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조아 지배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의 질서를 만드는 계급은 노동계급이다. 함께 일하면서 집단의 공동체의식을 생활속에서 체험하는 계급, 하나의 개인보다는 집단의 이익에 먼저 매달릴 수밖에 없는 존재들 이 노동계급이다. 부르조아에게 맞서서 싸울땐 혼자라는 것은 보잘것없이 잡초지만 뭉치면 핵폭탄이 되어 사회의 근본질서를 무너뜨리는 존재인 노동계급이다. 이런 노동계급의 존재가 그 힘을 잃고 흔들려서 부르조아에게 연전연패를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부르조아가 존재하는 한 영원한 맞수인 노동계급은 자신의 적에게 패배를 당하는 원인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하는 선진노동자들 덕분에 오늘도 지역적으로 시간적으로 고립이 되어 힘겨운 투쟁을 하고 잇는 것이다. 부르조아의 힘은 지배계급으로서의 모든 장점을 살리고 피지배계급에겐 분산되어 고립시켜 힘을 약화시키는 단순한 정책을 실행하여 재미를 톡톡히 보고있는 중이다. 노동대중의 힘이 약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제대로 된 분석도 없이 망둥이가 뛰니깐 꼴뚜기도 뛰는 모양으로 아무데서나 비정규직 철폐투쟁만을 내세워 노동현장의 투쟁력을 갉아먹고 있다.

 

자본주의 철폐 反자본주의를 외치는 여타 조직들은 자신들의 마음과는 다르게 대중에게 정확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미흡한 역량으로 인하여 半자본주의로 각인시키는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절반의 승리를 목메고 있는 선진노동자들의 맥빠진 모습은  자본주의를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새로운 안식처를 찾아다니고 있는 기회주의적인 작태인 것이다. 오늘의 승리는 내일의 승리이며, 영원한 자신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는 바보들은 언제든지 존재하며, 그런 정신으로 전술을 채택하고자 하는 마음은 대중을 광신도로 만들어 보고 싶어하는 황빠주의자들의 세뇌교육 일뿐인 것이다.  프랑스에서의 좌파들의 승리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피지배계급들의 몸부림에 의한 부르조아의 일시적인 물러섬일 뿐이며, 남미에서의 좌파의 승리는 쁘띠부르조아의 승리며 허울뿐인 피지배계급의 승리인 것이다.

 

IMF의 체제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국의 시장 개방은 준비가 된 재벌들의 잔치의 시작이며 자본의 이동을 원활하게 해주어 그동안 국내에서만 숨죽여 살아가던 부르조아에게 새로운 심장을 이식 시켜주어 활발한 활동을 하게 만들어 주었다. 현대의 미국과 베이징에의 공장의 건설은 수출이라는 미명으로 국내의 노동대중을 착취를 했던 체제에서 자신들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선 더 낳은 조건이 주어지는 해외로 나가 고용없는 성장이라는 기현상으로 부의 편재가 집중이 되어 양극화가 한층 심화되는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중국의 공장이 가동이 되면 한국의 공장에서의 인원감축은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며, 노동대중의 고용불안 속에서 대중의 투쟁은 비정규직이라는 문제에서의 집중은 소탐대실하여 노동대중의 힘을 분산시키고, 사회의 주인은 부르조아라는 것을 각인시키는 닭 쫓던 개 지붕만을 쳐다보는 격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것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관계없이 흐름 속에서 나타날 수뿐이 없다. 부르조아 지배체제를 그대로 둔 노동자의 권익은 항상 다람쥐 챗바퀴를 돌 것이라는 기본명제는 눈앞의 이익을 찾아만 다닌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약한 생존권의 문제로 빠져들게 되고 노동자계급은 투쟁에 묻혀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지도 못한채로 생존의 의욕을 상실하여 혁명의 이름이 라는 형식에서 반혁명이라는 내용을 담아 찬양을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FTA는 자본의 이동을 원할 하게 해주며 경쟁력이 약한 자본은 잠식을 당하여 자본의 집중을 용이하게 해준다. 한국의 자본주의에 대항하고자 하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FTA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정리해야 하며, 그에 상응하는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에 따르는 고용유연화 정책으로 세계경제가 몸살을 알고 있지만 20%의 부를 위해서 60%가 희생하고 있는 자본의 횡포는 강력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무기가 존재하지 못하는 한 계속적으로 이루어 질 것이며, 자본주의는 꾸준한 발전을 보일 것이다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는 선진노동자들과 여타 조직들의 내부적인 모습은 모르겠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목소리만 반자본주의, 사회주의를 외치고 잇다는 사실이다.

 

"양극화의 원인은 바로 IMF 이후 지금까지 계속된 경제 위기와 신자유주의 정책이다."(대기업 노조 양보론에 속지 말라 | 다함께 제 72 호 ) 라고 주장하면서 대책으로는 "엄밀하게 말해, 김종철 후보는 “유럽에서 일반화된, 이미 유럽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말하고 있다.” 그의 말마따나 이마저도 우리 사회에서는 “금기시”돼 있지만 말이다......그럼에도 김종철 후보가 “교육·의료·교통·에너지 등 우리 생활의 필수 요소에 대해 ‘공공성의 원리’가 필요하다는 점을 설파하는 데서 한발 나아가 사회주의적으로 재편돼야 한다는 점을 선언하겠다”는 것은 두 가지 긍정적인 면이 있다."(김종철 후보의 사회주의 선거운동을 방어하라 | 다함께 제 77 호 - 솔직히 본인은 다함께의 입장을 김종철동지가 대변하는지는 모른다. 다만 다함께의 신문에 나와 있기에 대안의 입장으로 제시한 것으로 판단하여 집필한다)

 

그런데 계속된 경제위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장주도업종에서 일자리창출능력이 급감하고 있는 것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이는 이 업종에서 자본 중 불변자본비율(거칠게 말하여 기계 등 생산수단이 차지하는 비율)이 급속히 상승하여 이 업종의 높은 성장률에 비해 노동력의 수요가 별로 늘지 않고 있으며 이 추세가 역전될 가능성도 높지 않기 때문이다. 성장주도업종에서의 일자리 창출능력의 급감은 한국자본주의의 일자리창출능력이 급격히 축소되게 만들고 있다."(해방 9호 삶의 파탄을 막고 인간다운 삶을 확보하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요구 이하 요구)

 

바로 다른 내용이 보단 일자리 창출능력이 급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변자본의 비율이 급속히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자유로운 해외로의 진출로 인한 국내 생산시설의 기반이 무너진다는 사실에 있다는 점이다. 기업의 본사가 국내에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기업의 이윤이 높아진다는 사실이 바로 경제의 활성화가 아니라 양극화를 활성화시킨다는 점인 것을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대안이 아닌 대안으로서 노동운동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으로  올바른 실천과제를 제출하지 못하는 형상까지 이르게 되었다. FTA에 대한 반대 운동은 농민과 스크린 쿼터 속으로 파묻혀 그들만의 잔치로 끝날 것이고, 이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지원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에 따르는 노동계급의 생사권의 박탈 문제도 그 안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조직간의 사상은 밥그릇 싸움이라는 것으로 표현되어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전진, 다함께, 노동해방실천연대, 사회당 등등의 좌파라고 자처하는 조직은 대중과 함께 하고자 하는 의지만 가상할 뿐 대중을 악의구렁텅이로 몰아 넣으려는 가련한 음모의 희생양인 것이다.

 

민주노총의 비정규직 법의 개악저지를 위한 총파업의 시도는 노동운동의 분열된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어서 부르조아에겐 행운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겐 악몽을 꾸게 만들었다. 한정된 조건에서의 싸움은 이해당사자간의 싸움으로 일단락 지어질 뿐 노동계급 전체의 기본욕구를 대변하지 못한 투쟁의 방식은 조직내의 힘 겨루기와 더불어서 갈등만 양산할 뿐이며, 계파간의 주도권 싸움으로  항상 비추어 질뿐인 것이다. 비정규직 법의 개악을 저지하는 투쟁에서는 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을 소외시킬 수뿐이 없고, 이는 노동자 계급의 전투력에 심각한 타격을 가져 온 것이다. 이는 현 노무현 정부의 의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외치면서 노동자들을 임금 삭감·동결, 대량해고와 비정규직화로 내모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구해 양극화를 촉진해 왔다......하지만 노무현은 또 책임을 전가하려 했다. “대기업 노조는 단체협약상 높은 고용보장을 받고 있어서 일단 고용하면 실제로는 해고가 어렵고 … 결과적으로 교섭력이 강한 소수의 노동자들은 두터운 고용보호를 받고 있는 반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더욱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대기업 노조 양보론에 속지 말라 | 다함께 제 72 호 )

 

고용하면 해고가 어려운 국내의 현실에서 인원감축은 기업이 어렵다면 노조와의 타협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대량의 해고자를 양산하여 언제든지 해고당할지 모른다는 압박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노동계급에게  자신의 급박한 생존권이 아닌 것에 목숨을 걸고 싸우라고 한다면 기사도 정신을 가진 동키호테를 제외한 누가 투쟁을 하고자 하겠는가!  현재 정규직 노동자계급에게 노동귀족의 모습을 찾는다는 것보다는 투쟁의 명분이 생존에 와 닿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동지들 스스로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투쟁을 안한다고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를 욕하고 외면하는 것은 함께 투쟁을 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가지 못한 선진노동자들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외면한 누워서 침 뱉는 격이다.

 

비정규직 문제는 전 세계적인 자본주의나라에서는 보편화 되어있고 늘어나는 문제이지만, 이문제의 핵심은 바로 고용유연화 정책으로 인한 것이며, 신자유주의 정책의 기본적인 내용인 것이다. 이윤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것은 자본의 기본속성이다.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인건비를 절약해야하며, 이는 노동시장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을 통하여 언제든지 해고와 임금 축소를 야기 할 수 있는 토대 마련이 되어야 하며, 더 낳은 조건이 존재한다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자리여야 한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통하여 노동계급은 하루하루 자신의 앞날을 이야기하지 못하며 비정규직노동자 조차도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는 존재로 여기게 되어 노동계급간의 분열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적인 노동계급인 것이다.

 

그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노동계급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과 함께 한 지역의 또는 나라의 경제를 더욱 더 불안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면서 노동계급에 대한 압박감으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에 자유로운 이동에 따르는 통제가 필요하며 통제는 생산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하며, 노동계급이 통제 관리하는 시스템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동자통제인 것이다. 고용불안의 문제로 인하여 생기는 문제는 노동계급의 국가 건설이라는 목적을 제시하고 그 사회의 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명확한 계급적인 대안을 제시할 때만이 대중의 투쟁에 대한 단결된 모습을 가지고 부르조아에게 철퇴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이구동성으로 한목소리는 낸다고 한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며, 올바른 계급적인 입장을 제시할 때만이 쁘띠부르조아와의 차별성을 노동계급에게는 목적의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대안이 아닌 비정규직이라는 문제로 한정된 투쟁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의 분열과 지역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제한된 소수 인력으로 투쟁의 골만 깊어가게 만드는 역할을 할 뿐이다.

 

혁명의 이름으로 반혁명을 찬양하진 말아라! 
동지들이 혁명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다면 먼저 혁명적인 노동계급정당을 만들어야 한다.
동지들이 혁명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다면 제한된 공간의 목소리를 나타내어서는 안된다.
노동계급의 입장을 올바로 제시하는 사상은 노동계급의 국가 건설이다.
노동계급의 이름으로 고용불안 요소를 제거하고 양극화 현상을 없애는 것은 노동자국가가 건설되어야 하는 것이며  노동자통제가 이루어져야하는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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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16 12:52 2006/04/16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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