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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륭전자 김소연 이야기

많은 이들이 전망이 없다고 떠나는 구로공단에서 20년에 이르는 세월을 노동과 투쟁 속에서 보내는 이가 있다. 20대 정규직노동자로 일을 시작해 IMF 시기에 노조 위원장이 돼서 폐업에 맞선 장기투쟁을 벌이고, 30대 비정규직노동자의 삶을 살며 비인간적 대우에 맞서 1000일이 넘는 투쟁을 벌이고 있는 기륭전자 김소연 동지를 만났다.

 

70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소연은 고등학교 2학년이던 87년 민주화항쟁의 분위기 속에서 학원민주화투쟁을 경험하게 된다.

 

“87년 6월항쟁 있을 때 분위기 타고 사립학교 민주화투쟁이 쭉 있었어요. 저희 학교도 그런 흐름이 있었죠. 워낙 비리가 심해서... 수련회비, 졸업여행비 이런 것들 먹고... 졸업생들 돈 걷어서 기부 받은 돈을 개인적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제일 결정적이었던 건, 88올림픽 기념행사 그러면 학생들을 많이 동원했어요. 행사하러 갔더니 어느 학교는 빵하고 우유를 주는데 우리는 아무 것도 안 주고, 차비도 우리 돈 내고 갔는데 다른 데는 차비도 줬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 때어 먹은 거구나’ 그랬죠.

그런 내용들을 지도 선생님들이 많이 알았겠죠. 선생님들이 모여서 얘기를 해갖고 대자보를 붙였어요. 학생들이 보고 분노를 했죠. 그래서 들어갔는데, 교장선생님이 해명을 하고, 이거에 대해 선생님이 반박을 하려하자 마이크를 뺏어 버렸어요. 이거에 분노를 해서 학생들이 다 뛰쳐나갔어요.

그래서 수업거부도 하고, 점거농성도 하고, 교무실 접수해버리고... 시험 때 백지동맹을 했는데 단 한 사람도 답을 쓴 사람이 없기도 했어요. 졸업생하고 학부모까지 공대위 구성해서 굉장히 크게 싸웠어요. 그렇게 투쟁을 해서 재단은 못 바꾸고 교장만 3~4번 바꿨어요. 관선이사 파견하라고 교육위원회 가서 싸우고 그랬는데, 관선이사는 파견이 안 됐고... 선생님 한 분은 구속 되고... 나중에는 의식 있었던 선생님 한 분을 좌경으로 몰아서 국가보안법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와해되고... 마지막에는 학생들이 남아서 싸움정리를 해요.

11월부터 시작해서 방학기간 내내 했어요. 신학기 돼서는 전면으로 할 수는 없으니까 복귀를 해서 공부는 하면서 투쟁은 계속 이어졌죠. 그렇게 하면서 싸움은 정리되고, 직선제 학생회장 선출하고... 기본적으로 학생회 활동이 활성화되는 그런 과정이었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학교 후배들을 지원하면서 일을 다니기 시작한다. 몇 군데에서 일을 하다가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옮기던 중 92년 구로공단으로 와서 갑을전자에 입사하게 된다.

 

“그때만 해도 사람을 뽑는 데가 워낙 많아서 가리봉에 내리면 서로 데려가려고 했어요. 내리면 공고 같은 거 엄청 붙어있고... 그런 거 보고 했는데도 연결이 잘 되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가리봉에 내렸는데 ‘좋은 일자리 있다’고 가자는 거예요. 봉고차에 실려서 갔는데 거기가 갑을전자였어요.

젊은 친구들 많고,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천 명 정도 됐으니까 꽤 컸죠. 그리고 집행부가 어용이라서 이미 노민추가 존재하고 있었어요. 그 당시만 해도 구로공단은 활동가들이 많고, 다양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보통 전자회사는 남성이 많지 않은데, 갑을은 거의 남녀가 반반 정도였어요. 젊은 층이 많았고... 제가 23살에 입사를 했는데 나이가 중간정도였어요. 그러지 않으면 아주머니들... 남성들을 대부분 병역특례병이거나 고3실습생들이니까 다 나이가 낮아요. 30대 이상도 있기는 있었는데 그렇게 많지는 않았어요. 그러니까 분위기가 아주 좋죠. 잘 하고, 정의감도 있고... 3교대를 했는데 어울리거나 이런 것도 많았고... 술집 가면 3개조가 있었는데, 한 개 조 빼고 다 만나요. 야간조가 그때까지 마시고 있어서... 그러면서 서로간의 친분이나 이런 것들이 되게 좋았어요.

노민추가 워낙 활발해서 노민추 사람들이 집행부와 상관없이 파업까지 준비하니까... 현장에서 라인싸움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결정적인 건 위원장 선거만 하면 지는 거예요. 걔네들이 회사랑 결탁해서 돈 살포하고... 위원장이 임금인상에서 도장 찍고 가버리면 집 하나 생기고 차 하나 생기던 시절이니까...”

 

88년 시대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갑을전자노조는 초기에 비교적 건강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지만 곧 어용세력들이 노조를 장악하게 된다. 이에 노민추가 만들어져 김소연이 입사하던 92년에는 노민추 회원만 50여 명에 이를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90년대 초반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사상적 혼란이 일어나고, 현장 활동도 좀처럼 나아질 전망이 보이지 않으면서 많은 활동가들이 떠나기 시작한다.

 

“94년 선거 때 ‘조합원이 아닌 사람이 투표 하는 것을 확인했고, 후보자 유세나 이런 것을 제대로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진행한다’ 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런 선거는 못한다’하면서 선거 당일 날 선거보이콧을 선언하죠. 그런 조건에서 선거보이콧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다 마당에 앉아 있고, 선거를 하는 사람들은 계단을 통해서 올라가고... 확연히 구분되는 거죠. 현장사람들은 안 하고, 관리직이나 이런 쪽은 하고, 일부 현장에서 아주머니들은 참여하는 사람이 있고...

이러면서 과반은 넘겨서 당선은 됐는데, 우리가 법원에 부정선거라고 해서 가처분을 내요. 그게 우리가 이겨서 위원장은 내려가요. 그런데 새로 뽑아야 되는데, 보통 이런 데는 선관위를 자기네 편으로 하는데, 자기네 편인 선관위원장을 직무대행으로 시켜버려요. 그러니까 심각하죠.

이러면서 쭉 싸움이 진행되는데 그 과정에서 노민추 활동가들이 많이 떠나요. 그 전부터 두 번 정도 선거에서 실패를 하면서 전망 고민을 한 거죠. 그리고 나이가 20대 중·후반이 되니까 조금 더 안정적인 거를 찾기도 하고... 자기 전망 갖고 나간 사람도 있고...

선관위원장이 직무대행을 하면서 오랫동안 유지를 해요. 그러면서 지난한 과정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에 대한 투쟁은 계속 진행했죠. 대의원 선거가 이런 거는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대의원선거도 아주 치열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의원은 민주파를 많이 뽑죠.

그런데 많이 그만두고 그러니까 많이 침체가 되죠. 회사 규모도 천 명에서 점점 축소시켜나가는 과정이 있었고, 우리 힘이 약하니까 활동하는 친구들을 가능한 한 부서로 몰아버리는 과정도 있었어요. 오히려 그게 해방구를 만들기도 했죠. 그 사람들이 끝까지 남아서 사수하게 되는 힘이 됐어요. 건물 페인트 일도 시키고, 지붕 위에 올라가서 뭣도 하게 하기도 하고, 별거 별거 다 시켰어요. 그런데도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버틴 친구들도 있죠. 그렇게 하면서 노민추 회원으로 활동했던 사람이 마지막에 3명 남아요. 그때가 96년 이예요.”

 

96년 임원선거에서 조직력이 약해진 노민추를 후보를 내지 않고 경선에 출마한 후보 중 한 후보를 지원하게 된다. 노민추가 지원한 후보가 당선이 되면서 노민추 활동가들이 상집으로 결합하게 됐다. 그러나 96년 연말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벌어진 노동법개악저지 총파업에 최소한이라도 결합하기로 했던 결정을 위원장이 번복하면서 노민추 활동가들과 갈등이 일어나고, 현장에서 압도적으로 불신임 서명이 벌어지자 위원장을 사퇴를 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치러지는 임원선거에 노민추는 김소연을 위원장 후보로 해서 출마를 하게 된다. 이전 임원선거와 달리 선관위 구성에서부터 적극적으로 대응을 했고, 계속된 인원 감소와 현장 통제 등으로 위기의식이 높아진 현장의 분위기 등에 힘입어 김소연은 힘겹게 위원장에 당선된다.

 

“임·단협이 늦게 됐고, 조합원들 요구도 있고, 그래서 첫 해는 아주 빡 세게 싸우거나 이러질 못했어요. 회사는 우리가 대단히 부담스럽고... 그래도 의미 있게 임·단협 마무리 되고...

98년에 처음으로 1시간 파업을 했어요. 파업 경험이 없거든요. 사람들이 파업하면 회사 망하고 해고당하는 줄 알고 그랬어요. 그런 걸 넘어서서 1시간 파업을 성사시키고 잘 마무리 됐어요. 그때 한국노총이잖아요. 그래서 민주노총 전환 찬반투표를 해요. 찬성이 2/3가 돼야 하는데 무난히 갔어요.

99년에 민주노총 지침에 따라 주40시간 요구를 걸고 파업을 벌여야 했어요. 그때 교섭도 충분히 않았는데, 정치파업 시비가 있고 그래서 회사가 엄청 탄압을 하기는 했는데... 우리가 힘 있게 그 파업을 만들어냈어요. 그 전까지만 해도 현장에 탄압이 들어오면 간부들이 쳐내지 조합원들이 싸우질 못했어요. 그런데 99년 2박3일 파업투쟁 하면서 조합원들이 관리자랑 붙어서 싸우는 힘이 생겼어요. 일부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다수는 아니에요. 오히려 투쟁 안하는 사람들이 욕먹고 왕따 되는 분위기...

보통 97~98년에 단협에서 많은 것을 뺏기는데 갑을은 하나도 뺏기는 않았어요. 구로공단 내에서는 유일하게 하나도 안 뺏긴 사업장일 거예요. 그래서 청소나 식당 아주머니들도 다 조합원이었어요. 그전에는 사측 편들고 그랬지만, 조직화도 하고 그러면서 우리 쪽으로 많이 오고... 새로 입사하신 분들은 노동조합 좋은 건줄 아니까...

97년 IMF 때 갑을그룹이 워크아웃 들어가고, 갑을전자도 부도가 나서 화의신청을 해요. 회사는 부도가 났어도 조합원들은 안 흔들렸어요. 왜냐하면 회사가 맨날 어렵다고 그랬거든요. 그리고 우리도 ‘웃기지 마라. 돈 많이 벌어놓고도 그렇게 한다’ 하면서 아무 것도 안 뺏기고 갔죠. 그런데 회사가 ‘지금 하고 있는 게 별 전망이 없으니 새로운 걸 하려고 한다. 승인해 달라’ 이런 거였고... 솔직히 우리가 기업경영이나 이런 거는 잘 모르고, 그 전부터 쭉 관여했으면 모르겠는데 그런 조건이 아니었고, 그래서 ‘검토를 같이 하자’하면서 갔어요. 회사가 ‘일감이 없고 그래서 부분적으로 휴업에 들어가야 되겠다’ 그러면서 99년 하반기에 휴업에 들어가요. 법적 보장임금 70%, 월별 정기적 노사협의회, 복귀 시기나 인원은 노사가 합의하기로 하고...

그런데 일이 잘 안됐어요. 갑을이 미국에 있는 큰 회사에 거의 사기당하는 식으로 투자실패를 해요. 그래서 휴업기간이 길었죠. 처음에 6개월 합의했는데, 또 가야되는데 안 되잖아요. 그래서 6개월 후에 다 복귀를 시켰어요. ‘조합원들이 다시 돌아와야 할 근거를 마련하자. 임·단협 진행하자’ 그래서 10만원인가 임금인상을 하고, 휴업급여를 8O%로 인상하고... 이래서 다시 휴업에 들어가요. 들어가는 기간 동안 조직력이 훼손되면 안 되니까 일상 활동을 쭉 진행해요. 상근자는 매일 출근해서 체크하고, 조별 모임이든, 부서별 모임이든, 야유회든 쭉 진행해요.

그런데 회사가 마지막 6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더 이상 못하겠다’고 그래요. 여기는 화의신청 상태였기 때문에 사업주가 못하겠다 그러면 파산이에요. 그게 2000년 6월 이예요. 그런 과정에서 조합원들 불러서 복귀 계획 세우고 교섭을 했는데, 교섭이 안 되죠. ‘이 회사는 니 개인 회사가 아니고, 이 사람들 일터다. 생계대책 책임져라’ 했지만 막판에 사장이 폐업신고를 하고 파산 절차에 들어가요.

그래서 불러 모아서 요구사항을 세운 게 ‘생계대책비를 지급하라. 공장이 재가동 되거나 매각 될 때 전원 고용승계 단협승계 노조승계를 약속하라’는 것이 핵심요구였어요. 그런데 생계대책비를 얼마로 할지 애매하잖아요. 토론을 통해서 평균임금 9개월 정도로, 1인당 천 만원 정도 될 거예요. 그렇게 요구를 정해서 투쟁에 들어가죠.

사실 저는 그 당시에 너무 갑갑했어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냐하면 ‘퇴직금도 줄 돈이 없는 회사에 무슨 위로금을 달라고 하냐?’ 이런 거였어요. 아무 것도 건질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때 우리 조합원들이 한 얘기가 ‘부자는 망해도 3년은 산다’ 그런 거였고, 그래서 ‘그럼 좋다. 싸워보자. 돈이 없으니 1인당 10만원씩 투쟁기금 내자’해서 싸움을 시작했어요.”

 

이미 회사의 일부가 경기도 군포로 이전한 상황에서 서울과 군포를 오가면서 벌여야 하는 투쟁이었다. 그리고 조합원도 많이 줄어서 투쟁을 벌일 때는 80여 명의 생산직 조합원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투쟁은 매우 힘 있게 진행됐다.

 

“사장이 안 나타나니까 찾으러간다고 광화문에 있는 갑을그룹 본사로 갔어요. 그대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어요. 그때 조합원들이 남성도 있었는데, 여성이 좀 많았어요. 가서 발로 차고 싸우는데 예기치 않게 회장실을 점거했어요. 원래 계획에 없었던 건데...

검거를 하니까 얘네들 당황해서 ‘요구가 뭐냐?’ 그래서 ‘대표자 사라졌다. 찾아와라’ 그랬어요. 처음에는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그러더니 연락이 왔어요. ‘오면 나갈 수 있냐?’ 그래서 ‘나갈 수 있다’고 했죠. 결국은 걔네들이 그 뒷날 교섭을 잡아줘요. 그런데 우리 조합원들이 ‘제네 말을 어떻게 믿냐? 우리 못 나간다’ 그러면서 자장면 시키고 난리 났어요. 집에다 전화해서 ‘우리 애들 아침에 학교 잘 보내고...’ 이러면서... 조합원들이 워낙 흥분해 있는 상태니까... 내가 간부들 불러서 ‘내가 약속했는데 약속은 지켜야 될 것 같다’ 그랬어요. 그래서 간부들 의견 모으고 조별 토론 붙였어요. 결국은 ‘약속만 안 지켜봐라’ 이러고 철수를 했어요.

뒷날 아침에 갔더니 갑을그룹 전체를 전경들이 삥 둘러싸서 아무도 못 들어가게 한 거예요. 교섭단만 들어오라는 거예요. ‘그렇게 못 한다’ 그러면서 4시간 넘게 난리를 쳤어요. ‘우리 못 들어가면 아무도 못 들어간다’ 그러면서 조합원들이 문을 다 막고 아무도 못 들어가게 했어요. 거기 여행사도 있고, 증권사도 있고, 외국인도 많이 오는 그런 데였어요. 심지어는 아줌마들이 ‘화장실 가고 싶다’ 그랬는데도 옆 건물 가라면서 안 들여보내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웃기는 소리마라. 내가 뼈 빠지게 일해서 만든 빌딩인데 내가 왜 못 들어가냐?’ 그러면서 거기서 소변을 봐 버렸어요. 그게 절박해야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결국은 그 문을 뚫었어요. 다만 ‘조합원들은 로비에 있어라’ 그래서 들어가서 조합원들은 로비에 있고 우리는 교섭하러 올라갔어요. 그때부터 갑을그룹 155일 점거농성이 시작됐죠. 그 당시에는 꽤 장기투쟁이었거든요. 그 과정에서 이탈자 한 명도 없었고...”

 

철저하게 민주적으로 진행된 농성투쟁은 조합원들의 자발적 참여와 자기규율 속에 더욱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10명 단위로 8개 조를 짜서 조장들이 있어요. 농성을 하다보면 몸이 아파서 늦게 나올수 있는 건데, 조합원들이 ‘얄짤 없다. 누군 안 아프고 안 힘드냐? 규율을 분명하게 해야 된다’ 그래요. 나는 오히려 그렇게 하면 위화감 생길 수 있고 단결이 저해될까봐 걱정했는데... 조합원들이 조합원 투표 붙여서 압도적 다수가 ‘그렇게 해야 된다’ 해서 했어요. 조별로 출석 체크 다하고, 마지막에 일괄 정리할 때 출석률에 근거해서 지급했어요. 그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노동자 규율인거 같더라고요. 돈 한 푼 더 받고 이런 문제가 아니라...

출근은 아침 8시까지 해서 그날 저녁 6시까지 일정이에요. 밤에는 2개조씩 돌아가면서 자고... 연대집회나 이런데 안 나가면 아침 집회부터 30분 하고 20분 쉬고 이런 식으로 계속 해요. 지루함 없이 해요. 그 진행은 간부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조별로 조원들이 나와서 하게 해요. 전체 율동에, 조별 율동에, 노가바(노래가사 바꾸기) 만들기, 구호 만들기 이런 것도 쭉 진행하고... 저는 로비에 앉아 있은 적이 거의 없어요. 맨날 회의도 해야 되고, 바쁘니까... 간부들 다수가 그랬어요. 간부들 바쁘니까 위에 있고, 조합원 자체적으로 다 운영했어요. 투쟁이 짜증스럽고 위험한 것이 아니라 진짜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이어올 수 있었던 거고... 그러면서도 빡 쎘어요.”

 

장기투쟁사업장일수록 연대투쟁이 매우 큰 힘을 발휘한다. 특히, 갑을전자의 농성장이 서울 광화문이었기 때문에 이런 저런 투쟁으로 올라오는 사업장들이 자연스럽게 결합하기도 했다.

 

“그때는 연대투쟁이 잘 됐어요. 지금은 산별노조라서 노조지침이 없으면 잘 움직이지 않는데,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서울지역은 지구협의회가 막 건설되고 있었거든요. 거기 연맹을 넘어서 각 사업장들이 모이니까 지역단위 결속력이 높았어요. 그 당시에 금속연맹 시절이었는데 연맹 산하 서울본부에서도 연대가 잘 됐고... 우리 투쟁할 때도 여러 단위에서 많이 왔고, 우리도 가기도 했고... 그때가 대각선 교섭이다 이런 거 하면서 산별노조 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을 때여서 공동투쟁이 잘 됐어요. 그래서 조합원들이 힘을 많이 받기도 했고...

저희가 투쟁하는 과정에서 대구를 내려간 적이 있었거든요. 대구 내려가서도 민주노총 대구본부나 금속연맹 대구본부 동지들 도움을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거기에 갑을그룹 계열사인 갑을금속이라고 있는데, 거기 동지들을 우리가 헌신적으로 도와주고...

이러면서 동지간의 연대나 정이 많이 생겼어요. ‘어디 연대가자’ 그러면 ‘내가 왜가?’ 이런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 조합원들이 가서 지도를 해요. 금속사업장은 다른 데보다 좀 과격해요. 우리가 광화문 있을 때 보람원 동지들이 상경투쟁 한 적이 있거든요. 코오롱 자본인데 거기 매장이 있으니까 가서 지원을 해요. 그런데 너무 얌전하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러면서 밥 그룻을 두들겨요. 밥 그릇 두들기면서 매장 돌아다니고...

우리가 투쟁 할 때 상경 단위가 많았는데 대부분 다 해결되고 돌아갔어요. 그래서 조합원들이 ‘우리만 해결 안 되는구나’ 하고 한편의 절망도 했죠. 지금 우리 기륭전자 조합원들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데... ‘승리는 차분차분 오는 게 아니라 어느 날 확 온다. 조금조금 승리의 길로 나가는 게 보여 지지 않는다’ 그래요. 실제 갑을이 그랬거든요. 합의되는 전날까지 아무 것도 없었어요. 우리는 좀 더 가보자 그러면서 싸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연락이 온 거 였거든요. 걔네들은 내부적으로 준비를 하면서 우리들이 흔들리나 안 흔들리나를 지켜본 거죠.”

 

투쟁이 완강하게 진행되자 사측이 수정 제안을 하기도 했지만, 전체 토론을 통해 자존심을 지키는 투쟁을 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투쟁 중간쯤에 회사가 보상금 3000만원(총액) 안을 냈어요. ‘웃기지 마라’ 그러니까 그 다음에 2억(보상금 총액) 안이 나왔어요. 많이 나온 거잖아요. ‘이거를 받든가, 안 받으면 백지화다’ 그런 거고, 나는 ‘웃긴다’ 그랬죠. 조합원들이 흔들리죠. ‘조합원 토론에 붙이자’ 그러는데 ‘간부들 입장을 갖고 들어가야 된다’ 해서 간부들은 ‘이거는 문제가 있다. 다시 한 번 투쟁을 제기하자’라는 입장을 갖고 들어갔어요. 막 논란이 됐는데 결국 조합원들이 ‘우리가 거지새끼냐? 백지화 시켜라 어차피 싸우겠다’ 그러면서 삭발하겠다고 막 그랬어요. 그러니까 회사가 바로 꼬리를 내리면서 ‘그게 아닙니다’ 이렇게 나왔어요.

그렇게 다시 투쟁을 하면서 우리가 마지노선을 정했어요. 퇴직금은 파산이 되면 법적을 받을 수 있는데, 우리는 누진제였기 때문에 누진분이 인정이 안 돼요. 그거는 그렇게 정리하고, 대신에 상근자도 필요하고 변호사도 필요하니까 상근자 활동비, 변호사 비용을 정했어요. 그리고 ‘생계대책비 양보 없다’ 이렇게 정리를 한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받았어요. 마지막에 연·월차니 이런 것도 다 받았어요.”

 

2001년 11월 합의가 이뤄지면서 투쟁은 마무리 된다. 갑을전자 투쟁이 마무리 됐지만 회사는 분할매각이 되면서 조합원들은 각자가 일자리를 알아봐야 했다. 김소연 역시 다시 구로공단에서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지만, 더 이상 정규직 일자리는 없었다.

 

“취업을 하려고 보니까 정규직 뽑는 데가 없더라고요. 2002년 6월에 기륭에 들어왔는데, 그때가 기륭이 파견을 선도적으로 도입하는 회사였어요. 벼룩시장을 보는데 일반회사는 거의 없어요. 휴먼닷컴이 제일 큰 회사더라고요. 그래서 갔더니 그게 파견회사였던 거예요. 몇 군데 회사를 얘기하고, ‘기륭을 가면 6개월 후에 정규직 된다’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그래서 ‘여기 가겠다’ 그랬죠.

기륭은 IMF 이후에 생산직을 중심으로 정리를 쭉 해나간 거예요. 신입 사원 안 뽑다가 인원이 줄면 빈자리를 처음에는 계약직으로 뽑았어요. 그러다가 2002년부터 파견직을 뽑은 거예요. 이 공단이 파견노동자를 시작한 게 2002년부터예요. 6월에 생산직이 50명 정도 규모였는데, 11월에 가니까 100명 정도로 팍 늘어요. 그러다가 12월말에 가니까 또 50명으로 줄어요. 파견이라는 게 그 정도로 탄력성이 있는 거죠. 정규직은 상여금이 700% 되는데, 파견은 한 푼도 없어요. 1년이 되든 2년이 되든 임금은 똑같고... 그러니까 버틸 수가 없죠.

그리고 이 지역은 돌고 돌아요. 거주지가 대부분 이 쪽이기 때문에... 회사가 이전해버리면 쫓아갈 수가 없잖아요. 남성은 쫓아가는데 여성은 그러지 못하니까... 그러니까 돌고 돌고 돌고...

초기에 내가 입사했을 때만해도 이 사람들이 파견직 경험이 없어요. 정규직으로 있다가 애 키우고 나와 보니까 파견직이라서... 처음에는 파견이 뭔지도 모르고 온 거예요. 와 보니까 이상한 거거든... 임금 차이도 크고, 사람 취급도 안 해주고, 그러니까 불만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초기에는 그래서 이직률이 굉장히 높았어요.

회사가 이직률이 너무 높으니까 일을 시킬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계약직 전환을 시켜주는 거예요. 계약직이 되면 상여금 400%가 생겨요. 호봉제도 있고, 근속수당도 주고... 그만둘 거 같으면 ‘조금만 기다려라. 계약직으로 전환해준다’ 그러는 거죠.

그러고 나서 공단에 점차 실업자가 늘어났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회사도 배짱이죠. 들어올 사람 많고, 사람들이 갈 데가 없으니까 있어야 되고... 그리고 2003~4년 거치면서 파견이라는 것이 정착돼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처음에는 분노가 높아서 그만두고 딴 데 갔는데, 가니까 또 파견이거든요. 그래서 ‘어디가도 똑같다’ 그러면서 정착을 하게 되요.”

 

소수의 정규직, 중간에 낀 직접고용 계약직, 다수의 간접고용 파견직이 일하는 기륭전자는 살벌함 그 자체였다. 현장은 완전한 위계구조로 짜여 있었고, 관리자들의 통제 속에 노동자들 서로 간에 대화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2005년 4월에 그 유명한 잡담해고가 발생해요. 문자로 ‘내일부터 나오지 마시오. 해고사유는 잡담이다’ 이런 거예요. 그게 왜 그랬냐 하면 조장한데 ‘이거 이렇게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업무적인 건의를 했는데 ‘너 그랬게 잘났냐?’ 해서 해고시켜 버린 거예요. 해고의 권한이 조·반장한테 있어요. ‘말 안 듣는 애들 명단 올려’ 그러면 걔네가 명단을 올려요. 일요일까지 일 시키고 월요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그래요.

이 사람들이 힘들어도 말을 못해요. ‘내가 여기서 해고당하면 어디 가서 일을 할까’ 그러고 있는데... 그게 반복이 되니까 우린 다 알죠. 일이 없으면 쫙 해고 했다가, 일이 있으면 또 쫙 뽑고... 1주일 상간에 20~30명을 해고했다가 뽑고 그러니까...

지각 몇 번하고, 잔업 안 하고 이런 사람들을 해고 시켰는데... 일도 열심히 했던 아줌마 한 명 해고시켰어요. 그 이유가 1년 가까이 했는데 업무가 너무 힘들고 건강문제가 심각해서 공정을 바꿔달라고 한 거예요. ‘너 그렇게 아프면 그만 둬’해서 해고예요.”

 

너무도 심각한 비인간적 대우로 현장 노동자들의 불만이 높아지는 속에서 김소연은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로라도 노조를 만들어서 대응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2005년 5월부터 7월까지 암암리에 준비가 진행된다.

 

“제가 10명한테 제안을 했어요. 나랑 관계가 있었던 계약직 파견직을 개별적으로 만나면서 했는데 ‘안 돼. 무서워’ 이러는 사람이 한 명도 없고 ‘그래, 하자’ 이러는 거예요. 5월에 회사에서 야유회를 갔어요. 전체 다 풀어놓고 관리할 생각도 안 하길래 ‘끝나서 보자’ 그래서 10명이 처음 다 만났어요. ‘다 동의했으니까 더 사람이 필요하지 않냐? 주변에 얘기할 사람 얘기해봐라. 얘기할 때 필요하면 나를 불러라’ 그랬더니 이 사람 저 사람 막 부르는 거예요. 그래서 10명이 30명이 된 거예요.

우리가 노동조합을 7월에 만들었는데 60일 넘게 보안이 지켜진 거예요. 하나도 안 세나갔어요. 정규직, 계약직, 파견직이 그 비율만큼 초등모임에도 들어와 있었고, 이후 조합 확대에서도 그래서 된 거예요.

‘7월 5일 날 하자. 아침 10시에 모이는데 사전에 얘기하면 세니까 사람들한테는 아침 9시 반에 전달하자. 노조라고 얘기하지 말고 중요한 일이 있으니 모이라고 얘기하자’ 그래서 내가 일하고 있는 2층으로 모이기로 했어요. 내가 지금까지 오랫동안 활동했지만 그때만큼 가슴이 터질 거 같은 때가 없었어요. ‘될까?’ ‘몇 명이나 올까?’ 그런 생각에... 30명이 전체를 데리고 오는 게 쉽지 않잖아요. 되게 단결이 잘 됐어요. 괴짜들도 많고...

그래서 10시가 딱 됐는데 발걸음 소리가 안 들려요. 불안하잖아요. 그런데 1~2분 지나니까 갑자기 쿵꽝 쿵꽝 소리가 나는 거예요. 그래서 300명 중에 200명 가까이가 모였어요. 준비된 친구들은 관리자들이 올지 모르니까 문 입구에 세워놓고... 내가 얘기를 하고 다른 친구들이 노조가입원서를 막 나눠주고... 그런데 관리자들이 눈치를 챘는데 무서워서 못 들어오는 거예요. 쉬는 시간 10분 동안 내가 얘기를 하는데 아주머니들이 눈물을 막 흘리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150장이 들어왔어요. 쉬는 시간 끝나서 내려가야 되는데 이 사람들이 안 내려가요. 원서 쓰느라고.... 그래서 회사가 발칵 뒤집혔죠.”

 

급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회사는 탈의실에 에어콘을 설치하는 등 여려가지 현장복지를 개선하면서 불만이 폭발하는 것을 막아간다. 그와 동시에 현장에 60여 대의 CCTV를 설치하면서 감시를 강화하는 등 탄압의 고삐를 조여오기 시작한다. 노동부 진정을 통해 불법파견 판정이 나자 회사는 합법도급으로 전환하기 위해 7월말부터 계약기간이 끝나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계약해지 통보를 하기 시작한다.

 

“8월 한 달 동안 해고자가 80명 되니까... 어마어마했어요. 조합원들의 요구가 컸죠. ‘해고당하고 싸울래, 해고 안당하고 싸울래’ 그러면 당연히 해고 안당하고 싸우는 게 맞죠. 그래서 결단을 했던 거예요. 쟁의행위 뭐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비정규직 문제는 결사항전 밖에 없다’ 그래서 8월 24일 10시를 기해서 파업에 들어갔죠.

120명 정도가 들어갔어요. 그것도 기적이에요. 그때 파업 들어가면서 3일이면 끝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요구를 수용하든가, 아니면 우리를 끌어낼 것이다 생각을 했죠. 그런데 이것들이 끌어내지도 않고 요구도 안 받네... ‘해 볼 테면 해봐라’예요. 3일 동안 조합원 아무도 집에 안 가면서 농성 했고, 그 후에는 3개 조로 짜서 한 개조씩 집에 보내고... 그러면서 55일 동안 점거농성 파업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얘네들이 용역깡패를 들여보내는데... 그전부터 들어오기는 했는데, 대거 들어온 게 60명, 사무직 남자들 200명 구사대 조직하고... 조합원들이 잘 싸웠어요. 갑을에서 했던 것처럼 조별로 율동도 하고, 현장에 다니면서 비조합원에게 동참도 호소하고... 그러니까 얘네들이 문을 폐쇄해버려요. 2층은 거의 비워버리고... 그러다가 공권력이 투입돼서 쫓겨나죠.

그런데 문제는 기륭이 근속년수가 짧다는 단점이 있었던 거예요. 파견노동자는 2년 넘은 사람이 2명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다 1년 미만이었고, 계약직이 오래된 사람이 3년차였기 때문에... 그러다보니까 들어온 지 2개월 3개월 만에 파업 들어간 사람들도 많은 거예요. 그중에도 여성가장이 많고, 아이들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관계가 깊지 않으니까 속 얘기를 충분히 못 하는 거예요. 오늘까지 밤새도록 열심히 투쟁했는데, 내일되면 안 나와요. 조용히 사라져요. 너무 가슴이 아픈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우린 다 수배 중이었으니까. 얘네가 업무방해 고소 고발 다 했고, 소환장 오는데 우리는 못 가잖아요. 그러니까 다 수배를 때려버린 거예요. 소환장이 오면 우리가 ‘언제까지 가겠다’ 그러면 인정하지 않고, 1·2·3차 소환장을 하루 간격으로 막 보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조합원 전체가 수배상태가 되버린 거죠.”

 

2005년 10월 17일 경찰 투입으로 농성자들은 강제해산 됐고, 김소연과 함께 2명의 간부가 구속됐다. 그 와중에 조합원들은 회사 앞에서 천막농성을 벌이며 완강히 저항했지만 일시적 지도력의 공백은 많은 어려움을 낳았다. 공안기관에서 위원장의 과거 경력을 거론하면서 조합원들을 이간질 시키는 과정이 있었고, 생계문제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조합원이 떠나가게 된다. 3개월 만에 보석으로 출소한 김소연은 조합원들을 추스르면서 다시 삭발, 단식, 진격투쟁 등 활발한 투쟁을 벌인다.

 

“쉬지 않고 다양한 투쟁을 전개했고, 우리는 하루도 쉬지 않고 아침 출근투쟁을 하고 있어요. 초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서 잤는데, 장기화되면서 돌아가면서 자고, 아침에 출근해서 퇴근하는 형식으로 해요. 주1회 집중집회도 거의 거르지 않고 지금까지 진행하고 있고... 이렇게 스스로 결의했던 게 투쟁을 지금까지 끌어왔던 동력인 거 같아요. 보통은 1~2년 넘어가면 느슨해지고 그러는데 저희는 그렇지 않아요. 다만 생계가 어려우니까 인원수는 줄어들고 있죠.”

 

노조의 완강한 투쟁은 사용자를 강하게 압박해 장기투쟁 과정에서 사용자가 4번이나 바뀌기도 했다.

 

“투쟁하는 과정에서 회사 주인이 4번 바뀌었어요. ‘노조 때문에 못해먹겠다’ 이런 거죠.

첫 번째 했던 데가 아시아시멘트라는 회산데, 규모도 있고 자금력도 있잖아요. 여기는 ‘노조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게 굉장히 커요. 그래서 우리는 맨날 아시아시멘트에 갔어요. 아시아시멘트 회장 고향집에도 갔어요. 거기는 유지니까 아주 인자한 사람으로 인식돼 있더라고요. 학교 재단 이사장이기도 하고... 학교 가서 해버리니까 돌아버리죠. 그래서 포기했어요. 당장 지분을 팔아버렸어요.

그때 들어온 회사가 투자회사예요. 결국은 투기꾼에게 넘어간 거죠. 그때 기륭은 하향길로 접어든 거죠. 만약에 팔지 않고 노사문제 해결했으면 회사는 훨씬 성장했을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팔면서 문제가 생긴 거죠. 이 투자회사의 핵심이 뭐냐 하면 한국유리공업이라고 모든 자동차 유리를 생산하는 어마어마한 데예요. 여기 회장단들이 운영하는 투자회사였는데, 여기가 외국기업으로 넘어가면서 싱가포르로 국적을 이전하면서 외국자본 유치했다가, 중기청 정보통신부 돈 끌어다가 펀드에 투자했는데 결국은 투기죠. 이걸 우리가 알았어요. 그래서 그걸 폭로하고, 중기청 찾아가는 이런 투쟁을 하고... 여기도 회장이 예술의 전당 이사고 그래서 거기도 갔죠. 그래서 또 팔았어요.

또 바뀐 게 지금 있는 개인이 들어왔는데, 여기도 투기꾼이에요. 여기가 2007년 9월에 들어와서는 구조조정을 지금 하고 있어요. 이 사람도 와서는 ‘문제를 풀겠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3개월 만에 대표이사가 바뀌었어요. 조합원들이 기대를 많이 했는데, 뒤집은 거죠.

지금 안에는 사무직 60여 명이 정리됐고, 생산라인 전원 해고하고, 최근에 파견노동자를 다시 고용하고 있죠. 그리고 중국에 공장 가동하고 있고, 최근에 ‘공장 이전하겠다’면서 공장 부지를 내놨어요.”

 

소수의 조합원들이 장기투쟁을 벌일 수 있는 주요한 힘 중의 하나는 연대투쟁에 있다.

 

“처음에는 조합원들이 ‘우리 거 있는데 왜 딴 데 가냐?’ 그랬는데, 지금은 GM이나 어디 중요한 투쟁이 있으면 ‘우리 거 취소하고 가자’ 그렇게 바뀌었어요. 이 문제가 사업장만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단결해야 하는 문제임을 아니까... 그리고 어렵고 힘든 것을 아니까 정말로 힘을 보태주고 싶고... ‘우리가 가야지 온다’ 이런 개념이 아니라 정말 마음으로부터 ‘함께 가자’는 생각이 많이 생겼어요.

대표적인 게, 2006년에 장기투쟁사업장이 9박10일 공동투쟁을 한 적이 있어요. 7월 달에 했는데, 전체가 같이 비 맞으면서 점거도 하고, 한강대교 뛰기도 하고, 인왕산 등반하면서 전경하고 싸우기도 하고... 그때 함께 했던 동지들이 지금까지 해결된 데도 있지만, 안 된 데가 태반이에요. 이런 것들을 하면서 많이 끈끈해지기도 하고... 그런 것들이 버티는 힘이기도 하고...”

 

그러나 연대투쟁 방식은 몇 년 전 갑을전자 투쟁시기와 달라져 있기도 했다.

 

“서울지역은 제조업이 별로 없어서 어려움이 있고... 금속 같은 경우, 갑을(전자 투쟁) 때는 멀리 있어도 지원요청 하면 올라와요. 그런데 지금은 산별노조 돼서 요청해도 지침이 없으면 못 올라와요. 왜냐하면 재정이 중앙으로 집중돼 있다 보니까 올라오려면 차비 들고 그러는데 그 비용이 많이 들어서 어렵다는 거예요. 지침이 결정되면 위력적인 힘을 받기도 하지만, 일상적인 연대나 이런 건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집중집회 할 때도 지침이 기륭이 아니고 다른 데가 그러면 기륭에 오고 싶어도 거기에 가야 하거든요. 또 하나의 단점은 절차가 복잡하다는 거예요. 투쟁사업장은 당장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데, 투쟁계획도 한 달 전에 내야 되는 형식이어서 어려움이 있어요.”

 

200여 명으로 시작한 투쟁은 3년을 넘기면서 40여 명의 조합원으로 줄었다. 그나마 생계활동을 하지 않고 농성투쟁을 이어가는 조합원은 10명이다. 이들은 심각한 생계의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3년이 넘는 기간을 버티고 있는 것이다.

 

“금속노조에서 생계비를 1년간 지급했어요. 그나마 숨통이 트였죠. 지금은 끝났지만...

여기는 비정규직이고 근속이 짧으니까 모아 논 돈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55일 파업했을 때만 해도 걸어 다니는 조합원들이 있었어요. 애 학교 가야되는데 교통비를 못주니까... 그때 모아서 5만원씩 지급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나마 내가 나와서 아는 사람들 돈 끌어 모으고 하면서 처음으로 생계비를 20만원인가 지급하고...

그런데 생계비 끊기면 정말 생활이 안 돼요. 월세 낼 돈도 없으니까... 우리 조합원들은 적금이고 뭐고 다 깼어요. 전세방 빼서 친구한테 얹혀 있는 친구도 있고... 그러면서 생계활동을 나가게 되는 거죠. 지금은 아무튼 생계비를 지급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CMS를 조직하고 있어요. 때가 되면 주점이나 재정사업 수시로 하고... 그러다보니까 미안하기도 하죠.”

 

20년 가까이 힘겹게 달려온 김소연은 힘겹지만 현장이 재미있다며 현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지금 숨을 쉴 수가 없는 세상이잖아요. IMF 때가 어려웠다고 했지만, 지금이 진짜 어려워요. 기륭도 공동체가 이미 파괴돼 있었어요.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는데 옆에 동료하고 마음 열고 편안하게 얘기할 수도 없는 조건이에요. 경조사가 있어도 누구도 안 챙겨요. 이게 기륭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의 사업장이 다 그래요. 언제 관둘지 모르는데 안 챙기죠. 공동체가 많이 파괴되고 인간성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함을 많이 느껴요.

그래서 저는 들어가서 이런 것을 바꾸는 활동을 하고 싶고... 더불어서 진짜로 세상을 바꾸는 투쟁은 현장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무리 지역정치활동이라고 해도 현장을 버리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속에서 조직적인 활동을 통해서 바꿔내지 않으면 토호세력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런 활동 중심으로 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솔직히 서울이 너무 팍팍해서 서울에서 살기 싫다는 생각은 있어요. 장기투쟁을 해도 지방에서 하면 동지들보니까 여유가 좀 있어요. 너무 어렵긴 한데, 인간적인 것이 있으니까... 그런데 서울은 없어요. 그래서 만약에 기륭이 안 되면 ‘나도 지방 가서 살까?’ 이런 생각은 해요.

그런데 저는 여전히 체질이 현장이에요. 이렇게 하는 게 너무 힘들긴 한데 이렇게 하는 게 좋아요. 사람들 하고 수다 떨고 놀러 가고 이런 게 좋고... 나는 상층에서 논쟁하고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우리 투쟁이 노선이 달라서 달라지는 투쟁이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작은 거 하나 결정하는데 정파적 입장으로 정리해버리고, 그리고 내 조직을 확대해 보려고 하는데 있어서 저는 문제의식이 있어요.

저는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있는 모든 것을 같이 모아가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그리고 그 핵심은 현장으로부터 시작한 투쟁으로 모아가야 한다고 봐요. 그 수준도 조합원들 요구를 기반으로 해서 가야 되는데, 너무 원칙적으로만 얘기한다고 되는 문제는 아니거든요. 그것을 하기 위한 사전조직 사업들, 투쟁 사업들 속에서 신뢰가 확보 돼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이런 부문이 너무 무너져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이 있어요.”

 

김소연은 농성 1000일을 맞아 삭발을 하고 투쟁의지를 다졌다.

 

“많은 사람들이 질문하는 건 ‘어떻게 그리 오랫동안 버틸 수 있냐?’ ‘생계도 어려운데 다른 데 가야되지 않냐?’ 그러는데... 솔직히 기륭 아니면 내가 갈 데 없겠어요?

그런데 문제는 가도 똑같고, 우리 투쟁으로 인해서 공단은 심각한 상황이 된 거예요. 이 문제는 누구든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고, 지나온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도 있고, 그동안 우리가 해왔던 것이 너무 억울해서 이거 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분노가 있는 거죠.

그리고 또 하는 의리예요. 조합원들끼리의 의리와 더불어서 진짜 많은 동지들이 이 투쟁을 함께 했어요. 지금까지 들어온 투쟁기금 합치면 억 단위가 넘죠. 그 의리를 지켜야 된다는 게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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