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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3/31
    <워낭소리>(2)
    Nim Cruz
  2. 2009/03/31
    어떻게 지내느냐는 친구의 말에.(2)
    Nim Cruz
  3. 2009/03/31
    RAGE AGAINST THE MACHINE RNC
    Nim Cruz
  4. 2009/03/31
    내 수업의 결과로 희망사항.(1)
    Nim Cruz
  5. 2009/03/31
    내가 가진 교사에 대한 반감.(1)
    Nim Cruz
  6. 2009/03/30
    포괄, 균형, 연계= 조화(2)
    Nim Cruz
  7. 2009/03/29
    다수에 대한 공포.(3)
    Nim Cruz
  8. 2009/03/29
    순덕이 이상무!(1)
    Nim Cruz
  9. 2009/03/27
    사랑하면 서로 닮는다.(3)
    Nim Cruz
  10. 2009/03/27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2)
    Nim Cruz

<워낭소리>

웬 가리늦가 워낭소리냐 하면,

 

오늘 도서관에 갔다오니 부모님이 조금 더 늦게 들어오셨다.

 

그래서 어딜 다녀오시냐고 여쭈었더니,

 

워낭소리를 보고 오셨단다.

(읍네 새마을금고에서 밀양영화학교 주관으로 무료영화상영을 하고 있다. 거기에 다녀오신 것이다.)

 

며칠 전 아버지께서

"워낭소리 재미있냐?"

 

난 "아뇨. 재미없어요. 보지 마세요."

 

"니는 보고 왔으니 재미없다고 말하지-. 왜 다들 재미있다던데."

 

결국 오늘 보고 오신 것이다.

"우찌. 재미있섭디꺼?"

"우와- 워낭소리 재미없더라."

"거 보세요. 재미없다고 했잖아요."

"재미있는 줄 알았지. 피곤해서 보다 좀 잤다. 놈놈놈은 재밌나?"

"그건 재미있을거라예."

 

좀더 늦게 어머니께서 들어 오셨다.

"워낭소리 재미있섭디꺼?"

"그냥 할배할매 사는데 소 키우고 소꼴 뜯고 그런 얘기데. 그냥 할배할매 나와서 할배가 소꼴 뜯고, 밥 주고 일하고, 그러다 소가 죽더라."

"저도 봤습니더."

"그랬나? 할배들이 보고 한심스럽다 카더라-."

"누가예? 영화가예? 그 할배들이예?"

"그 할배들이."

"영화는 재미있습디꺼?"

"아니. 그저그렇더라. 재미없더라. 집으로는 어떻노?"

"그것도 촌에 할매, 손자 얘깁니더."

"그렇나? 내나 똑같겠네."

 

이상이 부모님가 내가 나눈 대화다. 부모님께서 영화보는 눈이 나빠서 영화가 재미없는 건 아닐테다. 내나 촌에서 옛날에 경험한 얘기인데, 무어 재미있을 것이 있겠는가? 뭐 다른 것이 있겠는가? <워낭소리> 속 할배와 동네 할배의 삶은 유독 소를 사랑했다는 것 빼놓고는 그리 큰 차이가 없다. 과대선전의 피해자가-비록 공짜지만- 된 셈이다. 나 역시 보고 좀 심드렁한 기분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내 친구는 보고 금방 눈물이 쏟아지더라던데 나는 별로였다. 그만큼 회자되고 극찬할 만큼의 영화는-다큐로서도- 아니었다. 범작 수준? 아니면 B급 정도?

 

영화는 인간과 동물의 우정을 놓고 보았을 때, 동물농장이나 주주클럽 딱 그정도다. 딸랑거리는 워낭소리가 주구장창 대리선동을 하여 오히려 기분이 나빠질 정도다. 애써 눈물을 쥐어짜내려는 삼류멜로처럼.

 

<워낭소리>는 '신-구문명의 충돌과 구문명의 패배'의 관점으로 보면 그나마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영화가 된다. (이렇게 보면 위 어머니와의 대화 중 동네 할버지들의 한심스럽다는 말은 중의성을 띤다. 불편하고 좁은 의자에서 애써 시간을 내 저딴 영화를 보는 자신들이 한심스럽다는 것과 구문명의 실질적인 패배자로서의 한심함이 그것이다.)

 

늙은 소와 할배와 고된 노동은 전통-구-문명을 대표하고, 젊은 소와 할배할매의 아들딸들과 석유 때는 농기계는 현대-신-문명을 대표한다. 할매는 중간자적 입장에서 현대문명을 옹호하는 역할을 한다. 시종일관 영화는 전통문명을 고된 노동과 골병을 반복해서 부정적으로 보여준다. 그나마 인간과 동물을 우정이라는 포장을 통해 긍정적 감성을 자극한다. 마찬가지로 현대문명에 대해서는 매정함을 보여준다. 늙은 소를 여물통 밖으로 몰아내는 젊은 소, 농삿철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여가삼아 내려와 고기를 구워먹으면서 '소팔라!'라고 외치는 자식들. 그들은 농삿일을 돕지도 않거니와 병원 한번 모시고 가지 않는다.

 

늙은 소와 할배는 할매의 끊임없는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전통을 고집스럽게 고수하지만, 추수철 콤바인에게 한 번 도움을 받고, 소팔라는 자식들 소리에 좌절하고, 늙은 소가 노사하면서 할아버지는 만신창이의 몸으로 '아파!'라고 외치고, 한편으로는 워낭소리를 딸랑거리며 마침내 패배를 선언한다.

 

이렇게 <워낭소리>는 '전통문명의 마지막 장, 패배 선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다큐란게 원래 그렇고 그래서는 안 되는 건지는 모르지만, 영화는 어떠한 희망이나 대안도 보여주지 않는다. 즉 자기 목소리라는 것이 없다. 이 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희망과 대안을 보여주지 않았으니,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못하니 우리가 찾아야 한다. <워낭소리>를 본 그 수많은 도시 사람들이 그 희망과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 이것에도 나는 부정적이다.



이와 관련해 떠오르는 사건이 있다.

 

남대문 방화사건.

 

난 그 때 뉴스를 보면서, 불타버린 남대문을 보면서, 사람들의 외침, 절규와 그들의 눈물을, 생방송으로 보면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정말로 빵 터졌다. 어찌나 웃기고 역겹던지.

 

그들은 남대문이 불타버린 것이 대한민국 전통문화의 크나큰 상처, 손실로 보았는데, 그것이 같잖았다.

 

남대문 물론 국보 1호로 대단한 문화유산이다. 그것도 유형의.

하지만 서구문화를 동경해 한시빠비 전통문화를 내팽겨치고 없애버린 그들이, 소젖보다 Milk를 좋아하는 그들이. 외국에 팔거리-관광상품-가 아니면 돌보지 않는 그들이. 좋은 것을 보러 유럽으로 날아가는 그들이. 동강이 아니라 세느강과 허든슨강을 사랑하는 그들이. 남대문을 빙 둘러싸고 남대문이 탄다고 민족의 자존심이 탄다고 슬퍼하고 있다. 발을 동동굴리며 오열하고 있다. 이 얼마나 쓰디쓴 유머인가? 뉘라손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닥종이, 전통 나룻배, 가산오광대 등-이 밖에도 무진장 많다- 무형문화재는 후계자가 없어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있다. 그들의 죽음에는 조문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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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내느냐는 친구의 말에.

 

무지개님(http://blog.naver.com/tensiyun)의 그림을 펐다.

 

-패러디 되긴 했지만-그랜져 광고다. 예전부터 보였는데 아직까지도 이걸로 선전되고 있다.

 

만약 내 친구가 저 지랄을 한다면,

 

나는 "넌 이제 내 친구 아냐! 개장간장국간장아!"라고 외쳐 버릴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광고는 어쩌면 현존 사회 이데올로기의 친숙함과 신선함에 의탁한 유목적적 표현일텐데, 다시 말해 우리나라에서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의 의식을 반영한 산물일텐데, 이 광고를 보면 너무 슬프다.

 

나와 너의 한 모습.

 

'세바퀴'에서 본 건데, 우리나라 20, 30대 여성이 바라는 최고 조건은 "돈"이란다. 그 현실.

바라지는 않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현실.

 

우리의 모습이다.

 

어제 본 '얍! 활력천국 시즌2'에서 본 남해군 남면 홍현마을의 한 할아버지의 멘트.

"지금은 돈세상인데. 나는 돈이 없어 활동을 못 한다."



아무래도 그림을 퍼온 무지개님의 멘트가 마음에 걸린다.

 

"아직도 차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대변한다는 조금은 유치한...ㅋㅋㅋ"

 

그리고 댓글 중에

 

"아직까지도 차가 사회적 지위와 자존심을 나타낸다는 분위기를 조장하는 광고죠. ㅎㅎ"

 

내 생각에는 이 광고는 조장하는 것도 아니고 유치한 것도 아니다.

 

조장하다는 것은 네이버 국어사전에

[명사]도와서 자라게 . 주로 부정적인 의미쓴다.

로 나온다.

 

조장하는 광고는 공익광고이다. "흡연은 죽을 죄입니다!" 이런 식.

 

하지만 상품광고는 다르다.

상품광고는 내밀한 욕망을 집어내어 펼쳐 보여 주면서 상품을 사면 그것이 실현되리라는 기대를 심어준다. 그 내밀한 욕망이 의식하기 어려운 것일수록 광고는 더욱 참신함을 갖추게 된다. 그 욕망을 꼭 집어내어 상품과 연결시키는 작업으로 인해 욕망이 드러나기 때문에 조장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욕망은 광고를 통해 면죄부를 부여받는다. 이 부풀어진 욕망이 지갑을 열게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서울우유였던가? 미스유가 나오는 광고가 있다. 두 개가 제작되었는데, 하나는 학생보다 키작은 선생이 나오고, 또 하나는 동창보다 늙어 보이는 아줌마가 나온다. 키 크고 싶다는 열망, 젊고 예쁘게 보이고 싶다는 바람이 이 특정한 상표의 우유로 인해 충족되라는 내용이다. 이런 두 가지의 욕망이 여기서 조장되는 것은 아니며, 단지 그런 욕망이 보편적인 것임을 확인하는 동시에 긍정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광고가 욕망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꼬집어 내어 상품과 연결하는 것일 뿐이며, 그 내밀한 욕망은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진 것이어야 한다. 몇몇만 특수하게 가진 욕망으로는 당연히 돈벌이가 안 될 것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한 사회의 일반적이고 내밀한 욕망을 광고를 통해 확인할 수가 있다.

 

위 그랜져 광고에 이러한 확인 작업을 해 보면,

 

친구가 안부를 즉 현재 상태를 물어봤는데 다른 친구는 그랜져로 '삐빅'거린다. 현재 상태가 그랜져라는 것이다. 자신의 현재 상태는 '애가 인제 갓 말을 하기 시작하는데, 아빠라는 소리가 너무 듣기 좋고, 아내 생일을 까먹어서 집안이 아직 저기압이고, 이것 때문에 이런 고민이 있고, 저것 때문에 저런 생각이 든다." 따위가 아니라, "삐빅"이라는 것이다. 즉 나의 상태는 이 그랜져가 말해준다는 선언이다.

 

이제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것은 소유하고 있는 재화의 양과 질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치한 것이 아니라 무서운 것이다. 이제 우리는 소유하고 있는 물건의 목록을 적은 종이를 유대하고 하고 다니다가 자기를 소개할 때 그 종이를 척!하고 보여주면 되는 세상이다.

 

이것은 단순히 "차가 사회적지위를 나타내주는 지표에요."를 넘어서는 일이다. 이미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욕망-소유로서의 자기소개-은 돈많은 몇몇, 혹은 특수사회의 것이 아니라 보통의 일반적인 욕망이다. 점심먹고 스타벅스 테이크아웃컵을 자랑삼아 들고 다니는 20, 30대의 커리어우먼층, 혹은 그런 모습을 열망하는 일부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과 관련하여 심각하게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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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GE AGAINST THE MACHINE RNC

 

지난 9월인가 미국의 미네소타주 한 도시에서 공화당 전당대회가 벌어지고 있었고

가까운 곳에서 음악 페스티벌 비슷한게 열리고 있었다.

 

거기에 등장한 밴드가 렙 메탈의 전설인 Rage Against The Machine !!

하지만 전투경찰들은 전당대회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무대 전원을 차단시키고 무대를 철수시켜버린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인가?

 

자신들은 그들이 두렵지 않고 다만 그들이 자신들을 두려할뿐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사회부조리를 날카롭게 꼬집는 행동파 밴드의 참모습이 아니던가!!

 

곡 순서

1. Bulls On Parade

2. Killing In The Name

[출처] RATM 거리공연 - Rage Against The RNC|작성자 이동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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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재결합 소식에 대한 정확한 기사가 없을까 하여 공식 홈피를 들렀다가,

NEWS에 RNC 영상이 있다길래 네어버에 검색해 관련 블로그의 글을 찾았다.

드라로차의 첫 마디-"Rage aginst the machine is Back!"-에 어찌나 설레이던지. 너무 좋다.

그들은 함께 해야 한다.

영상은 조금 감동적인 면이 있다. 영어라서 당최 모든 멘트를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근데 이게 지난 9월 영상이니까. 도대체 최근 소식은 어디에 있을까나?

공식 홈피에서도 이 뉴스가 3월 8일자이니 원.

음반 잡지를 끊은 지 오래되어 이런 저런 소식을 접할 구멍을 찾기 힘들구나.

난 공부를 해얄 텐데 원.

앨범이 기다려진다. 기다려도 되는거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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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수업의 결과로 희망사항.

내가 만약 운이 좋아 교사가 되어 수업을 했다면,

 

그리고, 그 수업을 받은 학생이 집에 가서 어머니와 대화를 했다면,

 

 

엄마 : "얘야 학교 갔다 왔니? 그래, 오늘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니? 선생님이 무엇을 가르쳐 주던?"

 

학생 : "응? 학교에서 배운 거? 없어-. 선생님은 아무 것도 가르쳐 준 것이 없어."

 

엄마 :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수업을 안 했니?"

 

학생 : "응. 수업은 했는데, 죄다 내가!-자랑스럽게- 그리고 우리가 알아낸 거야. 선생님은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질 않고, 그냥 이것저걱 물어보기만 해. 우리 반 아이들은 선생님보다 더 똑똑한 거 같애."

 

엄마 : "저런, 원 나쁜 선생님이구나! 그래 너희들이 뭘 알아 냈는데?"

 

학생 : "응, 이거랑 저거랑. 그런데 이건 좀 어려워서 내가 책을 좀더 찾아 봐야 할 것 같애."

 

 

이런 대화였으면 좋겠다. 내가 가진 대단한 희망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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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교사에 대한 반감.

나는-대한민국 교사가 되길 바라면서도- 대한민국 교사에 대해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먼저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 글이 나 자신만이 옳고 나머지는 모두 그릇되었다는 주장을 하려는 글이 아니다, 또한 우리나라에는-그래도- 좋은-나름대로 애쓰는- 선생님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교사에 나는 왜 반감을 가지는 것인가라는 것을 스스로 납득하고자 쓰는 글이다.)

 

지금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일제고사 때문에 불거진 교사들의 비겁함이 반감의 원천일까? 그들은 대한민국 공무원으로서 교사이며 제도에 대해 약간의 반발을 하지만 생계 즉 돈 때문에 적극적 목소리를 내지 못 하는 그들의 상황을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당장 짤리면 뭐해서 먹고 살 것인가? 이것 때문만을 아니다.

 

그럼 지식-권력 구조를 지지하고 재생산하는 그들의 역할 때문일까?

 

국어 교사이면서 교과서와 관련된 책 이외의 다른 문학 작품을 읽지 않는 그들의 나태함 때문일까? 등등.

 

모든 것이 반감의 이유가 되겠지만, 그 근본적인 원천은 무엇일까?

 

언젠가 교사가 된 지 3, 4년이 된 동기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그녀의 말인 즉, 무능력한 교사들이 많다는 것이다. 왠고 하니 자신은 교육과정에 맞춰 학습목표를 만들고 내용을 선정하고, 학습활동을 조직하고 평가도 최대한 애를 써서 만드는데 그렇지 못한 교사들이 많다는 것이다. 학생들을 위해 -교육과정에 충실하도록- 수업연구를 열심히 하는 듯 보였다. 그/그녀는 말하자면 능력있고 애를 쓰는 교사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나라의 국민기본공통교육과정 그 자체에 의문이 든다. 그 교육과정 내용 하나하나를 따져서 그 부분에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문제제기가 아니다.

 

푸코에게 이런 용어가 있다. ORF, PRF. official recontextualizing field는 교육과정의 공식적인 재맥락화 단계이고, pedagogic recontextualizing field는 교수를 위한 재맥락화 단계를 말한다. 무엇인고 하니 공식적인 재맥화 단계는 각종 학문에 의해 생산된 지식을 국가 이데올로기에 맞추어 교육과정으로 만드는 단계이고, 이것을 이용하여 교육현장의 틀에 맞게 재구화하는 것이 교수를 위한 재맥락화 단계이다. 위에서 언급한 친구가 애쓰는 일은 ORF에 맞추어 PRF를 제대로 구현하는 일이다.

 

이것이 과연 옳은가하는 의문이 든다. 현재 유능한 교사는 PRF를 제대로 실행하는 교사이며, 무능한 교사는 그것을 제대로 할 능력이 모자라는 교사이다.

 

교사는 근본적으로 학생을 기르는 일을 한다. 교사는 전적으로 자신의 일이 학생의 지식에 관련된 것 뿐만 아니라 학생의 삶에 총체를 신경써야 하며, 학생은 교사의 지식 영역 뿐만 아니라 전인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 볼 때 교사의 수업행위는 학생의 삶-현재와 미래-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PRF가 그런 것일까? 일제고사가 그런 것일까?-일제고사는 입시위주, 삶의 경쟁장에서 역설적으로 도움이 된다- 국민기본공통교육과정에 짜맞춰 학생을 양산시키고, 장차 사회의 경쟁의 장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튼튼한 전사를 배출하는 것이 학생의 삶을 위한 것일까?

 

현재의 신자유주의적인 논리에 맞추자면 딴은 옳다. 그것은 학생의 삶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일제고사도 국가와 학생을 위한 것이다. 경쟁을 하려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시 된다. 일제고사를 거부하면서 대학입시교육을-지식나열과 문제풀이 수업- 하는 것은 모순적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입시제도를 거부하면서 ORF와 PRF를 긍정하는 것은 모순적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학생을 잠재력을 개발하여 전투에 능한 전사를 키우는 동시에 학생의 삶을 위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스스로가 경쟁의 장에서 피터지게 싸운 영광으로 교사가 되고 난 뒤에 학생들을 경쟁으로 모는 것을 부당하다고 볼 능력이 있을까? 없을까?

 

점점 내가 가진 반감의 원천은 오리무중으로 빠진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 혼자가 아니라 모든 것과 연결되어 그물을 이루는데 그 그물코 하나를 내가 정확히 지적하는 것이 가능한지 의문이 든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 교사의 유능함, 빗나간 열정, 나태함, 비겁함, 그들이 가진 다양한 모순 등의 재료를 잘 섞은 비빔밥의 맛을 나는 '반감'이라고 느끼는 듯하다. 딴은.



사실은 나의-내 친구가 지적한 관상학적으로- 반골상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ㅋㅋ

 

그리고 나의 반국가적인-반단일체제의- 대안적 삶이 가진 세계관에 기인하는 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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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괄, 균형, 연계= 조화

 

이렇게 그려보고 싶었다. ^-^;;;



 

이 두 개의 그림으로 세상과 삶을 설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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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에 대한 공포.

어느-「그리고 죽음」, 짐 크레이스- 소설을 읽다가

 

톡토기-잘은 모르지만 묘사된 바로는 바닷가 모래사장에 사는 메뚜기같이 생긴 손가락 한 마디 만한 곤충-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며 난 다수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고 깨달았다. 모래사장에 지나간 파도의 흔적을 따라 죽 늘어선, 그 조그맣고 까만, 바글바글대는 녀석들.

그게 곤충이라서 그럴까?

 

석양을 배경으로 열두 마리의 기러기가 뒤집은 V, 혹은 W나 V 자로 날아 가는 이미지는-경험에 의하면- 꽤 멋지다. 하지만 석양을 뒤덮은 천 이백 마리, 아니 만이천 마리의 기러기가 날아 가는 이미지는 꽤나 오싹하다. 왠지 지옥이 있다면, 그것의 이미지를 닮았을 것이라 짐작한다.

 

이렇게 보면 그 수 많은 무리, 다수, 대중과 같은 집단 등에 대해 나는 공포를 느끼는 것이 분명하다. 촌스러워 비행기를 타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도시의 풍경은, 접해 본 사진이나 높은 건물에서 내려다 본 끝없이 펼쳐진 건물들의 늘어선 모습이 중첩된 것과 비슷하다고 보았을 때, 나에게는 쾌나 두려울 만한 것일 게다.

 

그 대도시의 건물들, 한 건물 속에 한 사람이 이상이 살 것인데, 그럼 그 많은 건물들 속에 들어 차 있는 사람들이 거리로 다 나온다 치면, 정말 바글바글-까만 점들이 뒤덮은 점묘화-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 마치 로드킬의 희생물을 보는 것과 같이-측은함을 제외하고- 소름끼친다. 우리는 너무 많은 수의 개체가 충분히 좁은 일정한 지역에 모여 산다. 옹기종기 정도가 아닌 따닥따닥.

 

나는 왜 그런 것일까? 왜 많은 것들이 모인 이미지를 무서워 하는가?

 

그래서-마찬가지의 매락으로- 절대 정신이니 대중의 각성이니 뭐라고 이름을 붙이든, 많은 사람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장면이 전율을 불러 일으키면서 무섭다. 만약 다수-민중 혹은 대중-가 뭉친 거대한 혁명이 크고 거친 파도로 일어난다면 나는 지독히도 끔직한 것을 목격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왜 그런 것일까? 왜 많은 것들이 모인 이미지를 무서워 하는가?

 

일단, 내린 답은...

 

다수의 내재적이고 필연적인 폭력. 그 힘의 방향과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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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덕이 이상무!

순덕이-시클라멘-는 잘 있어.

 

분갈이 해주고 싶은데, 꽃대가 계속 올라오네.

 

5월 이후로는 꼭대가 올라오지 않는다니까 꽃대가 사라지고 나면 해줘야겠어.

 

화분은 사 놓았지만...

 

은근히 손을 많이 가야 하는 녀석이야. 순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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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서로 닮는다.

사랑하면 서로 닮는다.

 

사실인 것 같다.

 

부부는 서로 닮는다.

 

연인도 서로 닮는다.

 

새를 사랑하면 새를 닮는다.

 

나무를 사랑하면 나무를 닮는다.

 

물을 사랑하면 물을 닮고, 산을 사랑하면 산을 닮는다.

 

부모를 아이들은 닮는다.

 

선생님을 학생들은 닮는다.

 

허나 요샌 학생들은 선생님을 닮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이 어쩌면 잘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돌이켜... 어쩌면 닮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분명 학생들은 온라인 게임을 닮는다.

 

돈을 사랑하면 돈을 닮는다.

 

기계를 사랑하면 기계를 닮는다.

 

권력을 사랑하면 스스로 권력이 되고자하고, 무력을 사랑하면 무력을 행사한다.

 

존레논은 평화를 사랑한 것 같다.

 

나는 고양이를 사랑하는 것 같다. 성질이 비슷하다.

 

외모도 고 멋진 고양이를 닮고 싶은데, 더 사랑해야 되지 싶다.

.

.

.

 

사람다운 사람은 사랑을 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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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복수를 부른다.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는 말 말이야.

 

사실은-너한테만 특별히 알려줄께. 누구나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니까. 또한 누구나 알아야 하는 것이야.-

 

원래 '죄악은 복수를 부른다.'야. 놀랍지 않니?

 

이 말이 언제 어떻게-한 단어만이- 바뀌었는지는 나도 잘 몰라.

여기에 어원적 설명이나, 고문서의 주석에 참조해서 설명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는 말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야.

자. 이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지.

바로 내가 수모를 당해도 그것에 대한 복수는 하지 말라는 것이지. 왜냐면 그 악순환은 영원할 테니까.

 

여기에 헛점이 있어. 처음 내가 당한 수모는 그럼 누가 갚아주지?

하느님? 예수님? 부처님? 그 분들은 참으라고 하지. 왜? 그래야 천국에 갈 수 있고,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영원한 평안을 얻는다고 그 분들은 하실 거야. 한낱 내 설움은 그 분들의 위대한 말씀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것이니까. 그 자비로운 분들은 나쁜 놈을 용서할 것이고 그 나쁜 짓은 실제에서는 소멸하게 되지.

 

우리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먼 옛날 고대에서 복수는 아주 신성한 권리였어. 누구나 복수를 하려는 자에게 참견을 하지 못 했어. 중세까지도 이런 면이 조금은 있었지. 옛날 유행한 코메디 레퍼토리처럼 '아버지의 원수! 받아라! 죽어!' , '챙챙챙-' 이렇게.

 

하지만 어느 순간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는 말이 나타나면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는 아이에게 스승이 나타나선 '그래서는 안 된다. 얘야.'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어.

 

처음으로 돌아가서 원래 '죄악은 복수를 부른다.'는 말이 있었어.

그때 의미는 '네가 남에게 눈물을 흘리게 할 짓을 하면 너도 똑같이 받을 거야. 그러니 너는 나쁜 짓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 한단다.' 이런 것이었어. 아버지가 철 없는 아들에게 성년이 되기 전에 꼭 해줘야 하는 말이었을 거야. 그래서 성년이 된 아들은 남에게 나쁜 짓하기를 두려워하게 되었지.

 

하지만 어느 순간에 나쁜 짓하는 놈들이 나타났어. 남의 것을 빼앗고 죽이고 노예로 만들면 몸이 편하다는 사악한 생각을 가진 자들이었어. 실제로 해보니 그렇게 어렵지가 않고, 자기들 생각대로 되는 거야. 하지만 그 놈들은 한 가지 께름칙한 것이 있었어. 바로 '복수'야. 자기는 남에게 나쁜 짓을 해서 잘 먹고 잘 살는데, 그 당한 놈들이 자기들에게 복수를 하지 않기를 바랬어. 수모를 당한 놈이 바보이고, 약한 놈이고 착한 놈이게 만들어야 했지. 그 착한 놈들이 길길이 날뛰어 자신들에게 복수를 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꾀를 냈어. 그들은 잔머리가 좋아. 예나 지금이나.

 

말을 교묘히 바꾸어 퍼뜨린거야.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고

 

이게 바로 '죄악은 복수를 부른다.'가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가 된 비밀이야.

 

그리고 그 나쁜 놈들은 종교 지도자들과 결탁을 했어. 종교 지도자들도 그들과 입장이 비슷했기 때문에 흥쾌히 수락을 했지. 왜냐면 그 종교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선구자 혹은 스승은 있을 수 있으나, 지도자 혹은 대장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들은 사람들을 속여 지도자가 되어 존경과 부를 가지게 되었는데, 누구 하나가 그것을 간파하여 언젠가 그들을 끌어내릴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죄악은 복수를 부른다.'는 말을 쓰는 놈을 죽이고, 그 말이 적힌 책은 태워버리거나 말을 고쳐 다시 기록했지. 그래서 지금은 우리는 '복수'라는 말은 부정적인 것으로, 해서는 안 되는 바보같은 행동, 그것을 하는 사람은 잔인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었지. 누구도 의심없이.

 

그 나쁜 놈들은 아직도 나쁜 짓을 스스럼없이 하면서 복수를 하지 말라고 하고 있어. 참으라고 말이지. 참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결국 당하는 놈들이 이기는 것이라고. 당한 수모를 참아서 이긴 것이라고 스스로 자위하면서 그 고통을 감내하고 있지. 옆구리에서 피가 질질 흘러내리는데 말야.

 

그래서 나쁜 짓을 하는 놈들이 더 잘 살게 되고, 더 많아지고, 누구나 먼저 나쁜 짓을 해서 성공하려고 하는거야. 당한 놈은 참아야 하니까.

 

그런데 참다 참다 못 참는 미친, 복수는 나쁜 것이라고 말을 해도 알아 듣지 못 하는 바보같은 놈이 나타날 때도 있단 말야. 오랜 세월에 간혹 하나씩. 그래서 또 잔머리를 굴릴 수 밖에 없었어. 그들은 '법'이란 걸 만들어 내었어. 원래에도 법은 있었지만 이전 법과 그들이 만든 법은 성격이 다른 것이었지.

 

이전의 법은 간단하고 명료했지. 그것의 목적은 함께 살기 위한 것이었어. 우리 마을에서 이 짓을 하면 쫓겨나거나 벌을 받는다. 복수를 받을 것이다. 이런 개념이었어. 말하자면 무엇이 나쁜 짓인지 적어놓은 것이었지. 나쁜 짓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런데 나쁜 짓을 하는 놈들은 법을 새로 만들면서 착한 놈들의 행동과 사고 하나하나를 조종하려는 법을 만든거야. 그리고 복수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것이었지.

 

그래서 간혹 가다 나타나는 복수의 화신은 더욱 복수가 어렵게 되었어. 새로 만든 법이 있기 이전에는 복수 이후 어리석음의 표본이 되게 되어 버릴 자신의 평판만 신경쓰면 되었는데, 새로운 법 이후에는 법을 지키려는 선량한 다른 착한 이웃들까지 그를 막아 세우는 상황이 된 거야. 복수를 하려면 이웃까지 베어야 했는데 차마 그정도까지 미친 놈은 없었어. 그래서 복수의 화신조차 참아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어. 단어 하나가 바뀐 후부터 지금까지 쭉-.

 

여기까지가 네가 알아서는 안 되는, 그러나 알아야 되는 비밀이야.

 

너는 복수라는 말을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니?

어리석음? 무지몽매? 잔인함? 허무? 감방?

 

복수를 허용하면 정말 세상은 흉폭하고 차마 인간이 살지 못하는 세상이 될 것 같지?

 

하지만 말야. 복수를 허용하면 우리 할아버지의 할어버지에다 더 위의 할아버지들이 사셨던, 나라가 있기 전의 평화로운 세상이 될 거야. 모두가 남의 눈에 눈물이 나게 하는 짓은 두려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말야. 그러면 우리는 그런 곳에 살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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