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제되지 않은 생각들....

 

나에게 대중이란 무엇일까?  보다 친숙한 것은 계급일거다.

하나의 노동계급.

지난 몇년동안 아니 대학에 갓 입학한 후부터

줄곧 내 앞에 놓인 것은 대중이 아닌 계급이었다.

심지어 "민족"이라는 것이 내 앞에 거대한 괴물처럼 다가올때조차도

한 점 흐트러짐없이 계급, 노동하는 계급이었다.....


이렇게 동일성, 내가 가진 신념을 대변하고 표상하는 것으로써의 계급은

언제나 손쉽게 잡아둘 수 있었고 손쉽게 다가갈수 있었던 대상이었다.

그렇게 몇년을 헤매기도하고
노동하는 계급에 연대/동조/지지/참여 등을 하면서도 한번도 의심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를 잡아두고 가두어 두었던 동일성 혹은 억지로 합체해본 조립장난감처럼

생동/생기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현실, 그 속에서 언제나 부차적이고 수동적으로 변해가는

나의 삶의 방식들.

더욱더 동일성이 와해되는 순간들 - 가령 노동하는 계급은 파업의 순간과 일상에서의 삶의 방식이

마치 전혀 다른 이중성, 이중인격을 가진것처럼 보였다.

그런 동일성이 와해되고 이해하기 힘든 이중적 삶의 방식에 화들짝 놀랄때마다 몰려드는 배신감은

항상 나를 운동이라는 것,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 나의 삶 자체를 쉽게 붕괴시키곤 했다.


결국 내가 나 스스로를 옭아매는 방식으로써의 "동일성"에 대한 추구,

즉 노동하는 계급에 대한 맹목적 헌신은 알고보면 자기기만이고 자기 헌신/희생을 가장한

자기 못남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령 내가 최근 겪었던 지역의 정치운동판에서 보여지는 철저한 권력지향적인 동지(?)들

- 실은 "동지"라는 단어 자체가 동일성의 거대한 압력이다.

난 이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는데 유독 파업의 현장이나 선거판에 가면 이 단어들이 난무하는

것을 본다. 거의 강압수준으로 나를 "동지"로 칭하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내내

 "내가 왜 저들과 동지일까?"하는 물음을 하곤 했다.

운동하는 의지가 같아서일까? 하지만 선거철/ 파업철이 지나고 나면 

달라지는 삶의 조건들에 의해서 그들은 중산층으로살고 난 여전히 허덕이는 빈자의 삶을 사는데도,

그리고 운동이라는 것에 매달려 구르고 또 구르고 있는 내가 왜 이런 시기에 저들과 같아지는가?

하는 물음을 하곤했다.

선거철 혹은 진보정당 운동을 논의하고 실제 출마/선거운동을 할때의 모습조차

아니 "진보정당"을 거세하고 나면 차라리 쳐다봐주기 안타까울정도의 이중적인 삶의 진상들이

금방들어나 버리는 그들의 삶이란....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에게는 내가 아니 나를 "동지"로 묶어두려고 하고

나 또한 속편하게 같은 진보적 정치운동/진보정당운동을 함께하는 하나의 "무엇"으로 배치해두는

행태들속에서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오는 배신의 향기만 풍겨나온다.

 

그렇다면 그렇게 스스로 묶어두려했던 동일성의 "무엇" - 가령 노동계급, 민중, 동지 등-이 아닌

대중이란 나에게 무엇이고 또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

책에서 이야기하듯 스스로 "동일성"으로 상징되어온 것들을 폐기한다면

우리는 과연 대중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만나 접속하고 함께 할까 ?

"대중"을 흐름으로 파악한다는 것, 단순이 "인간"중심이 아니라 인간,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

그 관계속에서 배치되는 흐름과 다양성으로써의 대중을 실제 깨닫고 그들과

어떤 접속고리들을 찾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아 보인다.

어디서나 그렇지만 아무런 동일화 작용을 거치지 않은 누군가를 내가 받아들이고 또한

내가 다가간다는 것은 실은 나의 삶의 지반자체가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일수도 있고

특히 "대중의 죽음"으로 이야기되어지는 그 "배신"의 끝은

어쩌면 근근이 버티어 온 내 삶의 모든 것들을 좌절 혹은 실패속에 처박아둘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처한 물리적 상황들 즉 내가 살아가는 지방도시에서 "대중"은

"흐름"보다는 정체되고 스스로 죽어가고 있는 자살로 뛰어나가는 "대중"인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현실이라는 폭력과 "지역공동체(?)"라는 또다른 내재화한 폭력앞에서

쉽게 보수화 혹은 파시스트화 해버리는 "대중"은

어쩌면 내가 항시적으로 "동일성"에 나를 맡겨 보호하려 했던 가장 큰 원인이자 내 삶의 한계일 것이다.

이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로서, 차이와 다양성의 "대중"을 내 앞에 불러세워놓고

이제까지의 방식이 아닌 다른 접속을 준비해야 한다면 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

 

결국 지금 나에게 남는 것은 "동일성"이라는 피난처를 나 스스로 제거하는 방식으로

"대중"이라는 흐름에 나를 던져놓는 것이 아닌 나스스로 흐름을 만들어가는 것일테고

"유일성"이 아닌 나 스스로를 다양화하는 것,

내 속의 다양성을 끄집어내서 다양한 "무엇"과 소통하는 것일 테다.

 

출발은 어쨋든 내 속의 다양성을 끄집어 내는 것에서부터.
그리고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흐르게 소통하게 만드는 것에서 부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03/26 10:53 2009/03/26 10:53
http://blog.jinbo.net/com/trackback/10
su  | 2009/03/26 11:10
"'지역공동체'라는 또다른 내재화한 폭력"이 무엇인지 살짝 여쭈어봐도 될까요? 반갑습니다. su라고 합니다.
앙겔부처  | 2009/03/26 16:00
아~~ 요즘엔 운동에 대한 고민을 담을 글들이 많네요. 모두 움직이고 있다는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