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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4/07
    쌍추 쌈을 먹다가 한 가족의 탄생기를 듣다
    Nim Cruz
  2. 2009/04/07
    Let it be에 반하는 것, 악의 규정(2)
    Nim Cruz
  3. 2009/04/07
    일제고사 거부 서명 교사 형사처벌 검토 중
    Nim Cruz
  4. 2009/04/06
    도서관의 병폐
    Nim Cruz
  5. 2009/04/06
    국어교육의 기둥 [말에는...]
    Nim Cruz
  6. 2009/04/01
    좌우명(1)
    Nim Cruz
  7. 2009/04/01
    Time Goes By(1)
    Nim Cruz

쌍추 쌈을 먹다가 한 가족의 탄생기를 듣다

몇 주전 논에서 점심을 먹었다.

우리 집은 논에서 먹는 점심은 특히 봄철은 밭에서 나는 여러 종류의 상추와 쑥갓 등의 푸성귀 그리고 된장국이-새끼 손가락만한 멸치가 꼭 두 마리가 들어있다, 이것만 빼면 만족할 만한데- 주된 반찬이다.

 

그날 모자란 일손을 도와주시러 온 나이 많으신 아주머니-우리집과 매우 돈독한, 집은 좀 멀지만 이우지, 일명 형광댁이-께서 쌍추 쌈을 싸시다가 어느 일가족의 탄생기 비슷한 얘기를 들려 주셨다. 아버지께서도 소년시절 때라 알지 못하는 이야기. 나는 이런 얘기를 듣는 것이 엿듣기 비슷한 느낌을 주면서 참 재미가 있다. 그래서 여기에 옮겨 본다. 이야기 중 대화가 여럿 오고 갔지만 그것은 빼고 적는다.

 

"예전에도 참 상추 이걸 많이 먹었는데. 왜 그리 많이 먹었는지 몰라. 늘 상추가 없었으면 밥을 못 먹었으니. 많이도 묵었다아이가 한 소쿠리 가득. 아마 밥이 적어 상추나 풀로 배를 채울라고 많이 먹었지 싶어. 그래서 늘 점심 전에 동네 도랑으로 상추를 씻으러 많이 갔다아이가.

 

상추 씻으러 간 도랑에서 칠성이(가명)엄마 아나? 거기서 칠성이아빠랑 그리 된 기다아이가.

봄에 하루는 칠성이엄마가 상추를 씻으러 갔는데, 저짜저 거기. 야가 없어진기라. 그 집에서 찾으러 가 보이끼네. 도랑에 쌍추소쿠리만 덩거리니 있제, 사람이 없더라아이가. 어째 된 것인고 하니, 칠성이엄마가 도랑에 갔는데 칠성이아빠가 옆에 보리밭으로 델고 들어가서 눌맀붔지. 그라고 칠성이아빠는 일하러 갔부리고. 칠성이엄마는 보리밭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그 안에 한참 들앉아 있었다아이가. 칠성이엄마는 순진해서 수산-20리 정도 떨어진 읍네-이 뭔지도 몰랐어. 나가보다 못 했고. 나도 참 웃겼었지. 그걸 찾을끼라고 돌아댕기고, 보리밭에서 찾아서 뭐했노 물어 봤시. 나도 그때는 젊었을 때니까.

 

그래가꼬 사람들이 찾아냈는데, 좀 있다가 칠성이아빠가 밤에 칠성이엄마를 델꼬 어디로 내뺐버린기라. 그래 있다가 누가 저짜 삼랑진 다리 밑에서 찾았는데, 칠성이엄마가 새벽에 아침도 안 묵고 조개캐러 가는 거를 찾았는 기라. 칠성이아빠는 없고. 그래가꼬 델꼬 왔는데 그때부터 칠성이엄마를 밤마다 다른 데 재운 기라. 돌아가면서. 와 거기 동네 친척들 집에 돌아가면서 밤에는 불서고 장성들이 대문걸에 지키고 있고. 그때 칠성이아빠가 돌아와서는 밤에 돌아 댕기면서 술묵고 나댔거든. 델꼬 온나고, 다 쥑이뿐다꼬. 낫들고. 그래 돌아가면서 징키고 했지. 밤에 잠도 못 자고.

 

와 그래 식구들이 싫어했냐면 칠성이아빠가 그때 가진 것이 없었다아이가. 넘 머슴 살고. 아무 것도 없었지 그래서 싫어했지. 그래 안 했으면 장개도 못 가지. 그때는... 장가 가 볼라꼬 그랜 거지. 그래가꼬 칠성이엄마가 안 되겠다 싶어. 식구들한테 얘기했다아이가. 그냥 갈끼라고. 그래가꼬 우째 살겠노? 그자?

 

이래이래 가지고 둘이 결혼을 했는데, 그예 칠성이아빠가 바람을 핐으니 될끼가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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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 it be에 반하는 것, 악의 규정

악이란 무엇일까?

신학에는 전혀 문외한이라 체계적으로 그것도 정당한 방식으로 규정할 재간이 나에게는 없다.

 

하지만 선, 악의 양면적 모순을 지닌 한 인간으로서

악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데.

 

내가 스스로 생각해 본 악이란,

강요를 통한 폭력과 그것을 행사하는 자이다.

 

이 폭력은 즉 힘의 행사는 신체적 폭력을 포함한다. 나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폭력에는 긍정적인데, 이렇게 보면 악은 행위자체가 아니라 목적과 관계되는 셈이다.

 

그 악이라고 부를만한 목적은 무엇인가? 악은 강요하고 억압하여 순종하게 만들어 자신의 발 아래 타인을 순종하게 하려는 목적이 있다. 그래서 타인에게 행사하는 신체적 폭력도 여기에 포함이 된다.

 

개념에 대한 선명한 느낌을 얻기 위해 반대되는 개념을 생각해 보는 방법이 있다. 그렇다면 선은? 나는 선이 내버려 두는 것이라 생각한다. Let it be-내비 둬-. 스스로 살게 내비두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나는 존레논의 'let it be'와 'imagine'이란 곡을 사랑한다.

 

오늘자 경향신문 일면에 책소개란에 이런 문구가 있다.

'詩聖은 오늘도 말한다. 서민을 배려하라.'

「두보시선」이라는 책을 소개하는 글의 제목이다.

서민에게 최선은 무엇일까? 그냥 내비두는 것이다. 뭘 배려하려고조차 하지 않는 것이 서민을 위한 것이다. 서민은 스스로 살아갈 수 있으며 행복을 영유할 수 있다. 간섭과 수탈만 없으면.

 

우리사회는 그야말로 악 속에서 운행되고 있다. 각종 법률과 세제, 그것을 지탱하는 기구, 학교, 정치, 미디어 그리고 시장. 그것들은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계속 머릿속을 울려된다. 결코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나는 현재 내가 당면한 지상최대의 악은 끝판대장으로 '국가'인 셈이다.

그들은 내버려 두지 않는다. 국가는 사람을 규정하여 시민으로 만들고, 간섭하고 억압하는 대표적인 기구이다. 국가 속에는 자잘한 기구들도 모두 그러한 작용을 돕는다. (규정, 간섭, 강요, 억압 등이 레이지 어겐인스트 더 머신이 말하는 Machine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밴드도 사랑한다.) 이러한 강요를 정당화하기 위해 국가가 국민을 보호한다느니, 복지정책이라느니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낸다. 마치 국가가 없으면 사람이 살 수 없는 것인 것 마냥. 나는 여기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가장 못마땅한 것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태어난 것이 못마땅하다. 그러면 핀란드에서 태어났으면? 그것도 못마땅할 것이다.

 

나는 국가를 전면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데. 어떠한 정치 체제를 갖춘 국가라도, 국가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면 모두 악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속 대의민주주의 국가도 싫다. 직접민주주의 국가도 싫고, 맑시즘에 기초한 사회주의국가나 공산주의 국가도 싫음은 물론이다. 이런 국가를 지지하는 여러 정당도 마찬가지이다. 현실적인 이유에서 진보신당을 지지하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정당정치는 이건 아니다 싶다. 정당은 일단 국가를 긍정하며 권력에서 우위를 독점을 쟁취하기 위한 기구일 뿐이다. 행여 진보정당에서 대통령이 선출되고, 여당이 된다고 하여 국가의 강요와 억압이 없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현실적으로 사회주의 운동가들-맑스를 열심히 읽고 신봉하는- 그리고 그러한 단체들 하는 일들이 올바른 점이 있긴 하지만, 나에게 있어 그러한 운동은 근본적으로 불순하다. 왜냐면 모든 노동자들을 해방시켜려고 하는 취지는 좋아보이나 특정한 사상 즉 맑시즘의 사회주의 국가를 이룩하려는 목적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해방이 가능할 지는 모르나 설령 그것이 실현되는 순간 그들은 사회주의 국가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할 것이 분명하다. 내 생각에 선은 그들이 해방하는 순간 해산해버리거나, 그들끼리 그것을 만들고 싫은 사람은 내버려 두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혁명 혹은 해방 속에 현재 우리나라에 속한 모든 사람을 귀속시키길 원한다는 점은 빤하다.

 

나는 간디가 한 주장에 대해서 혹은 그가 쓴 책을 자세히 읽은 적이 없다. 하지만 꼭 읽어 봐야 겠다는 생각을 기지고 있는데, 언젠가 읽어본 글에서 인용하기를, 간디가 인도는 독립하면 7만의-정확한 숫자가 기억나지 않는다- 마을공동체로 구성되면 좋을 것이라고 했단다. 이 주장이 참 마음에 든다. 그랬다면 인도는 참 선한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말이 많이 길다. 여러 가지로 뻗치는 생각은 행간사이에서  퍼져나가기만 하니 여기서 그만 두어야 겠다.

 

간추리자면 현재 내 짜른 생각으로는,

 

선은 내버려 두는 것이요, 악은 강요하는-모든 강요에는 부당한 목적이 있으니- 것이다.

나는 선하게 살기를 원한다. 그리고 세상사람 모두가 선하게 살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다. 유토피아에는 국가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국민이나 시민이 아니라 마을사람이 될 것이다.

 

 

* 적고나서 보니 이건 완전 이적행위로 규정될 소지가 다분하다. 혹여나 이 글을 읽은 사람은 신고를 말아주길 빈다. 세상이 아무리 흉흉하지만, 인정으로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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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고사 거부 서명 교사 형사처벌 검토 중

오늘 경향 신문을 보니

 

울산에서 일제고사 거부 서명 교사를 형사처벌하려고 벼러고 있단다.

 

1300여명의 교사가 일제고사 거부 서명을 했다는데-숫자가 많이 부풀려진 느낌이 있다- 이에 대해 공무원법을 적용해 단체행동금지에 관한 조항을 어긴 죄목이다.

 

며칠전 신문에는 서울시 교육청에서 직속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한 걸 따져서 징계를 할 방침이라고 한다.

 

곧 일제고사를 거부한 교사에게 물을 수 있는 죄는

 

ㄱ. 직속상관의 명령에 불복종

ㄴ. 단체행동 금지의 위반

 

이다. 공무원은 단결권, 단체교섭권 이 노동 2권만이 보장된다.

 

이제 교사들은 근본적으로

 

ㄷ. 양심에 의해 명령에 불복종할 자유

ㄹ. 단체행동권

ㅁ. 교육과정과 수업에 교사의 온전한 자율권

 

을 국가 혹은 교육청을 상대로 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런 요구를 하려면 거부를 위한 거부 즉 단체행동을 통한 것이어야 한다.

 

위 ㄱ, ㄴ을 교사 스스로가 인정하면, 당연히 그들은 처벌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지방교육청 즉 직속상관이 일제고사는 무조건적으로 치뤄야 한다고 명령이 하달된 상태에서 거부를 한 것이고, 그들의 일제고사 거부는 단체행동에 준하여 국가의 정상적 상태에 심대한 위기를 끼칠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일제고사는 나쁜 것이야. 그래서 나는 거부해. 나라에서 설마 옳은 일을 하는 자에게 칼을 꽂겠어?' 이렇게 순진하다면-국가에 대항하기에는- 그냥 잘리는 수 밖에 없다.

 

아니. 그냥 잘라서 TO나 늘려다오. 교정징계는 아니된다. 배제징계를 내려다오. 위대한 국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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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의 병폐

공부를 하러 도서관에 매일같이 간다.

 

그런데 이 도서관이란 곳이 심각한 병폐를 가진 곳이다.

 

정말 대단한 작가들과 그 작가들이 쓴 대단히 좋은 소설들이 그것이다. 그것들은 뿌리칠 수 없이 달콤한 유혹을 한다.

 

날 읽어라고 막 소리친다.

 

딘 R 쿤츠, 히가시노 게이고, 하워드 패스트, 존 스칼지, 빌 S 밸린저, 크리스 보잘리언, 짐 크레이스, 앨런 폴섬 등등... 이들의 목소리이다. 더 문제는 이들의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난다는 것이다.

 

3월 달에 헤아려 보니-전공책 빼고- 12권의 책을 읽었는데, 우리나라의 책은 김연수의 「꾿빠이, 이상」과 권성현 등이 엮은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줘」 이 두 권밖에 없다. 왜 그럴까?

 

나에게 정말 좋아하는 작가와 소설을 꼽아보라면 모두 외국작가와 외국소설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좋아하는 작품은 여럿 되긴 하지만, 작가는 김유정, 성석제 정도 밖에 없다. 왜 그럴까?

 

원작의 아우라에는 못 미칠 수 밖에 없는 번역이라는 약점을 지니면서도 왜 그런 것일까?



내 생각에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우리나라 문학은-물론 예외는 있다- 스토리텔링이 부족하다. 나는 소위 장르문학이라고 하는 스릴러 소설-영화도-을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스토리에 있다.  우리나라 소설에서 스릴러 장르가 이제 막 피어나려는 상황이고 또한 그러한 장르 소설이 아닌 소설이더라도 스토리가 빈약하며-내용이 빈약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 빈약한 부분을 서술자의 의식이 많은 부분 메꾸고 있다. 그래서 극적-드라마-이지 못하다. 스토리 진행은 느려지고 감정이입을 지독하게 요구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무라카미 하루키도 싫어한다. 한마디로 재미가 없다.

 

둘째는 우리나라 문학을 처음 접하는 곳은 중고등학교의 국어시간이다. 그런데 이 국어수업이란 것이 문학을 정말 재미없게 만든다. 주제는 무엇이고 소재는 무엇이다, 기법은 이러한 것이 쓰였다. 문단을 나누고 여기 밑줄을 죽- 그어라. 이런 수업 방식 뿐 아니라 교과서 속 문학작품은 지독하게 재미가 없는 작품들만 모아 놓았다. 그것도 수십년전의. 이런 것들로 문학적 문화의 고양하려고 한단다. 이러한 수업 방식과 교과서 속 문학작품은 분명 우리나라 문학에 대한 일종의 선입관을 갖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선입관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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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교육의 기둥 [말에는...]

말에는 힘이 있다.

 

말에는 길이 있다.

 

말에는 법이 있다.

 

 

이 세 가지가 거의 모두 작용하겠지만,

 

말의 힘을 가르치는 데는 문학이 좋고, 말의 길을 가르치는 데는 언어사용이 좋고, 말의 법을 가르치는 데는 문법이 소용이 된다.

 

이 세 개의 기둥은 언제나 국어교육을 지탱하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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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명

내게 좌우명이 있었나?

 

있었다면 이걸로 바꾸고-없었다면 이걸로.

 

내가 아무리 옳고 상대가 그르다 하더라도,

내가 아무리 그르고 상대가 옳다 하더라도.

 

세우지 말기.

 

좌-우라고 하니 하나 더 보태도 말이 어긋나지는 않겠다.

 

자기연민하지 말기.



이젠

 

세상을 좋게 변화시켜야 한다는 신념,

 

민중의 단결, 투쟁,  연대, 해방... 이런 이념적 기치들은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거기에 내 얄팍한 머리로는 답-은 물론이거니와 내 행복도-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것 같다.

 

내가 진정하고 싶은 것은 사회라는 이름의-자기파괴의 궤도로 욕망과 억압의 힘으로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것.

 

좁은 숲길을 느긋하게 걷는 인생. 거기에 맞잡은 손.

 

이것만이 필요하고 절실하다.

 

빠른 속도로 레일 위를 질주하는 쾌적한 기차 속 졸음 겨운 승객을 깨워

 

기차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희한한 경유역-종착지는 물론 죽음-을 통과해 간다고 일러주어

 

그 짜증 섞인 승객의 '걱정마. 차장이 다 알아서 갈꺼야.'라는 핀잔을 들을 필요가 있을까.

 

기차를 돌릴려고-멈추려고-늦추려고 아웅다웅 해볼까?

 

돌려도, 멈춰도, 늦춰도 기차간은-특등석, 일등석, 이등석, 일반석, 입석으로 나뉜- 기차간이다.

 

뛰어내리자고 설득을 해 볼까? '미쳤냐? 그러다 다리 부러진다.'는 대답.

 

내려 내 삶을 느긋하게 걸어나가는 것이 내 직접행동이 될 수 있다.

 

그 뛰어내림을 위해-자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일등석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

 

나가기 위해 들어 가기.

 

나는 이것을 성공해야만 한다.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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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Goes By

Time goes by.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다.

 

힘든 시간도 흘러 끝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을 외면해도 시간을 흘러 버린다.

 

괴로움을 견디면 즐거움이 오기 마련.

그것을 잔인하게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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