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하는 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핵심은 무엇일까? 생산을 담당하는 자들이 권력의 핵심으로 나서야 하며 그들이 권력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를 건설 할 때만이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것이고, 평등으로 가는 첫걸음이 시작되는 것이다. 생산하는 자들이 권력을 잡기 위한 과정은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누구나 확답을 할 수 잇는 절대자들이 아니며, 그것은 상황에 따라 객관적인 흐름에 이끌려 나갈 것이다. 중요한 명제는 어떠한 방식으로 나타나던지 상관없이 다수를 위한 민주주의로 이끌려 나가야 하는 것이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한 형태로 발전되어야 하는 것이다. 부르조아의 기본적인 민주주의 형식적인 틀을 가진 국가 권력을 그대로 이용을 한다면, 새로운 지배계급을 양산하고, 또 다른 자본주의로의 회기로 이루어 져 나가는 것이 우리가 봐왔던 역사의 흐름이었다. 소련의 붕괴, 중국의 자본주의로의 발전. 아직도 진행되어지고 잇는  남미의 민중들의 투쟁  속에서 뚜렷한 대안을 제시 못하고, 또는 대체세력으로서 계급사상을 제대로 답보하지 못하는 조직들이 존재하는 지역에서 자칭 진보라고 하는 쁘띠부르조아들이 권력의 핵심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도입하여 피재배계급의 눈을 흐리게 하고 는 잇지만 노동자계급이 진정한 주인으로 나서지 못하는 한 새로운 반혁명으로 빠져들어 자본주의로 회기 할 수뿐이 없는 갈림길에 존재하고 잇다.

 

전 세계적으로 자본의 이윤극대화로 인한 자본의 이동은 중국을 전세계의 생산 공장 역할을 하게 만들었고, 중국의 높아지는 인건비 및 물류비용은 또 다른 나라에의 이동으로 나타나고 대체하는 나라로서는 아직은 항만 및 여타 시설이 미흡하지만 인도 및 남아시아의 나라들이 그 명맥을 이어갈 준비를 하고 잇다. 유럽 및 아메리카, 일본 한국 등등의 세계에 경제를 담담하는 축에서의 노동자들은 자국의 생산설비의 이전으로 인하여 공동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중간의 축을 담담하던 전문인력이라고 자처하던 노동귀족의 핵심은 서서히 몰락의 길을 접어들게 되어있다. 생산 설비의 공동화현상은 자본의 주요한 실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전 세계를 하나의 경제블럭으로 만들어 버린 자본의 힘은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서 더 좋은 조건을 찾아다니는 철새처럼 언제든지 자리를 박차고 갈 준비는 항상 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고용없는 성장은 이미 어느 한나라의 일이 아니며, 세계자본주의 경제의 한 축으로서 자리를 잡은 OECD국가들은 누구나 겪는 당연한 결과이다. 노동생산성의 증가가 생산수단의 발전보다는 노동강도의 강화 및 비정규직 노동자와 비 숙련노동자의 비율의 증가로 또한 생산설비의 해외이전에 따르는 인건비의 축소의 원인으로 인하여 나타나게 되었다. 요즘 선진국이라는 국가들이 자국내의 생산설비시설 확대 및 타국의 생산설비시설을 끌어 오는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도 자국의 고용없는 성장에 한계점이 보이기 때문인 것이다. 쁘띠부르조아의 약화가 된 모습은 자국의 생산설비가 타국으로 이전하면서 나타나는 공동화 현상의 일부분이며, 그들의 빠른 우경화의 모습은 더욱더 자본가계급에게 충성을 다하여 살아남고자 하는 그들의 위기 의식인 것이다.

 

현재 프랑스의 대규모 파업은 학생과 함께 연대하여 자신들의 불안한 미래에 대한 책임을 조금이라도 회피하고자 하는 노조 지도부 및 쁘띠부르조아계급의 주도로 이루어져 가고 있지만 서서히 주도권은 피지배계급의 힘으로 성장해야 할 것이며, 노동자계급의 한단계 성숙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바랄 뿐이다. 프랑스의 대규모 파업의 승리는 여타 지역으로 전달이 될것이며, 사태를 주시하고 잇는 국가들에서는 피지배계급을 달래기 위한 개량적인 모습을 보여 줄 수도 잇지만, 그 한계점은 부르조아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시키기 위한 방식으로 이루어 질 것이다. 프랑스 및 여타 유럽의 피지배계급의 투쟁은 이젠 서서히 파고를 올려 나갈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나, 그 힘은 아직도 프롤레타리아트조직이 담보를 하지 못하는 상황에선 대안으로서 쁘띠부르조아가 자신들의 입지를 위해서 대중의 투쟁에서 자신들의 힘에 흡수시키고자 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을 잡고나 유지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조직이 필수이지만 아직도 그들의 활동은 대중에게 각인되지 못하고 대중과의 활동은 자기 만족으로 빠져가고 잇다. 이탈리아에서의 좌파계열의 선거 승리도 노동자계급의 승리가 아닌 의회주의로 매몰되어 버린 좌파계열의 승리인 것이다. 99번 패배할지라도 한번의 승리로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잡아서 새로운 국가건설을 해나갈 때만이 승리했다라고 할지 있지만 부르조아의 국가권력기구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릐화라는 것에 매몰되어서, 행정부에서 권력을 잡았다라고 한다면 승리가 아니라 개량주의로 빠진 전형적인 기회주의인 것이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전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잇는 자본의 이윤극대화는 독점재벌이라고 칭하는 삼성의 가전제품의 생선설비를 중국으로 이전하여 생산을 시작했으며 국내생산의 라인을 대폭 줄여서 공장이 비어 있으며, 현대는 미국의 앨라버마주에 자동차공장을 짓고 생산을 시작하여 앨러버마의 주민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7월 말 중국 장가항에 연산 60만톤 규모의 스테인리스 일관제철소를 준공함으로써 세계 3대 메이저 스테인리스사로 도약할 것으로 예상되는 포스코 등등의 재벌 및 기업들은 이젠 자국 내에서 더 많은 이윤을 얻기보다는 이윤의 극대화라는 절대 명제를 쫒아 외국으로 생산설비를 수출하여  기업의 이윤이나 매출의 증가가 바로 산업인력의 확충이라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고용없는 성장으로 나타나고 잇으며, 이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문제인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함을 보여준다. 생산설비의 이전에 따르는 노동인력의 감소는 서비스업의 비대화로 나타나며, 가진자들의 하녀나 기사로서 그들의 역망에 충실한 짐꾼의 역활로서 서비스업의 확대는 더욱더 처절한 양극화로 치달아 가고 있는 현실의 반영일 뿐이다. 또한 이러한 자본의 유출로 인하여 자본의 힘은 더욱더 강화가 되어가고 잇는 반면에 한 국가의 노동자계급의 힘은 약화 되어가고 있으니 막말로 노동운동이 강화가 되면 "너희 때문에 못해먹겠다"라고 하면서 다른 지역 또는 나라로 이동하면 가능하다라고 협박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 자본의 파업이라고 너스레 떨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이윤을 더 높이기 위해서 노동자 계급을 몰락시키면서 떠나는 그들은 이젠 한 지역의 한 나라의 자본가 계급이 아니라 이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여 자국의 시장을 개방화시키면서 자신들은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서 피지배계급의 힘을 쥐어짜 탈진 상태까지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이제 겁을 억고 있는 쁘띠부르조아들은 알아서 그들 앞에서 설설 기면서 대중에겐 투쟁을 외치면도 투쟁의 힘의 강도를 조정하면서 강력한 힘을 비축하는 것보단 풍선의 공기를 빼서 터지지 않을 정도로만 유지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쁘띠부르조아에겐 부르조아계급에게 자신을 유리한 값으로 흥정하기 위한 수단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이 필요한 것이며, 그 이상의 투쟁은 중간에 서성거리는 자신들을 위해서는 좋을 것이 없는 것이다. 화물연대의 투쟁이 전국적 파업에서 지역적으로 바뀌게 된부분이나, 철도공사의 파업에서 단합된 힘보단 분산 투쟁으로 전환 된 모습, 민주노총의 말로만의 총파업선언 등등의 투쟁의 지침 및 투쟁하고자 하는 의지보다는 자신만이라도 살고픈 계급적인 속성으로 나타나서 더 이상 잃을게 없는 노동자계급이나 자신의 삶을 위해서 힘을 쓸 수밖에 없는 현실에선 자신들의 힘은 분산되고 고립되어져 부르조아에게 각개격파 당하고  잇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의미는 지배계급을 위해서, 지배계급에 의한 유한한 착취를 보장해주는 피지배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주저앉아있는 현실은 지배계급의 힘이 강력함이 아니고 그들과 함께 해야하는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회주의자들이 올바른 방향성으로 투쟁을 제시하지 못하고 쁘띠부르조아의 정신으로 무장시켜 나약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법안의 국회통과를 저지한다라는 명문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대칭으로 노동자계급을 스스로가 분열시켜서 힘을 약하게 만들었으며, 정규직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배부름에 동참을 하기보다는 방관을, 그리고 자신의 이익이 줄어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행동으로 답을 보여주는 것이 노동자계급의 연대가 아닌 비  협조로서 반사적으로 부르조아의 이익에 보템을 주고 힘을 실어주는 역할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피지배계급의 투쟁은 아직도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방향점을 잡지 못하고 물결에 따라서 배의 방향이 유동적으로 바뀌어지고 잇는 상태이다. 자신들의 대안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부르조아 지배체제를 부수어 나간다는 것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라는 의미보다는 현재 존재하는 부르조아 체제를 개량화하고, 변혁시키며 그 국가 체계를 그대로 이용하겠다라는 어이없는 상태로까지 나타나는 현실 안주에 이바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자신들이 동경 해왔던 사회가 무너뜨려야 했던 사회를 이기지 못하고 패배했다는 허탈감 때문에 그 안에 존재 해왔던 객관적인 사실을 무시하고 억지 춘향으로 만들었다는 사실과 함께 스스로가 미화하고 싶었던 옛이야기 속으로 몰입하고 싶은 도망갈 자리를 만들었다는 데 의의를 둘 필요가 있겠다. 이미 자본주의라는 틀 속에서 그들의 국가형태를 그대로 이용하겠다는 좌파적인 시각은 개량주의의 전초단계라기 보다는 현시기의 좌파계열의 일반적인 형태로 자리를 잡고 있다. 사회주의를 외치고 잇는 조직이라도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현 자본주의 국가의 의회 내에서 권력을 잡아, 조금 더 발전된다면 행정부를 장악한다면 자신들의 뜻을 펼칠 것이라고 속으로 장담하고 있다. 국가의 권력이 무엇인지 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고, 계급의식마저 과감히 내버린 전형적인 쁘띠부르조아들로서의 변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것이 무엇이던가? 부르조아를 위한 부르조아를 의한 부르조아의 정치가 아니던가! 그런 국가권력은 어디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어디에서 실행하고 있는지는 대중들에게 제대로 선전선동하지 안하고, 선거라는 공간속에서 자칭 사회주의자들조차 마찬가지로 스스로가 권력을 잡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가지고 대중들에게 표를 구걸하고 있는 모습, 방향성이라는 틀보단 한 순간 또는 한 시기를 무사히 자신들의 안위와 명성을 위한 모습은 이미 계급적인 기반을 포기하고 부르조아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대체 상품으로 전락했음을 주시하고 잇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외치는 다함께, 해방연대, 그들의 대변인 민주노동당, 그들의 모체인 민주노조 등은 이미 노동해방이라는 대의를 포기하고 발전의 모습은 새로운 자본주의 내부권력의 대체세력의 모습일 뿐이며, 새로운 사회로의 모습으로 자본주의를 대처하고 사회주의로 발전하고자 하는 조직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보기가 힘들다. 말로만의 사회주의는 자신들의 변명을 위한 쉼터가 되었고, 대중들의 앞에서는 사회주의라는 말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방향타라는 의미보다는 환타지세계가 존재 할 수도 잇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잇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투쟁으로, 노동자계급이 자신이 권력을 가질 때만이 실현할 수 잇는 것이지,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 했다라고, 행정부에서 몇자리는 얻었다고 실현할 수있는 터전이 마련댔다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자본주의내에서의 노동자계급 나가야 하는 길이고 사회주의를 외치고 잇는 조직이 제시해야 하는 길인 것이다. 현실은 대중에게 어떠한 선전을 하고 잇는지 스스로 확인을 할 필요성이 있다. 곧 바로 이어지는 지방의회선거를 민주노동당은 몇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승리의 포석으로 삼아 그것이 바로 노동자계급의 승리로 선전 선동하고자 하며, 그 안에 소속되어있는 자칭 반자본주의적인 사회주의정치세력은 거기에 동조를 해서 같은 목소리를 내어 좀더 낳은 것을 원하고 있다면 표를 몰아달라고 애원을 하고 있다. 덤프연대, 화물연대 등등의 파업유보 및 낮은 차원으로서의 투쟁은 그들 스스로가 더욱 더 고립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민주노총이 투쟁의 힘을 스스로 약화시키고 잇는 시점에서 무엇을 가지고 그들을 더욱더 높은 투쟁의 열기로 끌어들일 수 있는가? 누구나 YES라고 할 때 NO라고 한다면 다구리를 당하고, 누구나 NO라고 외칠 때 YES라고 외치면 왕따를 당한다라는 책임감으로 따라가고 있는 좌파들의 모습은 참으로 한숨이 나온다. 자신들은 스스로가 높은 점수를 매기면서 아니라고 자족하고 있는다고 할 지라도 이미 함께 했던 다른 부류의 사람들속에서 제대로 된 자신의 주장을 대중들 앞에서 펴지않고( 못하고라고 하는 것이 맞는 듯 하다) 그냥 자신들끼리만 아는 언어로 가족적으로 떠든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을 갖기 위해서 노력했다라고 할 수는 없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위한 조직을 건설하는 일이다. 두 번째는 올바른 전술관을 가지고 현시기에 맞는 원칙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첫 번째 부분에 대해서는 여태까지 해왔듯이 프롤레타리아트 정당, 즉 혁명적 전위 정당을 건설해야 함은 누누이 이야기를 해왔다. 프로레타리아트는 당이 없다고 할지라도 투쟁을 전개 할수 있으며, 승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이 없다면 국가권력을 장악하지 못하고 유지하지도 못한다.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당을 건설해야 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라는 쁘띠부르조아 정당에게서 기대는 이미 포기하는 것이 좋다.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그 자리에 안주하고픈 사회주의자들은 이미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피지배계급을 위해 투쟁에 앞장서기보다는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계급협조주의인 것이다.

 

두 번째로서의 현시기에는 어떠한 전술입장을 내세워야 하는가하는 점이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간의 접점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올바른 투쟁관을 잡을 수가 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2005년 11월 중 제조업취업자수는 전년동월대비 10.7만명이 감소하였는데 제조업부문 취업자수는 이미 2005년 1월 이후 11개월 연속 감소하고 있었다.(SERI 경제포커스 제71호, 삼성경제연구소). 사태는 제조업내부로 들어가면 더 심각하다. 제조업 중 성장을 주도하는 업종인 전기/전자업종은 고용계수(고용계수는 산출액 10억 당 소요되는 피 고용자수를 의미)가 급감하고 있다. 전기/전자업종의 고용계수는 1990년 20.4명에서 2000년 3.8명으로 급감하여 성장주도업종임에도 일자리창출 능력은 급감했다"(해방 9호 삶의 파탄을 막고 인간다운 삶을 확보하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요구 이하 요구)라고 나타나고 있는 이유는 생산설비의 이전에 따르는 산업의 공동화 현상으로 노동인력의 급속한 감속인 것이다. 본사는 그대로 있고 제조설비는 상대적으로 절감할 수 있는 지역으로의 이동으로 인하여 국내 생산현장의 노동인력은 대폭적으로 줄어들어 생산수단의 발전에 따르는 노동인력의 자연스러운 감축이 아니라 자본의 이동에 따르는 감축의 결과로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노동계급의 투쟁의 의욕을 생존권의 문제로 다시 떨어뜨리는 악순환 과 더불어서 고용의 불안 요소를 잠재우지 못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비정규직의 문제가 비록 수면위로 올라와 잇지만 이 문제로 현재의 노동시장의 불안 요소를 없앨수 잇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다른 부분을 도외시하고 있기 때문에 고용불안정 부분은 계속해서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발목을 잡힐 수뿐이 없는 것이다. 정규직이 되엇다라고 할지라도 공장이전에 따르는 인력감축은 부르조아의 몫으로 그대로 남아있는 한 언제든지 노동자계급은 인력감축이라는 칼날에 투쟁이라는 선도성보다는 협력이라는, 자본가계급의 비위를 거스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투쟁으로 유지되어질 것이며, 현재 그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현대자동차노조의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의 미온적인 자세가 자신들이 정규직이라는 생활적인 여유가 가져오는 부분도 있지만 또 하나의 문제는 언제든지 노동유연화 정책으로 인하여 자신의 목에 칼이 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투쟁에 방관적이고 미온적인 자세를 취하고 잇는 것이다. 분리되어 있는 노동자계급의 힘을 하나로 모으려면 노동자계급이 누구에게나 부르조아 체계를 흔들어 자신들의 세상을 건설할 계기나 매개체를 가져야하며 더 이상 물러나면 그들은 사육장의 개처럼 언제든 도살장에 끌려나갈지 모르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을 주시해주어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사회의 상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 앞으로 나가야 하는 사회를 각인시키 위해서라도 우리가 지금 무엇을 가지고 투쟁을 전개해야 하는지를 제시해야 하는가하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전술의 핵심은 전략적인 승리를 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하며, 한나라의 유방이 초나라의  항우에게 전술적으로 계속적인 패배를 했다라고 할지라도 전략에 봉사를 하도록 유인을 했듯이 99번 패배와 승리의 주역으로 이끌어 갈 단 한번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현재의 패배라는 것에 목을 메어 패배감, 무력감에 빠져있는 좌파세력들은 만회를 해야 한다는 집착에 빠져 무엇을 대중에게 보여주었는지도 모르는 채로 대중들의 투쟁에 계급적인 입장을 포기한 채로 그들 자신의 한순간적인 이익이라는 비정규직철폐라는 구호에 이구동성으로 매달린다면 침소봉대하여 소탐대실하는 것이다. 현시기의 노동대중의 투쟁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명제는 비정규직 노동자대중의 정규직노동자와의 차별적인 임금 및 근로조건 때문인 것이다. 현시기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비정규직 정규직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유연화정책으로 인한 고용불안정이며,  이런 차별적인 요소를 노동환경에 제거를 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체제에서는 불가능하며, - 비정규직이 생겨난 이유가 이윤극대화에 따르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때문이다. 도랑 치고 가재를 잡듯이 노동대중의 투쟁력이 약화되는 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 세계자본주의에서는 확대되어 가고 있는 상태다. 이의 대안은 생산현장에서 권력을 장악 할 때만이 가능하겠지만, 현시기의 대안으로서 현장에서의 권력이라는 제안은 아직 까지는 시기 상조이며, 다만 최소한의 노동대중의 투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도 진정한 목적의식적인 활동을 위해서라도 노동자통제 제시하는 것이다. 노동현장을 노동계급이 관리 및 자발적인 생산환경을 만들어 나갈 때 노동대중간의 차별화는 없어질 것이며, 더욱이 고용유연화정책으로 인하여 나빠진 노동환경 및 자본의 이동을 막을 길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투쟁은 언제든지 생존권에서적인 문제부터 나타나며 그 끝은  정치투쟁으로 막을 내린다. 정치권력을 잡은 계급이 앞으로의 사회를 이끌어 나갈 것이며, 그 목적성을 가진 계급만이 목적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생존권적인 문제를 가지고 정치투쟁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해 갈 수는 잇지만 준비를 하지 못한 계급은 자신의 힘을 자신을 믿고 따라 준다라고 판단되는 계급에게 전가시켜 피지배계급은 또 다른 계급에게 종속을 당한다. 노동대중이 진정한 힘을 가지려면 권력을 장악해야하고 권력을 장악하고자 한다면 현시기에서 자신의 의지를 다른 계급에게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다. 중간에 동요하는 계급을 노동계급의 편으로 끌어들이던지 아니면, 적대계급에게 동조를 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으려면,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져야 하며 투쟁에 대한 뚜렷한 전망을 가져야 한다. 자본의 이탈에 따르는 - 자본의 파업이라고 제시하는 현시기에서 언제든지 이윤의 최대화를 위해서 국가와 민족은 부르조아의 법칙에 따라야 하는 현실에 자본의  이동을 자유롭게 하는 시장의 개방화시대에서 노동자계급을 가장 강력한 투쟁의 매개 고리로 잡기 위해서는 노동현장에서의 권력의 맹아일 수도 있는 노동자 통제를 나타내야 하며, 최소한의 자주적 관리를 제시해야 한다. 노동자통제가 아닌 비정규직철폐투쟁은 정규직 노동자대중과의 희생이라는 측면을 부르조아가 유포시키는 이데올로기에 노동대중을 자연스럽게 분열시키는 고리역활을 할 것이며 두 번째로는 현실이라는 내용 속에서 투쟁의 성과물을 대중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라는 의미를 제시하지만 말만 바꾼 또 다른 비정규직의 양산을 할 뿐이다. 세 번째로는 자본의 이탈에 따르는 고용의 불안 속에서 대중의 투쟁을 강화시킬 수가 없다는 의미이다. 자본의 이동은 부르조아를 위한 것이며, 프롤레타리아트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시장의 개방화는 농민의 농업생산물의 저가 공세로 그들의 터전을 잃어간다는 의미도 있지만 자본의 이동에 따르는 공장이전 공장폐쇄 등의 힘으로 노동대중의 삶의 터전을 잃어 가게 한다는 의미와 이들을 무마하기 위한 저가 농수산물의 유입으로 또 다른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시켜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미 중국산 공산품에 의해서 잠식되어가고 잇는 한국시장은 더 싼 가격으로 판매하기 위해서 자국내의 생산 시설을 포기하고 가까운 중국 인도 방글라데시 등등으로 진출했으며, 그에 한국의 노동시장은 더욱더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 상태이기에  자본에 대항하고자 한다면 비장규직 투쟁이라는 협소한, 눈앞의 의미보다는 더 멀리 바라볼수 있는 자세로서 필요한 것이 바로 노동자 통제인 것이다.  

 

부르조아는 힘은 뭉쳐있고 그들의 자신들간의 협조 및  정보를 공유하여 피지배계급을 지배할 수 있는 형태이고 프롤레타리아트는 흩어져 있으며, 정보를 언론의 교묘한 통제로 제대로 연결이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다. 현재 우리 프롤레타리아트의 실정인 것이다. 약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지배계급을 분열시키고 그들의 힘을 약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지방선거라는 좋은 재료인지 악재인지는 지나 봐야 알겠지만, 눈앞의 이 공간들은 분명히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은 분명하다. 노동계급은 서서히 불꽃을 피우려고 하지만 뒷받침해줄 무기가 없어서 힘들다. 아무리 조직이 없다라고 하더라도 노동계급은 부르조아에게 자신의 색깔을 선명하게 제시할 것이며, 그 색깔을 더욱더 강렬하게 비춰주는 것이 노동자통제이며, 노동자국가 건설인 것이다. 혁명의 길은 멀다. 기회주의자들이 판치는 노동현장에서는 더더욱 멀어질 수뿐이 없다. 노동자계급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사상으로 무장된 조직이 있어야 하며, 제대로 된 전술 지침이 존재 해야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무기는 조직이며, 총알은 전술인 것이다. 무기가 없다고 하더라도 총알을 발사 할 수 있는 뇌관이라도 만들어 보자. 비정규직 철폐가 아니라 노동자통제를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노동자통제 없는 비정규직 철폐는 또 다른 고용불안인 것이다. 불안감속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노동자국가 건설이 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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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14 20:52 2006/04/14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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