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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트풀8

타란티노 영화는 망설이면 안 된다.
주제의식이나 평점이니 하는 것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하루 이틀 미루다보면 어느 순간 영화관에서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볼 생각이 있으면 개봉과 동시에 봐야 한다.
제주도에서도 단 한 군데서만 겨우 상영하고 있어서
망설이지 않고 개봉 첫 날 첫 회 상영을 보러갔다.

 

평일 오전 11시 상영이었는데도 의외로 사람들이 있었다.
타란티노 팬들인 것 같은데 의외로 여성들이 많다는 게 좀 의외였다.
하긴, 아주 폭력적인 영화를 마초적 방식과는 다르게 만드는 감독이니...

 

조명이 어두워지고 영화가 시작됐다.
눈 쌓인 황야에 예수상이 보이고 저 멀리서 마차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의미심장한 음악과 함께 롱테이크로 찍은 첫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역시 타란티노는 멋을 제대로 부릴 줄 알았다.

 

‘chapter 1’이라는 자막과 함께 시작하는 영화는 탄란티노 영화에서 익숙한 방식이어서
마음을 편하게 하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지만 긴장을 풀지는 않았다.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오고 피가 튈지 모르니까.

 

탄란티노 영화는 심각하게 보면 재미없으니까
머리를 비우고 감독이 가는 데로 그냥 따라가고 있었는데
초반이 의외로 재미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씩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여자 죄수를 제외하고는 캐릭터들이 너무 전형적이어서 밋밋했다.
탄란티노 영화는 캐릭터의 재미로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 따라갔는데
서로 주고받는 대화의 긴장감이 약간 느슨한 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닌가.
탄란티노 영화의 매력은 조였다 풀었다 하는 긴장감에 있는데...
뭐 그래도, 예상치 못하게 터지는 액션과 감독이 이끄는 묘한 분위기에 이끌려 갔다.
시간이 오래지 않아 고립된 산장에 불쾌한 8명이 모이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됐다.

 

‘신용문객잔’이나 ‘황혼에서 새벽까지’ 같은 황당하고 정신없는 액션이 벌어질까?
그냥 ‘저수지의 개들’처럼 자기들끼리 말싸움하고 치고받고 하면서 개판을 벌일까?
아니면 ‘폰 부스’류의 밀실 스릴러처럼 팽팽한 심리전을 벌일까?
이런 저런 기대를 하면서 영화를 보는데...
웬걸, 캐릭터들은 계속 밋밋했고, 대화의 긴장감은 팽팽하지 않았고, 타란티노 영화에서 많이 봤던 액션들이 자주 나왔다.
그리고 한 명씩 죽어가면서 마지막에 주인공만 남고 영화가 끝났다.
이건 뭐, 타란티노 영화라는 걸 확인시켜주려고 만든 영화인가 싶었다.

 

‘바스터즈’에서 독일군 장교가 어느 유대인 농가에 찾아가 얘기를 나누며 진행되는 아주 팽팽한 긴장감은 타란티노 영화의 백미 중의 하나였다.
‘헤이트풀8’에서도 그런 심리적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 몇 군데 있었지만 헐렁한 고무줄을 잡아당기는 느낌이어서 많이 허전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벌어지는 예측불허의 액션과 잠시 마음을 놓는 순간 날아오는 총알에 쓰러지는 반전의 묘미 같은 게 타란티노 영화의 쾌감 같은 것인데
긴장감이 팽팽하지 못하니 예측불허의 액션은 그냥 총질일 뿐이고, 감독이 시키는 총질에 하나씩 줄어갈 뿐이었다.
한 공간에 놓인 인물들간의 관계를 풀어가는 퍼즐 같은 재미도 1940~50년대 초기 추리소설의 단순한 구조를 벗어나지 못했다.
타란티노 영화의 독특한 매력 중의 하나는 영화의 상투적 법칙을 그대로 활용하면서 능숙하게 갖고 논다는 점이다.
그런데 어는 순간부터 이런 제주마저 조금씩 관성화되면서 타란티노 영화의 상투적 법칙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바스터즈’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까지 갖고 놀려고 했던 무모한 자신감은 사라지고
‘장고’에서는 ‘킬빌’의 덫에 걸려 폼 나지 않는 활극을 벌이다 끝나더니
‘헤이트풀8’에서는 초기작인 ‘저수지의 개들’에 빠져서 발버둥치다가 끝나버렸다.
‘데스 프루프’의 앤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는 가슴이 시원했는데
‘헤이트풀8’의 앤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는 허무한 느낌이 날아들었다.

 

그래도 2시간 40분이 넘는 긴 영화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는 점만으로도
타란티노 영화는 역시 타란티노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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