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체제에 대안을 위한 생각


사회주의를 외치고 노동해방을 주장하는 많은 동지들은 현장의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다. 그 노력의 결실로 자본주의세계의 대안을 보여줄 구체적인 모습으로서 강령을 대중에게 전달해 왔다. 구체적인 모습을 그리지 못하고 어디로 나가야 할 바를 모르던 선진노동계급은 서서히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조직들에 의해서 구체화된 대안으로서 강령의 모습은 대중에게 다가 설 수 있는 하나의 다리가 되었다. 혁명을 꿈꾸다 지친 노객들에겐 새로운 쉼터로써 자리를 잡게 해줄 수도 있다. 그러나 강령의 사용에 있어서 착각을 하는 경우를, 기계적인 적용을 자주 접하게 된다. 80년대의 노동해방투쟁동맹에서 제시된 제헌의회 전술적 슬로건에서부터 현재까지 나타난 현상을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못 궁금하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민중의 건강권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아파도 돈이 없어 병원에 갈 엄두를 못내는 것이 현실이다. 병원진료비와 의약품 가격에 대한 노동자 통제와 사회적 무상의료가 실시되지 않는다면 아파도 치료받지 못하면서 점점 병을 키워가고 있는 노동자 민중의 삶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통제를 누가 할 것인가. 자본가들이 언제까지 노동자민중의 목숨을 담보로 이 통제권을 쥐고 흔들게 그냥 놔둘 수는 없다. 병원산업 노동자들, 건강보험 노동자들의 통제권이 필요하다. 또한 국가와 의료산업 전체를 국유화하여 노동자계급이 사회적으로 통제해야만 한다.”(가자! 노동해방45호  자본가들이 통제하는 더러운 의료체계 중에서)


병원산업을 국유화되어야한다는 것, 노동자통제가 이루어져야한다는 점 이러한 것은 이전의 글에서(제3의 길을 참조바람) 자세하게 설명을 했고 예전부터 국유화와 통제에 대한 문제제기는 계속해왔다는 점에서 이러한 비판을 생략하고 여기서 제시된 문제를 한번 살펴보자.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이윤을 착취하고자 하는 자본가들의 손길에서 벗어날 순 없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노동력을 상품으로 만드는 것에서부터 몸조차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 버린다. 성을 상품화하는 것은 더 이상 이야기 거리조차 되지 못하고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이다. 그러한 자본이 이윤을 학대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초과이윤을 획득 할 수 있다면 새로운 투자를 시작 할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의료체계에 대한 자본의 공격이다. 민영화되어 있는 병원의 이윤을 확대시키고자 경쟁과 영리를 목적으로 변화를 시키는 것과 공공의료보험체계를 민영화시킬 목적으로 도입하는 민영의료보험체계는 자본의 재투자를 확실하게 해주며, 더 많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도록 돕는다. 더 낳은 이윤의 생산이 노동계급과 민중들에게 어떠한 부의 분배가 이루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하여 더 많은 노동시간과 노동강도를 강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의료체계는 공공의료체계와 민영의료체계가 공존하고 있다. 공공의료체계는 의료보험을 비롯하여 보건소와 더불어 의료원이라는 형식으로 진료를 이루고 있고 민영의료체계는 민영보험과 더불어서 이윤을 목적으로 설립이 된 대학병원 및 종합병원들, 그리고 개인의원, 약국이 하나로 민간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민간병원들 및 대학병원과 하나가 되어 있는 의약업체들은 현재 법 개정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들은 자본주의에 의해서 생긴 병을 자본주의체제의 수호자들을 위한 이윤제조기에서 치료받기를 원하는 것뿐이다. 그들의 작은 소망을 들어주지 못하고 짓밟고자 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대안은 오로지 국유화후 노동자통제를 외칠 뿐이다.    


의료체계를 민중의 손으로 개혁하고자 외치는 이유는 사회주의사회로 가는 가교서 자리를 잡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한 가교의 위치를 목적인 슬로건으로 외치면 만병통치약으로써 자릴 잡을 수 있을까?  통제의 의미와 의료체계의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면 피상적인 내용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신문에서 제시된 내용은 그 조직의 대표성을 가진다고 볼 때 사노련의 입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견해가 과연 대중을 반 자본주의운동으로 이끌어 갈 하나의 다리가 될 수 있을까? 아무 때나 외치는 통제의 개념은 암환자에게 감기약을 투여하는 꼴이며, 대중에겐 먼발치의 뜬구름으로 보일 뿐이다.


강령투쟁이 중요한 것은 대중을 반자본주의운동으로 스스로 나가는 길이 존재함을 대안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대중이 운동의 흐름을 가지기 위해선 구체적인 인식과 주요한 부분으로써  대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공간을 만들어 갈 수 있는 대안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공간으로써 의료체계에 대한 대안은 무상진료, 공공의료체계를 강화가 되어야하며 이러한 방식으로 제시 되어야 한다. 민영화가 되어 있는 부분은 자본 잠식이 되어 있어 폐업을 하는 경우의 병원은 노동계급과 의사 간호원들 및 환자들에 의해서 점거 관리 통제가 이루어 질 자주관리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는 엄연하게 대중들에겐 통제의 개념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실생활에 그들의 투쟁이 목적을 결합하고 의료체계에 대한 자본주의 성격을 거부할 수 있는 대안으로 나타난다.


사노련 동지들은 10대강령을 발표하면서 대중과 호흡하기위한 노력도 기울이고, 계급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노력을 열심히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강령의 부분을 제대로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및 진보정당의 모습은 글을 읽기는 하지만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여 자신의 강령을 꿔다놓은 보릿자루로 만들어 무엇을 해야 하지 모르고 대표의 무죄선고에만 무척 만족하고 있어서 무척 황송해 하고 있어서 보기 좋은데, 사노련의 그러한 모습에서 일보 전진했지만 아직도 강령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고 오로지 기계적으로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대안은 먼 곳에 잇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동지들의 가슴속에 있다. 가슴속에 들어 있는 강령을 현실 속에 구체화시켜라. 그것이 동지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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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2 15:54 2010/01/22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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