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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세계의 기술종속과 국제적 불평등

제3세계의 기술종속과 국제적 불평등


박인권(서울대 환경대학원 석사과정)




Ⅰ. 제3세계의 기술발달


얼마전 반도체 회사에서 근무하던 연구원들이 대만 회사에 64메가디램 생산기술을 유출시킨 일이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킨 일이 있었다. 기술 후진국에 머물러 있던 우리 나라로서는 그나마 우리 경제에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반도체 기술이 여간 고마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이 몰래 외국으로 빠져나간다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반도체 기술의 해외 유출 사건은 어쩌면 '즐거운 불행'이라고 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 국제 경쟁력의 원동력인 기술을 도둑맞았다는 점에서는 커다란 불행이지만, 세계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던 우리도 도둑맞을 만큼 값진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불과 30여년 전 우리가 '공업입국(工業立國)'을 기치로 내걸고 산업화를 시작했을 때, 우리가 기술을 도둑맞는다는 생각을 할 수나 있었겠는가?

많은 제3세계 나라들이 과거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거나 현재의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다. 도둑맞을 기술보다는 도둑질해 올 기술이 많은 나라들이 바로 제3세계의 나라들인 것이다. 물론 제3세계 나라들이 기술을 도입하는 데에는 도둑질이라는 비도덕적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적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부터 응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들여오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정당한 방법으로 기술을 도입하는 것은 제3세계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비용을 요구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제3세계로서는 기술에 국적도 소유권도 없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게 된다.

사실 기술발달의 측면에서 제3세계가 열위의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역사적 결과일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적 생산력 발달과 궤를 같이 해온 기술발달은 그 발생에서부터 서구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 물론 제3세계로 분류되는 나라들에 일찍이 기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본주의적 생산력과 연결되지 못했거나 다른 맥락에서 발달하였다. 이런 이유로 현재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은 대부분 서구적인 것이다. 따라서 제3세계 국가가 시장질서와는 다른 노선을 채택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서구의 기술을 직 간접적으로 도입하여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대부분의 제3세계 나라들이 이른바 '기술종속'의 상태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는 원인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그런데 제3세계가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게 기술을 의존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기술의 이전과 수입은 근대화 과정과 함께 나타나는 당연한 과정이라는 주장에서부터, 기술종속이 제3세계 국가들의 저발전의 원인이라는 극단적 부정론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최근에는 환경문제와 관련해서도 논의가 활발하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수입되었던 반생태적 제3세계 환경오염의 주범이 되고 있다는 의견도 있고, 제3세계 환경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이미 개발된 선진국의 환경친화적 기술을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와 같이 제3세계 기술발달과 관련해서는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문제가 얽혀 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제3세계 기술발달이 선진국의 경우와는 달리 국제적 불평등 구조에 종속되어 있고, 그것이 제3세계 기술발달 및 경제발전, 환경문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아래에서는 제3세계 기술발달이 어떤 국제적 불평등 구조와 관련되어 있는지 살펴 보도록 하자.



Ⅱ. 기술종속의 의의(意義)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제3세계 국가들은 기술 및 관련지식의 자생적 기반이 취약하여 경제발전에 필요한 기술을 대부분 선진국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상황을 '기술종속'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바, 기술종속이란 "한 사회에서 필요한 기술의 공급을 외부주체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를 대체할 과학기술적 능력과 관련체계가 내부에는 결여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기술종속이 제3세계의 자체기술 발달과 경제발전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제3세계의 기술종속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신고전파이론(또는 근대화이론)과 부정적으로 접근하는 종속이론이 가장 크게 대비를 이룬다. 먼저 신고전파이론은 선진사회에서 후진사회로의 기술이전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며, 제3세계는 전근대적 산업단계에서 근대적 산업단계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이를 적극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이들은 제3세계의 나라들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미 개발된 기술을 위험 부담 없이 받아들여 이용하면 수월하게 근대적 산업화를 이루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이들이 암묵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전제에는 치명적 결함이 있다. 즉, 그들은 기술이 모든 나라 모든 기업들에게 "확실하게 알려져 있고, 아무 비용도 들이지 않고 이용가능하다"고 보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생산주기(production cycle) 상에서 이미 성숙단계에 들어선 기술은 이제 막 등장하고 있는 첨단기술에 비하면 저렴한 비용에 쉽게 도입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신슘페터주의적 접근을 시도하는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잘 밝혀진 바 있다. 하지만 기술을 단지 경제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그것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이라고 가정하는 신고전파이론은 분명 비현실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종속이론가들이 주장하는 기술종속의 부정적 측면은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기술이전이 이루어지는 불평등한 조건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종속이 제3세계 저발전의 구조적 원인이 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사실 선진국에서 제3세계로의 기술이전은 많은 경우 일반 상품의 수출입처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직접투자 형태로 이루어져서, 제3세계의 기술과 산업을 선진국이 직접 통제해 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제3세계로의 기술이전은 제3세계의 기술발달에 기여하기보다는 선진국의 이익도모를 위해 봉사하게 된다.

종속이론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제3세계 국가들은 기술이전을 받아서 산업화를 하더라도 더욱 빈곤해질 뿐이며, 거기서 발생하는 모든 이익은 자본 투자국으로 송환되게 된다. 이런 설명은 많은 제3세계 현실에는 적합한 것이 사실이나, 한국과 같은 이른바 신흥공업국에 대해서는 설득력을 잃고 만다. 신흥공업국들은 종속이론의 주장과는 달리 기술발달의 측면에서 적잖은 성과를 거두었고 상당한 경제성장도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신슘페터주의 이론가들은 제3세계 국가들이 새로 도입한 기술체계를 자기 사정에 맞게 적응시키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자체기술능력을 축적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우리는 신흥공업국의 성과를 과대평가하는 우를 범해서는 곤란하다. 신흥공업국들이 기술능력을 축적할 수 있는 것은 주도적 '기술 패러다임' 내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부분을 차지한다. 따라서 '기술혁명'에 의해 새로 등장하는 기술 패러다임에 대해서는 적응하고 변화시키는 기술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선진국의 꽁무니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하물며 신흥공업국 이외의 제3세계 나라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Ⅲ. 특허제도와 불평등


그렇다면 제3세계의 기술종속이 경제발전과 자체기술 개발에 저해요인이 되니까 선진국과의 기술교류를 끊고 자체기술능력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타당한가? 종속이론의 전통적 논자들은 그런 처방책을 제시해 왔다. 하지만 그것의 결과는 참담한 현실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다. 자립과 자력갱생을 국시로 내세운 북한의 현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것이다.

사실 최근 기술이전과 관련하여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기술종속이 기술도입국의 경제와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한 것보다는 자유로운 기술이전을 가로막고 있는 각종 제도적 장벽과 관련된 것이다. 이러한 장벽은 한편으로 기술종속으로 인한 부정적 영향의 제도적 원인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제3세계로의 기술이전을 가로 막고 있는 요인이 되고 있다. 최근 '지적 소유권'과 관련된 선진국과 제3세계 국가들과의 분쟁은 바로 이 대목에서 되새겨 봄 직하다.

지적 소유권은 국제 특허제도를 통해서 보호된다. 특허제도는 적어도 "원칙적으로 자국인의 발명활동의 촉진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제3세계에서 특허제도는 외국인의 발명보호보다는 사실상 외국인들이 발명하여 상업화한 기술의 독점적 소유를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우리 나라만 하더라도 내 외국인의 특허등록 건수를 보면 7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외국인 비율이 꾸준히 상승하여 90%대에 육박한 적도 있다. 다른 제3세계 나라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미국 일본 등 선진국가의 경우는 내국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제3세계 특허등록 건수에서 외국인의 비율이 이렇게 큰 원인과 그것의 영향은 자명하다. 선진국들은 제3세계, 특히 신흥공업국에서 자신들의 기술을 모방하는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왠만한 기술에 대해서는 일단 특허등록을 해놓고 본다. 자국의 특허권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나라의 모방활동을 저지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특허제도는 기술을 가진 자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남에게 무상으로 빼앗기지 않으려는 제도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허제도의 이런 특성 때문에 제3세계는 선진국으로부터 필요한 기술을 자유롭게 도입할 수 없고,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외국인투자를 유치하거나 비싼 로열티를 지불하고 기술을 수입해 와야 한다.

물론 '지적 소유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면 특허제도도 불필요하고 기술종속이라는 상황도 발생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에서 기술은 자본가의 혁신 노력과 함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부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에 기술의 자유로운 교류와 공유를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기술이 돈이다'는 원칙이 통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적 소유권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본의 소유권을 폐지하자는 주장과 같고 이는 곧 자본주의 체제를 폐지하자는 주장과도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매우 난망해 보인다. 하지만 환경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지적 소유권' 원칙이 부분적으로 유보될 가능성과 필요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Ⅳ. 기술이전의 딜레마


지금까지 우리는 기술이전에는 필연적으로 불평등한 국제관계가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살펴 보았다. 사실 기술이전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일컫는 '기술종속'이라는 용어 자체에 그러한 불평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이런 이유로 제3세계는 기술이전과 관련하여 딜레마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즉, 경제성장을 하자면 선진국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할 수밖에 없고, 기술이전을 하게 되면 불평등한 조건으로 인해 자국 경제와 기술발달에 부정적 영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는 최근 활발한 논의가 진행 중인 환경 문제와 관련해서도 나타나고 있다. 즉 기술이전은 제3세계 환경오염의 요인인 동시에 해결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현 상황에서 환경문제를 고려하면 기술이전을 마냥 반대할 수도 찬성할 수도 없는 것이다.

사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제3세계, 특히 신흥공업국의 환경문제는 외국인의 직접투자와 함께 도입된 선진국의 공해기술로부터 초래된 경우가 많다. 신흥공업국들은 대개 70년대를 통해 급속한 공업화를 이루게 되었는데, 이 시기 선진국에서는 산업 구조조정을 통해 고에너지 공해 산업이 퇴출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 분야에 투자 중이던 선진국들의 자본들은 이제 갈 곳이 없게 되었는데, 마침 경제개발을 갈구하던 신흥공업국이 바로 이들에게 중요한 출구를 제공하였다. 이렇게 출구를 찾은 자본들은 본국에는 이윤의 송환을 안겨다 주고 값싼 공산품을 소비할 수 있도록 하였지만, 투자국에는 환경오염이라는 사생아를 낳고 말았다.

그런데 환경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환경오염을 규제하는 각종 국제협약들이 체결되자 제3세계 국가들도 환경문제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문제는 제3세계 나라들이 환경을 살리기 위해서 '깨끗했던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계속해서 경제개발만 할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환경친화적 기술로 기존의 산업구조를 혁신하지 해야 한다. 하지만 환경기술 역시 주요 공급원은 선진국이라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NGOs와 환경주의자들은, 선진국에도 제3세계 환경오염의 책임이 상당부분 있는 만큼 환경기술을 무상 혹은 헐값으로 제3세계에 이전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환경기술이 여타의 산업기술과 좀 다른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는 여지를 지니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한 것이어서 아직까지 선진국들은 제3세계 환경오염에 대한 책임감을 통감하고 있지 못하며, 따라서 환경기술에 대해서도 지적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형국이다. 환경기술 분야에서도 불평등한 국제관계가 그대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난처한 상황에서 제3세계 국가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일까? 자체기술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주장은 중장기적으로 옳은 이야기일지 모르나 당장 그것을 현실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외국에서 도둑질을 해올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당장에 선진국으로부터 무역제재를 포함한 경고조치를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교적 실현 가능한 방안은 되도록 외국인 직접투자 보다는 기술도입 계약 쪽을 지향하는 것이다. 물론 기술도입 계약에도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기술 공급자의 입장에서는 기술의 통제가 용이한 직접투자 쪽을 선호하기 때문에 협상에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또 기술을 수입해 오는 것은 제3세계 나라에 외채 부담을 안겨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술을 수입하는 것은, 자국의 기술변용능력을 제고하여 장기적으로는 자체기술능력을 향상시킨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 점은 특히 환경기술과 관련해서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환경문제는 지역마다 독특한 생태적 조건을 고려한 경제활동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지역마다 다른 경제활동은 당연히 지역에 고유한 기술의 발달을 내포한다. 이 점에서 기술의 자주적 개발 또는 변용의 능력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다. 이런 이유에서 외국으로부터 도입된 기술에 대한 통제력을 가능케 하는 기술도입 계약이 기술이전을 위한 적절한 방안이 되리라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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