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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비, 쉬리를 먹다가 사레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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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블록버스터 영화를 봤다.

아무 생각없이 연말을 즐기고 싶은 영화를 고르는데

사람들이 막 몰리는 영화보다는 조금 한가할 것 같은 영화로 선택한 것이 ‘강철비’였다.

얼마 전에 케이블로 본 ‘변호인’도 괜찮아서 그냥 편하게 선택했다.

 

시작하자마자 북한에서의 긴박한 상황을 보여주며 박진감 있게 달리더니

예상 외의 상황전개로 처음부터 몰아쳤다.

북한의 쿠데타를 배경으로한 영화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초반 쿠데타 상황은 예상을 넘는 사건스케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피격당한 김정은을 구출하는 과정과 그를 태우고 남한으로 넘어오는 과정이

상상을 초월할정도 장난이 아니었다.

그걸 보면서 드는 생각

“어쩌면 저렇게 큰 규모로 쿠데타를 설정하면서 말도 안되게 허술한 방법으로 남한으로 넘어올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 이후부터 영화에 대한 몰입도는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장난이 아닌 상황은 계속됐다.

남한으로 도망친 북한 특수요원과 김정은을 찾기 위해 북한은 말도 안될 정도로 신속하게 특수요원들을 급파하는데, 청와대는 말도 안되는 우연의 일치로 그를 만난다.

북한은 전광석화처럼 쿠데타를 진행하고 전쟁으로 밀어붙이는데, 남한은 주전파와 협상파가 대립하고 미국 일본 중국과 밀당을 하면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벌어지는 토론의 수준이라는 게 고등학생들 모의법정을 보는 듯했으니... (아이고, 이렇게 얘기하면 고등학생들 수준을 너무 우습게 본다고 항의할지도 모르겠다.)

일사천리로 몰아치는 북한에 비해 갈팡질팡하는 남한의 모습은 너무 어의가 없어서 쓴웃음만 나왔다.

그 와중에 남과 북을 너무도 쉽게 오가고 너무도 쉽게 남북한의 인사들을 사살하는 북한 요원들의 모습에서는 전지전능함을 봤다고 해야할까.

영화가 아무리 픽션이라고 하지만 현실의 민감한 문제를 다룬 영화라면 그래도 ‘정도껏’이라는 게 있는데...

 

한심한 수준에 한숨만 나오고, 별볼일 없는 액션에 하품이 나오고, 앙상한 CG에 쓴웃음이 나오는데도

2시간20분이나 되는 긴 런닝타임이 그렇게 고문이 아니었다는 점만큼은 칭찬해줘야 하는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내내 ‘쉬리’가 생각났다.

북한정세의 급변으로 인한 남북의 불안정한 대립상황, 북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전쟁을 감수하는 북의 강경파, 그런 속에서도 어떻게든 파국을 막아보려는 헌신적 노력. 극한의 상황 속에서 남북 특수요원 사이에 싹트는 애정, 북한 요원의 비극적 결말로 마무리되는 엔딩까지 ‘쉬리’의 냄새가 너무나 강했다.

하지만 ‘쉬리’에서의 한석규와 김윤진 사의의 러브스토리를 ‘강철비’에서는 정우성과 곽도원의 우정으로 대신한 것 말고 ‘쉬리’와 ‘강철비’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쉬리’는 오직 호전적이고 비인간적이기만 했던 북한 특수요원에게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감성을 집어넣어서 사랑할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냈다. 그래서 천편일률적인 반공영화에서 벗어나 북한사람도 대화하면 말이 통하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으로 품은 최초의 영화였다.

그런데 ‘쉬리’가 나오고 18년이 지나 만들어진 ‘강철비’는 북한사람도 대화하면 말이 통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따뜻한 가슴으로 품을 수는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만들어진 상황이 그렇기 때문에!

18년이나 지난 ‘쉬리’는 아직도 키싱구라미라는 열대어와 이방희라는 캐릭터 이름과 ‘WHEN I DREEM’이라는 주제곡과 바다가 보이는 마지막 벤취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데

‘강철비’는 내일이면 그냥 휙 사라져버릴 것 같다.

 

얼마 전에 누가 내게 “영화를 너무 분석적으로 본다”고 했다.

그 말이 떠올리며 글을 다시 읽어보니 역시나 분석적이다.

“감정이입이 도저히 되지 않는 영화랑 어떻게 대화를 하느냐?”고 항변을 할 수 있지만

한 번 감독이랑 대화를 시도해보자.

 

양우석 감독님, 도대체 이 영화를 만든 목적이 뭔가요?

혹시 어떻게든 핵전쟁이라는 재앙은 막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나요?

만약 그런거라면 영화 속 상황이 너무 어설퍼서 메시지가 묻혀버린 건 아닌가요?

그냥 무겁고 복잡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보다는 그저 상업영화로 봐달라고 하고 싶으신가요?

그런거라면 차라리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처럼 노골적인 반공영화로 만들어서 액션이나 CG에 공을 들여야했던 것은 아닐까요?

혹시 김정은과 트럼프가 전쟁을 불사하겠다며 극한으로 대립하는 상황에서 너무 무겁지 않게 현실의 문제를 영화적으로 드러내보려고 했던 건가요?

정말로 그런거라면, 극박한 상황에서는 미군의 군사력으로 북한을 선제타격하고, 궁극적으로는 남한도 핵무장을 해서 전쟁을 방지해야한다는 결론이 너무 무책임하지는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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