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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넘지 못 한다

흔히 교육에 대한 어떤 주제를 놓고 이야기 할  때,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 넘지 못 한다.'는 문구를 인용하여-누구의 말인지는 모르지만 곧잘 사용한다.

 

확실히 이 말에 공감을 한다.

 

이 말이 인용될 때 교육에 관해서 교사의 책임 막중하다거나, 교사의 역할이 그만큼 무거워 교사를 우대하여하 한다는 의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 말도 맞다.

 

허나 다시 꼬아서 생각 해 보자.

 

현재의 교육의 상황은 줄세우기식 엘리트 선발에 봉사하도록 강요받고,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교 할 것없이 신자유주의식 경쟁 속에 놓인 듯 보인다. 왜 이렇게 교육이 흘러가는가? 아니 흐른다기 보다는 교육이 왜 이런 지경에까지 변질되어 버렸는가? (교육이 원래 이런거야 선발이야 선발! 이러면 할 말 없다.)

 

여기서 위의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 넘지 못한다.'는 말을 인용 해 보자.

지금 교육의 요따구 인 것은 교사가 이따구이기 때문이야라는 생각이 자연스럽다. 너무 꼬아 버린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왜냐면 일부분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 말도 맞다.

 

 

 

그럼 교사들이 왜 이따구인가? 일필휘지 써 내려가기 어려운 질문이다.

한 번에 한 가지씩.

 

얼마전 뉴스에서

일제 고사 반대(?)를 해서 파면 혹은 해임을 당한 교사들이 몇몇이 등교를 했다고 하는 보도를 들었다. 짤렸는데 왜 나오느냐는 것이다. 거기서 교사는 투쟁이란다. 저는 승복할 수 없다고 했다. 아마 소추심사 중인가 보다.

 

그녀 혹은 그-뉴스에서 본 사람은 그녀는 홀로 국가를 대한 싸움을 시작했다. 그 뿐이다.

 

이것은 그녀의 싸움이다.

대다수의 교사들의 싸움이 아니다.

강압적인 일제고사에 대한 싸움은 국가 대 교사들의 싸움이 아니라,

국가 대 그녀 혹은 그, 거대 집단과 개인의 싸움으로 보인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이 보이지 않는가?

교사들 이따구의 단 한 가지이다.

 

나는 일제고사 부활로 인해 파면 혹은 해임되었던 선생님들 때문에,

어떤 대전환을 위한 시발점, 혹은 비등점이 될거라는 희망을 가졌었다.

 

나의 기대는 여지 없이 무너졌고, 그들은 짤려 홀로 진흙 속에서 싸움을 하다 목구멍까지 흙맛을 볼 것이다. 그리고 잊혀질 것이다.

일련의 사건들에서 대다수의 나머지 교사들은 자기일이 아니고, 또한 앞으로도 자기 일이 아닐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잠잠하다.

 

그들은 아마 앞으로 곧 시행될 교원평가제 역시 안 되었으면 싶지만, 그로인해 자기는 짤리거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아니면 경력이 낮아서 불이익당해도 별 수 없는 일이라고 나라에서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않겠느냐고 생각한다. 그도 아니면 제가 열심히하면 더 좋은 봉급과 대우, 승진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도 잠잠할 수 있다.

 

 있으면 진단고사라는 둥의 일제고사가 또 치뤄질 것이다. 교육청에서는 각급학교에 이번 시험에서 지난 번 같은 일이 벌어지면 알아서 하라는 으름장을 공문형식으로 송달해 놓았다. 교사들은 잠잠할 것이다. 기대된다. 어떤 자기변명을 늘어 놓을지, 분명 논리적 모순의 코미디를 선사하거나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을 찬양하거나 잠잠할 것이다.

 

교사들이 이따구다. 혹시 전교조라는 둥 투철한 교육 철학 속에 가르치고 생활하는 이 나는 참 선생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이 글을 읽으면 무척 열불을 낼 것 같다.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둥. 니 주위를 한 번 찬찬히 보라.

 

내가 쓰레기 백수 임용준비생이라도 그건 안다. 주위를 둘러봐라. 그렇다 교사가 이따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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