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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34회 – 지옥에 가닿기를

 

 

 

1

 

오래간만에 아는 형님 부부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집에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 후

산책을 하자고 해서 집을 나섰습니다.

형님 부부가 타고 온 자전거로 먼저 출발하자

저도 부랴부랴 창고에서 자전거를 꺼내 뒤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형님 부부가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 금세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강변을 달리자고 했던 말이 생각나서 강변 쪽으로 향하는데

다리 입구에서 사람들이 몰려들더군요.

사람들이 많지 않은 다리 아래쪽 길로 가려니 길이 엉망이었습니다.

 

자전거에서 내려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어와서

자전거가 다리 위쪽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자전거를 잡으러 다리 위쪽으로 뛰어올랐더니

어떤 분이 날아가는 자전거를 잡고 제게 건네주더군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다시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몇몇 사람들이 이곳에서 자전거를 타면 안 된다면서

제 자전거를 뺏으려 했습니다.

그 사람들을 피해 황급히 도망가는데

뒤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달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꿈이야, 마음을 진정하고 그곳에서 벗어나.”

 

마음을 진정하고 주위를 봤더니

어느 허름한 주택가 골목길에 있었습니다.

자전거는 사라져버려서 그냥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몇몇 사람들이 저를 잡으러 뛰어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황급히 옆집 담장을 넘어 도망가는데

뒤에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고

주변 집에서 인상이 험악한 사람들이 나와서

저를 향해 달려오더군요.

2층집 난간을 타고 넘어 다시 조그만 골목으로 접어든 후 또다시 옆집 담장을 넘어서며 열심히 도망쳤지만

뒤에서 따라오는 이들과의 거리를 점점 좁혀져만 갔습니다.

 

“이건 꿈이야, 마음을 진정하고 그곳에서 벗어나.”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킨 후 다시 눈을 떴더니

강변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없고 찬바람만 불어오는 강변길을 달리면서

형님 부부를 부지런히 찾고 있는데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군요.

 

 

2

 

갑자기 들린 요란한 소리에 눈이 뜨였습니다.

요란한 소리의 정체는 휴대폰이었고

휴대폰을 열었더니 경주에서 지진이 발생했다는 문자가 와 있었습니다.

시간을 확인했더니 새벽 5시였습니다.

새벽 4시 반 쯤에 겨우 잠들었는데...

“에이 씨발, 그래서 뭐 어쩌라고!”

다시 정신이 말똥말똥해지는 것 같았지만

억지로라도 잠을 자야겠다는 생각에 눈을 감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렇게 30분 정도 이불 속에서 뒤척이다가 살짝 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잠결에 사람들 소리, 차 지나가는 소리 같은 것들이 들려왔지만

눈을 뜨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이불속에서 버텼습니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고 버티다가 눈을 떴더니 11시였습니다.

눈을 뜬 상태에서도 최대한 버텨보려 했지만

소변이 마려워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일어나서 컴퓨터를 켜고 지진 소식을 검색해봤더니

특별한 내용이 없어서 짜증이 더 밀려왔습니다.

날씨를 검색해봤더니 맑지만 추운 날이 하루 종일 이어질 거라고 하더군요.

 

배가 고파서 라면을 끓여먹고는 옷을 든든하게 입고 집을 나섰습니다.

낮에 최대한 몸을 움직여야 밤에 덜 힘들기 때문입니다.

날씨가 추워서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거리에는 차들이 뭐 그리 바쁜지 무수히 돌아다니고 있고

인근 공원에는 이 날씨에도 운동하는 노인들이 몇 명 보였습니다.

그나마 햇살이 비춰서 돌아다니기에 많이 힘들지는 않았지만

한 시간쯤 돌아다녔더니 너무 추워서 가까운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빈자리 없이 사람들로 꽉 찬 도서관에서 잡지와 신문을 들척이고 있는데

마른기침을 해대는 할아버지

휴대폰을 눌러대느라 정신없는 남자

또각또각 발자국 소리를 내며 왔다 갔다 하는 여자

부스럭거리며 과자를 집어먹는 학생 등

온통 정신 사납게 하는 사람들뿐이어서

오래 있지 못하고 나와 버렸습니다.

 

‘뭘 할까?’ 생각하다가 버스 종점여행이나 하기로 했습니다.

최대한 멀리까지 가는 버스를 골라 탔습니다.

사람들이 많지 않은 버스 뒷자리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사람들, 차들, 건물들이 쉬지 않고 움직이더군요.

시내로 접어들면서 차가 막히기 시작하니까 바쁜 일 없는데도 짜증이 나더군요.

시내에 접어들어 차에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사람이 탈 때마다 내 옆자리에 앉지 않기를 바라면서

괜히 어깨를 쫙 펴고 자리를 좁아보이게 만들기도 해봤지만

중년의 남자가 옆자리에 앉고야 말았습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손을 자꾸 움직이느라 제 어깨랑 자꾸 부딪혔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계속 자기 할 일만 하는 것에 짜증이 나서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고 말았습니다.

 

날씨가 추웠지만 잠시 걸었습니다.

오뎅이나 붕어빵 같은 걸 파는 곳을 지날 때는 출출하기도 했고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연인을 보면 눈을 빠르게 돌려버렸고

앞에서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는 할머니가 있으면 괜히 짜증이 났습니다.

 

얼마 걷지 못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퇴근시간이 다가오면서 거리에는 차들이 더 많아져서 버스는 더 느려졌고

버스 안에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서 옆자리 앉은 사람이 불편해도 참아야 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렸더니 날씨가 제법 쌀쌀해져서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냉장고에 있는 꺼내서 적당히 저녁을 해먹고

어지러운 것들 대강 정리하고 시계를 봤더니 저녁 6시였습니다.

‘뭘 할까?’ 생각을 하다가 집안 청소를 하기로 했습니다.

청소기와 걸레로 집안 곳곳을 쓸고 닦고

화장실과 싱크대와 현관까지 말끔히 청소하고

세탁기까지 돌려 빨래를 널고 나서 다시 시계를 봤더니 저녁 7시밖에 안 됐습니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서 컴퓨터를 켜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시간을 때우다가

할 것 없으면 tv를 켜고 채널을 무수히 돌려가며 볼만한 것을 찾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없었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오락을 해봤지만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습니다.

 

시계를 봤더니 밤 10시

정신은 말짱하기만 하고

할 일은 더 이상 없고

가만히 있으면 속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술을 사러 나섰습니다.

오른쪽 골목길에 있는 슈퍼에는 그제 술을 사러 갔었고

왼쪽으로 향한 도롯가 편의점에는 어제 술을 사러 갔었기에

오늘은 좀 멀더라도 길 건너 편의점으로 향했습니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밤길을 걸어가는데

환하게 불 켜진 식당과 술집에서 즐겁게 술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더군요.

술집에서 누구랑 같이 술을 먹어봤던 것이 몇 년 전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해서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딴 세상 모습 같았습니다.

 

술중에서 가장 싼 막걸리 두 병을 사들고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술을 마시면서 인터넷으로 다시 이곳저곳 다녔던 곳을 또 다녔습니다.

시간을 최대한 때우기 위해 술도 천천히 마셨습니다.

그나마 술기운이 돌아가니 마음 속 답답함이 조금을 풀리는 것 같더군요.

하지만 막걸리 두 병으로 때우는 시간을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술기운은 살짝 오르는데 취해서 잠들 정도는 아니고

시간은 자정을 넘어섰지만 정신은 오히려 더 또렷해지기만 하고

tv도 인터넷도 더 이상 재미가 없고

마음은 심란해져서 이런저런 잡생각들만 더 많아져서 미쳐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포르노 사이트로 들어갔습니다.

내 머릿속을 가능 채우고 있는 것들을 무시하고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포르노를 보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오만가지 생각들이 흘러넘쳤습니다.

 

그렇게 끙끙거리다가 몸이 서서히 피곤해지는 것 같아서

새벽 2시쯤 자리에 누워봤지만

정신은 다시 말똥말똥해지고

어떻게든 잠을 자야 한다는 생각에 스트레스만 더 쌓여가는 판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30분 만에 다시 일어나서 포르노 사이트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두 시간쯤 더 보내고 난 후

새벽 5시에 몸이 너무 피곤해서 겨우 잠이 들 수 있었습니다.

 

 

3

 

모처럼 햇살이 화창한 날

텃밭에 모종을 심었습니다.

 

모종을 심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줄기가 어른 허리만큼 자라고 열매가 맺히기 시작해서

얼른 지주대를 만들어서 잘 뻗어나갈 수 있도록 해줬습니다.

 

잠시 다른 일을 하고 와서 봤더니

줄기가 지주대를 타고 왕성하게 뻗어나갔고

어른 머리통만한 수박들이 공중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매달려 있는 수박 중 가장 커다란 것을 하나 따고 집으로 들어서는데

사랑이가 문이 열린 틈을 타서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잽싸게 꼬리를 잡아채서 사랑이를 꼭 껴안았습니다.

 

그 와중에 바닥에 떨어진 수박은

빨간 속살을 드러낸 채 나뒹굴었고

깨진 수박 한 조각을 집어 먹었더니 아주 달콤하더군요.

그 맛이 무릉도원의 복숭아보다 더 달콤해서

나머지 수박을 따러 나섰습니다.

 

이 추운 겨울

지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수박 선물을 해봐야겠습니다.

 

 

 

(이장혁의 ‘아우슈비츠 오케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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