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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이상한 나라에서 온 스파이'를 읽고

이상한 나라에서 온 스파이 (최인석, 창작과 비평사, 2003년)

 

이 소설은 ‘한 소년이 고아원을 탈출하여 미군 나이트클럽에 취직해서 밑바닥 생활을 하고, 고아원에서 같이 자란 소녀와의 사랑이 현실에서 굴절되다가, 밑바닥 생활을 청산하면서 그 둘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정말 진부한 얘기를 400쪽이나 늘어놓고 있습니다. 환타지 소설도 아닌데 신화나 설화에 대한 얘기들이 많이 나오고, 논리적으로 말도 안되는 사건전개들이 무수히 나타나고, 그렇다고 리얼리즘 소설처럼 시대적 상황과 적극적으로 대화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철지난 진부한 얘기를 이상한 방식으로 늘어놓는 이 소설은 이상한 소설입니다. 소설을 잘 읽지 않는 시대에 이런 이상한 소설을 읽는다는 것도 이상한 짓입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나온지가 1년이 넘었지만 잘 알려지지도 않았습니다.

 

밑바닥 인생들의 얘기를 늘어놓는 소설들은 정말 많습니다. 그 유명한 ‘인간시장’을 비롯하여 과거 80~90년대 넘쳐났던 리얼리즘 소설 등 정말 진부할 정도로 많은 소설들이 밑바닥 삶을 얘기했습니다. 너무 진부해서 이제는 얘기하지 않는 그 얘기를 다시 끄집어낸 작가는 그 진부하고 구질구질한 삶을 정말 진부하고 구질구질하게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몸서리가 쳐집니다.

 

나는 바로 이튿날부터 일을 시작했다. 나는 소주에 취해 걸레조각처럼 쓰러져 잠든 어미를 생각했고, 그녀가 들려준 얘기를 떠올렸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지네였다. 화장실로 들어서는 미군 병사의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나는 채 문이 열리기도 전에 목청껏 고함부터 질렀다.

“굿 이브닝, 써어!”

선수를 빼앗긴 제임스 박이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검둥이 미군 병사가 들어왔다. 그는 나를 쳐다보더니 빙긋 웃으며 유 토킹 투 미, 하고 말하더니 소변기 앞으로 가 바지 지퍼를 열었다. 나는 양복솔을 들고 그의 등 뒤로 다가가 손을 한껏 뻗어올려 보잘것없는 스웨터를 걸친 그의 어깨에서부터 먼지를 털어내는 시늉을 시작했다. 미군 병사는 말했다. 유 돈 해브 투 두 댓 투 미, 보이. 유 돈 해브 투. 나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이런 짓 말라는 뜻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떻게 대꾸할 것인지 알 수 없었으므로, 나는 계속해서 양복솔로 그의 엉덩이와 바지자락을 털어 내려갔다. 그가 자리를 옮겨 세면대 앞으로 가자, 나는 얼른 구둣솔을 집어 들고 그의 발 뒤로 가 쪼그리고 앉아서 구두의 먼지를 맹렬히 털어냈다. 오, 보이. 돈 두 디스 투 미. 아이 해브 나씽. 그가 손을 씻고 돌아서자 나는 그의 눈앞에 타월을 들이밀었다. 손의 물기를 닦으며 그는 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젖은 타월을 받아들자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접시에 떨어뜨렸다. 25쎈트짜리였다. 그것은 드문 선심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미군 병사들이 떨어뜨리는 동전은 5쎈트나 10쎈트였다. 나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쌩큐, 써어!”

그 순간 문득 목이 메었다. 울먹임 같은 것이, 그와 함께 알 수 없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마침내 내가 그 짓을 하고 말았다는 자괴감과 혐오감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으나 나는 꿀꺽 그것을 삼켜버렸다. 나는 지네다, 하고 생각했다. 내 아비는 도둑이다. 내 어미는 주정뱅이다. 그리고 나는 지네다. 사람으로서는 이런 일을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네는 할 수 있다.

 

이렇게 구질구질한 삶은 이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더 구질구질해야 이 세상이 얼마나 구린 세상인지를 알게 되는 법입니다. 세상은 이 진부하고 구질구질한 고아들을 자근자근 짖밟고 씹어제꼈습니다. 정말 개같은 세상입니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가 단순히 밥벌이를 어떻게 하느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병식이형의 말은 나에게만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역시 가혹한 진실이었다. 태창 나염공장은 이듬해 1월 문을 닫았다. 소규모의 수공업 나염공장은 기술의 발전과 기계화 대형화 추세로 전반적으로 몰락하고 있었다. 그것이 막상 돈벌이가 되기 시작하면서 큰 자본이 투자되기 시작했고, 소규모 나염공장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병식이형은 실업자가 되었고, 그때부터 그의 술버릇은 더욱 사나워졌다. 술집에서나 골목에서나 아무하고나 붙들고 싸움을 벌여 코가 터지고 입이 찢어지고 눈자위에 멍이 들어 돌아왔다. 더욱 자주 순금이를 두들겨 팼다. 같은 동네의 십장 덕분에 그가 막노동을 다닐 수 있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

그들 부부는 나의 아비 어미와 비슷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충격으로 멍해졌다. 나의 영웅, 그리고 나의 미녀, 그들 부부가 나의 아비 어미와 비슷하다니. 어떻게 이렇게 되고 만 것인가? 때리고 맞고 깨고 부수고 남편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오랜만에 다시 나타나면 부부는 다시 싸우고 남편은 아내를 때린다..... 정말 똑같았다. 아아, 나의 영웅 부부가 나의 아비 어미와 같다니.

아이들은 밥상머리에서 숨 한번 쉬지 않고 고깃점을 허겁지겁 입안에 쑤셔넣고 있었다. 언젠가 이 아이들이 고아원에 맡겨진다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과연 고아는 고아를 낳는 것일까. 나는 나의 영웅과 나의 미녀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들의 사랑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지금의 그들이 이런 꼴이 되고 만 것은 더욱 놀라웠다.

 

“너도 알잖아. 우리 같은 것들이 살아남기 위해 이놈의 세상에 지불해야 하는 게 뭔지.”

물론 나는 알고 있었다. 치욕, 우리 같은 것들이 가진 지불수단이란 그것뿐이었다.

그렇다. 영순이에게는 그녀 몫의 치욕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런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어미의 치욕만으로도, 나의 치욕만으로도 벅차 구역질이 치밀었다. 나는 일어났다. 그녀가 나를 붙잡으며 힐난했다. 나도 니가 어떻게 살았는지 조금은 알아. 여기 여자들이랑, 제니랑 패티랑 무슨 파티를 벌였는지 알아. 넌 스스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난 아니야. 언제나 강요당했어. 어쩔 수 없었어. 아버지, 아버지가...... 하지만 이런 생활 곧 청산할 거야. 나 돈 많이 모았어. 곧 가게 하나 마련할 거야. 우영아, 제발, 제발...... 조금만, 조금만 관대하게 생각해줘.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엄격하게 굴지 말고. 나는 그녀를 뿌리쳤다. 뭘 어쩌자고? 고아와 고아가 만나서 또 고아나 만들자고? 밀수꾼 범죄자와 매춘부 출신 밀수꾼 범죄자가 만나서 또 범죄자나 만들자고? 너나 나나 누굴 만나더라도 좀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할 것 같지 않냐? 말하지는 않았으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영순이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듣지 않았으나 알아들었다.

또다시 우리 앞을 막아선 것은 아비였다. 나와 영순이에게, 우리 같은 고아들에게 아비 어미는 단순한 아비 어미가 아니라 어쩌면 저주,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이었다. 나는 그녀가 내가 아는 것 외에 또 무슨 얘기를 꺼낼 것인지 두려웠다. 또 하나의 나의 아비, 또 하나의 나의 어미와 마주치게 될 것이 뻔했고, 그것이 소름끼치도록 지겹고 혐오스럽고 무서웠다. 나는 소리쳤다. 그것밖에 몰라? 얼마든지 더 있는데. 애니도 있고 캐시도 있고 재클린도 있고 수잔도 있고...... 나는 내가 아는 모든 매춘부들의 이름을 늘어놓으며, 나를 붙자는 그녀를 뿌리치며, 그녀의 흐느낌을 등 뒤로 들으며, 돌아서서 그녀를 껴안으려 고집하는, 마음속에서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짐승을 짓누르며 그녀의 집을 나섰다.

만일 지금 내가 영순이를 받아들인다 해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이놈의 세상은 나나 영순이의 계획이나 임의대로 살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덫에 빠진 것이요, 그리하여 더욱 참혹하게 박탈당하고 말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듯 선명하게 나는 또 하나의 아비, 또 하나의 어미가 되어 있는, 혹은 또 하나의 나의 영웅과 미인이 되어 있는 나와 영순이를 떠올릴 수 있었다.

 

너무도 잔인하게 고아들을 짖밟는 세상은 결국 그들의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언제든지 미련 없이 이 나라를 떠나고 싶은 거고, 그래서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덤벼들고, 기회만 되면 ‘달러의 나라’ 미국으로 가기위해 별별 짓을 다합니다. 그런데 정신 나간 미군 탈영병이 나타나서 “꿈깨!”라고 얘기를 하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입니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것은 허구다. 아메리카의 정의라는 것도 허구요 위선이다. 그 허구와 위선을 한꺼풀만 벗기고 들여다보면 거기 잔인성과 야만과 이기주의와 탐욕이 구정물처럼 악취를 풍기며 아메리카라는 하수구에 콸콸 흘러넘치고 있다. 아메리카에서는 허구와 위선이, 탐욕과 야만이 전통과 문화가 되어버렸다. 거기에다가 골목대장의 영웅심리를 더하여 이루어진 거대한 개미탑 같은 나라, 거기에 자유의 여신상이라는 위선을 덧씌워놓은 나라, 그것이 바로 아메리카다. 아무도 위선을 수치스러워하지 않고, 아무도 탐욕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것이 이미 문화가 되어버렸으니까. 가정에서부터, 학교에서부터 그르치고 배우는 교육의 중요한 커리큘럼이 되어버렸으니까. 참으로 우습고 무서운 일이다. 하기야 그 골목대장은 60년대 이래 쿠바에서, 남미에서, 그리고 최근에는 베트남에서 덩치도 보잘것없는 제3세계 아이들에게마저 연이어 형편없는 패배를 맛보고 있지만. 뭐 하러 그런 놈의 데로 이민을 간단 말이야? 난 내가 아메리카 시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치욕스러운데, 1년의 근무기간이 지나 아메리카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 벌써 지긋지긋해지는데, 그래서 난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갈까 생각중인데, 어떻게든 돌아가지 않을 방법이 있는지 궁리중인데.

 

진부하고 구질구질한 삶을 살아가면서 끝임 없이 짖밟히는 고아들에게 희망이라는 것은 정말 사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밥이나 해주고 때로는 창녀처럼 몸도 허락하는 밥어미이기도 하고, 주민등록이라는 것에 서류상의 이름으로는 윤작은년이기도 하고, 열고야라는 이상한 나라의 스파이 이름으로는 꽃실이이기도 한, 몇 백 년 묵은 여자와 그의 동료 스파이가 나타납니다. 그들의 공작수법은 참 특이했습니다.

 

나는 밥어미가 알돈사가 되어 그의 앞에 서서 부르짖는 것을 보았다. 난 공주도 둘시네아도 아니에요! 난 창녀예요. 이 세상이 얼마나 잔인하고 야비한 곳인지 난 잘 알아요, 하지만 그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의 부드럽고 착한 마음이야말로 나에게는 고문이라구요. 당신은 나에게 하늘을 보여줬지만, 늘 땅바닥에 엎드려 걸레질이나 하고 사는 벌레 같은 저에게 그 하늘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요? 나는 싼초 빤싸가 되어 그에게 말했다. 그 여자는 공주님이 아니라 여인숙 부엌데기에다 창녀에 불과합니다. 그건 적들이 아니라 풍차라구요. 이 미친 늙은이야. 그게 황금투구라구요? 천만에요. 그건 이발사가 가지고 다니는 깨어진 세숫대야예요. 그러나 돈 끼호떼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대야를 뒤집어 쓰고 풍차를 향해 덤벼들었고, 그것은 공주 둘시네아에게 그 승리를 바쳐 그녀를 영광스럽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곳 사람들을 상상할 수는 있었다. 작은년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이 어떤 곳일지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말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넌 이미 알고 있어. 어릴 때부터 넌 이곳이 니 나라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았더냐? 그것은 사실이었다. 이곳은 나를 고아로, 지네로 만드는 땅일 뿐이었다. 언제나, 지극히 작고 사소한 희망마저 어김없이 빼앗고 짓밟았다. 그런 곳이 내 나라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니 나라는 어딘데?”

그가 다시 물었다. 내 나라는 어디일까? 내 나라는..... 없었다. 어디에도 내 나라는 없다. 택이 아비는 말했다. 니가 이곳이 니 나라가 아니라고 말할 때 니가 갈망하는 모든 것, 그리워하는 모든 것, 열고야국이 그런 곳이다. 니 나라는 거기다. 아니, 세상 모든 사람들의 나라가 사실은 거기다. 까마득한 옛날 세상의 학대에 견디다 못해 강으로 뛰어든 백수광부가 도달한 곳이 거기다. 사랑마저 금지된 노예 생활을 견디다 못해 아사달과 아사녀가 물속으로 들어가서 이른 곳이 또한 거기다. 수로부인이 왕들에게 백 번을 사로잡혔다가 백한 번을 탈출하면서도, 백성들을 이끌고 동해바다까지 쫓겨가면서도 끝내 들어가고자 했던 곳이 바로 거기다. 예술로, 정치로, 가끔은 치사하고 비굴한 짓까지 해가며 이루려던 것을 끝내 하나도 이루지 못한 최치원이 금강산으로 들어가 이르고자 했던 곳이 거기다. 양반네들 앞에서 그네들 조롱하는 소리와 술로 세상을 견뎌내려 했으나 결국 더이상 견뎌낸다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갑자기 목청을 잃어 소리를 할 수가 없다고 핑계대고 종적을 감춘 송홍록이 떠난 곳도 거기다. 모든 존재와 아름다움과 그리움의 근원이다. 기이한 일이지. 이곳에서 태어나 살다 그곳을 발견한 사람은 종종 그곳으로 건너가기고 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태어나 이곳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이곳으로 건너온 사람들은 늘 가장 비천하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고통스럽게 살다가..... 죽거나...... 살해당하거나...... 발광을 하거나...... 자살을 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처형당하고 만다. 그는 쓸쓸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정 이곳이 니 나라가 아니라면 니 나라는 거기여”

 

정말일까. 정말 사람이 그리워하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일까? 정말, 틀림없이 그러하기를, 꼭 존재하기를. 그런 곳이 존재하기만 한다면 나는 기어이, 끝내 그곳으로 건너갈 것이다. 나는 그 갈망으로 가슴이 메었다. 나의 거지 어미도, 나의 도둑 아비도, 내가 그리워하기만 한다면 죽어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지 모른다...... 적어도 열고야국에서는,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간절히 그런 나라가 존재하기를 바랐다. 그런 나라가 정말 존재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몸이 더워졌다. 그러나......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인가. 그런 생각에 골몰하는 나 자신이 두려고 어처구니없었으나 나는 간단히 부정해버릴 수가 없었다. 그 나라의 주민들이, 작은년과 택이 아비가 있지 않은가?

물끄러미 작은년의 우물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나는 구덩이로 내려가 택이 아비가 내던지 삽을 움켜쥐고 삽질을 했다.

그렇게 나는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작은년의 슬픔을, 어쩌면 내 가슴을. 그녀가 5년 동안 끊임없이 내 가슴을 향해 걸어오기를 바라며. 어쩌면 나 역시 이렇게 삽질을 함으로서 그녀의 가슴으로 걸어들어갈 수 있기를 바라며. 아니, 그보다는 열고야국을 향하여 다가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 우물을 통하여 지구덩이의 반대쪽으로 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랐다.

 

지난 여름 파병철회투쟁이 뜨겁게 진행되고 시들해질 즈음 청와대 앞에서 정말 죽을 각오로 조용히 단식을 하던 지율스님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습니다.

파병철회투쟁을 목소리 높여 외치던 민중운동과 시민운동 지도자분들은 노무현하고 제대로 맞짱도 뜨지 않고 적당한 명분 속에 단식을 시작하고, 적당한 명분 속에 단식을 접었습니다. 그래서 자이툰 부대는 이라크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조용히 청와대 앞에서 단식을 하던 지율스님은 “천성산이 내게로 왔다”면서 투쟁 속에 죽음을 준비하였습니다. 결국 청와대는 승복을 하였습니다.

지율스님의 비타협성 속에서 천성산의 아픔이 스님의 아픔이 되었기에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민중운동과 시민운동 지도자분들의 타협성 속에는 김선일씨의 절규가 자신의 절규가 되지 않았기에 간절함이 없었습니다.

나는 “대중이 아프면 그 아픔을 자기 스스로가 느껴야 한다”고 목소리 높여왔습니다. 그리고 얼마전부터 노동보건운동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이제는 큰 목소리를 좀 죽여야겠습니다. 내가 아프면 이 아픈 것을 고치기 위해 마음속으로부터 정말 간절하게 빌고 빌어야겠습니다. 비타협성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그리고 대중이 요구하는 것을 비타협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전투성이 발현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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