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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4/06
    국어교육의 기둥 [말에는...]
    Nim Cruz
  2. 2009/03/31
    내 수업의 결과로 희망사항.(1)
    Nim Cruz
  3. 2009/03/31
    내가 가진 교사에 대한 반감.(1)
    Nim Cruz
  4. 2009/03/19
    말의 길(1)
    Nim Cruz
  5. 2009/03/19
    문득 예전 전공시간의 말이 떠올랐다.
    Nim Cruz
  6. 2009/03/09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넘지 못 한다
    Nim Cruz

국어교육의 기둥 [말에는...]

말에는 힘이 있다.

 

말에는 길이 있다.

 

말에는 법이 있다.

 

 

이 세 가지가 거의 모두 작용하겠지만,

 

말의 힘을 가르치는 데는 문학이 좋고, 말의 길을 가르치는 데는 언어사용이 좋고, 말의 법을 가르치는 데는 문법이 소용이 된다.

 

이 세 개의 기둥은 언제나 국어교육을 지탱하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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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수업의 결과로 희망사항.

내가 만약 운이 좋아 교사가 되어 수업을 했다면,

 

그리고, 그 수업을 받은 학생이 집에 가서 어머니와 대화를 했다면,

 

 

엄마 : "얘야 학교 갔다 왔니? 그래, 오늘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니? 선생님이 무엇을 가르쳐 주던?"

 

학생 : "응? 학교에서 배운 거? 없어-. 선생님은 아무 것도 가르쳐 준 것이 없어."

 

엄마 :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수업을 안 했니?"

 

학생 : "응. 수업은 했는데, 죄다 내가!-자랑스럽게- 그리고 우리가 알아낸 거야. 선생님은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질 않고, 그냥 이것저걱 물어보기만 해. 우리 반 아이들은 선생님보다 더 똑똑한 거 같애."

 

엄마 : "저런, 원 나쁜 선생님이구나! 그래 너희들이 뭘 알아 냈는데?"

 

학생 : "응, 이거랑 저거랑. 그런데 이건 좀 어려워서 내가 책을 좀더 찾아 봐야 할 것 같애."

 

 

이런 대화였으면 좋겠다. 내가 가진 대단한 희망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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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교사에 대한 반감.

나는-대한민국 교사가 되길 바라면서도- 대한민국 교사에 대해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먼저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 글이 나 자신만이 옳고 나머지는 모두 그릇되었다는 주장을 하려는 글이 아니다, 또한 우리나라에는-그래도- 좋은-나름대로 애쓰는- 선생님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교사에 나는 왜 반감을 가지는 것인가라는 것을 스스로 납득하고자 쓰는 글이다.)

 

지금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일제고사 때문에 불거진 교사들의 비겁함이 반감의 원천일까? 그들은 대한민국 공무원으로서 교사이며 제도에 대해 약간의 반발을 하지만 생계 즉 돈 때문에 적극적 목소리를 내지 못 하는 그들의 상황을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당장 짤리면 뭐해서 먹고 살 것인가? 이것 때문만을 아니다.

 

그럼 지식-권력 구조를 지지하고 재생산하는 그들의 역할 때문일까?

 

국어 교사이면서 교과서와 관련된 책 이외의 다른 문학 작품을 읽지 않는 그들의 나태함 때문일까? 등등.

 

모든 것이 반감의 이유가 되겠지만, 그 근본적인 원천은 무엇일까?

 

언젠가 교사가 된 지 3, 4년이 된 동기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그녀의 말인 즉, 무능력한 교사들이 많다는 것이다. 왠고 하니 자신은 교육과정에 맞춰 학습목표를 만들고 내용을 선정하고, 학습활동을 조직하고 평가도 최대한 애를 써서 만드는데 그렇지 못한 교사들이 많다는 것이다. 학생들을 위해 -교육과정에 충실하도록- 수업연구를 열심히 하는 듯 보였다. 그/그녀는 말하자면 능력있고 애를 쓰는 교사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나라의 국민기본공통교육과정 그 자체에 의문이 든다. 그 교육과정 내용 하나하나를 따져서 그 부분에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문제제기가 아니다.

 

푸코에게 이런 용어가 있다. ORF, PRF. official recontextualizing field는 교육과정의 공식적인 재맥락화 단계이고, pedagogic recontextualizing field는 교수를 위한 재맥락화 단계를 말한다. 무엇인고 하니 공식적인 재맥화 단계는 각종 학문에 의해 생산된 지식을 국가 이데올로기에 맞추어 교육과정으로 만드는 단계이고, 이것을 이용하여 교육현장의 틀에 맞게 재구화하는 것이 교수를 위한 재맥락화 단계이다. 위에서 언급한 친구가 애쓰는 일은 ORF에 맞추어 PRF를 제대로 구현하는 일이다.

 

이것이 과연 옳은가하는 의문이 든다. 현재 유능한 교사는 PRF를 제대로 실행하는 교사이며, 무능한 교사는 그것을 제대로 할 능력이 모자라는 교사이다.

 

교사는 근본적으로 학생을 기르는 일을 한다. 교사는 전적으로 자신의 일이 학생의 지식에 관련된 것 뿐만 아니라 학생의 삶에 총체를 신경써야 하며, 학생은 교사의 지식 영역 뿐만 아니라 전인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 볼 때 교사의 수업행위는 학생의 삶-현재와 미래-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PRF가 그런 것일까? 일제고사가 그런 것일까?-일제고사는 입시위주, 삶의 경쟁장에서 역설적으로 도움이 된다- 국민기본공통교육과정에 짜맞춰 학생을 양산시키고, 장차 사회의 경쟁의 장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튼튼한 전사를 배출하는 것이 학생의 삶을 위한 것일까?

 

현재의 신자유주의적인 논리에 맞추자면 딴은 옳다. 그것은 학생의 삶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일제고사도 국가와 학생을 위한 것이다. 경쟁을 하려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시 된다. 일제고사를 거부하면서 대학입시교육을-지식나열과 문제풀이 수업- 하는 것은 모순적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입시제도를 거부하면서 ORF와 PRF를 긍정하는 것은 모순적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학생을 잠재력을 개발하여 전투에 능한 전사를 키우는 동시에 학생의 삶을 위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스스로가 경쟁의 장에서 피터지게 싸운 영광으로 교사가 되고 난 뒤에 학생들을 경쟁으로 모는 것을 부당하다고 볼 능력이 있을까? 없을까?

 

점점 내가 가진 반감의 원천은 오리무중으로 빠진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 혼자가 아니라 모든 것과 연결되어 그물을 이루는데 그 그물코 하나를 내가 정확히 지적하는 것이 가능한지 의문이 든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 교사의 유능함, 빗나간 열정, 나태함, 비겁함, 그들이 가진 다양한 모순 등의 재료를 잘 섞은 비빔밥의 맛을 나는 '반감'이라고 느끼는 듯하다. 딴은.



사실은 나의-내 친구가 지적한 관상학적으로- 반골상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ㅋㅋ

 

그리고 나의 반국가적인-반단일체제의- 대안적 삶이 가진 세계관에 기인하는 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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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길

* 뚫린 입으로 사람은 아무 말이나 지껄일 수 있다.

 

*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 말의-말이 가야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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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예전 전공시간의 말이 떠올랐다.

문득, 예전 전공시간에 한모 교수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논술에 시를 적어도 좋지 않겠니? 얼마나 멋지겠니? 시로 생각을 표현할 수도 있다고 봐.'

 

이런 얘기. 그 때는 그냥 -그녀의 수업시간 대부분 내가 그러했듯이 별 생각없이 지나쳤다.

지금 그 물음이 다시 돌아 온다면 내 대답은 -그 교수의 질문에 내 대답이 거의 그랬듯이 '아니오'다.

 

평가에서 어느 한 논설문을 평가할 때 논술의 형식이 평가의 중요한 한 가지 요소이기 때문이다.

논술을 적어라면 논술을 해야 한다.

논술이 무엇인지 대략이라도 안다면 논술에 시를 적는다고 하는 말은 무식한 소리이다.

그 때의 맥락은 논술이라는 딱딱한 글에 문학적인 표현이 가능하지 않겠는냐는 소리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유 정도가 아니라 시라면 곤란하다.

 

또한 다르게 접근하면,

 

만약 그 교수가 레포트를 내어 주었다고 하자.

그래서 나는 백지에 낙서를 휘갈겨서 내었다고 하자.

그 레포트는 한모 교수의 관점에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문학이 아니라 낙서니까 F가 되는 것인가?

특정한 레포트에는 그에 걸맞는 내용과 함께 특정한 형식이 요구된다. 그래야 평가라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문학이라는 글은 평가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레포트와 논술이다.-

무슨 뜻인지도 알 수 없는 낙서. 그것은 내가 시라고 하면 시이다.

그 교수는 이해불가하다고 하여 -그녀의 일천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시각에서라면- 나에게 낙제점을

줄 수 없다.

왜냐면 선이해적 기반없이 내 낙서를 해석할 수 없을테니까.

나에 대한 선이해적 기반은 평가자인 교수의 몫이니까 내가 해명할 이유 역시 없다.

 

이런 식의 전개가 되었을 때 '내가 내어주는 레포트는 이것과 달라.'라고 한다면

그녀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이렇게 그 때 한방 먹였어야 했는데,

좀 아쉽다. 히-

 

잠시 예전 생각. 요샌 이런 생각이 아주 가끔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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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넘지 못 한다

흔히 교육에 대한 어떤 주제를 놓고 이야기 할  때,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 넘지 못 한다.'는 문구를 인용하여-누구의 말인지는 모르지만 곧잘 사용한다.

 

확실히 이 말에 공감을 한다.

 

이 말이 인용될 때 교육에 관해서 교사의 책임 막중하다거나, 교사의 역할이 그만큼 무거워 교사를 우대하여하 한다는 의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 말도 맞다.

 

허나 다시 꼬아서 생각 해 보자.

 

현재의 교육의 상황은 줄세우기식 엘리트 선발에 봉사하도록 강요받고,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교 할 것없이 신자유주의식 경쟁 속에 놓인 듯 보인다. 왜 이렇게 교육이 흘러가는가? 아니 흐른다기 보다는 교육이 왜 이런 지경에까지 변질되어 버렸는가? (교육이 원래 이런거야 선발이야 선발! 이러면 할 말 없다.)

 

여기서 위의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 넘지 못한다.'는 말을 인용 해 보자.

지금 교육의 요따구 인 것은 교사가 이따구이기 때문이야라는 생각이 자연스럽다. 너무 꼬아 버린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왜냐면 일부분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 말도 맞다.

 

 

 

그럼 교사들이 왜 이따구인가? 일필휘지 써 내려가기 어려운 질문이다.

한 번에 한 가지씩.

 

얼마전 뉴스에서

일제 고사 반대(?)를 해서 파면 혹은 해임을 당한 교사들이 몇몇이 등교를 했다고 하는 보도를 들었다. 짤렸는데 왜 나오느냐는 것이다. 거기서 교사는 투쟁이란다. 저는 승복할 수 없다고 했다. 아마 소추심사 중인가 보다.

 

그녀 혹은 그-뉴스에서 본 사람은 그녀는 홀로 국가를 대한 싸움을 시작했다. 그 뿐이다.

 

이것은 그녀의 싸움이다.

대다수의 교사들의 싸움이 아니다.

강압적인 일제고사에 대한 싸움은 국가 대 교사들의 싸움이 아니라,

국가 대 그녀 혹은 그, 거대 집단과 개인의 싸움으로 보인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이 보이지 않는가?

교사들 이따구의 단 한 가지이다.

 

나는 일제고사 부활로 인해 파면 혹은 해임되었던 선생님들 때문에,

어떤 대전환을 위한 시발점, 혹은 비등점이 될거라는 희망을 가졌었다.

 

나의 기대는 여지 없이 무너졌고, 그들은 짤려 홀로 진흙 속에서 싸움을 하다 목구멍까지 흙맛을 볼 것이다. 그리고 잊혀질 것이다.

일련의 사건들에서 대다수의 나머지 교사들은 자기일이 아니고, 또한 앞으로도 자기 일이 아닐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잠잠하다.

 

그들은 아마 앞으로 곧 시행될 교원평가제 역시 안 되었으면 싶지만, 그로인해 자기는 짤리거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아니면 경력이 낮아서 불이익당해도 별 수 없는 일이라고 나라에서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않겠느냐고 생각한다. 그도 아니면 제가 열심히하면 더 좋은 봉급과 대우, 승진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도 잠잠할 수 있다.

 

 있으면 진단고사라는 둥의 일제고사가 또 치뤄질 것이다. 교육청에서는 각급학교에 이번 시험에서 지난 번 같은 일이 벌어지면 알아서 하라는 으름장을 공문형식으로 송달해 놓았다. 교사들은 잠잠할 것이다. 기대된다. 어떤 자기변명을 늘어 놓을지, 분명 논리적 모순의 코미디를 선사하거나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을 찬양하거나 잠잠할 것이다.

 

교사들이 이따구다. 혹시 전교조라는 둥 투철한 교육 철학 속에 가르치고 생활하는 이 나는 참 선생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이 글을 읽으면 무척 열불을 낼 것 같다.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둥. 니 주위를 한 번 찬찬히 보라.

 

내가 쓰레기 백수 임용준비생이라도 그건 안다. 주위를 둘러봐라. 그렇다 교사가 이따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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