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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09/03/19

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3/19
    말의 길(1)
    Nim Cruz
  2. 2009/03/19
    문득 예전 전공시간의 말이 떠올랐다.
    Nim Cruz
  3. 2009/03/19
    <봄인데>
    Nim Cruz

말의 길

* 뚫린 입으로 사람은 아무 말이나 지껄일 수 있다.

 

*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 말의-말이 가야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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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예전 전공시간의 말이 떠올랐다.

문득, 예전 전공시간에 한모 교수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논술에 시를 적어도 좋지 않겠니? 얼마나 멋지겠니? 시로 생각을 표현할 수도 있다고 봐.'

 

이런 얘기. 그 때는 그냥 -그녀의 수업시간 대부분 내가 그러했듯이 별 생각없이 지나쳤다.

지금 그 물음이 다시 돌아 온다면 내 대답은 -그 교수의 질문에 내 대답이 거의 그랬듯이 '아니오'다.

 

평가에서 어느 한 논설문을 평가할 때 논술의 형식이 평가의 중요한 한 가지 요소이기 때문이다.

논술을 적어라면 논술을 해야 한다.

논술이 무엇인지 대략이라도 안다면 논술에 시를 적는다고 하는 말은 무식한 소리이다.

그 때의 맥락은 논술이라는 딱딱한 글에 문학적인 표현이 가능하지 않겠는냐는 소리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유 정도가 아니라 시라면 곤란하다.

 

또한 다르게 접근하면,

 

만약 그 교수가 레포트를 내어 주었다고 하자.

그래서 나는 백지에 낙서를 휘갈겨서 내었다고 하자.

그 레포트는 한모 교수의 관점에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문학이 아니라 낙서니까 F가 되는 것인가?

특정한 레포트에는 그에 걸맞는 내용과 함께 특정한 형식이 요구된다. 그래야 평가라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문학이라는 글은 평가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레포트와 논술이다.-

무슨 뜻인지도 알 수 없는 낙서. 그것은 내가 시라고 하면 시이다.

그 교수는 이해불가하다고 하여 -그녀의 일천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시각에서라면- 나에게 낙제점을

줄 수 없다.

왜냐면 선이해적 기반없이 내 낙서를 해석할 수 없을테니까.

나에 대한 선이해적 기반은 평가자인 교수의 몫이니까 내가 해명할 이유 역시 없다.

 

이런 식의 전개가 되었을 때 '내가 내어주는 레포트는 이것과 달라.'라고 한다면

그녀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이렇게 그 때 한방 먹였어야 했는데,

좀 아쉽다. 히-

 

잠시 예전 생각. 요샌 이런 생각이 아주 가끔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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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인데>

내 어깨죽지에

깃은,

움트지도 못 한 채

썩었다.

 

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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