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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9/07
    치마를 입어야지, 아멜리아 블루머!
    깡통

치마를 입어야지, 아멜리아 블루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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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를 입어야지, 아멜리아 블루머!

 

어린이들이 읽는 그림 책이지만 어른이 읽어도 좋은 책 같다.

 

남녀 차별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다. 지금의 모습이라면 내가 죽은 뒤에도 차별에 대한 이야기들은 계속해서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릴 것 같다.

 

문제는 내게는 마누라가 있고, 딸이 둘이나 있다는 거다. 더 큰 문제는 막연히 차별이 없기만 바랄 뿐 내가 여성주의에 대해 모른다는 거다.

 

단지, 차별은 불편함을 가져오지만, 불편함이 하나가 사라지면 차별이 하나 사라지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내가 너무 낭만적인가?

 

 

새로운 변화에 대한 저항.

 

 

새로운 스타일의 옷을 ‘미국식 복장’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대부분 사람들은 그냥 ‘불루머’라고 했지요

물론 불루머를 모두 다 좋아한 건 아니었어요.

 

“흠.” 아주 올바른 신사 하나는 말했어요.

“기가 막혀서.” 다른 신사가 말했어요.

“여자가 점점 더 요구하는 게 많아질 거야.” 세 번째 신사가 투덜거렸어요.

 

 

이런 태도는 남녀의 관계를 떠나 기득권을 가진 일부 사람들의 삐뚤어진 모습이라 생각한다. ‘하나를 들어주면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놀부가 도움을 청하러 찾아온 동생 흥부를 박대한 이유도 이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때때로 사람들은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 교육이 중요하다고 말을 한다. 최근 우리나라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사의 수는 여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왜 남녀 차별에 대한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을까?

 

좀 아는 사람들은 제도적인 문제, 구조적인 문제, 문화적인 문제 등 여러 이야기들을 하겠지만 사실 나는 정말 모르겠다.

 

섀너 코리가 쓰고, 체슬리 맥라렌이 그린 것을 김서정이 옮긴 ‘치마를 입어야지, 아멜리아 블루머!’를 딸 아이들에게 읽어주며 든 생각은 어떤 거대 담론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살아가는데 불편함을 느낀다면 불편함을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그 불편함을 함께 바꾸려고 노력하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찌되었든 아멜리아 블루머가 살던 때와는 달리 오늘 날 여성은 자유롭게 투표를 하게 되었고, 편안한 복장을 입고 살아가는 건 그나마 비난 속에서도 자신의 불편함을 바꿔보고자 노력한 여성들과 그런 행동에 지지와 동참을 한 남성들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들보다 내게는 작가 노트에 쓰여진 아멜리아 블루머가 두 아이를 입양했다는 글이 더 마음에 와 닫는다.

 

 

작가 노트에 이런 글이 있다.

 

아멜리아 블루머는 나중에 남편과 함께 아이오와로 이사해서 두 아이를 입양했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권리를 위해 일하는 것은 계속했습니다.

 

사람들은 블루머를 여러 스타일로 바꿔 가며 계속 입었습니다. 블루머는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일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아멜리아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내 딸들은 아니 내 자신(남성)이나 아내(여성)나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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