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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23
    친절한 금자씨 문학적인 크리티시즘.
    가나니점 필립

친절한 금자씨 문학적인 크리티시즘.

 

금자, 감옥에서 13년이라는 시간을 보낸다. 영화는 그녀의 열렬히 종교적인 감옥안에서의 삶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전도사에 의해 스카웃되듯 종교에 연루된 그녀의 감옥밖에서의 첫번째 행동은 “why don’t you screw yourself.” (너나 잘하세요). 여기서 우리는 금자의 감옥안과 밖에서의 다른 행동에 의아함을 가지게 되며, 감옥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고싶다는 의문을 품지 않을수 없다.
 
빵집에서 같이 일하게 될 소년이 묻는다 “누나라고 불러도 되죠?” 금자 대답한다. “그냥 금자씨.”
남파간첩으로 30년을 복역한 치매노인이 금자에게 말한다. “이 꽃을 너에게 준다. 동지에게는 원수가 있으니.”
간통죄.
마녀 – 죄수들간의 왕, 죄수들은 다 같은 죄수이다. 죄목이나 죄의 무게가 다를뿐 감옥안에서는 같은 죄인일뿐. 하지만 마녀가 존재하면서 죄수들간의 계급격차가 생기는것은 마녀로 인해 핍박받는 죄수들에게는 하나의 적대시 할 대상이다.
금자가 “마녀”의 이름을 이어받게되고 “마녀”가 완전히 다른 생활을 다수의 죄수들에게 제공하게 된다는것은 중요하다.
“자기 스타일이 많이 변했네, 왜이렇게 눈은 시뻘겋게 칠하고 다녀.” “친절해 보일까봐.” 금자는 자신이 친절하지 않다는걸 보여주려한다. 그래서 빨간 눈화장은 그녀가 말한대로 친절하게 보이지 않기 위한 수단인것이다. 비록 그것이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소하게 느껴지더라도 그녀는, 그녀의 죄수동료들에게 무관심한 태도에서도 나타나듯이, 남의 눈치볼 필요없이 그녀의 할일을 할 셈인거다. 그럼에도 모든 죄수들이 그녀에게 변했다고 말하는것은 그녀와 대부분의 사람들 사이에 큰 오해가 있다는것을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담당형사와 금자의 만남에 담당형사의 아내와 금자의 어린 빵집 동료는 지극히도 감정적이고 이기적인 태도를 보인다. “누구야?” 전혀 모르는 사람에 대해 질문하고 이야기 하지만 대답에 따라 금방이라도 자신의 태도나 행동을 바꿀 태세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지독하게도 전문적이고 사무적인 관계인 “형사”와 “살인용의자”. 실제로 당사자들은 너무도 차분하지만 그주위의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얼굴을 붉히는것이, 이 장면에서 실제로 어떤일이 있었는지 더욱 잘 아는 금자와 형사를 주인공이라고 봤을때 주변인인 아내와 어린 빵집 동료는 어쩜 전문성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이해와 실천이 떨어지는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것은 아닌지…
금자의 범행증명 회상장면에서 전문성이 떨어지는 현실에 대한 비판은 계속된다. 사람들은 악마 물러가라하며 예수를 찾고, 사진기자들은 백선생이 옆에서 승리의 스트라이크 사인을 금자에게 태연히 보내는 동안에도 금자 – 범인이 아닌 – 를 쉴세없이 찍어대느라 정신이 없다. 금자가 마네킹에 나비고름을 메며 당황하지만 우르르 터지는 플래시 발광 소리와 함께 기자의 전문성은 하루살이 마냥 사라진다.
“그러니까 유괴범이 유괴범의 아이를 유괴한거야.” -그러니까 노동자가 노동자의 노동을 착취한거야.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착취된 노동자 부모들의 자본주의 안에서의 무력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꾸려고도 하지 않는 게으름으로 인해 아이들의 고난은 운명적인것이 되었다. 금자도 그랬지만 지금의 금자는 다르다. 직장에서 가불도 3개월씩치씩 자신의 전문성으로 꿀리지 않고 이루워 낸다.
아이는 엄마를 금자라고 부른다. 엄마일수 없고 금자일수 밖에 없는거다. 자신의 어린시절 무력함 속에서 생겼던 딸에게 볼품없고 분노섞이기만한 현실을 준것이 시간이 지나서 다시 찾은 가족안에서의 관계에서까지도 이어지는거다. 여기서, 나는 한국의 전쟁이후의 지난 근대역사를 떠올린다. 힘이 없었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역사가 정해졌고 그로인해 근 60년간 우리는 변화를 꿈꾸기 힘든 부패의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는것에 큰 공통점을 찾았다 …
백선생의 직업 – 영어강사 – 프로페셔널리즘의 상실 – 흉내내기식의 껍데기 뿐인 우리사회의 부패를 보여줌
금자는 왜 벌써 죽어서 묻힌 차가운 백선생의 얼굴을 향해  총알을 두발 남긴후 총을 백선생과 함께 묻을까?
“생일축하합니다.” (happy birthday song) – “sorry, it felt like birthday.” 아이를 잃은 사람들의 복수끝에 흘러나오는 생일 축하노래는 혼돈스럽고, 의아하다. 이런 아이러니 를 모두들 합창하며 되새긴다. 노래의 이유를 알건 알지 못하건 현재 그들의 상태가 행복하건 불행하건 빵집에 모인 하나의 인생의 주인공들은 반사적인 행동을 보일뿐 자신들의 모습이나 행동에 주체인지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리고 이들의 행동의 비논리성을 더욱 확신시키는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배고픔에 케이크를 먹다가 계좌로 돈을 넣어주냐는 질문에서 “프랑스에서는 천사가 지나가는거래요.” 라며 뭐하나에도 일관성을 보이지 못하고 이끌려 다니기만 하는 군중심리를 꼬집어 낸다. 감독은 극단적으로 현실적인 행동과 비현실적인 행동을 나란히 배치하며 우리네 모습을 꼬집는다, 극중 금자의 얼굴에 나타나듯이.
복수후 금자는 벌건  눈화장을 지운다. 그리고 그녀의 발아래로 흐르는 원모의 구슬 (marble), 그녀는 약간은 뿌듯한 얼굴 표정을 보이며 그녀의 생각을 아직은 어린모습의 원모에게 이야기 해주려 한다. 하지만 금새 자란 원모는 그녀에게 제갈을 물리며 아무 이야기도 듣기 싫다는듯한 표정을 짓고는 사라진다. 그렇다, 원모에게는 사실 아무것도 변한것이 없다. 그의 부모는 돈문제에 이혼문제 시달리는 삶을 계속하고 있고, 원모에게 사죄하지 않는다. 금자는 그녀가 사죄를 하는 마음으로 행동으로 옮긴 일이지만 이미 끝난일이다. 원모는 죽었고, 그때 원모가 죽게 놔두었던 패행의 사회는 그대로다. 이 영화속에서는 마녀이고, 천사인 금자조차도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거다. 그리고, 그녀는 피해자에 의해 올바르게 괄시받아 지는것이다. 마치 세월이 지나고 청년이 기성세대가 되어도 사회의 모습이 변하지 않고 부패한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는것처럼. 다시 말하자면 원모는 사회의 부패로 죽었지만 사회는 원모에게 사죄를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변화는 없다. 한마디로, 금자도 백선생도 같은 죄인일뿐이다. 백선생이 말하듯이, “세상엔 완벽한 사람은 없는거예요, 사모님.”
 
“이금자는 어려서 큰 실수를 했고, 자기 목적을 위해 남의 마음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어릴적 자신이 원하던 영혼의 구혼을 끝내 얻지 못했다.” … “나는 그럼에도 그렇기때문에 나는 금자씨를 좋아했다.”
금자씨는 용서받지 못하지만, 사랑받을수 있었다. 비록 그녀가 더이상은 차가운 눈을 향해 순수하게 입을 벌리고 무죄스러움을 감미하지 못하더라도 세상을 둘러싸는 흰눈은 그 흰눈의 맛과 의미를 아는 사람들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 연대감을 줄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금자가 더이상은 자신을 돌릴수 없데도 그녀의 노력은 그녀를 아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녀를 그럼에도 사랑하게 할것이다.
이쯤에서 금자가 죽은 백선생의 얼굴에 총을 쏜이유가 나온다. 영혼의 구원을 갈구 하지만 방법을 모르는 금자는 비논리적으로 이미 죽은 백선생의 얼굴에 총을 쏨으로써 구원이 될까 하는 어렴풋한 기대로 쏜것이다. 총을 쏘기 전이나 쏜 후나 그녀에게 변한것이 없다는것은 그녀의 행동을 통해 잘 나타나기도 한다.
“안녕, 금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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