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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최덕현 이야기

전교조는 엄청난 시련 속에 출발해 왔고, 합법화가 이뤄진 상황에서도 또 다른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교사운동이자 동시에 교육운동이 갖고 있는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정권의 민감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지난 20여 년간의 세월을 현장에서 보내고 있는 최덕현 동지를 만나 그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59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난 최덕현은 78년 공주사대에 들어가면서 교사의 꿈을 키워오기 시작했다. 박정희 유신정권 말기에 대학을 다녔던 최덕현은 유네스코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학생운동을 하는 선배들을 접하게 된다. 그러나 학생운동이 활발하지 않고 소수가 비공개로 활동하던 시절에서 학생운동에 참여할 생각은 하지 못한 채 간접적으로 선배들과의 대화나 사회참여적인 지식인들의 책을 보며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대학생활을 하게 된다.

졸업과 함께 의무발령이던 당시 82년 강원도 철원으로 발령이 됐고, 얼마 후 군 입대를 하게 된다. 85년 제대 후 다시 강릉으로 발령받아 본격적인 교사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군대 갔다 와서 ‘책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책방에 가면 판금(판매금지)된 책들이 많았어요. 그때만 해도 판금을 많이 시켰잖아요? 얘네들이 좋은 책을 선정해주는 거지... 판금된 책들이 좋은 책들이니까...

대학 다닐 때 선배들한테 들은 얘기도 있고, ‘내가 사는 게 답답하다’ 그런 생각도 들고, 선생하면서 걸리는 게 많으니까... 그 당시에 주로 마음에 걸렸던 게... 보충수업 자율학습 무진장 시켰거든요. 보충수업 자율학습 시키는 게 아이들한테 도움이 되지 않는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거는 시키고 있는데 안 할 수는 없고, 안 하게 되면 현장에서 버틸 수가 없으니까... 해야 되는데 갈등이 생기는 거지... 해선 안 되는데 내가 하고 있으니까... 그 다음에, 선생도 공무원이나 마찬가지니까 관료들 지시나 통제 속에 생활하는데, ‘이렇게 내가 관료들 지시나 통제 속에 살아가는 게 옳은가?’ 하는 생각들... 그런 것 속에서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는데, 사회적 관심 속에서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었지...”

 

당시 진보적 교육운동을 고민하던 이들이 발간했던 무크지 ‘민중교육’을 비롯해 남미의 교육이론 서적, 미국의 탈학교 관련 서적들을 읽으면서 진보적 교육운동을 고민하던 중 교육민주화운동의 흐름에 참여하게 된다.

 

“주변의 선생님들하고 독서모임을 했거든요. 독서모임 하면서 회지 식으로 내고 그랬는데... 독서모임을 하는데 한 번은 경찰애들이 덮쳤어요. 교육관련 독서모임에도 불구하고 시대상황이 그러니까... 그때 전두환 때였으니까... 그래서 달려가서 조사받은 경험이 있고...

전국적으로는 YMCA교사회라는 게 있었는데, 교사회 중심으로 해서 각 지역별로 교육민주화선언을 조직했어요. 서울에서 교육민주화선언하고, 지역에서도 교육민주화선언하고 이런 시기였거든요. 그때 독서모임에 참여했던 선생님들이 Y하고는 무관하게 강릉지역에서 교육민주화선언을 했어요. 선언은 포장마차에서 하고, 그 선언을 일간지에 보낸 거지... 그래서 보도가 된 거예요. 그러면서 교육청에서 조사 들어오고...

나머지 선생님들은 별일 없었는데, 나하고 몇몇 선생님들은 부당전출이 된 거예요. 나는 고성으로 전출됐어요. 그게 87년 3월이었어요. 그리고 나서 우리가 ‘원상회복시켜라’ 얘기를 했는데, 6월항쟁 분위기 타고 6개월 만에 다시 발령을 내줬는데, 그게 원주였고...

원주에 와서는 그런 분위기 속에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원주에 와서도 주변 선생님들하고 그때 만들어진 교사협의회 활동을 했죠. 그게 전교조 전 조직이거든요. 교사협의회가 지역중심으로 움직이면서 전국적 네트워크가 만들어져 있던 거죠.

주로 현장 근무여건 개선 문제라든지, 아이들과의 관계개선 문제라든지, 아이들 인권문제라든지, 이런 활동들을 했고... 대정부활동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 당시에도 사학비리나 이런 게 많았었기 때문에 전국 집회도 하고 그랬었거든요. 교사협의회가 지역으로 조직되기는 했지만, 중앙으로 집중되는 성격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를 상대로 한 집회나 투쟁들도 많이 했죠.”

 

87년부터 시작된 교사협의회 활동은 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으로 이어졌고, 이어 정권의 대대적인 탄압을 맞이해야 했다. 전교조가 출범하자 전두환 정권은 매우 거세게 노조탈퇴 압박을 해왔고, 그를 거부하면서 버틴 1500여 명의 조합원을 대량해고하기에 이른다.

 

“해고 한다고 했을 때 집에 얘기를 한 거지... ‘내가 만일 탈퇴를 안 하면 해고시킨다고 한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그러니까 아내가 ‘버텨야 되는 거 아니냐?’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동의를 구했고... 그래서 내가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거지...

해고되고 나서 비합법이기는 했지만 각 시·군 단위 지회 활동이 계속 이뤄졌으니까 지회 활동을 계속 한 거였죠. 생계문제는 전교조 지역별로 현장에 있는 조합원들한테 후원금을 모금해서 해고자들 지원을 했던 게 일부 있었고, 집사람이 돈 벌고... 그때 애가 둘이었는데, 우유 배달한다든지, 파출부를 한다든지, 외판을 한다든지... 아이를 돌보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한 거죠.”

 

전교조 참여와 해고, 그리고 비합법 정치조직 활동 등을 경험하면서 최덕현의 삶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내가 생각해보면, 결정적으로 내 삶의 형태가 바뀐 것이 해고되고 나서라고 생각하는데... 그때 강원에 있는 동지 여럿이 학습모임을 했었거든요. 전교조 결성 이전부터 그 모임은 있었어요. 그게 쭉 이어지면서 그 모임에 참여했던 동지들이 다 해고됐죠. 그때는 원주에 있었을 땐데, 원주에 있는 동지들만 한 게 아니라 춘천에 있었던 동지들도 있었고... 그러니까 숙박을 하면서 했어요. 산에 들어가서 며칠씩 하기도 하고... 그때는 여전히 탄압이 있었을 때니까 숨어서 하고, 외부에서 강사도 오고 그랬는데 (비합법) 정치운동 하는 동지들이었으니까 드러내놓고 할 수 없었으니까...

그때 그 학습했었던 거 하고, 전교조 결성 돼서 해고됐었던 거 하고, 원주에서 언더 정치조직 활동하는 동지들하고 관계를 가지면서 결정적으로 내 삶의 형태가 바뀌고, 관심도 좀 더 그쪽으로 집중이 되고...”

 

정권의 거센 탄압과 해고자 생활이라는 어려운 조건에서도 전교조 활동은 매우 활발하게 진행됐다.

 

“시·군 단위 지회가 있었으니까 지회로 모아지는 활동을 했었죠. 지회에서 각 학교 대표자 선생님들 모여서 회의하고... 비합이기는 했지만 전교조 운동은 이뤄졌으니까... 전교조는 역사적으로 뿌리가 있으니까.. 교사협의회 활동도 했었고, 전교조 결성해서도 정부 상대로 합법화 투쟁도 하고, 복직투쟁을 하는 그런 시기였기 때문에 현장에서 전교조 활동을 하는 그런 동지들은 있었죠. 거의 매해 집회하고 그랬죠. 서울에서 집회하면 적어도 7~8천은 됐던 거 같은데... 전교조 집회 할 때는 많이 모이는데, 다른 연대집회 할 때는 안 모여서 문제지(웃음)...”

 

격정적인 몇 년의 시간이 지나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면서 사상적·조직적 혼란은 매우 거세게 몰아쳤다.

 

“소련 해체 이후에 동지들이 떠나더라고요. 다른 나라로 가는 동지까지 있었고... ‘돈 벌러 간다. 돈 벌고 와서 운동하겠다’ 그러면서... 나는 그게 믿기질 않는 거야. 사회주의가 해체됐다고 하는 사실이 믿기가 어려웠고... 그리고 또 하나는, 설사 사회주의가 해체됐다고 해서 동지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동지들이 흩어지고 그랬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운동을 그만두기는 마음이 내키질 않는 거예요. 자존심이 상하는 거죠.

혼자서 찾아봐야 되지 않겠느냐 싶은 건데... 개인적인 문제하고 조직적인 문제가 결합되면서 다른 돌파구가 없더라고요. 돌파구가 없으니까 그냥 주저앉아 있었던 거였죠. 그 당시에는 상반되는 감정상태 였는데... 하나는 ‘혼자서라도 뭔가 찾아봐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그런 상태하고, 또 하나는 ‘현실에 안주할 수 있지도 않겠느냐’ 하는 이런 생각이 막 혼란스러웠어요.”

 

사상적 혼란과 개인 문제가 겹치면서 최덕현은 93년부터 전교조 활동을 중단하고, 94년 해고자들이 신규채용 형식으로 복직하게 되면서 교사로서의 생활만을 이어간다. 장남이었던 최덕현은 96년 부모님을 보시기 위해 경기도 부천으로 학교를 옮기게 됐고, 98년 전교조는 합법화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던 99년 당시 부천지회장의 활동 권유로 중단했던 전교조 활동을 재개한다.

 

“당시에 지회장 동지가, 같은 학교에 근무했었는데, 와서 ‘상황도 어렵고 하니까 나와서 같이 일 좀 해야 되지 않겠냐?’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지회에 집행부도 꾸리기 어려우니까... ‘그렇다면 나가보자’ 그래서 지회 일을 다시 했어요. 내가 ‘운동을 완전히 접겠다’는 생각을 한 거는 아니었고, 혼란스러워서 그냥 있었던 상황이었으니까 바로 그런 계기가 주어지니까 ‘그럼 한 번 해보자’ 이렇게 된 거였고...

그 전에도 주변에서도 이야기 많이 하고 그랬었는데, 그냥 있었던 거였죠. 주저앉아 있고 싶었던 거였죠. 내가 사람들하고 싶게 접근해서 이야기 하고 이렇게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서 누가 먼저 와서 같이 하자고 하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것이 개인적으로 있었고... 특별한 계기만 주어졌으면 아마 그 전이라도 복귀는 했을 거예요. 스스로 ‘이걸 내가 극복하고 나가겠다’ 이런 생각을 못했던 게 있었고, 내가 움직일만한 계기들이 주어지지 않았던 거 같고...”

 

7년 만에 다시 전교조 활동을 다시 시작했지만 흘러간 세월만큼 교육현장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합법화와 함께 조합원이 대규모로 늘었지만 간부들의 열정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고, 교육현장에 몰아치는 신자유주의 정책은 교사들을 점점 경쟁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합법화 이전에는 눈에 보이는 분명한 투쟁거리가 있었어요. 합법화를 해야 하고, 해직교사 복직문제도 있었고... 현장에 있는 동지들도 다 그런 탄압을 버티면서 이겨냈었던 동지들이거든요. 숫자는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현장에서 꿋꿋이 싸우는 동지들이었기 때문에 합법화 이전에는 합법화까지 갈 수 있는 동력이 돼 왔어요. 투쟁력이나 이런 거만 보면 다른 부문의 동지들이 ‘전교조 대단하다’ ‘전교조는 싸움만 하면 이긴다’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합법화 되고 나서 그 동력이 유지되면서 숫자가 늘어났는데, 합법화 이후에 전교조 운동의 방향을 제대로 잡았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여전히 교육문제 중심으로 전교조 운동을 사고했지, 전교조 운동을 전체운동으로 발전시키려는 그런 노력들이 부족하지 않았느냐... 이런 것들이 결합해서 활동력이 떨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합법화 이후에도 그 동력이 있었기 때문에 2004년까지는 동력이 유지됐었거든요.

또 하나는 새로 발령 받는 선생님들의 조건이 다른 것도 있어요. 지금 임용고시 봐서 오는 선생님들보다 그 당시 선생님들이 사고가 건강했어요. 아무래도 시험을 보고 합격해서 오니까 오로지 시험 준비만 하다가 오는 거거든요. 사회적 관심이라는 게 별로 없어요. 그리고 굉장히 자기중심적 이예요. 그런 환경에서 들어 오다보니까 학교에서도 선생으로서보다는 직업인으로서의 정신을 갖는 경향들이 강해요. 그런데 그때는 의무발령이었으니까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대학을 졸업했으니까 사고는 자유로웠어요. 그래서 선생으로서 뭘 해야겠다는 생각들은 했던 거였는데... 지금은 오로지 시험에 합격해야 하니까 그 부담이 주는 압박이 옛날하고 다르죠.

또 하나는 전교조 활동을 하면서 승진에 굉장히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있어요. 전교조 결성 당시 중추세력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승진을 해야 되는 나이가 된 거예요. 내 나이 또래가 교감급 이거든요. 그런데 교감이 되거나 교장이 되려면 점수를 따야 되는데, 점수를 따는데 있어서 전교조 활동이 불리하게 작용할 수가 있어요.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동지들이 승진 길에 서면서 생각이 조금씩 변화된 것도 있고...”

 

신자유주의 공세는 전교조 내부만이 아니라 그 주변에서도 나타나 여러 이해관계자조직들이 생겨나며 갈등이 더욱 깊어진다. 교사조직으로는 전교조, 한교조(한국교원노조), 자유교원노조, 교총(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대립하고, 학부모단체는 참교육학부모회, 학사모(학교를 사랑하는 학부모모임), 뉴라이트 학부모연합 등이 대립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학교에서는 전교조하고 교총하고 대립되는 구도가 돼 있거나 그러진 않아요. 왜 그러냐 하면, 교총은 현장 활동이 없으니까... 교총은 조직은 있지만, 학교 단위에서 모임을 해서 뭘 한다 이런 건 없어요. 그런데 전교조는 분회가 있으니까... 주로 갈등이 생긴다면 교장과의 갈등이지... 학교 근무조건 개선과 관련해서는 전교조 교총 구분 없이 교장을 상대로 해서 하는데, 주로 부장까지는 교장 편이고, 나머지 평교사들은 같이 교장하고 싸움을 하고... 싸움을 하면 전교조만 하는 게 아니라 전체 선생님들 하고 같이 하니까... 교총과의 대립이 현장에서 나타나는 건 아니에요.

학부모들 하고의 관계는... 참교육 학부모회 활동이 부천지역에서는 별로 없어요. 부천에는 학부모연대라고 참학(참교육 학부모회)하고는 다른 성격을 가지는 조직이 있기는 한데... 뉴라이트 계열은 전교조가 뭘 하면 난리를 쳐요. 전교조에서 뭔 일을 하면 얘네들 나타나서 막고 그러니까... 직접 학교로 찾아와요. 부천 상동고등학교에 이용석 선생이라고 있는데, 국기에 대한 맹세 거부를 해서 징계를 받았는데... 그때 주동적 역할을 했던 게 학사모(학교를 사랑하는 학부모모임)였어요. 그런 식으로 전교조가 학교에서 교장을 상대로 싸움을 한다고 그러면, 학부모라고 하는 요구를 가지고 와서 역할을 하는 거죠. 그리고 의도적으로 교장이 부르기도 하고... 요즘은 뭔 일이 있으면 학부모 먼저 동원을 하니까...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그거예요. 학부모를 동원했을 때 학부모를 상대로 싸우는 게...”

 

20년의 전교조 역사 속에서 내부에는 노선적 입장을 달리하는 활동가조직이 크게 두 흐름이 존재한다. 이 흐름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 공개적인 현장조직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전교조 활동 자체의 침체 속에서 새로운 활동가를 발굴하는 것이 쉽지 않은 현실이다.

 

“대중적으로는 되질 안더라고요. 투쟁 사업을 만들어서 한다든지, 교육 사업을 만들어서 한다든지, 대중적 선전을 통해서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조직화가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수공업적이기는 하지만 개별적 접촉을 통해서... 경기 같은 경우에는 교사 수가 서울보다 많아요. 그런데 조직률은 전국의 최하위야. 전국 평균이 2%~30% 되는데 13% 정도 밖에 안 돼요. 그래서 사람은 있는데 그 사람을 조직해내지 못하는 게 있어요. 경기 같은 경우는 지역 현장모임이 있어요. 이쪽 경기 동부 쪽 현장모임을 꾸리게 하고 있고... 지역 모임을 하면서 수공업적으로 하고 있죠.”

 

2006년 잠시 중앙 연대사업부장 활동을 하기도 했던 최덕현은 전교조 활동이 기층연대활동으로 거듭나야 함을 강조한다.

 

“교육문제라는 것이 교사나 학생만의 문제가 아니고 학부모의 문제고 사회적인 문제거든요. 어쨌든 교육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체제를 재생산 하는 역할을 하고 있고, 계급을 구조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단순히 교사의 문제만이 아니고, 학생의 문제만이 아니고, 학부모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체의 문제다. 그래서 교육운동을 한다고 하지만, 전체 운동의 틀 속에서 이 문제를 풀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다는 거거든요. 그만큼 교육운동과 관련해서는 연대가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전교조가 연대에 너무 소극적이라는 거예요. 상층부문의 연대만 이뤄지지 현장에서의 연대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 게 문제다. 그렇게 연대투쟁을 조직하면서 교육문제를 전사회적인 문제로 만들어서 해결해야 되는데, 그게 안 되고 있는 게 문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최덕현은 교육을 시장의 상품으로 몰아가는 신자유주의 정책 속에서 교사와 학생과 학부모의 대립은 왜곡된 대립이라며 서로간의 소통을 통한 공동투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인권이라는 거는 보편적 권리의 문제이기 때문에 교사의 교육권이라는 것과 학생 인권이라는 것이 충돌하지는 않아요. 내가 가끔 아이들한테 얘기를 하는 게 ‘내 존재의 이유는 너희들이다’고 얘기를 하거든요. 아이들이 없으면 선생은 없는 거잖아요. 존재의 이유가 아이들이고, 그 아이들의 인권이 침해를 당하는 부분이 주로 입시교육 중심에서 나오는 문제예요. 대학만 잘 가면 애들 패고 그래도 모든 게 다 용서되는 분위기가 있고... 정보권이나 신체의 자유 같은 게 있는데... 이게 교육권하고 충돌되지는 않는데, 교사가 아이들을 통제나 규제의 대상으로 볼 때... 관습이나 그동안의 제도나 법이나 이런 것들에 의해서 충돌이 생기는 거지... 교사의 교육관과 아이들의 인권은 충돌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굳이 충돌이 생긴다면 학습권과 교육권하고 충돌이 생길 수는 있을 거예요. 인권의 문제는 아니고... 학부모하고 아이들은 배울 권리라고 얘기를 하고, 교사는 가르칠 권리가 있는데... 요구에 있어서 충돌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은 하는데... 그 충돌조차도 서로 다른 관점에서 교육을 바라보고 있다는 거죠. 요즘 윗대가리들 하는 얘기로는 공급자 수요자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교육은 공급과 수요의 상품이 아니에요. 시장 논리로 볼 때 충돌할 수 있는데... 사실은 교육이 공공적 성격을 가지고 있고, 그 공공적 성격을 구현하는데 있어서는 수요자가 가지고 있는 학습권하고 공급자가 가지고 있는 교육권이 충돌할 수 없다는 거죠. 그 문제 역시도 잘못된 관점 속에서 나온 표현이라는 거죠.

내가 보기에는 학생의 권리하고 교사의 권리가 충돌할 여지는 많지 않다. 설사 충돌한다고 하더라도 법이나 이런 걸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교육적 소통을 통해서 해결할 문제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장애인 교육권 문제도 제도와 충돌을 하는 거예요. 장애인이 비장애인하고 똑같이 교육받을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도가 막고 있는 거지 교사가 막고 있는 건 아니거든... 그러면 이 제도 개선을 위해서 교사나 장애인이나 장애인 학부모나 같이 투쟁할 문제라고 생각하는 거죠. 장애인 학습권 관련해서 교사가 담당하고 있는 장애인 학생 수가 너무 많다고 그러면 교사 수를 늘려야 되는 거죠. 그러면 ‘교사 확보해라’ ‘예산 확보해서 시설 확충해라’라고 요구해야 되는 거고, 이 요구는 교사의 요구이자 장애인 학생의 요구이자 장애인 학부모의 요구이거든요. 공동의 요구이지 충돌할 부분이 아니라는 거죠.

결국은 이런 모든 문제는 시장적 논리로 교육을 보면서 생기는 거예요. 어떻게든 돈은 덜 들이려고 하고 효과는 효과대로 내려고 하는 교육정책과 제도 속에서 나오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거는 공동의 요구로 해서 제도개선투쟁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죠. 그거는 많은 소통이 필요한 거 같아요.”

 

학교 안에는 구성이 다양한 만큼 노동조합도 다양하게 조직돼 있다. 교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전교조, 국·공립학교의 행정실 직원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전국공무원노조 교육기관본부, 학교 내 비정규직을 조직하고 있는 학교비정규직노조 등이 있다. 이들 노동조합은 구성이 다른 만큼 간혹 서로간의 충돌도 발생한다.

 

“최근에 전교조하고 공무원노조 교육기관본부하고 다툼이 있었거든요. 그게 뭐 때문에 그랬냐 하면... 학교 환경조사 하는데 ‘그게 보건교사가 할 일이냐’ ‘학교 행정실에서 할 일이냐’는 다툼이 있었는데... 교육부 지침이 해석을 애매하게 내렸어요. 공무원노조 교육기관본부는 해석하기를 ‘이거는 보건교사의 일이다’라고 해석을 하고, 전교조 보건위원회에서는 ‘이거는 행정실에서 할 일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그래서 서로 다투기까지 했어요. 서로 ‘우리 할 일 아니다’고 자지 주장을 하는 거예요.

학교 환경문제라고 하면 교사도 아니고 학교 행정실도 아니고 자치단체에서 할 문제지 학교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와 가지고 오염도 얼마 되고 측정하고 하는 거는... 전체적으로 자치단체 내의 시설 관리하고 하는 거는 지방자치단체에서 할 문제지 학교에서 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전문적인 문제도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이 있는데, 그거를 각자의 자기 요구로만 하는 거예요. 이게 문제라는 거예요. 그게 각자의 요구일 수밖에 없는 거는 현재의 제도 틀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그거는 서로 소통하고 하면서 공동의 요구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부천지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최덕현은 활동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현장투쟁을 고민하고 있다.

 

“최근에 지회에서 한 거는 방과 후 활동 문제 때문에... 심각하거든요. 일과 이후에 아이들 특기적성교육 시킨다고 하는 건데... 원래는 저소득층 자녀나 맞벌이 부부 자녀들을 위해서 학교에서 끝까지 교육기능을 담당해야 한다고 해서 들여온 건데... 그게 지금 보충수업으로 진행이 되려고 하고 있어요. 그거 싸움 하고 있는 중이예요.

문제는 현장이 침체돼 있는 걸 어떻게 복원할 거냐에 중심이 가있거든요. 이번 집행부는 그전 집행부 하고 다르게 현장에서 작은 거라도 이기는 싸움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이에요. 방과 후 활동 문제도 보충수업으로 하지 말라는 건 교육부 지침이거든요. 그런데도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그걸 폭로하고 시교육청 들어가서 교섭을 하면 이길 수 있는 문제거든요. 교육청 들어가서 교육장한테 합의를 받아냈거든요. 파행적으로 운영하지 않겠다는 합의 받아내고, 공문 내리게 하고... 학교별로 공문 다 받긴 했다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해서 이길 수 있는 싸움들을 학교별로 하게 하고... 그렇게 싸움 과정에서 현장이 움직이고, 이기면서 자신감 갖고... 그렇게 하면 현장이 달라지지 않겠는가 하는 희망을 갖고 현장투쟁 중심으로 사업계획을 만들었어요.”

 

교사중심의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학생 당사자운동이 새롭게 활성화돼야 함을 느끼고 있기도 하다.

 

“어떤 때는 그런 생각도 하는데... 교사 가지고 되겠냐? 교육문제는 교사보다는 학생들이 더 큰 역할 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해요. 왜 그러냐 하면, 너무 힘드니까... 그리고 사람들이 힘들게 하니까...

같은 전교조 조합원이라고 하더라고 교장 같이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학교 내의 어떤 문제를 가지고 ‘이런 요구를 갖고 싸움을 하자’ 그러면 ‘교장이 하고 있는 게 왜 그런지에 대한 근거를 갖다 달라’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그리고 정규수업 시간에 EBS 방송을 하는 데가 있어요. 정규수업 시간에 EBS 방송을 전체 학생들에게 강제로 보게 하는 거는 교육과정 자체를 파행으로 만든다는 거죠. 그 한 시간을 하면 아이들의 학습시간이 한 시간 더 늘어나는 거예요. 또 EBS를 보려면 애들이 교재를 강제로 다 사야 되는 문제가 있고... EBS 교육이 교육적 효과가 있느냐는 문제가 있어요. 그동안 EBS 교육 많이 하고, 많이 떠들어 댔지만, 실제로 EBS 보는 애들이 거의 없어요. 교육적 효과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그거 하지 말라고 교육청에 가서 지랄을 하고 공문까지 만들어서 내려 보내도록 했는데, 정작 해당 학교의 조합원은 ‘이거 아이들한테 도움 되는 거 아니냐?’ ‘왜 가서 항의해가지고 현장 복잡하게 만드냐?’고 얘기를 해요. 미치겠는 거예요.

교육운동의 주체를 교사로 보고 교사를 조직한다는 게 지금 분위기로 본다면 한계에 있다는 생각도 드는 거고... 또 교사들이 집단적으로 뭐 하면 잘 안되는데 학생이 한 번 들고 일어나면 당장 해결되거든요.

우리 학교에서도 학생생활규정 개정 토론회를 교사대표, 학생대표, 학부모대표 해서 하는데... 학생 인권문제나 자치활동 문제는 다 규제하고 통제하려고 하는 그런 개정안을 내놓은 거예요. 그런데 아이들 하고 나만 반대를 하는 거예요. 다섯, 다섯, 다섯인데 학부모가 한 명이 안 오고 네 명이 온 거예요. 그러면 14명이잖아요. 애들 다섯, 교사 중에서는 나 하나... 조항 하나하나 씩 검토하면서 손들기 하는데 계속 8:6이야. 그래서 하도 화가 나가지고 정회 요청하고 애들 불러 모았죠. ‘이거 여기서 계속 얘기해봤자 들러리다. 계속 이렇게 진행되면 나 나갈란다’ 그러니까 ‘그러면 우리들도 나갈래요’ 이러더라고요. 그걸 공개적으로 다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그 다음부턴 태도가 바뀌더라고요.

교사는 조직하기도 힘들고, 조직해서 싸움을 하더라도 별 효과가 없지... 그런데 학생들이 움직이면 바꿔낼 수 있는 여지들이 보인단 말이에요. 옛날에 전교조 결성 당시에는 고등학생운동이 따로 있었어요. 그때 있었던 고등학생운동을 다시 부활시켜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지역의 학생회연합조직이 있는데 그것도 하고 있어요. 그런데서 또 다른 전망들을 찾을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이요.”

 

20여 년의 교사운동 속에 나이 오십이 넘어선 최덕현은 현장활동의 정치활동의 결합을 모색하고 있다.

 

“옛날에는 전교조 운동 하는 게 재미있었거든요. 오히려 비합 때 힘은 들었지만 재미는 있었고 할 맛이 났거든요. 지금은 쪽수는 많고 할 일은 더 많아졌고, 그런데 싸움은 안 되고... 답답한 거예요. 그걸 어떻게 잘 만들어봐야 되지 않을까... 정년을 하게 되면 정년을 할 때까지 현장을 움직여 봐야 되겠다 하는 생각은 해요.

정치적으로는 대리정치나 의회정치를 돌파하는 것은 계급정당 직접정치가 아니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정치적 전망을 갖고 계급정당 건설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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