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정치인이 성추행을 했다. 동아일보 여기자가 술자리에 함께 했고  폭탄주를 마신 관계로 치마만 두르면 접대부로 오인한 관계로 성추행을 했다. 총리라는 작자는 영납제본을 비롯한 부산상공인과의 골프접대를 받았다라는 점으로 인하여 한나당의 열띤 정치공세를 받고 잇다. 두 가지를 보면서 재미있는 발상이 존재한다. 누가 무엇을 위하여 그들을 함께 하고자 했던 것인가하는 점이다. 누가 접대를 하고, 누가 술값이나 골프장 사용료를 지불했으며, 왜 그들은 그곳에 있었으며, 무엇을 하고자 함께 했는가 하는 점이다. 권력자들은 자신을 홍보하기 위해서 언제든지 기자들을 대동하고자 하며, 자신들의 홍보에 주력을 한다. 이유야 자신들의 권력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서 인 것이다. 또한 홍보와 더불어서 자기 혼자먹고 사는 것이 아닌 이상 자신들의 수하 또는 윗선의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하는 중차대한 임무는 언제든지 발생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생존권 문제를 해결하고자 후원 및 기부형식 그리고 음성적이라도-현 한국 사회의 부르조아의 법적인 틀 속에서  조차도 불법적이라고 하는 방식을 통해서라도, 예전에 부시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선거자금 모집에 충실히 임했고, 사상 최대의 선거자금을 모집에 성공하여 승리를 이루었던 만큼이나 부르조아 정치인들에겐 정치 자금이라는 것은 자신의 생명줄인 것이며 이는 가진자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보답으로 그들에겐 권력의 힘을 사용하여 도와 주고 있느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자본의 얼굴이다. 자본가는 정치가를 먹여 살리고, 정치가는 자신을 후원이라는 명목으로 자금을 지원해주는 부르조아-자본가계급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해서 자신의 군대, 경찰, 정보부(안기부), 법원 등등을 내세워 언제든지 탄압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피지배계급의 힘이 강해져서 지배계급을 압박할땐 적절하게 사용하고자 빵과 채찍을 번갈아 가면서 사용한다.


 

여기자는 예쁘게 생겨서 접대부로 오인 받았던지 말던지 중요한 것은 그런 술자리에 왜 참석을 했을까? 한 정치인의 정치적인 힘을 더욱더 키워주기 위해서, 법사위원에서 열심히 일하는 정치인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아니면 그런식의 봉사를 했던 댓가를 받기 위해서 였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 하나의 자리에서 남녀가 유별한데 한자리에 있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면, 여자가 조신해서 몸관리를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 아니 그런자리에 있었다고 한들 성추행이라는 몸통도 아닌 날개를 가지고만 노는 언론들의 모습과 그런모습에서 조차도 아무런 말도 없는 진보적인 진영이라는 민주노동당이라는 개량주의 정당도 성추행이라는 말로만으로 의원직 사퇴만을 강조하는 작태들을 보면서 계급적인 입장에서 어떤식의 선전 선동을 해야 하는 것인지를, 무엇을 가지고 자신들의 무기를 버리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어릭석은 자가당착에 빠지고 있다라고 생각한다.

 


 엄연히 언론이라는 제4의 권력기관이라고 떠들어대는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언론의 역할이 그런 정치인과 함께 있었다라는 점을 밝히지 못하고, 같이 한자리에 앉아서 누구나 지금 편하게 외치는 비정규직 철폐라는 슬로건을 남들이 다하니깐 무엇을 하고자 하기 이전에 휩쓸려 유행의 물결 속에서 자신들의 색깔조차도 못 찾더니, 이젠 누구나 공감하는 성추행, 골프접대에서 자본가와 언론의 밀월을 제대로 판단해서 비판의 근거로, 자신들의 계급적인 입장을 제시하지 못하고 하나의 사고로 넘어가는 상황은 동지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잇는지 판단할 필요가 있다.

5월달에 있는 지방선거에서 총력전을 피우기 위해서 합법적인 공간에서 활동을 한다고 하지만 활동은 항상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계기속에서 매몰되어진 모습은 언제나 자신들 역량이 모자르기 때문에  각 계급간의 공동전선을 이야기하면서 피지배계급의 혁명성은 부르조아에게 팔아 버리고 남아 있는 것은 빈 껍데기의 사회주의뿐이라는 사실이다.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주체적인 계급적 사상이며, 이 사상을 위한 선전과 선동은 우리가 가질 수 잇는 총알인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라는 관점이 아니라, 실지로 일어났던 점이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을 무기로 싸우는 조직이라면, 자신들의 현 상황에 대한 계급적인 입장을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답이 없다. 이는 책임을 소홀히 하며, 스스로가 자신들의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맴도는 다람쥐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다.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무엇을 표현해야 하는가? 우리의 선전선동은 피지배계급인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등의 투쟁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만을 보여주어야하는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들어나는 지배계급간의 갈등속에서 나타나는 부패의 현장이 대중에 더 쉽게 더 빠르게 다가갈 수 잇는 계기를 활용해서 지배계급을 고립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동지들은 아직도 성추행범인 정치인에게 전자팔찌를 채우고 의원직 사퇴라는 것만으로 해결을 짓는 것을 원하는가? 총리직을 사퇴하면 해결된다라고 판단하고 잇는가? 아니면 동지들은 다 알고 잇는데 쓸데없이 그런말을 만들어낸 저의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싶은가? 무엇이 진실인지가 알고싶으면 진정한 자본주의의 얼굴로서 나타난 이번 사건을 계급적인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부르조아 언론기관 및 계급적인 입장을 가졌다라고 자처하는 언론기관에서 조차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앓던지 아니면 나타난 형상에 매몰되어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는 자칭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우리는 러시아혁명에서처럼 프라우다라는 기관지가 없다라는 것을 한탄하기 이전에  대중에게 무엇을 계급적인 관점에서 보여주었는지를 제대로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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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0 20:50 2006/03/10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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