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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3/31
    <워낭소리>(2)
    Nim Cruz
  2. 2009/03/26
    <괴물과 FTA> 2006. 8. 6.
    Nim Cruz
  3. 2009/03/23
    <山內 달밤>
    Nim Cruz
  4. 2009/03/19
    <봄인데>
    Nim Cruz

<워낭소리>

웬 가리늦가 워낭소리냐 하면,

 

오늘 도서관에 갔다오니 부모님이 조금 더 늦게 들어오셨다.

 

그래서 어딜 다녀오시냐고 여쭈었더니,

 

워낭소리를 보고 오셨단다.

(읍네 새마을금고에서 밀양영화학교 주관으로 무료영화상영을 하고 있다. 거기에 다녀오신 것이다.)

 

며칠 전 아버지께서

"워낭소리 재미있냐?"

 

난 "아뇨. 재미없어요. 보지 마세요."

 

"니는 보고 왔으니 재미없다고 말하지-. 왜 다들 재미있다던데."

 

결국 오늘 보고 오신 것이다.

"우찌. 재미있섭디꺼?"

"우와- 워낭소리 재미없더라."

"거 보세요. 재미없다고 했잖아요."

"재미있는 줄 알았지. 피곤해서 보다 좀 잤다. 놈놈놈은 재밌나?"

"그건 재미있을거라예."

 

좀더 늦게 어머니께서 들어 오셨다.

"워낭소리 재미있섭디꺼?"

"그냥 할배할매 사는데 소 키우고 소꼴 뜯고 그런 얘기데. 그냥 할배할매 나와서 할배가 소꼴 뜯고, 밥 주고 일하고, 그러다 소가 죽더라."

"저도 봤습니더."

"그랬나? 할배들이 보고 한심스럽다 카더라-."

"누가예? 영화가예? 그 할배들이예?"

"그 할배들이."

"영화는 재미있습디꺼?"

"아니. 그저그렇더라. 재미없더라. 집으로는 어떻노?"

"그것도 촌에 할매, 손자 얘깁니더."

"그렇나? 내나 똑같겠네."

 

이상이 부모님가 내가 나눈 대화다. 부모님께서 영화보는 눈이 나빠서 영화가 재미없는 건 아닐테다. 내나 촌에서 옛날에 경험한 얘기인데, 무어 재미있을 것이 있겠는가? 뭐 다른 것이 있겠는가? <워낭소리> 속 할배와 동네 할배의 삶은 유독 소를 사랑했다는 것 빼놓고는 그리 큰 차이가 없다. 과대선전의 피해자가-비록 공짜지만- 된 셈이다. 나 역시 보고 좀 심드렁한 기분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내 친구는 보고 금방 눈물이 쏟아지더라던데 나는 별로였다. 그만큼 회자되고 극찬할 만큼의 영화는-다큐로서도- 아니었다. 범작 수준? 아니면 B급 정도?

 

영화는 인간과 동물의 우정을 놓고 보았을 때, 동물농장이나 주주클럽 딱 그정도다. 딸랑거리는 워낭소리가 주구장창 대리선동을 하여 오히려 기분이 나빠질 정도다. 애써 눈물을 쥐어짜내려는 삼류멜로처럼.

 

<워낭소리>는 '신-구문명의 충돌과 구문명의 패배'의 관점으로 보면 그나마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영화가 된다. (이렇게 보면 위 어머니와의 대화 중 동네 할버지들의 한심스럽다는 말은 중의성을 띤다. 불편하고 좁은 의자에서 애써 시간을 내 저딴 영화를 보는 자신들이 한심스럽다는 것과 구문명의 실질적인 패배자로서의 한심함이 그것이다.)

 

늙은 소와 할배와 고된 노동은 전통-구-문명을 대표하고, 젊은 소와 할배할매의 아들딸들과 석유 때는 농기계는 현대-신-문명을 대표한다. 할매는 중간자적 입장에서 현대문명을 옹호하는 역할을 한다. 시종일관 영화는 전통문명을 고된 노동과 골병을 반복해서 부정적으로 보여준다. 그나마 인간과 동물을 우정이라는 포장을 통해 긍정적 감성을 자극한다. 마찬가지로 현대문명에 대해서는 매정함을 보여준다. 늙은 소를 여물통 밖으로 몰아내는 젊은 소, 농삿철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여가삼아 내려와 고기를 구워먹으면서 '소팔라!'라고 외치는 자식들. 그들은 농삿일을 돕지도 않거니와 병원 한번 모시고 가지 않는다.

 

늙은 소와 할배는 할매의 끊임없는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전통을 고집스럽게 고수하지만, 추수철 콤바인에게 한 번 도움을 받고, 소팔라는 자식들 소리에 좌절하고, 늙은 소가 노사하면서 할아버지는 만신창이의 몸으로 '아파!'라고 외치고, 한편으로는 워낭소리를 딸랑거리며 마침내 패배를 선언한다.

 

이렇게 <워낭소리>는 '전통문명의 마지막 장, 패배 선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다큐란게 원래 그렇고 그래서는 안 되는 건지는 모르지만, 영화는 어떠한 희망이나 대안도 보여주지 않는다. 즉 자기 목소리라는 것이 없다. 이 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희망과 대안을 보여주지 않았으니,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못하니 우리가 찾아야 한다. <워낭소리>를 본 그 수많은 도시 사람들이 그 희망과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 이것에도 나는 부정적이다.



이와 관련해 떠오르는 사건이 있다.

 

남대문 방화사건.

 

난 그 때 뉴스를 보면서, 불타버린 남대문을 보면서, 사람들의 외침, 절규와 그들의 눈물을, 생방송으로 보면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정말로 빵 터졌다. 어찌나 웃기고 역겹던지.

 

그들은 남대문이 불타버린 것이 대한민국 전통문화의 크나큰 상처, 손실로 보았는데, 그것이 같잖았다.

 

남대문 물론 국보 1호로 대단한 문화유산이다. 그것도 유형의.

하지만 서구문화를 동경해 한시빠비 전통문화를 내팽겨치고 없애버린 그들이, 소젖보다 Milk를 좋아하는 그들이. 외국에 팔거리-관광상품-가 아니면 돌보지 않는 그들이. 좋은 것을 보러 유럽으로 날아가는 그들이. 동강이 아니라 세느강과 허든슨강을 사랑하는 그들이. 남대문을 빙 둘러싸고 남대문이 탄다고 민족의 자존심이 탄다고 슬퍼하고 있다. 발을 동동굴리며 오열하고 있다. 이 얼마나 쓰디쓴 유머인가? 뉘라손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닥종이, 전통 나룻배, 가산오광대 등-이 밖에도 무진장 많다- 무형문화재는 후계자가 없어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있다. 그들의 죽음에는 조문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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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과 FTA> 2006. 8. 6.

몇 년이 지난 지금 이-학과지 '거름'에 싣는다하여 거의 강제로(?) 제출해야 했던- 글은 다시 읽어보니 생명력을 잃은 것 같다. 별로 글 솜씨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어색한 논리 전개가 눈에 띠어 혼자 부끄럽다.

 

하지만 나중에 저 때, 그 때, 이 때 더러더러한 생각을 나중에 잃어 버리지 않기 위해 Ctrl+V의 필요성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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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과 FTA

 

 

괴물은 따로 있다

평소 영화 보는 것을 즐겨하는 나는 <괴물>이 개봉한 첫 날 보러갔다. 친구들과 오전에 표를 예매하고 저녁에 보러갔는데 예상대로 영화관 안은 <괴물>을 보러온 이로 가득 차있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걸 잘 아는 나는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그저 괴물을 깨부수는 액션 블록버스터거니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영화는 내가 기대한 그런 눈요기 영화는 아니었다. 한 친구가 평한 대로 영화 <괴물>은 부조리극이었다. 마냥 용가리가 업그레이드된 괴수영화로 생각했던 내 생각은 착각이 되었고 나는 영화가 속삭이는 말을 들으려고 보는 내내 집중해서 영화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 있겠거니 하면서.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내 마음 속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있었지만 씁쓸하다는 느낌이 가장 많았다. 쓴 커피의 맛이 나는 블랙코메디를 보고 난 느낌과 같았다. 영화 속 부조리는 우스꽝스러움을 가진다. 그 우스꽝스러움이 클수록 더욱 씁쓸한 느낌을 주는 것이 이 영화 <괴물>이다. 그 장면들을 몇 가지 살펴보자면,

처음 괴물은 미군기지의 불법 독극물방류로 인해 태어났다. 국가에서는 괴물을 퇴치할 방법으로 에이전트 옐로우라는 베트남전에 살포했었던 독성화학물질을 사용한다. 그 결과 괴물의 등에서 툭 튀어나오는 새로운 괴물이 생긴다. 독극물로 인해 괴물이 생겨나고 독극물으로 괴물을 물리치고 또 다시 괴물이 태어나는 대책 없는 연쇄를 일으키는 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꼴이 아닌가.

괴물이 한강에 출몰하자 방송에서는 괴물과 접촉한 도날드 하사의 몸에서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검출되었다고 보도한다. 하지만 그 바이러스는 없는 것이고 누군가가 국민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생각하건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공포를 느끼고 분노하는 뉴스는 단연 건강, 먹거리, 교육에 관한 부정적인 보도이다. 언론을 이용해서 공포에 떠는 국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2004년 만두파동이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강두가 괴물에 납치된 딸 현서가 살아있다고 해도 믿지 않고, 원효대교 밑 하수구에 갇혀 있다고 해도 가족 외에는 아무도 귀 기울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합동분향소에 모여 있던 유가족들에게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정부는 그들을 강제로 병원에 수용한다. 현실의 막힌 언로(言路)를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리고 허울 뿐 인 병원 전염병관리하며 비상시에 사용하지도 못하는 휴대폰의 위치추적기능, 그리고 한강 통제 공무원의 부패, 신고보상금에 후배를 팔아넘기는 양심 등 영화는 쉴 새 없이 풍자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것이 추악하더라도 현실이라는 것이 더더욱 쓴웃음 짓게 만든다.

하지만 부조리의 극치를 보여주는 장면은 강두의 뇌 검사 장면을 꼽겠다. 있지도 않은 바이러스를 찾아낸다고 한국의 연구진은 강두의 뇌를 파보려 한다. 수술대에 묶인 강두는 딸의 찾으러 가야한다는 절규를 외치지만 의사, 간호사들은 강두의 머리를 각도기로 이리재고 저리재고 할 뿐이다. 그 장면은 안타까움과 슬픔으로 가슴 아팠지만 머릿속에는 또 다른 장면이 겹쳐보였다. 민중의 고통어린 외침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정부의 경제개발정책, 민중들의 삶은 황폐해지고 삶터가 사라져가지만 책상 위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며 계산하는 경제 관료들의 모습이 그것이다.

어쨌거나 결국 괴물은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괴물을 추적한 강두 가족과 이름 없는 노숙자에 의해서 퇴치된다. 그러한 괴물에 대항해서 강두의 가족이 혈투를 벌이는데 국가는 무엇을 하였나는 의문이 든다. 국민의 안전을 보장해야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어찌하여 괴물에 그 가족은 괴물에 홀로 맞설 수밖에 없었나. 그것이 실제 현실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괴물이 쓰러지고 난 후 연기 속에 비춰지는 에이전트 옐로우 분사기의 모습이 꼭 한강 철교에 매달린 괴물과 꼭 같아 보이는 것의 이유는 무엇인가. 괴물이 쓰러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진정한 괴물은 여전히 우리 곁에 매달려 우리의 목숨을, 우리의 삶을 호심탐탐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건대 괴물은 여전히 남아있다. 집채 같은 몸집에 끔찍한 모습을 한 괴수는 분명 아니다. 그것은 숨어서 보이지 않는 ‘괴물’이다. 독극물을 뿌려 괴물을 만들어내고, 매스컴을 조종하고, 언로를 차단하고, 부정부패를 만들고, 돈 때문에 양심을 팔아넘기게 만드는 것,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은 사람을 억압하는 모든 것이 그 괴물이다. 그 괴물의 이름을 ‘시스템’이라 부를 수 있겠다.

시스템이라는 괴물의 다른 이름은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이다. 자본주의 이전에 사람을 억압하는 가령 봉건신분제 같은 구조가 있었지 않은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부조리를 만들고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폭력 구조는 근대와 함께 시작한 자본주의라는 이름과 함께 시작되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시작한 자본주의는 지금의 괴물, 시스템을 만든 토대인 것이다. 이 시스템은 누가 만드는 것인가. 그것은 영화 <모노폴리>에서 존이 말한 ‘1%클럽’에서 만드는 것이다. 서민층을 무릎 꿇고 쓰러지지 않게 하는 ‘희망’이라는 장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 1%클럽이다. 그 장치로 인해 계속되는 민중들의 착취가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지만 자본주의가 인류의 삶을 편안하게 해주고 발전하게 한 것이 아닌가. 나쁜 것은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천민자본주의가 아닌가. 그것은 아닌 것 같다. 물질 중심의 천민자본주의 자체가 자본주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의 이름이다.

 

FTA라는 괴물

자본주의가 새로운 옷을 입고 나타난 것이 신자유주의이다.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세련된 탈을 썼다고 해도 괴물은 괴물이다. 그 괴물의 졸개, 아니 행동대장격인 괴물이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FTA이다. 이 FTA 역시 괴물이면서 막 출몰하려는 무시무시하고 흉폭한 성질을 가진 놈이다.

FTA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무서운 괴물이라는 것인가. 영어약자로 이름을 삼아서 자신의 모습을 어름하게 감춘 FTA의 본래이름은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이다. 쉽게 말하면 두 나라 사이의 모든 무역장벽을 제거시키는 협정인 것이다. 보호무역을 없애고 두 나라사이에 자유무역을 하자는 목적이다. WTO(World Trade Organization, 세계 무역 기구)가 다자간 무역 협상장인 관계로 협상체결이 쉽지 않은 문제 때문에 태어난 것이 FTA이다. 여러 나라가 함께 무역 협상할 것이 아니라 두 나라가 자유롭게 무역협정을 맺을 수 있는 통로로 만들어 졌다. 이것은 단순한 무역협정이 아니라 경제활동의 모든 영역을 이윤 추구의 대상으로 여기는 포괄적인 경제통합 협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논의 중인 한미FTA는 공산품, 농산물 뿐 아니라 의료, 교육을 포함한 모든 공공서비스를 개방할 방침이라고 한다.

한미FTA는 노무현 정부가 미국에 먼저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 미국 측에서는 한국경제에서 크게 이득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미지근한 태도였던 터라 몸이 달은 정부는 4대 선결조건이라는 카드를 내밀었다. 4대 선결조건이란 소고기 수입재개, 스크린쿼터 철폐, 자동차 배기가스 규제완화, 의약품 가격인하 조치완화를 말한다. 정부는 언뜻 봐도 우리나라에 불리한 이 4대 선결조건을 빌미로 미국을 유혹했고 미국은 걸려들었다.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이 한미FTA로 인해 완성에 다다르게 되었다. 노무현 정부가 원하는 것은 대한민국이 동북아에서 경제․군사면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것을 얻기 위해 미국에 속박될 수밖에 없는 이 협정을 진행한 것이다. 이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따져보기 이전에 이 한미FTA가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미국과 FTA를 체결하지 않은 다른 나라를 보자.

우리나라와 경제규모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스위스는 먹거리에 관한 원산지 표시,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유전자변형농산물)표시 등 먹거리에 대한 안정성이 문제가 되어 국민투표로 인해 FTA체결이 거부되었다. 일본의 경우는 농업부문에 관해서 포기를 못해 아직 FTA를 검토 중이다. 한 일본의 여류 경제학자는 PD수첩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미FTA는 불가피하게 일본이 미국과 FTA를 체결해야 할 경우 어떻게 협상해야 하는 지에 대한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FTA가 나라의 경제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 온다면 이들 나라가 왜 진작 FTA를 체결하지 않았을 것인가.

우리나라가 미국과 체결하고자하는 FTA의 기본 협정안을 보면 이 협정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지 알 수 있다. 1. FTA의 협의 사항은 각국의 국내법보다 상위법으로 인정한다. 2. FTA의 협의 결과는 최소 20년 동안 재협상할 수 없다. 3. FTA의 협의 사항이 아닌 품목은 무조건 개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4. FTA의 협상과정의 세부내용은 어느 한 나라가 원하면 3년간 공개하지 않는다. 5. FTA의 최종합의문은 협상 즉시 공개한다. 이 다섯 가지가 한미FTA 기본 조항이다. FTA가 한 번 체결되고 나면 1번 조항에 의해서 자국민을 보호하는 국내법은 무시되게 되고 그것의 폐해에 대해 뒤늦게 알게 되더라고 2번 조항으로 인해 고칠 수조차 없어진다. 20년이면 나라가 망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 밖에 독소조항도 있다. 내국민대우 원칙, 의무이행강제의 금지 등이 그것이다. 내국민대우 원칙은 계약을 체결한 상대국 국가의 투자자에게 자국 투자자와 동일한 대우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정부가 사회․경제적 필요에 따라 국내 산업에만 차별적으로 적용하는 보호정책들을 철폐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의무이행강제의 금지는 상대국 투자자가 사업체를 창설․취득․확장․경영․관리 운용할 때 어떤 의무나 약속을 강제로 이행하게 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국내 기업을 인수한 외국 투자자는 고용승계 의무, 내국인 일정 비율 의무, 노동기본권 보장, 환경기준의 준수 의무 등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또한 경로우대제도 등 사회복지 차원에서 규정한 의무사항들도 지킬 필요가 없게 된다. 한마디로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말이다. 이 둘은 대 정부 제소권이 인정된다는 것을 뜻한다. 미국의 투자자는 우리나라 정부의 보호정책으로 인해 어떠한 피해가 있을 경우에 대한민국 정부에 대해 국제재판에 제소할 수 있게 된다. 이의 한 예로 캐나다의 사례가 있다. 캐나다의 우체국은 지금 미국의 다국적기업인 UPS(United Parcel Service, 운송회사)에 의해 제소당한 상태이다. 미국의 다국적기업을 상대로 재판을 이긴 정부는 거의 없어 캐나다는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어야 하고 캐나다 우체국은 사라지게 될 것 분명하다. 우리나라 우체국도 마찬가지 과정을 밟을 것이라는 것은 안 봐도 DVD이다.

이러한 실체를 가지고 있는 한미FTA가 체결되고 나면 사회․경제․환경 전반에서 큰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멕시코처럼 농민은 땅을 떠날 것이고, 생태계는 철저히 파괴될 것이다. 공기업은 사기업화 되고, 노동권의 유연화로 비정규직은 더욱 늘어날 것이고, 취업은 꿈같은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양극화는 최대치가 될 것이다. 미국과 NAFTA(North American FTA)를 체결한 멕시코의 현재 상황이 대한민국의 미래의 모습이 될 지도 모르는 것이다. 멕시코 사회보험청이 집계한 2004년 최상위 5분위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4만908페소(약 350만원)로, 최하 1분위 가구의 1912페소(16만원)와 20배 이상 차이가 난다. 이러한 양극화로 어린이 노숙자만 10만 명이 이른다고 한다. 멕시코는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나라의 상황을 살펴보자. 미국과 의료부문까지 통합한 칠레는 양극화가 심해짐에 따라 부유한 사람은 개인보험에 가입하고 개인 주치의를 고용해 효과적인 의료서비스를 받지만 가난한 사람은 팔이 부러져 병원에 가도 3일을 기다려서야 깁스를 할 수 있다고 한다. 미국기업에 상수도를 매각한 볼리비아의 상황은 어떤가. 물 값이 보통 노동자 임금의 20%까지 올라서 집에서 아이가 혹시 물을 사용할까 걱정되어서 수도꼭지에 자물쇠를 잠그고 다닌다고 한다. 거짓말 같지만 엄연한 사실이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한미FTA 역시 공공서비스부문에 상․하수도, 전기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니 몇 년 뒤에 우리는 빗물을 받아쓰고 촛불을 켜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공공서비스 조항의 아래에 있는 교육은 어떻게 될까. 노무현 정부는 한미FTA를 추진하기 전부터도 교육 개방이 세계적 대세라고 주장해 왔던 터이다. 2003년 WTO에 교육 개방 양허안을 제출한 나라 8개국 중 당당히 대한민국이 끼어있다.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다. 나머지 교육 개방에 적극적인 나라는 호주나 뉴질랜드 같은 영어 수출국 일부이다. 노무현 정부가 내세우는 교육 개방의 논리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교육개방을 통해 외국의 우수한 교육기관을 유치해 외국 학교와 국내 학교들이 경쟁하게 함으로써 한국 교육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것이고, 둘째는 미국 유학생이 8만 5천여 명인 현실을 감안할 때 유학 수요를 흡수해 외화 유출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럴싸한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우선, 하버드나 예일 같은 미국 유수의 대학이 한국에 분교를 세워 자신들의 졸업장을 나눠줄 가능성을 거의 없다. 게다가 유학의 주된 목표가 미국 명문 대학의 졸업장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알아주지도 않을 분교 졸업장에 만족할 한국 학생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 들어올 교육기관들의 거의 대다수는 돈벌이가 목적인 영리 대학들일 것이다. 이들은 어학이나 교양과정만 한국에서 운영하고 전공수업은 미국에서 함으로써, 미국의 본교로 한국 유학생을 유치하는 구실을 주로 해 유학도 줄 지 않을 것이다. 그 다음 교육 경쟁력 강화에 대해 생각해 보자. 교육 경쟁력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아마 그것은 더 좋은 교육 환경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는 것을 뜻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미국식 대학 경쟁 체제와 한국 대학의 ‘미국대학 따라하기’경쟁은 학생들의 교육 환경 개선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그것은 대학의 자산 불리기 경쟁일 뿐인 것이다. 결국 정부에서 말하는 교육 경쟁력 강화는 등록금 인상을 말하는 것이다. 참고로 하버드대학교의 자산은 2004년까지 226억 달러(약 22조원)자산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이화여대는 2004년까지 5천7백38억 원의 자산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경쟁력이고 미국을 따라가려면 등록금이 얼마나 더 올라야 될 것인가. 이 상황에서 대학들이 자산을 학생들을 위해 투자하리라고 생각하면 너무 순진한 생각이 아닐까. 자산의 1~2%만 투자해도 학생들이 등록금을 내지 않고 학교를 다닐 수 있는데 말이다.

이 교육개방의 문제는 대학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나도 얼마 전에 안 것이지만 자립형사립고인 민족사관학교는 1년 등록금이 천만 원을 넘는다고 한다. 또 송도 경제자유구역에 국제학교라는 이름으로 1년 등록금이 2천만 원으로 예상되는 초․중․고등학교가 2008년에 개교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것도 모자라서 현재 한나라당은 자립형 사립고 확대를 요구하고 정부는 이를 수용할 태도이다. 한미FTA가 체결되면 이런 빈부 차별 교육이 초․중등교육에서 한층 강화될 것이다. 정부에서는 초․중등교육은 한미FTA에서 협상대상이 아니라고 하지만 정부의 공식입장은 FTA협상과 별도로 국가 경쟁력 강화차원에서 신자유주의적 교육 개편을 추진할 것이라는 것이다. 한미FTA가 체결된다면 정부의 신자유주의 교육 정책은 가속화 될 것이다. 그 결과 국립대는 법인화되고, 중등교육기관 역시 법인화의 길을 걸을 것이며 정부의 교육 지원금은 축소되면서 등록금은 천정부지로 솟게 될 것이다. 교육 역시 양극화를 피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교사 입장 역시 교원 평가제를 통한 성과급제가 적용되어 정부의 교사 봉급 지원이 줄게 될 것이고, 교사는 ‘수요자’가 원하는 지식을 ‘공급’할 수밖에 없게 되어 학교는 ‘학원’이 될 것이다. 어떻게 보아도 교육 경쟁력이 강화가 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괴물에 맞서는 우리의 자세

이러한 괴물 같은, 아니 시스템이라는 괴물의 졸개이자 충실한 행동대장인 괴물 FTA은 어째서 우리 정부는 추진하는 것인가. 손해만 보는 장사가 아닌가. 사실대로 말하면 마냥 손해만 보는 것이 아니다. 무슨 이득이 있으니까 한미FTA를 추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문제는 그것이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의 것이 ‘절대’ 아니라는 점이긴 하지만 말이다. 괴물을 조정하는 것은 앞에서 ‘1%클럽’이라고 비유한 다국적 기업들이다. 미국에만 다국적 기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삼성, 현대, LG가 우리나라의 대표적 다국적 기업이고 한미FTA가 체결된다면 많은 이득을 보는 이들이다. 이들 역시 미국의 다국적 기업이 하고 있는 것처럼 칠레, 베트남 등지의 나라에서 민중 착취로 인한 이득을 보고 있다. 즉 FTA는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와 하든지 간에 양극화를 가속시키고, 민중을 착취하고 죽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미FTA가 체결되면 미국의 민중들도 마찬가지로 고통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결국 이득을 취하는 것은 다국적 기업인 것이다.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다음 정권을 포기하면서까지 한미FTA를 추진하고 있다. 그것은 FTA가 체결되더라도 그들 자신들은 삼성으로 대표되는 다국적 기업으로부터 얻는 막대한 이득이 있다는 말이다. 사회 지배층은 양극화가 진행되더라도 자신들이 얻는 몫으로 충분히 양질의 서비스를 받으며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민중들은 언제 우리의 목숨을 하루끼니로 잡아먹을지 모르는 괴물과 함께 살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적어도 그 괴물에 저항을 해서 우리의 목숨과 삶터를 지켜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 당면한 FTA라는 괴물과 시스템이라는 우두머리격인 괴물을 상대할 수밖에 없다.

앞서 한미FTA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심각하게 생각되지만 앞서 말한 것은 한미FTA의 일부일 뿐이다. 먹거리의 안정성, 의료부문, 통신(휴대폰, 인터넷 등)을 비롯한 각종 공공서비스 부분을 따지고 든다면 문제는 더욱더 심각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한미FTA에 대처해야 할 것인가. 정부는 지금 미국과 한창 FTA를 협상 중이다. 하지만 그 협상은 비공개로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고, 무척이나 급하게 진행하고 있다. 국민들이 FTA의 진상을 파악하기도 전에 타결할 것 같이 종종걸음치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한미FTA가 진행되고 있는지 세부적인 내용은 알 수 있는 도리가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되도록 많은 국민이 FTA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국민의 반수 정도는 FTA를 찬성한다고 한다. 국정홍보처의 FTA 미화 광고가 효과를 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도 그랬듯이 FTA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 지 못한 어름한 상태에서 그러한 광고를 보면 혹 할 수 있고, 우리가 살 길은 무조건 FTA 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FTA의 진면목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라. 나에게 돌아올 직접적인 피해를 알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는 있지만, 무턱대고 찬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FTA라는 괴물의 실체를 알려야 한다.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주변 사람들과 FTA에 대해 이야기해 보거나 들려주어야 한다. 그런 다음 한미FTA에 대해 반대 목소리가 더욱 커질 때, 대다수 국민들이 FTA를 반대할 때, 뭉쳐진 민중의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은 효순이․미순이 촛불시위 때처럼 가두시위의 모습이 될 것이다. 서명운동도 빼 놓을 수 없다.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보아야 한다. 정부가 비밀리에 FTA를 추진하고 있는 행태를 봐서 지금 민중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부가 애써 듣지 않으려하는 민중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려주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 바쁜 걸음으로 진행 중인 한미FTA의 발걸음을 늦출 수 있고 결국 뒷걸음질 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더욱 근본적인 우두머리 괴물인 시스템이 남아 있다. 자본주의라는 담론은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뿌리박혀서 어디서부터 그것이 우리를 조종하는 시스템인지 모를 지경이다. 나 역시 사실 소비지향적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의 진짜 모습은 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좀 먹는 괴물이다. 이러한 인식이 먼저 있어야 하겠다. 그러고 나서 대안을 찾아야 한다. 기존의 시스템에 저항하고 새로운 길을 찾는 생각을 흔히 부르는 말로 ‘진보’라고 한다. 반면 시스템을 고수하고 가지고 있는 지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을 ‘보수’라고 한다. 우리는 보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바로 지배층이 원하는 바다. 지배층에게 그들의 더 큰 이득을 위해 이용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진보를 따라서도 안 될 것이다. 진보라고 하는 흔한 모습들 중 하나는 그들이 지배층이 되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이미 진보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 올바른 눈을 가져야 한다. 착하기는 쉽지만 올바르기는 어려운 일이다. 착하다고 칭찬을 듣는 것은 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쳇바퀴를 잘 돌고 있다는 칭찬에 다름 아니다. 곧 착한 것이 전부 올바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 세상을 올바로 보고 삶을 올곧게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소설가 장정일은 책을 무척 많이 읽는다고 하는데 이유는 나쁜 시민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렇듯 우리는 올바른 눈을 가지는 노력을 해야 하고 그것을 가지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단 그 태도가 흑백논리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이분법적인 닫힌 생각은 의미가 없다. 올바른 삶을 살기위해서는 눈과 귀와 입, 그리고 마음까지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런 다음 진보든 보수든 시스템이든 자기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생각해 볼 자본주의라는 괴물에 맞서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 역시 앞서와 마찬가지로 민중들에게서 찾아야 한다. 봉준호 감독은 <괴물>을 괴물과 싸운 그 가족들에게 바치는 영화라고 하였다. 그 가족의 모습은 어떠한가. 한강변에 조그만 매점을 가진 가족. 우리 민중과 다름 아닌 모습이 아닌가. 그리고 그 괴물을 물리치는 것은 누구도 아닌 모두 가족의 힘이 아니었던가. 괴물에 맞서 같이 싸운 이름 없는 노숙자 역시 지금 민중의 한 모습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강두 가족으로 대표되는 민중들의 힘으로 시스템을 쓰러 뜨려야 한다. 시스템이라는 괴물에 맞서 싸울 방법은 현재 시스템을 속에서 찾을 수 없다. 그럼 그 대안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 대안에 대해서는 저마다 많은 생각이 있을 것이다. 모자라지만 거기에다가 나의 의견을 보태자면, 나는 그것을 ‘촌락공동체’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표방한 세계화에 맞서는 지역주의이다. 농업을 밑거름으로 하는 새로운 삶터를 만드는 방법이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삶터가 아니다. 원래 우리 겨레의 삶이 살아 숨 쉬는 곳이었다. 모든 문화, 놀이, 일들이 피어났던 곳은 바로 촌락이었다. 그것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삶이 풀뿌리에서 시작되어 풀뿌리에서 끝나야 한다. 땅을 파헤치고 콘크리트로 뒤덮는 발전과 개발, 그리고 단절이 아니라 땅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소통하는 삶터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꼭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길다면 길게 영화 <괴물>을 통해서 시스템이라는 진정한 괴물과 현재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는 한미FTA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이러한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저마다 스스로 가진 올바른 눈이 가장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우리 모두 당장에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몇 십 년이 걸릴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삶을 보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근본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을 읽을 많은 선배님, 동기들, 후배님들이 예비 선생님이라서 희망적이다. 학생들에게 세상을 올바로 보는 눈을 키워 주고 그들 스스로의 삶을 소중히 여기게 만들어 줄 수 있기에. 민들레를 닮을 수 있는 선생님이 될 사람들이기에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재미있지도 않은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는 것이 적어, 쓸 말이 많고 글이 어지럽습니다. 따꼼한 질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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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길구나. 그 때는 많은 사람들이 FTA가 뭔지도 몰랐을 때인데, 미친소촛불집회 이후 지금은 식상도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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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內 달밤>

山內 흰 길을 돋구는

달에

白山 흙담이 옹긋웃긋하다.

 

月이

달이니

너의 달인 줄을 안다.

 

나의 달이

어느 마당에 눌어붙어 들리는 건

너의 숨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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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인데>

내 어깨죽지에

깃은,

움트지도 못 한 채

썩었다.

 

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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