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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4/07
    일제고사 거부 서명 교사 형사처벌 검토 중
    Nim Cruz
  2. 2009/03/31
    어떻게 지내느냐는 친구의 말에.(2)
    Nim Cruz
  3. 2009/03/27
    사랑하면 서로 닮는다.(3)
    Nim Cruz
  4. 2009/03/27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2)
    Nim Cruz
  5. 2009/03/23
    [홍세화칼럼] 보잘것 없는 사회
    Nim Cruz
  6. 2009/03/20
    신문을 보면,(1)
    Nim Cruz

일제고사 거부 서명 교사 형사처벌 검토 중

오늘 경향 신문을 보니

 

울산에서 일제고사 거부 서명 교사를 형사처벌하려고 벼러고 있단다.

 

1300여명의 교사가 일제고사 거부 서명을 했다는데-숫자가 많이 부풀려진 느낌이 있다- 이에 대해 공무원법을 적용해 단체행동금지에 관한 조항을 어긴 죄목이다.

 

며칠전 신문에는 서울시 교육청에서 직속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한 걸 따져서 징계를 할 방침이라고 한다.

 

곧 일제고사를 거부한 교사에게 물을 수 있는 죄는

 

ㄱ. 직속상관의 명령에 불복종

ㄴ. 단체행동 금지의 위반

 

이다. 공무원은 단결권, 단체교섭권 이 노동 2권만이 보장된다.

 

이제 교사들은 근본적으로

 

ㄷ. 양심에 의해 명령에 불복종할 자유

ㄹ. 단체행동권

ㅁ. 교육과정과 수업에 교사의 온전한 자율권

 

을 국가 혹은 교육청을 상대로 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런 요구를 하려면 거부를 위한 거부 즉 단체행동을 통한 것이어야 한다.

 

위 ㄱ, ㄴ을 교사 스스로가 인정하면, 당연히 그들은 처벌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지방교육청 즉 직속상관이 일제고사는 무조건적으로 치뤄야 한다고 명령이 하달된 상태에서 거부를 한 것이고, 그들의 일제고사 거부는 단체행동에 준하여 국가의 정상적 상태에 심대한 위기를 끼칠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일제고사는 나쁜 것이야. 그래서 나는 거부해. 나라에서 설마 옳은 일을 하는 자에게 칼을 꽂겠어?' 이렇게 순진하다면-국가에 대항하기에는- 그냥 잘리는 수 밖에 없다.

 

아니. 그냥 잘라서 TO나 늘려다오. 교정징계는 아니된다. 배제징계를 내려다오. 위대한 국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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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내느냐는 친구의 말에.

 

무지개님(http://blog.naver.com/tensiyun)의 그림을 펐다.

 

-패러디 되긴 했지만-그랜져 광고다. 예전부터 보였는데 아직까지도 이걸로 선전되고 있다.

 

만약 내 친구가 저 지랄을 한다면,

 

나는 "넌 이제 내 친구 아냐! 개장간장국간장아!"라고 외쳐 버릴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광고는 어쩌면 현존 사회 이데올로기의 친숙함과 신선함에 의탁한 유목적적 표현일텐데, 다시 말해 우리나라에서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의 의식을 반영한 산물일텐데, 이 광고를 보면 너무 슬프다.

 

나와 너의 한 모습.

 

'세바퀴'에서 본 건데, 우리나라 20, 30대 여성이 바라는 최고 조건은 "돈"이란다. 그 현실.

바라지는 않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현실.

 

우리의 모습이다.

 

어제 본 '얍! 활력천국 시즌2'에서 본 남해군 남면 홍현마을의 한 할아버지의 멘트.

"지금은 돈세상인데. 나는 돈이 없어 활동을 못 한다."



아무래도 그림을 퍼온 무지개님의 멘트가 마음에 걸린다.

 

"아직도 차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대변한다는 조금은 유치한...ㅋㅋㅋ"

 

그리고 댓글 중에

 

"아직까지도 차가 사회적 지위와 자존심을 나타낸다는 분위기를 조장하는 광고죠. ㅎㅎ"

 

내 생각에는 이 광고는 조장하는 것도 아니고 유치한 것도 아니다.

 

조장하다는 것은 네이버 국어사전에

[명사]도와서 자라게 . 주로 부정적인 의미쓴다.

로 나온다.

 

조장하는 광고는 공익광고이다. "흡연은 죽을 죄입니다!" 이런 식.

 

하지만 상품광고는 다르다.

상품광고는 내밀한 욕망을 집어내어 펼쳐 보여 주면서 상품을 사면 그것이 실현되리라는 기대를 심어준다. 그 내밀한 욕망이 의식하기 어려운 것일수록 광고는 더욱 참신함을 갖추게 된다. 그 욕망을 꼭 집어내어 상품과 연결시키는 작업으로 인해 욕망이 드러나기 때문에 조장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욕망은 광고를 통해 면죄부를 부여받는다. 이 부풀어진 욕망이 지갑을 열게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서울우유였던가? 미스유가 나오는 광고가 있다. 두 개가 제작되었는데, 하나는 학생보다 키작은 선생이 나오고, 또 하나는 동창보다 늙어 보이는 아줌마가 나온다. 키 크고 싶다는 열망, 젊고 예쁘게 보이고 싶다는 바람이 이 특정한 상표의 우유로 인해 충족되라는 내용이다. 이런 두 가지의 욕망이 여기서 조장되는 것은 아니며, 단지 그런 욕망이 보편적인 것임을 확인하는 동시에 긍정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광고가 욕망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꼬집어 내어 상품과 연결하는 것일 뿐이며, 그 내밀한 욕망은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진 것이어야 한다. 몇몇만 특수하게 가진 욕망으로는 당연히 돈벌이가 안 될 것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한 사회의 일반적이고 내밀한 욕망을 광고를 통해 확인할 수가 있다.

 

위 그랜져 광고에 이러한 확인 작업을 해 보면,

 

친구가 안부를 즉 현재 상태를 물어봤는데 다른 친구는 그랜져로 '삐빅'거린다. 현재 상태가 그랜져라는 것이다. 자신의 현재 상태는 '애가 인제 갓 말을 하기 시작하는데, 아빠라는 소리가 너무 듣기 좋고, 아내 생일을 까먹어서 집안이 아직 저기압이고, 이것 때문에 이런 고민이 있고, 저것 때문에 저런 생각이 든다." 따위가 아니라, "삐빅"이라는 것이다. 즉 나의 상태는 이 그랜져가 말해준다는 선언이다.

 

이제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것은 소유하고 있는 재화의 양과 질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치한 것이 아니라 무서운 것이다. 이제 우리는 소유하고 있는 물건의 목록을 적은 종이를 유대하고 하고 다니다가 자기를 소개할 때 그 종이를 척!하고 보여주면 되는 세상이다.

 

이것은 단순히 "차가 사회적지위를 나타내주는 지표에요."를 넘어서는 일이다. 이미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욕망-소유로서의 자기소개-은 돈많은 몇몇, 혹은 특수사회의 것이 아니라 보통의 일반적인 욕망이다. 점심먹고 스타벅스 테이크아웃컵을 자랑삼아 들고 다니는 20, 30대의 커리어우먼층, 혹은 그런 모습을 열망하는 일부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과 관련하여 심각하게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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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서로 닮는다.

사랑하면 서로 닮는다.

 

사실인 것 같다.

 

부부는 서로 닮는다.

 

연인도 서로 닮는다.

 

새를 사랑하면 새를 닮는다.

 

나무를 사랑하면 나무를 닮는다.

 

물을 사랑하면 물을 닮고, 산을 사랑하면 산을 닮는다.

 

부모를 아이들은 닮는다.

 

선생님을 학생들은 닮는다.

 

허나 요샌 학생들은 선생님을 닮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이 어쩌면 잘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돌이켜... 어쩌면 닮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분명 학생들은 온라인 게임을 닮는다.

 

돈을 사랑하면 돈을 닮는다.

 

기계를 사랑하면 기계를 닮는다.

 

권력을 사랑하면 스스로 권력이 되고자하고, 무력을 사랑하면 무력을 행사한다.

 

존레논은 평화를 사랑한 것 같다.

 

나는 고양이를 사랑하는 것 같다. 성질이 비슷하다.

 

외모도 고 멋진 고양이를 닮고 싶은데, 더 사랑해야 되지 싶다.

.

.

.

 

사람다운 사람은 사랑을 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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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복수를 부른다.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는 말 말이야.

 

사실은-너한테만 특별히 알려줄께. 누구나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니까. 또한 누구나 알아야 하는 것이야.-

 

원래 '죄악은 복수를 부른다.'야. 놀랍지 않니?

 

이 말이 언제 어떻게-한 단어만이- 바뀌었는지는 나도 잘 몰라.

여기에 어원적 설명이나, 고문서의 주석에 참조해서 설명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는 말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야.

자. 이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지.

바로 내가 수모를 당해도 그것에 대한 복수는 하지 말라는 것이지. 왜냐면 그 악순환은 영원할 테니까.

 

여기에 헛점이 있어. 처음 내가 당한 수모는 그럼 누가 갚아주지?

하느님? 예수님? 부처님? 그 분들은 참으라고 하지. 왜? 그래야 천국에 갈 수 있고,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영원한 평안을 얻는다고 그 분들은 하실 거야. 한낱 내 설움은 그 분들의 위대한 말씀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것이니까. 그 자비로운 분들은 나쁜 놈을 용서할 것이고 그 나쁜 짓은 실제에서는 소멸하게 되지.

 

우리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먼 옛날 고대에서 복수는 아주 신성한 권리였어. 누구나 복수를 하려는 자에게 참견을 하지 못 했어. 중세까지도 이런 면이 조금은 있었지. 옛날 유행한 코메디 레퍼토리처럼 '아버지의 원수! 받아라! 죽어!' , '챙챙챙-' 이렇게.

 

하지만 어느 순간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는 말이 나타나면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는 아이에게 스승이 나타나선 '그래서는 안 된다. 얘야.'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어.

 

처음으로 돌아가서 원래 '죄악은 복수를 부른다.'는 말이 있었어.

그때 의미는 '네가 남에게 눈물을 흘리게 할 짓을 하면 너도 똑같이 받을 거야. 그러니 너는 나쁜 짓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 한단다.' 이런 것이었어. 아버지가 철 없는 아들에게 성년이 되기 전에 꼭 해줘야 하는 말이었을 거야. 그래서 성년이 된 아들은 남에게 나쁜 짓하기를 두려워하게 되었지.

 

하지만 어느 순간에 나쁜 짓하는 놈들이 나타났어. 남의 것을 빼앗고 죽이고 노예로 만들면 몸이 편하다는 사악한 생각을 가진 자들이었어. 실제로 해보니 그렇게 어렵지가 않고, 자기들 생각대로 되는 거야. 하지만 그 놈들은 한 가지 께름칙한 것이 있었어. 바로 '복수'야. 자기는 남에게 나쁜 짓을 해서 잘 먹고 잘 살는데, 그 당한 놈들이 자기들에게 복수를 하지 않기를 바랬어. 수모를 당한 놈이 바보이고, 약한 놈이고 착한 놈이게 만들어야 했지. 그 착한 놈들이 길길이 날뛰어 자신들에게 복수를 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꾀를 냈어. 그들은 잔머리가 좋아. 예나 지금이나.

 

말을 교묘히 바꾸어 퍼뜨린거야.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고

 

이게 바로 '죄악은 복수를 부른다.'가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가 된 비밀이야.

 

그리고 그 나쁜 놈들은 종교 지도자들과 결탁을 했어. 종교 지도자들도 그들과 입장이 비슷했기 때문에 흥쾌히 수락을 했지. 왜냐면 그 종교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선구자 혹은 스승은 있을 수 있으나, 지도자 혹은 대장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들은 사람들을 속여 지도자가 되어 존경과 부를 가지게 되었는데, 누구 하나가 그것을 간파하여 언젠가 그들을 끌어내릴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죄악은 복수를 부른다.'는 말을 쓰는 놈을 죽이고, 그 말이 적힌 책은 태워버리거나 말을 고쳐 다시 기록했지. 그래서 지금은 우리는 '복수'라는 말은 부정적인 것으로, 해서는 안 되는 바보같은 행동, 그것을 하는 사람은 잔인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었지. 누구도 의심없이.

 

그 나쁜 놈들은 아직도 나쁜 짓을 스스럼없이 하면서 복수를 하지 말라고 하고 있어. 참으라고 말이지. 참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결국 당하는 놈들이 이기는 것이라고. 당한 수모를 참아서 이긴 것이라고 스스로 자위하면서 그 고통을 감내하고 있지. 옆구리에서 피가 질질 흘러내리는데 말야.

 

그래서 나쁜 짓을 하는 놈들이 더 잘 살게 되고, 더 많아지고, 누구나 먼저 나쁜 짓을 해서 성공하려고 하는거야. 당한 놈은 참아야 하니까.

 

그런데 참다 참다 못 참는 미친, 복수는 나쁜 것이라고 말을 해도 알아 듣지 못 하는 바보같은 놈이 나타날 때도 있단 말야. 오랜 세월에 간혹 하나씩. 그래서 또 잔머리를 굴릴 수 밖에 없었어. 그들은 '법'이란 걸 만들어 내었어. 원래에도 법은 있었지만 이전 법과 그들이 만든 법은 성격이 다른 것이었지.

 

이전의 법은 간단하고 명료했지. 그것의 목적은 함께 살기 위한 것이었어. 우리 마을에서 이 짓을 하면 쫓겨나거나 벌을 받는다. 복수를 받을 것이다. 이런 개념이었어. 말하자면 무엇이 나쁜 짓인지 적어놓은 것이었지. 나쁜 짓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런데 나쁜 짓을 하는 놈들은 법을 새로 만들면서 착한 놈들의 행동과 사고 하나하나를 조종하려는 법을 만든거야. 그리고 복수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것이었지.

 

그래서 간혹 가다 나타나는 복수의 화신은 더욱 복수가 어렵게 되었어. 새로 만든 법이 있기 이전에는 복수 이후 어리석음의 표본이 되게 되어 버릴 자신의 평판만 신경쓰면 되었는데, 새로운 법 이후에는 법을 지키려는 선량한 다른 착한 이웃들까지 그를 막아 세우는 상황이 된 거야. 복수를 하려면 이웃까지 베어야 했는데 차마 그정도까지 미친 놈은 없었어. 그래서 복수의 화신조차 참아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어. 단어 하나가 바뀐 후부터 지금까지 쭉-.

 

여기까지가 네가 알아서는 안 되는, 그러나 알아야 되는 비밀이야.

 

너는 복수라는 말을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니?

어리석음? 무지몽매? 잔인함? 허무? 감방?

 

복수를 허용하면 정말 세상은 흉폭하고 차마 인간이 살지 못하는 세상이 될 것 같지?

 

하지만 말야. 복수를 허용하면 우리 할아버지의 할어버지에다 더 위의 할아버지들이 사셨던, 나라가 있기 전의 평화로운 세상이 될 거야. 모두가 남의 눈에 눈물이 나게 하는 짓은 두려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말야. 그러면 우리는 그런 곳에 살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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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칼럼] 보잘것 없는 사회

마름이 자유인을 심판하는 것도 보잘것없는 사회의 한 단면이겠다.

 

지난주 교원소청심사위원회는 학생들에게 일제고사 대신 체험학습을 허락했다는 이유로 파면, 해임된 일곱 교사 중 파면된 세 교사만 해임으로 바꾸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정치적 결정을 내렸다. 국방부는 이명박 정권의 반동적 성격을 스스로 드러낸 불온서적 목록지정에 맞서 헌법소원을 냈던 두 법무관을 파면했다. 분단 이래, 아니 일제 강점기 이래 “나서지 마, 다쳐!”는 난세를 살아남는 요령이면서 사회귀족으로 출세하기 위한 일차적 조건이다.

 

 불의를 보더라도 눈을 질끈 감아라.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고 나아가 출셋길도 열린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설령 옳다고 믿더라도 행동에 나서지 마라. 나서 봤자 나만 손해라는 점, 이 땅의 역사는 충분히 가르쳐주었다. 이젠 젊은이들도 이를 체득한 듯 불의에는 아예 분노하지 않으며 불이익에도 더 큰 불이익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확신이 서야만 분노한다.

 

서민의 삶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음에도 이명박 정부가 부자 감세의 외길을 갈 때, 대학생들이 한나라당의 대학등록금 반값 공약을 지키라는 당연한 요구에도 나서지 않는 첫째 이유도 “나서 봤자 나만 손해”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명박 정권의 반동 시기가 과거 박정희, 전두환 권위주의 독재시절과 다른 점 중 하나는 일상적 고문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지금도 나섰다간 체포, 구속되고, 파면, 해임되지만, 그래도 고문은 당하지 않는다. 이 중대한 변화가 있음에도 사람들이 행동에 나서지 않는 것은 ‘나서 봤자 나만 손해’라는 주장이 물신 지배와 함께 강력하게 관철되기 때문이리라.

 

삼성 엑스(X)파일 사건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또 하나의 진실이 있다. 삼성 재벌의 떡값을 받아 챙기는 허접스런 검사일수록 검찰 안에서 삼성이 관리할 필요를 느끼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조직에서 악화들끼리는 유유상종하여 긴밀히 유착하지만 자유인은 외톨이가 되기 쉽다. 검사 이전에 인간으로서 염치가 있어서 떡값을 받지 않는 검사는 삼성이 관리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자리에 머물거나 그 염치 때문에도 신영철 대법관과 달리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

 

사회 변화는 “아니오!”라고 말할 줄 아는 소수의 사람에게 빚지는 법이며 어느 사회에서나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은 소수이기 마련인데, 한국에서는 그 소수조차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오르기 어려운 구조인 것이다.

 

이 보잘것없는 사회에 맞서겠다는 진정한 자유인이 있다면 그에겐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먼저 이 보잘것없는 사회가 인정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는 결코 끼어들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다음, 이 보잘것없는 사회가 인정한 그대의 능력이란 게 당연히 보잘것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자기 성숙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끝없는 자기와의 싸움이 될 것이다. 이번에 파면, 해임된 교사와 법무관이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그래야 하듯.

 

반면에, 이 사회가 인정한 능력을 갖고 있기에 언제라도 이 사회에 안주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과 끊임없이 싸우는 어려운 길을 택하기보다는 그 안에 안주하는 자신을 긍정하려고 이 사회에 대한 시각 또한 비판적이기보다는 긍정하는 쪽으로 기울 수 있다. 이 위태로운 도정에서 진정한 자유인의 의미를 되새김질할 것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이 사회가 조건 지운 보잘것없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홍세화 기획위원hongsh@hani.co.kr

 

 

* 가끔 신기하게도 같은 고민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의 글을 볼 때가 있다.

이럴 땐 반가우면서도 조금 서운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개가 비슷하구나하는 생각도 한다.

* 마름행세를 하는 사람들도 참 많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마름인 줄을 꿈에도 모른다는 것이다.

Das Mans...

* 내 실력증명 노정이 나를 잘근잘근 씹지 말지어다. 허나 잠시는 참아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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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을 보면,

신문을 보면 참 갑갑하면서도,

재미가 있다.

 

특히 만평이.

 

오늘은 불온서적에 대해 헌법을 내세워 비판(?)한 법무관 2명이 파임되었다는 뉴스.

하하하......하. 

 

트라시마코스(Thrasymachos) 아테네의 소피스트다. 그의 말이 옳음이 오늘도 증명된다.

 

"한데 적어도 법률을 제정함에 있어서 각 정권은 자기의 편익을 목적으로 하여서 합니다. 민주정체는 민주적인 법률을, 참주정체는 참주 체제의 법률을,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정치 체제들도 다 이런 식으로 법률을 제정합니다. 일단 법률 제정을 마친 다음에는 이를, 즉 자기들에게 편익이 되는 것을 다스림을 받는 자들에게 올바른 것으로 공표하고는, 이를 위한 하는 자를 범법자 및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른 자로서 처벌하죠. 그러니까 보십시오. 이게 바로 제가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나라에 있어서 동일한 것이, 즉 수립된 정권의 편익이 올바른 것이지요. 확실히 이 정권이 힘을 행사하기에, 바르게 추론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디에서나 올바른 것은 동일한 것으로, 즉 더 강한 자의 편익으로 귀결합니다."

 

허나 이 트라시마코스도 법률이 제정될 때가 아닌 공표된 후, 그것도 민주주의적인 법률 아래에서 최고 법인 헌법이 호도되고, 더 강한 자의 입맛에 맞게 하위 법률이 상위 법률을 업신여기는 상황, 이 대한민국, 그리고 세계의 상황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법의 공정성 모형이 동화童話인 현실.

 

고대 폴리스에서는 짐작 조차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고기가 물 밖을 모르듯이.

시민의 정치는 그들의 삶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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