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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라디오 '내가 우스워 보이냐?' (25회)

 

읽는 라디오 ‘내가 우스워 보이냐?’ (25회)

 

 

 

1

 

미쳐버린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두려워서 움츠려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뻘짓만 하는 정치인들을 바라보면서 욕만 하면서 앉아 있지는 않습니다.

이미 힘이 빠져서 관료들만 판치는 운동권을 원망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만 있지도 않습니다.

지식인들의 현란한 입놀림을 바라보면서 박수만 치는 구경꾼도 더는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 빌어먹을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머리를 모으고 서로의 힘을 합쳐서 여러 가지 일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몇 차례의 대규모 촛불집회에서 자신들의 힘과 상상력을 마음껏 느낀 사람들은 광장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광장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다양한 광장들이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더 다양한 투쟁과 놀이들이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반가운 소식을 하나 접했습니다.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영화에 자본이 투자할리 없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이 특정 프로젝트에 소액을 후원해서 제작비를 마련하는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방식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이제 이런 식으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생소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들의 상상력과 힘은 커지고 있습니다.

 

이미 시나리오도 나왔고, 캐스팅도 마쳤다고 하니 제작비를 모아서 영화를 만드는 일로 이어져야 하겠군요.

11월 한 달 동안 1억 원을 모으는 게 목표라고 하는데, 11월 5일 현재 560명 정도 참여해서 2천8백만 원 정도 모았다고 합니다.

이 정도 호응이면 목표치는 무난하게 달성할 것 같군요.

 

저도 참여하려고 했는데, 후원금 납부방식이 카드결제로만 가능하다고 해서 못했습니다.

통장입금이나 다른 방법으로 참여할 수 없냐고 물어봤더니, 만약에 목표에 미달할 경우 돈을 돌려줘야 하기 때문에 부득이 하게 카드결제로만 할 수 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저도 같이 하고 싶었지만,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좀 더 많은 분들이 참여하길 바라기만 해야겠습니다.

굿펀딩 홈페이지(www.goodfunding.net)에 가시면 자세한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반가운 소식을 전하면서 오늘 방송은 거대 재벌 삼성에 맞서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김창완이 부른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를 듣고 다음 이야기 이어가겠습니다.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 타자

오토바이로 기타를 타자 오토바이로 기타를 타자

오토바이로 기타를 타자 타자

 

수박으로 달팽이를 타자 메추리로 전깃불을 타자

개미로 밥상을 타자 타자

풍선으로 송곳을 타자 타지 말고 안아 보자

송충이로 장롱을 안아 보자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상상하는 대로 싸이버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상상하는 대로 싸이버

 

거실로 기차 타고 가자 부엌으로 기차 타고 가자

공부방으로 기차 타고 가자

기차로 생일 케익 하자 기차로 햄버거를 하자

기차 타고 시계로 들어가자

 

향기 나는 노래를 틀자 비눗방울로 집을 짓자

숫자로 꿈꾸자 꿈을 꾸자

뚜껑으로 두꺼비를 하자 영화로 버선을 하자

김치로 옷을 지어 입어 보자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상상하는 대로 싸이버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상상하는 대로 싸이버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 타자

오토바이로 기타를 타자 오토바이로 기타를 타자

오토바이로 기타를 타자 타자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상상하는 대로 싸이버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상상하는 대로 싸이버

 

 

2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기 위해 직장을 알아보던 이들에게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모두가 선망하는 대기업인 삼성에 취직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깨끗하고 안전하기로 소문이 난 반도체회사였으니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곳에서 몇 년 만 일하면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안락한 결혼생활도 할 수 있다는 꿈을 꾸면서 공장생활이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피로에 찌들고 스트레스에 숨 막혀 하면서 점점 생기를 잃어갔습니다.

그래도 조그만 참자고 자신을 달래면서 회사를 다녔지만 몸만 더 힘들어갈 뿐이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회사를 그만두고 쉬다가 병원을 찾았는데 듣도 보도 못한 휘귀병 진단을 받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힘겨운 치료를 이어갔지만...

그렇게 조용히 사람들이 죽어갔던 것입니다.

 

 

이윤정 씨와 정희수 씨는 8년을 함께 산 부부다. 어젯밤 남편이 술냄새를 풍기며 늦게 들어왔다고 윤정 씨는 투덜거린다. “늦게 들어오면 혼을 내주셔야죠”하고 받아치니 정작 그녀는 가볍게 넘긴다. “뭐, 나도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거 좋아했으니까 그 기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지나가듯 한마디를 붙인다. “이제, 보면 얼마나 볼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윤정 씨의 눈은 무심하다. 그 까닭이 항암치료 때문인지도 모른다. 감정표현을 둔하게 하는 부작용이 있다는 약물. 그녀는 시한부 1년을 선고받았다. 뇌암이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선고후 6개월이 지나 있었다. 약물치료의 부작용일까, 그녀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녀의 남편은 간혹 묻는다. “눈물은 나?” “응, 울어. 혼자 있을 때” 돌아오는 대답이 서늘하다. 감정표현이 적어진 아내, 그러나 부부이기에 그들은 여전히 다투고 화해하면서 함께한다.

-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 (희정 지음, 반올림 기획, 아카이브) 중에서

 

 

2007년 삼성반도체에서 일다하다 백혈병에 걸린 황유미씨가 21살의 나이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는 삼성에 의해 죽은 딸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무모한 싸움에 뛰어듭니다.

택시기사가 삼성을 상대로 싸우기 시작한 것이지요.

몇몇 단체들과 사람들이 모여서 다양한 활동을 벌였습니다.

직업병 환자들이 황유미씨만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전국을 다니면서 삼성전자·반도체 피해자 제보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2011년 3월 6일까지 총 115명의 노동자가 직업병으로 죽었거나 고통받고 있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삼성 외 사업장까지 합하면 모두 150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 이윤정. 1980년생, 여성. 1997년 삼성전자 반도체 온앙공장 입사, 6년간 고온 테스트 업무. 2003년 퇴사. 2010년 뇌암(악성 뇌종양) 진단

 

- 신송희. 1979년생, 여성. 2000년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 입사, 6∼8라인 공정관리 파트 소속으로 5년 6개월간 웨이퍼 검사 업무. 2009년 유방암 진단

 

- 이희진. 1984년생, 여성. 2002년 삼성전자 LCD사업부 천안공장 입사, 4년 3개월간 LCD 패널 화질·색상 패턴 검사 업무. 2008년 다발 경화증 확진

 

- 유명화. 1982년생, 여성. 2000년 삼성반도체 온양공장 입사. 2001년 중증 재생 불량성 빈혈 진단

 

- 황민웅. 1974년생, 남성. 1997년 6월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입사, 7년 4개월간 근무, 1라인 백랩(연마) 및 5라인 CMP 설비 엔지니어. 2005년 백혈병으로 사망. 당시 32세

 

- 한수영(가명). 1969년생, 남성.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디퓨전 공정 엔지니어. 34세에 베게너육아종증 진단

 

- 김주현. 1986년생, 남성. 2010년 삼성전자 LCD사업부 천안공장 FAB 컬러필터 공정 설비 엔지니어로 입사, 그해 자재관리 부서로 이동. 2011년 1월 기숙사 13층에서 투신 사망. 당시 26세

 

- 연제욱. 1982년생, 남성. 삼성전자 LCD 탕정공장 설비 엔지니어로 입사. 2009년 종격동암으로 사망. 당시 28세

 

- 박지연. 1987년생, 여성. 2004년 삼성전자 반도체 온양공장 입사, QE그룹 품질 실험 특정 검사 및 엑스레이 검사. 2년 7개월 근무. 2010년 3월 백혈병으로 사망. 당시 24세

 

- 김옥이. 1969년생, 여성. 1991년 삼성반도체 부천공장(온양공장 전신)에서 1년간 근무, 1992년부터 온양공장에서 절단·절곡 공정에서 6년간 근무. 퇴직 후 2005년 급성 골수구성 백혈병 진단

 

- 한혜경. 1978년생, 여성. 1995년 삼성반도체 LCD사업부 기흥공장 입사, 모듈 공정에서 6년간 근무. 2005년 소뇌부 뇌종양 진단, 뇌종양 제거수술 후 장애1급 판정

 

 

3

 

몇 년 전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얘기를 듣고 기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노동보건단체인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의 공유정옥 씨를 만나서 그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1년 재수를 하고 94년 고려대 의대에 입학한 공유정옥은 1학년 여름방학 때 우연하게 철거민투쟁을 경험하게 됩니다.

 

 

“상계동이 10몇 동까지 있는데, 우리는 상계4동에 들어가거든요. 그런데 1학년 여름방학 때 학교에 ‘상계1동 큰마을 철거’ 이렇게 대자보가 붙었어요. 우리 과 아닌 다른 과 친구들이 막 가고... 소위 운동권 친구들이 가는 거예요. 우리 과에서는 역사학회 하는 친구들이 가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가는 바로 옆 동네 일인데 가서 봐야 되지 않겠냐’ 그래서 동기 셋이서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고 갔어요. 갔더니 삼엄하죠. 다 놀래는 거야. 다행히 우리 과 선배들이 있고... 뭐했냐 하면, 돌 줍고, 골리앗에 기왓장 줍고... ‘오늘 밤은 자자’해서 자는데 새벽에 ‘들어온덴다’ 그러면서 깨우더라고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냐?’ 그랬더니 저랑 여자 둘이서 ‘동네 애기들을 데리고 뒷산에 가 있어라’ 그래요. 남자 애들은 제일 앞에서 화염병 던지고 빠지는 일을 했고... 새벽에 일어나서 갑자기 화염병 만드는 일을 처음으로 했고... 애들 데리고 다니면서 하루 종일 놀아주는 일을 했죠. 오지 말라고 그러더라고요. 저녁 때 다시 모이라고 그래서 저녁 때 모였죠. 그랬더니 13가구 남아있던 동넨데 그 집이 다 헐렸더라고요. 돌들만 쌓여 있는 집터에서 솥 걸어놓고 라면 끓여먹고 그랬는데...

그러고 나서 지하철을 타고 오는데... 잠도 한 숨도 못 잤고, 너무 긴장했고, 애들 다칠까봐 걱정했고... 우리 집은 강남에 넓은 아파트에 내 방이 있고, 침대가 있고... 그전까지는 우리 아버지가 ‘노력하면 잘 산다’는 것을 주입해서 ‘너무 잘 사는 거만 강조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데... 그날 지하철 타고 오면서 너무 피곤하기는 한데 잠을 한숨도 못 자겠는 거예요. ‘이제 겨우 스무 살에 내가 한 게 뭐가 있어서 그 집에 사냐?’는 거죠. ‘다섯 살 여섯 살 먹은 애들은 지들이 안 한 게 뭐가 있길래 하루 아침에 집 없는 애들이 되냐?’는 거고... ‘이건 정말 아닌 거 같다’는 생각도 하고...

지금도 돌 줍고, 화염병 만들고 이런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집터 무너졌던 거 하고, 지하철 타고 돌아올 때 너무 괴로웠던 거는 생각이 많이 나요. 그런 게 되게 무거웠던 거 같애요.”

 

 

이후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학생운동을 했던 공유정옥은 졸업과 함께 노동보건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노동자와 철거민들의 농성장을 방문하기도 하고 지원하기도 하다가 2002년 대우조선 노동조합의 근골격계 직업병 집단요양투쟁에 결합하면서 노동현장과 결합한 활동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2004년에는 도시철도공사의 기관사들이 심각한 공황장애에 시달라고 있음을 알고 그 힘겨웠던 투쟁에도 함께합니다.

 

 

“정말 문제가 너무 절박했었어요. 산재신청은 7명밖에 못했지만, 30여 명의 환자가 드러났었으니까. 투쟁을 전후로 해서 조합원들이 하나 하나 숨겨왔던 자기 얘기를 하게 되는데 그게 너무 좋기도 하고 너무 무거웠어요.”

 

 

2005년에는 현대자동차 노동조합과 함께 노동강도 평가사업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구로의 하이텍알씨디코리아에서 노조 탄압에 의한 정신질환문제로 또 힘겨운 기간이 이어집니다.

 

 

“하이텍 투쟁을 하는데 내가 1주일에 하루씩 가서 농성을 하는 것으로는 힘이 모자란 상황인데, 나는 그 이상 할 수는 없는데... 자격지심인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현대자동차 대공장 정규직노조에서 돈 받고 하는 사업만 하고, 13명 조합원의 하이텍투쟁은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내가 울산에서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오는데, 느낀 것도 나누고 싶고, 얘기도 하면서 정리도 하는 싶은데 그게 하나도 안 되는 거예요. 연구소 안에서 활동하는 동지들끼리 만나고 흐르고 서로 보듬고 그랬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나는 나대로 소외감 느끼고, 그런 벽들을 조금씩 조금씩 느껴갔어요. 그래서 2005년 여름에서 가을은 되게 힘들었어요. 개인적으로는 우울증 치료를 받아야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불면증과 만성두통... 그때 난생 처음으로 혼자 술 먹고 그랬어요.”

 

 

몇 년을 그렇게 정신없이 산재노동자들의 투쟁과 함께하는 속에 공유정옥이 소속해 있던 단체는 그동안 쌓여있던 내부문제로 홍역을 치루게 됩니다.

 

 

“2006년 상반기가 힘들었던 거 같애요. 그때 술 먹으면 울고 맛이 가고 그랬어요. 그게 혼자 속이 썩어문들어지는 것도 있는데, 연구소에 있는 다른 동지들이 많이 지지해준 거 같애요. 다를 아팠기 때문에... 상처를 더 덧나게 만드는 과정도 있었지만, 그러면 그 다음 주에 만나서 다시 해소하고... 그러면서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는다고, 그때부터 많이 친해졌죠. 연구소 활동을 떠나서 ‘남매 아니야?’ 할 정도로... 주변 사람들에게 나도 많이 의지를 했고, 서로 의지를 했던 거 같애요.”

 

 

그 뒤에 찾아온 일이 삼성반도체 백혈병문제였습니다.

 

 

“2007년 3월에 황유미씨가 돌아가셨고... 그 분이 백혈병으로 죽었는데, 나이도 젊고, 근무한지도 얼마 안 되고 그러니까 처음에 그걸 상담했던 노동안전단체 활동가들이 주변의 소위 진보적이라는 산업의학자들한테 물어봤더니 다 ‘관련성이 없는 거 같다’라고 그랬데요. 암은 좀 오래가는 건데, 노출부터 발병까지 기간이 너무 짧다는 거죠. 물어물어 다니다가 회의를 하고 헤어지는데 지나가는 말로 그러더라고요. ‘뭔가 있는 거 같은데, 다들 아니라고 한다. 너는 어떻게 생각 하냐?’ 그래서 ‘고농도의 노출에는 단기간에도 암이 생기지 않을까? 5년 10년 걸린다는 거는 지금까지 밝혀진 거고... 핵발전소 폭발하면 바로 죽기도 하는데...’ 그런 얘기를 했어요. ‘개별 산재보상 문제로 가서 풀릴 문제가 아닐 거 같으니까 대책위를 꾸려봤으면 좋겠다’는 정도까지 의견을 전하고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반 년 뒤에 수원지역 동지들이 대책위를 꾸리자고 제안을 했죠. 그래서 2007년 가을 정도부터 결합을 하고 있어요.

 

금방 안 끝날 거 같은 싸움인데 ‘잘 해보고 싶다’는 생각 많이 들고... 삼성이고 반도체라는 게 한국사회에서 엄청난 건데... 젊고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인데, 외국에서도 다 문제가 됐던 것이더라고요. 10년~20년 가는 싸움이 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연구소도 그렇고 저 개인적으로도 이런 스타일의 운동은 안 해본 거거든요. 게다가 노동조합도 없고... 우리가 상대해본 자본 중에 가장 막강한 자본이기도 하고... 해 보고 싶어요.”

 

 

제가 공유정옥 씨를 만나서 얘기를 들었던 것이 2008년 7월이었습니다.

그 이후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직업병 문제는 사회의 주요한 이슈가 됐습니다.

서로의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그들은 거대한 골리앗을 향한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고요.

 

개인적으로 공유정옥 씨와는 친분이 있어서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얘기가 들려오면 조금은 더 관심을 갖게 되기는 합니다.

지금 제 처지에서 그들의 투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지만 이 방송을 통해서 응원의 마음을 전합니다.

특별히, 공유정옥을 위해서 노래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한영애의 ‘조율’입니다.

 

 

알고 있지 꽃들은

따뜻한 오월이면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철새들은

가을하늘 때가 되면 날아가야 한다는 것을

 

문제 무엇이 문제인가

가는 곳 모르면서 그저 달리고만 있었던 거야

지고 지순했던 우리네 마음이

언제부터 진실을 외면해 왔었는지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 주세요

 

정다웠던 시냇물이 검게 검게 바다로 가고

드높았던 파란하늘

뿌옇게 뿌옇게 보이질 않으니

마지막 가꾸었던 우리의 사랑도

그렇게 끝이 나는건 아닌지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 주세요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 주세요

 

미움이 사랑으로 분노는 용서로

고립은 위로로 충동이 인내로

모두 함께 손 잡는다면

서성대는 외로운 그림자들

편안한 마음 서로 나눌 수 있을텐데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 주세요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 주세요

 

(우....내가 믿고 있는 건

이 땅과 하늘과 어린 아이들

내일 그들이 열린 가슴으로

사랑의 의미를 실천할 수 있도록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 주세요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 주세요

 

 

4

 

예전에 제가 울산에 있었을 때, 해마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끝이지 않아서 해고자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신생 해고자였던 공무원노조 해고자들을 비롯해서 해고된 지 10여 년이 지나서 어용노조에 의해 조합원 자격까지 박탈된 현대중공업 해고자까지 다양한 사업장의 해고자들이 열심히 투쟁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고참 해고자에 속했던 송수근 씨는 초거대재벌 삼성을 상대로 외롭게 싸움을 이어오고 있던 해고자였습니다.

울산에서 조금 떨어진 언양출신인 송수근 씨는 1987년 24살의 나이로 삼성전관(현 삼성SDI)에 들어갔습니다.

 

“87년 당시를 보면 노동탄압이라기 보다는 인권탄압이 심했습니다. 머리가 귀를 덮으면 총무부장이 나와서 직접 머리를 깎고, 사내에서 남녀가 같이 앉아서 이야기만 해도 풍기문란이라면서 징계를 할 정도였어요. 그런 시기에 불만이 한 번 폭발해서 16일 동안 파업을 한 적이 있어요. 파업을 하면서 노동조합 요구가 있었는데, 회사에서는 이것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임금을 22% 올려주고, 노동조합을 포기하는 대신 노사협의회를 만들어주고, 노사협의회 위원 60여 명을 전원 상근시켜주었습니다.”

 

무노조경영의 삼성에서 노사협의회는 사측의 온갖 회유 속에 유명무실해졌고, 산발적인 노동자들의 저항도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나 1996년 자동화에 따른 고용문제가 발생하면서 현장이 술렁거리자 송수근 씨가 나서게 됐습니다.

 

 

“96년에 자동화가 들어오면서 남자사원들이 고용이 불안해졌어요. 회사가 일방적으로 발령대기를 내고,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회사가 원하는 공정에 보내면서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회사 말을 듣게 하도록 만들었어요. 그 과정에서 우리하고 평소에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피해를 많이 보고 마음의 상처도 많이 받았어요. 그러면서 현장에서 불만들이 높아졌죠. 그를 통해 불안을 느끼게 된 사람들이 ‘이제는 노사도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우리를 보호할 수 있다’고 나를 적극적으로 추천해서 노사협의회 선거에 출마하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회사에서 나를 떨어트리기 위해 별별 일을 다 하는 거예요. 내가 쉽게 이동하지 못하도록 몇 년 동안 이용하던 출입문을 막고, 여사원 불러서 나를 안 찍는다고 할 때까지 집에 안보내주는 등 아주 노골적으로 그랬어요. 그래서 내가 조회시간에 ‘지금까지 선거에 개입해왔던 거 아는데, 이제부터는 그러지 마라. 그런 사람은 나하고 같이 일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겠다’ 그랬어요. 그 이후에 계속 선거에 개입했던 직장은 내가 당선되자마자 자기 스스로가 직장 자리 그만두고 물러났습니다. 그렇게 해서 96년부터 98년까지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노사협의회 위원에 당선이 되었어요.”

 

 

그렇게 활발한 현장활동을 벌이던 송수근은 98년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에서 해고가 됩니다.

 

 

“IMF가 찾아오니까 회사가 일방적으로 97년 연말 보너스를 삭감하고, 이후에 복리후생비를 삭감하고, 희망퇴직을 받는다고 면담을 하면서 거의 강제퇴직 수준으로 사람들이 쫓겨나고, 소사장제를 도입한다면서 한 공정의 사람들이 전원퇴사하여 그대로 비정규직으로 전화하게 되었어요. 당시에 1700여 억 원의 흑자를 낸 회사가 현장에서는 망할 것처럼 홍보하면서 구조조정을 한 거예요. 그때부터 분사를 하기 시작한 게 57개 공정 2~3천 명 정도가 비정규직이 되요.

회사가 ‘노사협의회는 경영권에 참여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래서 내가 ‘현대자동차는 지금 구조조정 문제 때문에 저렇게 시끄러운데, 우리는 노사협의회이기 때문에 경영권에 참여할 수 없다면 우리도 노동조합 만들어서 당당하게 하겠다’ 그랬거든요. 그러면서 본사에 항의방문을 가게 되었는데, 그게 해고 사유가 되었어요. 그때 9명이 갔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월차 처리 됐고, 오직 저만 무단결근으로 처리해서 해고사유로 삼았어요.

징계위원회 개최 한 후에 회사가 결정을 내리지 않고, 그날 밤에 공장장에게서 직접 전화가 왔는데 ‘내가 니를 해고시킬 이유가 뭐 있느냐? 노사협의회 안하면 안 되겠느냐?’라는 거예요. 결국 회사는 현장과 저의 관계를 때어놓기 위한 목적이었지, 해고가 목적이 아닌 것 같았어요. 그런데 내가 해고되지 않기 위해서 그런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은 나를 위해 함께 해주었던 많은 사람들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했어요.”

 

 

1994년에 결혼해서 애를 낳고 애가 한참 재롱을 피울 때 해고된 송수근에게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위협과 회유가 이어졌습니다.

 

 

“해고 당일도 회사가 여관방으로 봉투를 들고 왔어요. 거기서 저는 ‘어떤 것이든 나는 당당하게 회사 안에서 받겠다. 회사 밖에서 받을 이유가 없다’고 거부했어요. 그리고 회사로 출근하려고 가니까 럭비선수들 하고 경찰해서 100명이 정문에서 막더라고요. 그날 4시간 가까이 출입을 요구하면서 실랑이를 벌였지만 결국 출입을 못했어요. 그 이후에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서 한 달 가까이 계속 출입만 요구했어요.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그전에 안면이 있었던 경주 만도기계 사람을 찾아갔더니 민주노총을 소개해줘서 민주노총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지방노동위윈회에 구제신청도 넣고, 피켓도 만들고, 조끼에 글자도 넣고 하면서 1인 시위를 시작했죠.

그러다가 민주노총이랑 같이 첫 집회를 잡으니까 회사에서 친구들, 고향선배들, 회사에 물건을 납품하는 업체사장들을 동원해서 ‘회사가 대화를 원하는데 회사를 한 번 만나보자’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마지못해 언양 고기집에 갔더니 회사 관리이사가 나왔더라고요. 저는 복직을 요구했지만 관리이사는 안된다고 그러기에 ‘그럼 얘기 끝났다’면서 나오려니까 선배들이 근처에 가서 소주 한 잔 하자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소주 한 잔 하자고 차를 탔는데, 차를 타니까 문이 잠기면서 막 바로 고속도로로 올려버리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이건 납치다’그러면서 차에서 난리가 났어요. 그렇게 난리를 치니까 경주에 내렸어요. 경주에 내리니까 또 다른 차에서 다른 선배들이 와서 소주 한 잔만 먹자고 그러더라고요. 안 갈라고 하다가 하도 그러기에 다음부터 이렇게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술 한 잔 먹으러 들어갔어요. 그런데 거기서 술 석 잔을 먹고 정신을 잃었어요.

정신을 차려보니까 어떤 콘도인데, 옆에는 아가씨가 있고 밖에는 누가 지키고 있었어요. 나가니까 몇 팀들이 지키면서 못 가게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사람들 중에 한 사람에게 집에 걱정하니까 전화 한 통화만 하자고 해서 핸드폰 빌려서 집에 전화를 했죠. 집에 전화해서 ‘이 새기들 날 납치했다’ 그러니까 112에 신고했어요.

그때 감포, 영덕 이쪽까지 잡혀가면서 ‘회사하고 합의 봐라. 안 그러면 쥐도 새로 모르게 죽는 수가 있다’면서 협박을 엄청 받았어요. 그때 불안도 했지만 마음을 독하게 먹자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좋다. 나를 죽여라. 만약 죽이지 못하면 내가 나중에 가만 안 놔두겠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협력업체 사장들이 ‘돈이 얼마 필요하냐?’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는 와중에 신고가 들어가고 그래서 24시간 만에 풀려났어요.”

 

 

그 이후에도 회유와 협박은 멈추지 않았지만, 민주노총의 지원 속에 시작한 투쟁도 시간이 가면서 점점 사람이 줄어들면서 힘을 잃어가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 가운데 99년 업무방해와 명예훼손 등으로 구속된 이후 집행유예로 나왔지만, 이후 계속 투쟁을 벌이자 선전문의 내용을 문제 삼아 다시 2001년에 명예훼손으로 실형을 받아 1년 8개월을 복역하게 됐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회사에서 집 앞에 와서 지키고 동태파악하고 그랬는데, 이게 사회적으로 문제되니까 방식을 바꾸더라고요. 그래서 2003년 만기출소 하고 나온 이후부터는 휴대폰을 통한 위치추적을 시작했어요. 2003년 8월부터 위치추적이 시작되어서 700여 건 정도 위치추적 당했어요. 중요한 회의나 행사가 있는 날은 더 집중적으로 위치추적을 했더라고요.”

 

 

그렇게 버티는 과정에서 가족들의 고통도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가장 큰 고민인데, 저 혼자만 몸이 나빠지는 게 아니라 가족들도 감시 미행 등으로 고통을 많이 받아요. 집사람도 정신병원에 갔다 올 정도로...(송수근 씨는 말을 더 잊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제가 송수근 씨의 얘기를 들었던 것이 2005년쯤이었습니다.

언양에서 허름한 비디오가게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송수근 씨는 그때 목 디스크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천 만 원에 이르는 수술비를 마련하기가 만만치 않아서 수술을 못하고 있었는데...

 

 

5

 

오늘 방송은 특집기사처럼 말이 좀 많은 방송이 돼버렸습니다.

삼성이라는 괴물과 싸우는 사람들의 얘기를 짧은 문장으로 전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마저도 최근 얘기가 아니라 몇 년 전 기록을 되살리는 것이라서 시의성도 없고...

그렇게라도 그들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지금도 이어지고 있을 투쟁을 응원하고 싶습니다.

 

황유미 씨를 비롯해서 삼성에서 일하다가 죽어간 분들을 만나본 적은 없습니다.

그들의 얘기도 책이나 기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들었을 뿐이고요.

그 정도이기는 하지만 그분들의 고통이 조금은 전해집니다.

제가 느낄 수 있는 고통이 이 정도라면 그만큼이라도 연대의 마음을 전해봅니다.

 

‘전태일, 민중의 나라’를 들으면서 오늘 방송을 마치겠습니다.

 

 

너의 죽음으로 더욱 아름다워진

저 푸른 하늘을 보아라

가슴 벅찬 세상보아라

너의 불타는 넋이 누리에 살아 숨 쉬니

역사의 새 장을 열고서 그날을 맞이하리라

 

이제는 너의 이름 말하라

찬란한 민중의 나라

온 세상 산천초목 짙푸른

투쟁과 노동의 깃발

 

드높이 드높이 높이 솟아

맞이하리라 민중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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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방송에도 누군가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방송에 대한 의견도 좋고

전하고 싶은 얘기도 좋고

광고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도 됩니다.

아니면 쓸데없는 얘기 주절거려도 되고요. ㅋㅋㅋ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문을 열어 놓고 있겠습니다.

 

성민이 mk102938@hanmail.net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 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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