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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자본주의론의 반 맑스주의 비판

토니클리프와 그 변종 그룹들의 국가 자본주의 론을 비판하는 좋은 자료라 생각되어 퍼 옮깁니다. 이 글은 "국제 공산주의 동맹"의 전신이었던 "스파르타쿠스 동맹"이 1977년과 1982년에 출판했던 "소련은 왜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가?" 내용의 일부입니다. 국제 공산주의 동맹으로부터 분리한 "국제 볼셰비키 경향"의 한국어판 홈페이지에 전체 번역본이 있고, 이 것 또한 그곳으로부터 퍼왔음을 밝혀둡니다. 5. "국가 자본주의" 이론의 반(反)맑스주의 --- 트로츠키주의에 입각한 비판 <편집자 주: 이하의 논문은 스파르타쿠스동맹의 중앙위원 조지프 씨모어가 1975년 12월 스파르타쿠스 청년동맹의 미국 동해안 연수회에서 행한 강연 내용을 편집한 것이다.> 일부 정치 경향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소련의 집단적 경제체제는 "국가 자본주의"체제이며 소련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자본가 계급"이다. 오늘 강연은 이들이 제시하는 이론적 주장들의 일부에 초점을 맞추겠다. 특히 소련 경제가 자본주의 운동법칙에 지배되고 있음을 증명하려는 주요한 주장들을 논의해 보겠다. "국가 자본주의" 이론들의 최소한 일부는 경제주의 그리고 유사(類似)무정부주의에 입각하여 노동계급 독재 체제를 반대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 자본주의" 이론은 레닌 치하 러시아 노동자국가의 경제정책을 반대하고 있다. 또한 스탈린 치하에서 진행된 혁명의 관료적 퇴보에 대항하여 트로츠키주의 좌익반대파가 주창한 경제정책에도 반대한다. 이 점을 나는 오늘 강연에서 드러내 보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련에서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일소하고 노동자 민주주의와 소비에트 기관들을 소생시킬 정치혁명 이후 트로츠키주의 정당이 취할 경제 조치들에 대해 논의해 볼 것이다. 우선 소련의 퇴보한 노동자국가가 실제로 드러내고 있는 경제구조를 간략히 그리고 경험에 입각하여 묘사해보겠다. 소련에서 현재 중앙 경제계획을 입안하고 감독하는 관료기구는 고스플란(Gosplan)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기구는 국가 최고의 기구인 국무회의(Council of Ministers)에 직속되어 있다. 흐루시초프 정권 말기(1958년-64년)에는 경제의 지방분권화가 순전히 분파적 목적으로 도입되었다. 이 시기를 제외하면 소련경제는 전국 차원의 수직적으로 통합된 "산업부서 체제" 예를 들어 비철금속부, 식량산업부, 섬유부 등을 통해 운영되어왔다. 이 부서들은 강력한 권한과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코시긴은 1930년대에 섬유부 장관이 되어 처음으로 주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 체제의 최하 단위는 기업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생산의 기술적 단위이다. 공장, 국영농장, 광산 등이 여기에 속한다. 1973년에 행정 관료들이 수없이 교체되면서 동시에 경제체제의 최하 단위는 기업에서 여러 연관기업들로 구성된 기업연합으로 바뀌었다. 이 변화의 의의가 지금 시점에서는 분명하지 않으므로 기업을 경영과 회계의 기본 단위로 인정하고 얘기를 해나가겠다. 고스플란이 산업부서들에게 하달하는 경제계획은 물리적 단위로 표현된다. 강철이나 석탄 몇 톤, 판유리나 옷감 몇 평방미터 등등이다. 관료적으로 퇴보한 소련을 비롯하여 어떤 노동자국가에서도 경제는 임노동에 기초해야한다. 따라서 물리적 단위로 표현되는 계획과 연관되는 것이 바로 제품의 생산비와 가격을 반영하는 일련의 재정적 흐름이다. 소련 경제에서 모든 제품의 가격은 시장의 작동방식이 아니라 관료집단에 의해 행정적으로 결정된다. 가격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기업이 자기가 생산한 제품을 판매하거나 생산 투입 물품에 대해 지불하는 도매가격이 있으며 최종 소비자를 위한 책정한 소매가격이 있다. 기업가격(도매가격)은 평균생산비용에다 이윤을 덧붙인 것이다. 1967년 이전에 이윤은 생산비용에 연동되어 덧붙여졌으며 가격 전체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이윤 가운데 25%는 기업이 가지고 가고 나머지는 관련된 산업부서와 정부예산에 귀속되었다. 1976년 이후에는 이윤은 고정자산의 가치에 연동되어 덧붙여졌기 때문에 이전보다 비중이 더 커졌다. 이 결과 이윤의 40%가 기업의 몫이 되었다. 소련의 "이윤" 소련을 "국가 자본주의" 체제라고 주장하는 다수의 논객들은 소련 경제에 존재하는 이윤을 대단히 중요하게 보고 있다. 특히 모택동주의자들의 조야하고 주관주의적-관념주의적 "국가 자본주의" 이론은 소련 경제의 "이윤"을 "자본주의"와 동일시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혁명공산당(Revolutionary Communist Party)은 자신의 소책자 [소련에서 자본주의가 복귀한 방식]에서 소련의 1966년 포스터를 실으면서 독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 그림에는 소련의 노동자가 루블화 다발을 들고 있는데 이 다발에는 "이윤"이라고 크게 글씨가 박혀 있다. 그러나 소련에서 기업이윤은 기업이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는 교환의 보편적 수단(화폐자본)이 아니다. 단지 기업이 고객 기업에게 자신이 생산한 제품을 넘겨준 후 받는 세금일 뿐이다. 이렇게 창출된 이윤의 일부는 제품을 생산한 기업에게 할당된다. 그러나 이것을 지출하기 위해서는 기업은 상부 경제기관에서 작성한 아주 엄격한 지침과 지시에 따라야 한다. 제품을 생산한 기업이 책정하여 제시하는 제품 도매가와 소비자의 소매가 사이의 차액은 판매세인데 이것은 소련 경제에서 규모가 매우 크다. 이 판매세와 기업 이윤은 소련 정부가 교육, 보건, 군사, 투자 등의 분야에 쓰는 자금의 주요 원천이다. 중앙에서 계획하는 경제의 외부에 존재하는 유일한 주요 부문은 농업이다. 소련 농업의 총생산량 가운데 4분의 1은 국영농장에서 나온다. 국영농장은 공식적으로 기업과 같은 방식으로 운영된다. 집단 농장은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으며 곡물을 주로 생산한다. 곡물은 국가가 정해진 가격을 주고 강제로 징발한다. 농업 총생산물의 30%는 주로 과일, 채소, 육류, 가금류 등에 집중되어 있으며 농민의 개인적 소유인 텃밭에서 나온다. 이 가운데 약 50%는 농민의 개인시장을 통해 소비자에게 공급된다. 집단농장의 농민을 제외하면 소련에서 노동자들은 법적으로는 어느 곳에서든지 일할 수 있다. 행정적 또는 강제적 수단이 아니라 임금의 차이에 따라 노동자들은 직장을 선택한다. 이를 통해 각 분야에 필요한 노동량이 주로 할당된다. 법에 따르면 소련 시민은 태어날 때부터 집단농장에 소속되어 당국의 허가가 없으면 여기를 떠날 수 없다. 그러나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이 법은 강제된 적이 없어서 죽은 법이 되었다. 배급되는 주택을 제외하면 소비자들은 소매점에서 제공되는 제품을 마음대로 선착순에 따라 구매할 수 있다. 소비 제품을 매매하는 차원에서만 화폐는 일반적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다. 가치법칙은 무엇인가? 좀 더 정교한 "국가 자본주의" 이론들은 소련 경제가 노동 가치 법칙에 지배되고 있으므로 소련이 자본주의 체제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모택동주의자들이 소련의 "이윤"에 대해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이 이론들 역시 "가치법칙"을 "자본주의"와 동일시한다. 가치법칙은 생산에 필요한 자원(궁극적으로는 노동)과 교환조건 사이에 존재하는 엄격한 양적 관계이다. 가치법칙은 단순히 교환을 지배하는 관계만이 아니다. 이것은 재생산의 조건에 교환 조건을 연계시킨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만 가치법칙은 온전히 발휘된다. 왜 그런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상품 교환은 재생산 과정에 완전히 침투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이전이나 이후의 모든 사회에서는 생산의 핵심 요소들이 그 자체로 상품이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유럽의 봉건제에서 노동과 토지는 상품이 아니었다. 시장에서 교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특징은 고립된 개별 생산자들의 존재이다. 이들은 자기의 생산품을 보편적 교환수단(화폐)로 바꾸어 생산의 모든 요소들을 구입해야한다. 예를 들어 가치법칙은 화폐가 없는 물물교환 경제에서는 작동할 수가 없다. 이 경우는 교환의 조건은 우연한 공급/수요 조건이나 관습에 지배된다. 교환조건이 생산비용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교환조건이 재생산비용보다 낮을 경우 자본가는 같은 규모의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들을 구입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결과 기업이나 산업 생산은 축소되어야한다. 교환조건이 재생산비용보다 높을 경우 자본가는 비정상적으로 많은 이윤을 챙길 것이다. 이 현상은 더 많은 자본을 끌어들여 기업이나 산업의 생산은 확대될 것이다. 맑스는 단호하게 이렇게 주장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가치법칙은 고립된 생산자들 사이의 경쟁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 점에 대해 잘못 해석할 여지가 거의 없는 주장을 맑스로부터 직접 인용해보겠다: "개념적으로 말하면 경쟁은 자본의 내적 속성, 핵심적 성격에 불과하며 다수 자본가들이 서로에 대해 상호작용하는 것을 통해 그 모습이 드러나고 실현된다. 이 내적 경향은 외 적인 필연이 된다. 자본은 오직 다수의 자본들로만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자본의 자기 결정은 다수의 자본들이 서로에 대해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강조는 원저자)-- [정치경제학비판 요강], [청년 스파르타쿠스단]지(1975년 5월)의 번역 따라서 시장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가치법칙은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가치법칙은 시장에서의 경쟁에 의해 작동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치법칙이 작동하지 않는 시장은 존재할 수 있다.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들에서 교환은 재생산 조건과 충분히 분리되어 있어서 가치법칙은 작동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로마제국은 사치품들을 대규모로 중국에서 수입했지만 이 무역은 가치법칙과 무관했다. 로마제국의 붕괴로 이 무역은 소멸했지만 고대 중국의 사치품 생산은 전혀 지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련의 시장과 가치법칙 맑스주의 경제학의 범주들을 대단히 왜곡할 경우에만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소련의 생산재 부문에서 가치법칙은 작동한다. 소련 경제에서 생산재는 경제 단위의 구체적 사용가치로 할당된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관계와는 정반대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교환가치를 획득하기 위해 특정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즉 특정 사용가치는 이윤을 가져다줄 경우에만 생산된다. 소련에서 가격과 이윤은 관료집단에 의해 정해진다. 그래야 생산과 관련된 재정적 흐름이 구체적 사용가치의 계획 생산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기업 이윤은 부분적으로는 회계 장치이다. 또한 부분적으로 그러나 큰 효과 없이 경제 관료들의 양심적인 경영을 자극한다. 소련에서 가치법칙에 대한 논의는 농민의 개인시장, 노동시장, 소비재 시장에 한정되어야한다. 왜냐하면 시장의 존재는 가치법칙의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농민의 개인시장은 진짜 시장이다. 고립된 생산자들이 고립된 소비자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민의 텃밭에서 생산조건은 집단농장의 법규 따라서 정부에 의해서 전적으로 결정된다. 개인 시장에서 번 돈은 텃밭의 기계화나 자본화를 위해 사용될 수 없다. 그리고 이 돈으로 다른 텃밭을 살 수도 없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농민의 텃밭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자본축적을 자극할 조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교환조건과 재생산조건 사이의 관계가 아주 미약하기 때문에 농민의 개인시장에서 가치법칙이 온전히 작동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소련에서 노동시장의 사정은 어떠한가? 노동자들 사이에게 제공되는 임금이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므로 가치법칙 비슷한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가치법칙은 노동자들 사이에 임금을 배분하는 것만 결정하지 않는다. 사회총생산물을 소비재와 다른 용도 예를 들어 투자와 군비 등으로 나누는 것도 결정한다. 산업예비군(실업자들)이 자본주의에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높은 임금이 적절한 이윤 확보에 방해가 될 경우 실업이 증대하여 임금 수준을 낮춘다. 그러나 소련에서는 노동시장이 아니라 계획에 의한 소비재 총생산량이 임금 총량을 결정한다. 여기서도 소련 경제는 자본주의 노동시장과 정반대로 작동한다. 초기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들처럼 일자리가 계획된 것보다 많을 경우에는 임금이 떨어진다. 노동시장의 이러한 조건 때문에 노동력 부족이 임금 상승을 초래하고 이 결과 소비재 수요와 생산을 증대시키는 자본주의적 현상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스탈린 관료집단이 계획한 것보다 전체 일자리 수가 적을 경우에는 임금이 상승한다. 어느 정도 고정된 소비재 공급이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노동자들에게 골고루 퍼지기 때문이다. 소련에는 실업자들(산업예비군)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소비재 시장은 어떠한가? 맑스에 따르면 일반적 결핍이 존재하는 노동자국가에서 소비재 가격은 일반적으로 생산비용과 연동되어야한다. 이 때문에 시장 경쟁이 자동적으로 작동하여 발생하는 법칙이 아니라 계획에 의한 규범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관료적으로 퇴보한 소련 노동자국가에서 이 규범은 침해된다. 소련에서 소비재 가격은 생산비용과 조응하지 않는다. 수요와 공급의 차이를 나타내는 지수인 판매세가 일부 품목에서 특히 높게 나타나더라도 이 품목의 생산을 증대시키는 장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소련의 3개 시장들에는 가치법칙이 질적으로 완화되어 나타난다. 이 때문에 이 시장들은 자본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토니 클리프의 "국가 자본주의" 이론 이 강연의 나머지 부분은 영국 국제사회주의자들(IS)의 "국가 자본주의" 이론을 분석하는데 할애하겠다. IS는 한때 트로츠키주의자였던 토니 클리프가 주도하고 있으며 사민주의 경향의 미국 IS 그룹과 느슨하게 연계되어 있는 비교적 덩치가 큰 "제 3 진영" 개량주의 경향이다. 모택동주의 조직들을 제외하면 클리프의 조직은 현재 우리가 정치적으로 대면해야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국가 자본주의" 경향이다. 그러나 클리프의 "국가 자본주의"이론과 같은 엉터리 이론에 대해 논쟁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좀 당혹스럽다. 그의 주요 저서 [스탈린주의 러시아: 맑스주의적 분석]은 맑스주의 경제학 이론에 대한 좌익의 전반적인 무지를 조야하고 참주 선동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의 "이론"은 맑스의 과학적 용어들을 노골적으로 그리고 자기 멋대로 왜곡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맑스주의 경제용어들의 명확한 의미들 대신 클리프는 일반적인 경제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경제학 범주들을 멋대로 뒤섞어 사용하고 있으며 특히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체계적으로 혼동하고 있다. 돌팔이식 용어 사용 클리프의 "국가 자본주의" 이론은 경제적 경쟁과 축적 등 맑스주의 경제학 용어의 의미들을 핵심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관계와 관련지어 맑스가 말한 경쟁은 그 의미가 명확하다: 시장에서 상품의 교환가치를 놓고 개별 자본들이 각축을 벌이는 현상. 맑스는 "다수 자본들의 상호작용"을 경쟁의 "핵심 성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련에서 이 현상을 증명할 수 없는 클리프는 "경쟁"을 자기 멋대로 다시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재규정된 경쟁은 모든 종류의 정치적-경제적 라이벌 관계나 갈등을 의미한다. "국가 자본주의" 이론을 주요하게 설명한 저서에서 그는 이렇게 선언한다: "다른 나라들과의 경쟁이 주로 군사 분야에서 발생하므로, 소비자로서 국가는 탱크, 비행기 등 특정 사용가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가치는 개별 생산자들 사이의 경쟁을 표현하고 있다...." (강조는 인용자)-- [스탈린주의 러시아: 맑스주의적 분석](1955년) 그러나 이 주장은 용어의 의미를 엉성하게 바꿔치기하는 술수에 불과하다. 맑스주의 경제학 이론에서 "개별 생산자"는 민족 국가가 아니라 사적 자본가를 의미하며 "경쟁"은 군비 경쟁이 아니라 시장에서 교환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경쟁이다. 클리프는 계속해서 오류에 오류를 거듭하고 있다: "전 세계와 러시아 사이의 경쟁은 사용가치를 목적으로 격상시키고 있으며 경쟁에서 승리하는 궁극적 목표에 봉사한다." 물론 경제적 궁핍이 지배하는 모든 사회는 재화와 생산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언제나 발생시킨다. 그러나 사용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일반화된 경쟁 체제로 자본주의를 규정할 경우 즉시 황당한 결론에 도달한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 인디언의 샤이엔 부족과 수 부족은 사냥터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빈번하게 서로 경쟁했다. 그리고 유럽 봉건제의 지주들은 딸들을 왕과 결혼시키기 위해 결혼 지참금을 경쟁적으로 올렸다. 클리프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 이전의 이러한 경제 현상들도 "제국주의 세력들 사이의 전쟁"이요 "자본주의 경쟁"이 될 것이다! 결국 그가 소련의 "자본주의적 경쟁"에 대해 떠벌이는 헛소리는 철저히 계산된 용어상의 혼란에 불과하다. 클리프가 맑스주의 용어를 재규정하는 또 하나의 핵심적 경우는 경제적 축적이다. 여기서도 교환가치와 사용가치가 대단히 혼동되어 사용되고 있다. 클리프 경향의 주요 이론가인 마이클 키드런의 말을 들어보자: "소련의 관료들은 자신들과 유사한 사회적 위치를 가진 어떤 계급만큼이나 급격히 경제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강제적 압력을 받고 있다. 이들은 외국의 관료들만큼이나 경제성장을 확보하려는 확고한 동기 부여가 필요하다. 이들의 성공 기준이 화폐 이윤이 아니라 물리적 총생산량이라 하더라도 이 차이는 핵심적인 것이 아니라 세부적인 것일 뿐이다." (강조는 인용자)-- "마지노 맑스주의: 만델의 경제학", [국제 사회주의]지, 1969년 4월-5월 경제 잉여는 화폐 이윤과 화폐 자본 등 교환가치로 실현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의 핵심이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이 자리에 앉아서 말 그대로 며칠 동안 맑스의 저서들을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생산의 강제적 동기 --- 화폐 벌기"를 분석하면서 맑스는 이렇게 말했다: "...자본의 순환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1. 자본의 순환은 화폐자본의 순환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자신의 화폐형태 즉 화폐 자본으로서 공업자본은 이 순환 전체 과정의 출발점인 동시에 종착점이기 때문이다....더욱 이 이것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교환가치가 이 운동의 결정적 목표라는 사실을 표현한다." (강조는 인용자) -- [자본론] 제 2권, 제 1부, 제 1장 더욱이 클리프는 사용가치의 극대화("물리적 총생산량")를 교환가치의 극대화와 동일시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수단의 교환가치를 극대화하려는 노력은 진정한 경제성장과 주기적으로 갈등을 일으킨다. 자본가들은 교환가치의 총량이 아니라 이윤율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한다. 이윤율은 생산수단의 가치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이다. 자본주의에서 이윤율 저하가 생산력 발전을 정지시키는 중심적 요인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클리프나 키드런의 저서들을 읽으면 자본주의가 진정한 경제성장을 언제나 극대화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맑스는 불황과 공황을 "자본가치의 도살"이라고 불렀다. 이 현상은 주식 가격의 하락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클리프 경향의 자본주의 이론에는 이것이 설 자리가 없다. 계급투쟁: 노동자와 축적자의 대결? 관료적으로 퇴보하거나 기형화된 노동자국가들에 대한 "제 3 진영" 조직들의 분석은 지적으로는 엉성하기 그지없지만 나름의 매력이 있다. 미국 국제사회주의자들의 "관료적 집산주 의"이론만큼 클리프의 "국가 자본주의"이론은 진짜 매력이 있다. 왜냐하면 조합주의의 관점에 입각한 분석이기 때문이다. 영어권 나라들에서는 계급투쟁이 상대적으로 가라앉으면서 노동조합의 경제주의가 지배적 조류가 되었으며 자본가 계급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노동자국가에 대한 개념은 멀어 보이기만 한다. 이 상황 속에서 클리프나 섁트먼 등 제 3 진영 경향들의 이론은 노동운동권 내부에서 나름의 중요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클리프와 섁트먼 이론의 진정한 정치적 내용은 이렇게 표현 된다: 사회의 근본 갈등은 직접 생산자들과 이들의 소비 욕구를 한편으로 하고 행정가들과 이들의 축적 욕구를 또 한편으로 하여 발생한다. 달리 표현하면 지금 더 많은 임금을 받으려 하는 노동자들의 욕구와 지금의 욕구 불만을 감내하고 미래에 투자하여 경제적 축적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행정가들의 욕구 사이의 갈등이다. 클리프와 섁트먼의 전망과 호소력의 원초적 근원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다: "이놈들이 내 임금을 빼앗아 이것으로 공장을 짓는다. 이들이 누구이고 어떤 사회를 위해 일하든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놈들이 나를 더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클리프와 섁트먼의 글들을 각각 인용하여 다양한 "제 3 진영" 이론들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 무엇인지를 보여 보겠다. 또한 클리프의 "국가 자본주의" 주장과 섁트먼의 비(非)자 본주의 "관료적 집산주의" 주장을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게 될 것이다. 클리프는 이렇게 말한다: "러시아에서는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율이 증가하고 있으며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자들의 종속도 증가하고 있다. 이 현상은 버터가 아니라 총포를 거대한 규모로 생산하는 현상과 함께 일어나고 있다. 이 현상들은 모두 인민에 대한 억압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스탈린주의 러시아: 맑스주의적 분석] 그리고 섁트먼은 이렇게 말한다: "과거에 그리고 다른 곳에서 노동을 착취한 결과 발생한 자본의 도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들판과 공장의 살아있는 토착민 노동을 특히 잔인하게 착취하는 것을 통해 현대화가 진행되었다. 이것은 생산자로부터 조금의 저항도 허용하지 않는 정권을 요구한다.... 러시아가 보여주었듯이 이 방법을 통해 경제를 공업화시키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에 대한 대가는 사회 정상부에 전제적 특권계급을 유지시키는 것과 최하층 인민을 착취하고 무권리 상태로 만드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상황은 체제에 대한 반대와 저항을 위해 필요한 어떤 권리가 존재하더라도 완화되지 않는다."-- "트로츠키의 [중국혁명의 문제들]에 붙여"(1967년) 클리프와 섁트먼 이론의 핵심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후진국의 공업화는 노동자 민주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들이 인정할 수 없는 축적률을 요구한다; 따라서 공업화는 전체주의 체제를 요구한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위에서 노동자들에게 강요되는 가속화된 축적의 앞잡이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착취계급이다. 레닌의 볼세비키당에 대항하는 "제 3 진영" 경제주의 "제 3 진영"주의는 트로츠키주의로부터 이탈한 최초의 가장 강력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 혐오증 노선이다. 그러나 이 사고는 역사적 관점에서는 정확하지만 이 진영과 혁명 진영 사이의 엄청난 정치적 차이들을 너무 협소하게 바라보는 관점이다. 클리프와 섁트먼의 정치노선을 러시아 혁명 당시에 대입한다면 이들은 혁명 초기부터 레닌과 트로츠키의 정책을 반대했을 것이다. 1921년 이들은 조합주의적인 노동자 반대파에 가담하여 레닌과 트로츠키에 대항했을 것이며 1920년대 후반부 스탈린의 정치적 반혁명 이후에는 부하린 분파의 톰스키 파벌에 가담했을 것이다. 클리프의 노선을 견지할 경우 좌익반대파의 경제정책을 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20년대 후반부에 부하린의 우익반대파는 트로츠키주의 좌익반대파를 "초(超)공업화론자"라고 규정했다. 국가의 경제적 축적을 희생하여 노동자 임금을 극대화시키는 정책을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결코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27년 스탈린/부하린 정권이 좌익반대파에 대항하는 참주선동적 정책을 펴서 노동일을 8시간에서 7시간으로 줄였을 때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는 이 조치가 소비에트 경제에 해를 끼친다고 반대했다. 잠시 상황을 미래로 돌려 트로츠키주의 정당들이 소련 진영에서 관료집단에 대한 정치혁명들을 통해 집권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이 정치혁명들이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의 사회주의 혁명을 즉시 초래하지 않았다고 가정해보자. 상황이 이렇다면 고립되어 있지만 상대적으로 강력한 혁명적 노동자국가들의 동맹이 수립되어 있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도 "러시아 문제"를 둘러싼 우리와 "제 3 진영" 사이의 정치적 차이들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 차이들의 형태는 다르겠지만 결정적인 차이들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왜 그런가? "제 3 진영" 수정주의 이론의 근저에는 국가권력이 노동계급의 중요한 무기라는 사고를 거부하는 반(半)무정부주의적 경향이 놓여있다. 따라서 이 경향은 노동자국가가 활용할 수 있는 경제 자원도 거부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와 이 경향 사이의 핵심적 차이이며 이 차이는 스탈린주의 체제의 성격에 대한 구체적 문제를 초월한다. 클리프 경향의 지도자 크리스 하먼은 이 경향의 정치적 특성을 가장 명확하게 주장했다. 제 1차 5개년 계획의 시행으로 소련이 "국가 자본주의"체제가 되었다는 클리프의 주장을 그는 옹호한다. 그리고 고립되었으며 후진적인 노동자국가는 대중의 소비수준을 높이고 경제 축적 수준을 낮추는 정책을 통해 다가올 세계혁명을 무시할 수 있다고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1924년까지는 서방과의 경제적 군사적 경쟁이 아니라 혁명을 확산시키는 것이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를 확립하는 기초라고 간주되었다."-- "에르네스트 만델의 비일관성", [국가 자본주의 이론에 대한 독서 자료들], 영국의 국제맑스주의그룹에서 출판 레닌은 결코 이렇게 입장을 표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소련의 경제적 군사적 역량을 국제적으로 혁명을 확산시키는 것에 대치시킨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러시아 노동자국가 초기에 볼세비키당 내 가장 격렬한 분파투쟁들 그리고 러시아 노동운동 내 볼세비키당과 다른 경향들 사이의 투쟁들은 중앙 집중화 되고 효율적인 경제기구를 수립하려는 레닌의 일관된 노력 때문에 촉발되었다. 상당한 반대를 무릅쓰고 레닌은 노동자에게 위임된 경영체제를 일인 경영체제로 대체시키고 높은 임금을 받는 부르주아 전문 경영인을 고용하고 도급제를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정책을 위해 투쟁했다. 이 당시 레닌의 가장 우선적인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이것 이었다: 내전과 소비에트 노동자국가의 고립 때문에 소련 산업이 해체되고 이 결과 러시아 노동계급이 소부르주아로 변모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 1922년 코민테른 제 4차 세계대회 때 그가 행한 연설을 들어보자: "...우리의 중공업은 아직도 대단히 어려운 처지에 있다....종종 대중을 희생시키기는 하지만 우리는 절약해야한다....우리는 이렇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중공업을 구하고 회복시키지 않는 한 산업을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업이 없이는 독립국으로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망할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아주 잘 인식하고 있다. 러시아의 구원은 농장의 풍작에만 달려있지 않다. 이것으로는 불충분하다. 경공업의 좋은 상태에 달려있지도 않다. 이것은 농민에게 소비재를 제공할 뿐이다. 이것으로도 불충분하다. 우리는 중공업도 필요하다." (강조는 인용자)-- "러시아 혁명의 5년과 세계혁명의 전망", [레닌 전집] 제 33권, (1966년 판본) 공업화: 노동계급의 혁명 정책 왜 레닌과 트로츠키는 러시아의 공업 발전을 국제 혁명의 전망과 전혀 대치되지 않는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는가? 이 질문을 통해 "국가 자본주의" 이론들과 우리 사이에 가로 놓인 근본적인 정치적 차이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다. 실제로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렇게 생각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레닌과 트로츠키는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적군의 원수 투하체프스키가 적군을 동원하여 유럽을 정복하자고 주장했을 때 이들은 그의 생각에 격렬히 반대했다. 그러나 이 들은 유럽 특히 독일 혁명이 일국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독일 혁명이 성공했을 경우 프랑스와 영국의 부르주아 정권들은 독일 혁명에 개입했을 것이고 미국은 이들을 지원했을 것이다. 따라서 유럽 차원의 혁명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었고 이때 소련의 군사적 개입은 사태를 결정지을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1920년에 레닌은 독일 혁명에 좀 더 유리한 군사적 상황을 조성하기 위해 폴란드를 점령할 용의를 보였다. 1920년대 초반부에 독일 혁명이 성공했으나 제국주의 국가들의 군사적 개입으로 혁명이 더 이상 다른 나라로 확산되지 못했다고 가정해보자. 독일과 러시아의 소비에트 동맹은 고립되었을 것이고 혁명을 확산시킬 필요는 그만큼 시급했을 것이다. 소비와 축적 사이의 긴장과 갈등은 고립되고 후진적인 러시아의 경우보다는 훨씬 덜 했겠지만 여전히 존재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프레오브라젠스키는 자신의 저서 [신경제학]에서 바로 이런 상황이 초래할 경제적 문제들을 논의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독일 노동계급의 후진층은 경제자원이 대대적으로 러시아의 농민에게 수혈되는 것을 거부했을 것이다(1924년에 독일은 그 이전에 비교해 더 궁핍해 있었다). 반면에 실제 벌어진 사태대로 독일 혁명이 실패했으나 1925년-27년의 중국 혁명이 성공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상황에서 러시아보다 더욱 경제적으로 낙후한 중국에 러시아의 상당한 공업자원이 수혈되지 않았을 경우 단기적으로라도 중국의 노동자국가는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군사적 개입을 무시하더라도 소련-중국 노동자국가 동맹에 대한 무역 금수조치가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 체결되었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소련은 중국 노동자국가를 경제적으로 지탱시켜야했을 것이다. 따라서 소련의 경제적 군사적 역량은 진지한 세계혁명 전략에서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더욱이 소련의 공업화가 중요했던 여러 가지 방어적 이유들이 있었다. 공업화는 단순히 공장을 더 많이 세우고 기계를 더 많이 설치하는 것 뿐 아니라 다른 계급들에 비해 노동 계급이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함께 노동 대중의 문화수준도 일반적으로 상승한다. 1920년대에 소련의 노동계급 독재 체제가 고임금 저축적 정책을 취했다면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부하린/톰스키의 정책이 소련을 지배했다면 상대적으로 농민보다 임금 수준이 훨씬 높은 소규모의 공업 노동자층이 존재했을 것이다. 이 결과 농민들은 느리게 성장하고 있던 공 업부문이 흡수할 수 있는 수보다 훨씬 더 많이 도시 지역으로 몰려들었을 것이다. 1920년대 중반에 러시아에는 도시 빈민의 문제가 이미 등장하고 있었다. 신경제정책 시기에 도시 빈민의 환경을 묘사한 레오니드 레오노프의 멋진 소설 [도둑]을 읽어보면 이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920년대 러시아에서 사회구조는 현재의 소련보다 자본주의로 복귀할 요인이 훨씬 많았다. 마지막으로 이 시기에는 러시아 농민들에게 잘 알려진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당시 소비에트 체제의 공업이 농민에게 공업제품과 소비제품을 짜르 체제의 경우와 비슷하게 제 공하지 못했을 경우 농민들은 국가의 외국무역 독점을 무시하고 소규모 무역상들과 거래하려는 강력한 용의를 보였을 것이다. 이 결과 소련에는 한편으로는 농민 대중과 또 한편으로는 외국자본과 연결된 상업 자본가계급이 성장했을 것이다. 이들은 당연히 반혁명의 구심점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좌익반대파의 가속화된 공업화 강령은 부분적으로는 스탈린/부하린 정권 하에 반동 계급들의 성장을 저지하는 목적이 있었다. 초기 단계부터 10월 혁명의 역사적 성과를 방어하고 이것을 유럽 전역에 확대시키는 전망은 클리프와 섁트먼의 경제주의에 의해서만 전복될 수 있었을 것이다. 소련의 성격에 대해 우리가 클리프의 "국자 자본주의" 경향과 가지고 있는 정치적 차이는 다음과 같은 상호 관련된 질문들의 형태로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의 계획경제는 임금을 희생시켜 축적률을 극대화하는 경제법칙에 따라 작동하고 있는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분쇄하고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소생시키는 노동계급 정치혁명이 성공할 경우 소련의 공업화 속도는 질적으로 바뀔 것인가? 고립된 노동자국가의 경제는 축적률을 지배하는 경제법칙에 의해 작동될 것인가? "스탈린주의 궁핍화 법칙"은 어디에 있는가? 돌팔이식 용어 사용을 논외로 할 경우 클리프의 "국가 자본주의" 이론은 다음과 같은 주장에 의존하고 있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실질 임금은 크게 하락했다. 예상할 수 있듯이 클리프는 과도한 단순화에 기대면서 단순한 "사실들"을 경멸한다. 제 1차 5개년 계획 기간에 임금은 진짜 크게 하락했다. 그러다가 1930년대 후반부에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가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다시 하락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할 때쯤에는 임금은 1928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스탈린 사후 소위 "스탈린주의 궁핍화 법칙"은 어떻게 되었는가? 스탈린이 죽은 지 몇 년 내에 확실한 스탈린주의자인 베리아와 몰로토프는 소위 "신노선"을 시행하면서 소비재 가격을 내렸다. 그러나 이 정책은 소비재의 극심한 부족을 더 악화시키기만 했다. 그러나 스탈린 바로 뒤의 후계자들은 소비를 진작시켜 소득 재분배를 시행하기는 했다. 왜냐하면 대중의 불만은 높은데 자신들이 "위대한 지도자" 스탈린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1955년과 1968년 사이에 소련의 일인당 실질임금은 56% 증가했다(슈뢰더, "소련의 소비에 대한 조사", 모리스 보온슈타인/데이니얼 퍼스필드 저 [소련의 경제]). 이것은 총생산량 성장분 즉 트로츠키주의 정부가 임금을 인상했을 정도에 비하면 적지만 그래도 상당한 임금인상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1970년-75년의 5개년 계획은 생산재 부문이 소비재 부문보다 더 빨리 성장해야 한다는 기존의 스탈린주의 정책을 역전시켰다. 농업 부문의 목표량 미달로 이 계획은 성취되지 못했다. 그러나 의도는 역시 대중의 소비생활을 신장시키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통 클리프주의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러시아는 덜 "자본주의화" 되고 있다고 인정해야한다. 왜냐하면 "착취율"이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연한 실업 현상은 어디로 갔는가? 노동자 일인당 실질 임금 이외에 또 다른 임금 문제가 있다. 스탈린주의 정책이 임금 총량을 희생시켜 축적을 극대화하고 있는가? "국가 자본주의" 주창자들이 묘사하는 현실과 매우 다른 현실이 이 점과 관련해서도 존재한다. 자본주의의 지배계급과 달리 소련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정치적 불안을 두려워하여 실업자(산업예비군)의 등장을 막으려고 언제나 애써왔다. 1930년대에는 도시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농민들은 다시 소속 집단농장으로 강제 귀환되었다. 스탈린주의 경제계획은 제품 당 비용을 극소화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물리적 생산량을 극대화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이 때문에 기업 경영자들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수의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노동력을 비축하지 않을 수 없다. 소련의 기업에는 노동자들이 너무 많다. 이들이 다른 곳에서 일하면 훨씬 생산성이 증대될 것이다. 그렇다면 소련의 경영자들은 전형적인 자본주의 경영자들과 아주 비슷한가? 대답은 "결코 아니올시다"이다. 1930년대 초반에 소련의 실질임금은 급격히 하락했다. 그러나 이 현상은 스탈린 정권의 의도가 아니었으며 단지 소비재 생산계획의 예상치보다 더 많은 노동자들을 경영자들이 고용한 결과였다. 그러나 특권층이 관료적으로 통치하는 사회에서 스탈린주의 공업화는 중요한 평등주의적 측면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소련은 지금의 브라질이나 인도와는 전혀 모습이 달랐다. 이 자본주의 후진국들에는 공업 노동자들보다 낮은 수준에서 생활하는 거대한 도시빈민층이 존재하고 있다. 경제 정책: 트로츠키 대 스탈린 이제 두 번째 문제로 넘어가자. 정치혁명을 통해 관료집단을 타도한 소비에트 정권이 스탈린주의 정권보다 질적으로 낮은 축적률을 기록할 수 있는가? "국가 자본주의" 주창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트로츠키주의와 스탈린주의의 근본 갈등이 축적과 노동자 소비를 중심에 놓고 일어나고 있는가? [배반당한 혁명], [이행 강령] 등은 러시아의 정치혁명에 대한 주요한 강령적 발언이다. 그러나 이 저서들 어디에서도 축적에서 소비로 국민총생산을 근본적으로 재분배하거나 반드시 성장률을 낮추어야 한다는 주장은 없다. 특히 1930년대 초반에 트로츠키 그리고 심지어는 프레오브라젠스키도 실질임금의 재앙적 하락에 대해 대단히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정책의 우선순위를 다시 정할 것을 요구했다. 예를 들어 1932년에 트로츠키는 5개년 계획을 일 년 유예하고 경제를 다시 조정하여 생활수준을 회복시킬 것을 촉구했다. 따라서 클리프/섁트먼의 노선과 트로츠키의 노선 사이에는 피상적인 유사성이 있다. "국가 자본주의" 경향들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인정한다: 스탈린주의 경제정책은 그 자체로 보면 합리적이고 성공적이었다. 이들은 중공업에 투자를 더 많이 할수록 전반적인 경 제성장률은 더 높아질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희생시키는 가운데 스탈린이 진정한 경제성장을 극대화했다고 트로츠키가 인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제 1차 5개년 계획에 대한 트로츠키의 대안은 더 많은 소비와 더 낮은 공업화율이 아니었다. 그는 더 높은 소비수준을 통한 좀 더 균형 있는 경제성장이 비슷한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보장할 것이라고 보았다. 스탈린 공업화의 파괴적 작용 우선 1930년대에 스탈린이 추구했던 것과 같은 규모로 불균형 투자와 강제적 경제성장을 시도하는 것은 미시경제 차원에서 자원의 대규모 낭비를 초래한다. 당시 소련에는 엄청난 병목현상과 격심한 자원부족이 경제 곳곳에 드러났다. 반만 세운 공장들은 무너져 내렸다. 무분별한 모험주의적 경제 프로젝트는 수없이 많았다. 생산량 수치에 최우선 순위를 두었기 때문에 제품의 품질은 엄청나게 하락했다. 스탈린 공업화가 불러온 파괴적 작용의 측면으로 더 잘 알려진 경우는 강제로 진행된 농업 집단화였다. 이로 인해 농업 생산량은 재앙적 수준으로 하락했다. 지금도 신문만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1929년 스탈린이 강제 집단화를 통해 소련 경제에 가한 충격은 아직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와 함께 소련의 급격한 실질임금 하락은 관료집단의 전체주의적 테러통치와 결합하여 노동 창조성과 규율을 사정없이 무너뜨렸다. 기술/행정 수준과 직접 생산자 수준 모두에서 노동에 대한 열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특정 수준 이하에서는 중공업 투자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임금 억제 정책은 경제성장을 가속화시키기는커녕 정지시킨다. 스탈린은 이 수준 이하로 임금을 억제했다. 공업화는 단순히 공장을 더 많이 짓고 노동자 일인당 장비를 더 많이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규율을 갖춘 기술적으로 유능한 창조적 노동자원을 증진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문화 수준을 끌어 올려야 한다. 이 중요한 요소가 공업화에 포함되어 있다. 단수가 높은 부르주아 정부는 잘 알고 있다: 농촌에서 갓 배출된 문맹 농민들을 과도하게 착취하는 것은 최상의 정책이 아니다. 프랑스에서는 특히 북아프리카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다수 불법으로 이주하여 판자촌에서 살고 있다. 이들은 최저임금도 받지 못한다. 그러나 스웨덴에 도착한 유고슬라비아나 알제리 노동자는 먼저 스웨덴어를 배우고 다음에 기술을 익히도록 한 달에 300 달러를 지급받는다. 프랑스 자본가들보다 스웨덴 자본가들이 훨씬 더 고도로 외국인 노동자들을 착취한다. 노동자 민주주의와 경제정책 좌익반대파가 주창한 경제정책은 급격한 공업화를 반대하고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것에 있지 않았다. 소비 수준을 높이는 것을 포함한 좀 더 균형적인 경제정책이 스탈린이 초래한 엄청난 자원 낭비를 막고 적정한 수준의 공업화를 달성할 수 있다고 트로츠키는 주장했다. 1932년에 트로츠키는 이렇게 강조했다: 노동자 농민에게 관료적 테러를 대대적으로 가하면서 강제로 실시되는 공업화는 소련 경제의 합리적이고 급격한 성장에 해악이 될 뿐이다: "그렇다면 공업화와 집단화의 속도를 늦추어야 하는가? 의심의 여지없이 일정 기간 이 조치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 기간은 오래 끌지 못할 것이다. 노동자 자신이 정치 경제 활동에 참여하고 관료집단을 실제로 통제해야 된다. 그리고 상부 단위가 대중에 대해 더 깊은 책임을 느껴야한다. 이 모든 조치들은 생산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결과 체제 내부 갈등이 줄어들고 낭비적인 경제적 좌충우돌이 최소한으로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노동력과 장비가 좀 더 효율적으로 배분될 것이고 궁극적으로 경제성장 계수들은 상승할 것이다.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국가 경제 운영의 필수 요건이다." (강조는 인용자)-- [다음에는 무엇이? 독일 노동계급의 사활이 걸린 문제들] 부하린의 경제정책과 "평화공존" 이 문제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제 3 진영" 경향들은 스탈린/부하린 동맹의 스탈린과 제 1차 5개년 계획의 스탈린 사이에 근본적인 단절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들의 특징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결코 없었다.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는 스탈린이 경제적 군사적 수단을 통해 제국주의 서방을 패배시킬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제국주의 위협에 대한 스탈린의 반응은 "평화공존"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정책은 국제적 차원에서 계급협조가 가능하다는 환상에 불과했다. 부하린의 경제정책과 제국주의와의 화해 정책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은 두브체크의 "자유주의적" 스탈린주의로 다시 드러났다. 제국주의자들에게 좀 더 유화적으로 나오면 소련 진영은 군비를 감축하고 중공업에 투여되는 자원을 소비재 생산으로 전환시킬 수 있으리라고 두브체크는 가정했다. 예를 들어 소련의 경제학자 베르만은 중앙계획의 철폐, 무제한적인 노동자 경영, 시장 사회주의 등 근본적으로 조합주의 강령을 주창하고 있다. 그가 "긴장완화(데탕트)"를 열렬히 지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상당한 정도의 외부 위협이 없을 때에만 소련은 그가 원하는 경제체제를 건설할 수 있다고 베르만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련 진영이 개방되면 서방과의 화해를 주창하는 온갖 경향들이 난무할 것이다. 이들은 군사화를 반대하고 중공업 성장을 반대하고 소비수준 진작을 지지할 것이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은 이 점에서 암시하는 바가 아주 많다. 그리고 이 경향들은 나름대로 대중적 지지를 얻을 것이다. 부하린은 다수의 "자유주의적" 스탈린주의자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다. 그는 일종의 선구자 취급을 받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소련 진영에서 정치혁명을 위해 투쟁하고 있을 때 다음과 같은 진실이 곧 드러날 것이다: 아주 다른 상황에서 그리고 아주 다른 역사적 맥락에서 트로츠키가 부하린/톰스키에 대해 벌인 투쟁은 다시 되풀이 될 것이다; 이때 서로 투쟁하는 핵심 강령들은 과거와 동일할 것이다. 노동계급의 국가권력: 계급투쟁의 무기 이제 마지막 문제에 대답하면서 이 강연을 끝마칠 때가 되었다. 고립된 노동자국가에서 정치적 고려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고유한 경제법칙이 존재하는가? 대답은 "아니다"이다. 노동자국가는 계급투쟁의 무기이다. 이것은 당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당만큼이나 강력한 무기이다. 노동자국가가 군사, 중공업, 농민 소득, 노동자 임금 등 에 가용자원을 할당할 때에는 중요한 전략적 전술적 고려가 반드시 개입한다. 끊임없이 변하는 정치적 필요와 압력에 대응하여 노동자국가는 자원들을 적절히 할당해야한다. 따라서 고립된 노동자국가에는 고유한 축적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노동자 정당과 노동자국가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당연히 있다. 당은 자발적 조직이지만 노동자국가는 그렇지 않다. 정권을 장악한 혁명정당은 노동계급과 소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물질적 문화적 요구와 관심을 고려해야한다. 전시라는 명백한 예외를 제외하면 노동자국가의 경제정책은 노동자 민주주의의 한계 내에서 대중의 생활수준을 꾸준히 높여야한다. 그러나 생산성이 충분히 급격하게 상승하고 있다면 노동자의 임금과 농민의 소득을 상승시키면서 동시에 투자나 군비에 들어가는 자원을 증가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지금까지 강연을 통해 말한 주제들은 강령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이 중요성은 "국가 자본주의" 이론을 주창하는 선전그룹들에 대한 현재의 정치적 경쟁의 차원을 넘어선다. 소련 진영에서 국가권력을 장악하려는 투쟁 과정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도 이 나라들의 노동자 운동 내부에서 우리는 훨씬 더 위험한 형태로 클리프/섁트먼 경향들과 대결할 것이다. 노동자국가의 산업 역량을 발전시키는 것이 최우선이 아니라는 입장은 세계혁명의 전망에 결정적인 요소이기는커녕 진정으로 반(反)혁명성을 내포하고 있다. --- [청년 스파르타쿠스단]지 제 51-53호 (1977년 2월, 3월, 4월)에서 재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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