정한

계급의식으로 무장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한다. 자본주의사회의 지배자는 부르조아다. 봉건

제사회를 일소하고 자신의 지배를 일소하고 난후에 진보적이었던 존재는 보수화가 되었고,

당시 형성되었던 진보적인 사상의 잔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으로 한발 더 나갔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은 교육의 기회를 받을 수 있는 쁘띠부르조아에게 전해 줬고, 투

쟁의 실제적인 위치에 있는 노동자에게는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의식이 만들어졌다. 두 개의

의식으로 발전되었던 것은 자본주의가 가져다주는 필연적인 결과이며, 사회주의세계로의 발

전은 이전까지의 계급사회로의 발전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나타날 것임을 보여준다. 이전까

지의 체제변화는 경제력을 잡은 계급이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사상을 견실이 쌓아 가면서

권력을 장악 했지만 다수의 지배자를 두는 사회주의 사회는 권력을 먼저 장악한 후에 경제

력을 장악할 것이라는 점이다. 전술을 사용하는 점에서 국가권력을 장악해야만하는 선결 과

제를 갖는 노동계급은 밑바닥에서 자신의 입지조건을 닦아가던 예전의 전설의 모습과는 확

연히 다른 모습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단계론적 사고방식으로는, 점진적

개혁방식은 소수지배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것이 아니라 단지 그 밥에 그 나물로 전락하

여 소수의 지배를 더욱더 공고히 하고픈 시도인 것이다. 노예제, 봉건제, 자본제에서의 변화

는 사상 및 권력의 장악은 소수의 가진 자들의 특혜 속에서 진행되어 왔고 , 그들의 밑바닥

엔 언제나 경제력을 쥐고 흔드는 힘이 존재 했지만, 앞으로의 세계를 경제력을 쥐고 있는

계급이 사회를 장악하고자 할 때의 전술적 운영의 핵심은 바닥의 잔재를 헤쳐 나가는 것보

단 권력을 장악할 때부터 경제력을 장악할 수가 있는 토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전까지의 지배방식과는 다른 형태인 다수의 지배는 소수의 지배자들의 불안을 조성하여

자연스러운 변화의 방식보다는 다소 강제성을 뛸 수밖에 없다.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변화는 소수의 지배방식이었고, 자신의 모습을 바꿔가면서 연기를 하

면 그만 이었다. 노예주에서 봉건영주로 더 나가 자본가로의 이동은 자연스러운 한과정의

흐름이다. 자본주의에서의 사회주의로의 혁명은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방식이 아니라, 생

산과 생산물의 민주적인 배분을 이루는 사회이기에 소수에 부의 집중이 아니라 부의 확산을

통한 사회다. 즉 다수에 분배가 이루어지기에 자본가계급은 존립하여 병존한다는 상황은 불

가능하다.  부르조아의 힘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경제력에서 시작되지만,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은 상부구조의 최상층인 국가권력을 가질 때, 기존의 국가권력을 뒤흔들고 새로운 조직체

계를 가질 때만이 힘을 발휘한다. 자본주의가 상품경제의 중심에 있다면, 사회주의는 사용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분배구조의 핵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권력을 장악하지 않는 상태에

서의 분배구조는 자본주의적 상품경제의 공세에 빛을 잃어 버리게 된다. 부르조아의 국가

권력도 한몫을 하겠지만 부의 집중과 재생산구조에서의 모습은 노동자지주제도의 현재적 모

습으로 변한다. 부르조아는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부를 집중시키지만, 노동자국가

의 사회에서는 퇴보하는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이전의 지배계급을 억압하고 부의 집중을 견

제한다. 직접민주주의에서의 노동자참여와 더불어서 노동자권력의 국가는 기존까지의 분업

적인체계를 허물어뜨리기 위한 물적 토대를 제공해야한다.



대중의식의 후진성이라는 명분으로 그들보다 뒤처지기를 원하거나, 대중의 주도성을 과대평

가하여 그 안에 상주하여 뿌리를 내리려는 모습은 혁명적 진군을 가로막는 장해물이다. 장

해물인 기회주의자들의 뿌리를 뽑아 솎아내지 않는 이상 노동운동은 그들만의 잔치로 전락

한다. 민주노동당의 좌파그룹들, 노동자의 힘, 노동자신문 등등의 기회주의적인 작태들은 과

학을 빙자하여 대중의 발목을 묶어 뛰쳐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끈을 풀고 뛰쳐나간들 노

동대중을 진정 옹호하고 권력을 가지게끔 할 수있는 사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길 한

가운데 4살짜리를 풀어 놓고 있게 하고 있는 것이다. 아쉬우면 찾아오라고.


대중의식의 후진성이 필요한 것은 노동자계급이 아니라 대중주의에 영합하기 위한 조직들인

것이다. 사회주의운동의 질적인 변화는 노동대중의 강력한 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

라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전위조직이 존재할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혁명의 목적없이 대의

만 존재한다면, 모든 성과물은 약장수가 가져갈 뿐 곰은 풀뿌리로 연명할 뿐인 것이다. 대

중의식의 후진성이라는 명분을 갖지말고 혁명의 중핵을 만들수있는 정치조직이 필요한 것이

며, 계급정당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오로지 계급정당만이 대중의식을 발전시킬 것이며,

장미 빛 미래를 보장할 것이다. 대중은 계급정당의 필요성을 피부로 느껴왔다. 대안으로 민

주노동당의 10%가 넘는 지지도가 존재했다라는 사실이다. 자신의 대안을 맡기고, 자신의

임무를 찾아줄 수 있는 정치세력과 연계 하기위해서 하늘에 기도를 하여 동아줄을 받았지

만, 쁘띠부르조아의 썩은 동아줄이기에 투쟁의 최고점에서 떨어져 깊은 수렁에 허우적거리

고 허무감에 빠져 지역과 계급간의 연대의 골이 벌어져갔다. 쁘띠부르조아정당이 계급정당

의 헌신으로 남아있는 한 프롤레타리아트는 나치당을 원했던 대중이나, 파시스트를 갈망했

던 대중들과 별다르지 않게 한나라당을 원하는 것이다. 이미 배신의 늪에 빠져 있는 그들에

겐  더 다른 나락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파시즘의 등장은 쁘띠부르조아의 동요적 심리상태에서 나타난다. 양끝의 줄다리기 중에서

지배계급의 우세는 자신의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모습과는 일치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기

에 자신들의 안위를 위하여 부르조아계급의 강력한 우군으로 등장하는 것이 파시즘의 형상

을 띠고 나타난다. 한반도의 상황은 좀 더 강력하다. 속칭 좌파라고 지칭하는 작자들이 민

족이라는 허울 속에서는 모든 것을 양보하고 민족이 아닌 부분에서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

다. 오로지 민족의 한으로 무장을 하였기에 민족의 이름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시되며 통

일의 이름으로써 당당하게 진보진영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박근혜, 이명

박으로 대표되는 한나라당의 약진은 신자유주의 경제질서 속에서 도태되어가는 쁘띠부르조

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TV에서의 연개소문과 대조영의 핏줄의 무장을 제시하

면 자본과의 결합속으로는 나찌즘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파시즘의 등장은 신자유주

의 질서에 지배계급의 지배력을 약화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현재 파시즘의 보수대연합의 형태로 쁘띠부르조아 단결과 보수진영의 단결을 함축하면서 제기 되고 있는 것이다.


 

“강력한 증기는 결정적인 순간에 그것을 압축시킬 수 있는 피스톤이 없기 때문에 증발되어

버렸다. 결국 추진력은 증기, 즉 대중동원과 대중투쟁의 에너지이지 피스톤은 아니다.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증기가 없다면, 피스톤은 속빈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피스

톤이 없다면, 아무리 강력한 증기라도 소모될 뿐이며,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라고 러시아

혁명사에서 트로츠키가 주장을 했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모적인 민주노총, 민주

노동당의 투쟁이 아니다. 노동대중을 이끌고 함께 할 수 있는 계급정당이 필요한 것이다.

대중의식이 후진적인 것은 계급정당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 후진적이기 때문에 존재하

지 않는 것이 아니다. 민주노동당의 허울 속에 파묻혀 있는 좌파들- 그 안이 추운겨울에 따

뜻해서 나오기 싫어하지만, 노동자 정치조직을 건설한다고하는 명분만을 내세워 써클주의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말로만 언제나 필요하다라고 주장을 하지만 언제 대중의 꽁무니만

쫒아 다녀 잔반처리만을 전문적으로 하다보니 실천적인 과학보다는 실용적인인식에서 벗어

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혁명을 원하면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한다. 공동편집진을 구성해서 사상을 모아가야하며, 조

직의 체계도 형성해야한다. 실천적 과학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환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혁명적노동계급정당이 건설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암울한 미래가 노동계급의 청

사진을 제공하지 못한다. 오로지 혁명적 계급의식으로 무장된 노동자전위부대가 있는 계급

정당과 함께하는 노동대중에게 가능하다. 노동계급의 삶과 투쟁을 같이 하고, 이론적 사고를 경험으로 의식화 시켜주는 것이야말로  후진적 대중을 선진화시키며, 선진대중은 전위대

로 당당한 발걸음을 놀리는 것이다. 한반도의 혁명의 불씨는 계급정당의 출현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1917년 2월이나 3월에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성숙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레닌 때문이었

다. 그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전통을 체현하고

있었다. 레닌의 구호가 대중에게 이르기 위해서는 처음에 비록 그 수가 작더라도 중핵이 있

어야 했다. 중핵과 지도부사이에는 신뢰가 있어야 했다. 이 신뢰관계는 과거의 경험전체에

근거했다. 이런 요서를 미래에 생각해 볼 때 빼버리는 것은 정말로 살아 있는 혁명을 묵살

하고. ‘세력관계’를 추상으로 바꿔놓으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혁명은 바로 노동자계급의 의

식이 변화하는 가운데 세력관계가 끊임없이, 재빠르게 달라지고, 후진적 계층이 선진적 계

층으로 상승하며, 계급이 자신의 힘을 점점 더 믿게 될 때 발전하기 때문이다. 당의 구조에

서 결정적인 추진력이 지도부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 과정의 결정적인 추진력은 당이다”

(트로츠키. 계급 당 지도부 - 스페인노동자계급은 왜 패배했는가? 실천 3호 레닌주의조직론 - 에르네르트 만델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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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7 15:32 2007/05/27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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