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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8/18
    나는 부끄럽다.
    깡통

나는 부끄럽다.

나는 가끔 인터넷을 하다가 비밀번호를 잊어버려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내가 제대를 한지 20년이 된 지금 둘 삼삼으로 시작하는 군번을 기억하고 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내 짧은 인생에 있어 군대 생활이 꽤나 큰 충격의 시간이었기 때문일까 생각한다.

 
나는 1989년 3월 모보충대로 들어갔다. 부모님들과 이별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여기저기서 빨리빨리 움직이라고 소리 지르는 기간병들 사이를 지나며 군대 생활을 시작했다. 보충대에 들어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리버리한 우리들 눈에 장발을 하고 들어온 사람이 보였다. 다들 놀랐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의 장발은 모두 잘려나갔다. 그 날 저녁 내무반에서 불침번을 잘 서라는 연락을 받았다. 우리는 졸린 눈을 비비며 총도 없이 첫 불침번 근무를 했다. 아침에 한 녀석이 담장을 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시작부터 탈영이다.


보충대에서 근무할 곳을 분류할 때 기간병 중 한 사람이 자신이 근무하는 곳이 꽤나 빡센 곳인데 함께 군대 생활을 하고 싶은 사람은 나오라고 하자 몇 사람이 튀어 나갔다. 나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뒤를 이어 좀 빡세다는 곳에서 병사들을 뽑을 때 나는 눈에 힘을 뺐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런 곳과는 상관없는 곳으로 갔다.


짧았던 군대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낼 때 마다 망설여진다. 고생도 안하고 편하게 군대 생활하던 놈이 무슨 말이 그리도 많냐고 타박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후임병들에게 하던 이야기로 변명하고 싶다. “해병대나 공수부대를 가나 방위 생활을 하나 모두가 고생이다.” 하지만 권재신씨가 “강남에서 자란 장남이 서민생활을 이해할 수 있도록 고생시키는 차원에서 ‘산업특례’를 보냈다”(관련 기사 보기)는 말엔 확 짜증이 난다. 이런 걸 힘없는 사람들이 군대 생활을 하고 나서 생긴 피해 의식이라 불러도 할 말은 없다.


최근 안현태씨가 국립대전현충원에 갔다. 나는 그가 현충원에 들어간 것에 대해 옳고 그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다만 국립대전현충원이 준공된 뒤 몇 년이 지나 내 후임병 하나가 그곳으로 갔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다. 나는 제대를 앞두고 국립대전현충원에 한 번 찾아간 것 빼고는 한 번도 그곳에 가지 않았지만 그 후임병은 지금도 내 마음에 남아있다.


국립대전현충원 묘비에 적힌 계급은 안현태씨는 소장이고, 내 후임병은 상병이다. 그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계급의 차이를 느껴야 한다. 장군이 죽어서 들어가는 땅의 넓이와 장군이 아닌 사람들이 죽어서 들어가는 땅의 넓이가 다르다. 서울 현충원에 자리가 없다며 대전으로 내려 보내는 상황에서 죽지도 않는 백선엽씨를 위해 자리를 준비해두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관련 기사 보기) 힘이 있는 자들은 힘없는 자들과 현세의 삶 뿐 아니라 죽음 이 후의 모습도 나누고자 한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다. 내가 군대에 있는 동안 살아있을 때는 인사과에서, 죽으면 군수과에서 담당했다. 6월 군번 후임병이 훈련 중 생명을 잃었을 때 국군수도병원 영안실로 갔다. 사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 나는 국군수도병원을 국군수도통합병원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서울로 기억하는데 병원이 성남에 있다고 해서 다른 곳인가 했는데 서울에서 성남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것과 국군수도병원이 정식 이름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후임병의 시신과 함께 국군수도병원까지 갔다. 영안실에서 근무하던 사병이 나보고 한다는 소리가 자기는 주특기가 보급이라 좋아했는데 도착해보니 여기더라는 말을 했다. 그 병사와 영안실에서 이야기를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맨 정신으로 여기를(영안실) 잘 안 들어온다고 했다. 당시 나는 나보다 3개월 후임병의 싸늘한 시신 곁에서 국군수도병원까지 간 처지라 영안실을 드나드는 것에 별 다른 느낌이 없었다.


나는 군대라는 곳을 특수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 특수한 사회에서 생활을 한 수 많은 사람들은 나름의 상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군대에 있을 때 두 명의 죽음을 가까이서 봤다. 한 명은 자살, 다른 한 명은 훈련 중 사고였다. 한 명은 동기들 손에 한강에 뿌려졌고, 다른 한 명은 대전국립현충원에 갔다. 그래서 나는 늘 후임병들에게 “몸 성하게 집에 가라!”고 말했다.

 

군대라는 곳에서의 내 생활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 군대라는 곳에서의 기억은 힘이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처지를 생각하게 했다. 최근 해병대에서 구타 문제로 시끄럽다. 군에서의 구타 문제는 시간 날 때 따로 정리하려하지만 우선 내가 지난 2010년 11월에 쓴 ‘맞아야 정신 차리나’를 링크했다. 이 글은 서울시 교육청 학생인권조례 제정 때 써본 글이라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내 군 생활의 일부를 담았기 때문에 링크를 했다.(관련 글 읽기) 링크한 내 글에 나오는 6월 군번이 국립대전현충원에 있는 내 후임병이다.

 

가끔 군대를 갔다 와야 남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럴까? 남자란 무엇이냐고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어떤 것이 남자의 자격일까? 군대에 갔다 오면 철이 든다고? 나이를 먹어서 철이 든 것이지 군대라는 곳에 갔기 때문에 철이 든 것은 아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은 할 필요가 없다. 한상대씨가 2011년 8월 4일 검찰총장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이상권 의원에게 답변을 하면서 한 말을 떠올리면 우리 사회가 어떤 곳인지 생각하게 된다.

 

“제가 군대를 안 갔다 온 것에 대해서는 사실 동료들에게 항상 미안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직을 더 열심히 하려고 해 왔고 또 군대 얘기가 나오면 부끄럽게 느낀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제가 국민과 또 국가에 빚을 진 것으로 생각을 하고 앞으로도 빚을 갚는 심정으로 공직에 열심히 하겠습니다.”(국회에서 게시한 2011년 8월 4일 열린 제301회-법제사법제9차 회의록 38쪽 참고)

 

나는 한상대씨가 자신의 주장대로 군대에 갈 수 없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면 부끄러웠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당한 사유가 있음에도 군대에 가지 않았다고 부끄러워해야 하는 우리 사회가 부끄럽다. 나는 군대에 가야 할 사람이 군대에 가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 부끄럽다. 나는 군대에서 생명을 잃고 국립현충원에 가서도 계급에 따라 묻히는 자리까지 달라야 하는 현실이 황당하고 부끄럽다.

 

 

 

                 알아보기 -> 글을 쓴 enlightened  이광흠의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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