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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3/31
    <워낭소리>(2)
    Nim Cruz
  2. 2009/03/31
    어떻게 지내느냐는 친구의 말에.(2)
    Nim Cruz
  3. 2009/03/31
    RAGE AGAINST THE MACHINE RNC
    Nim Cruz
  4. 2009/03/31
    내 수업의 결과로 희망사항.(1)
    Nim Cruz
  5. 2009/03/31
    내가 가진 교사에 대한 반감.(1)
    Nim Cruz

<워낭소리>

웬 가리늦가 워낭소리냐 하면,

 

오늘 도서관에 갔다오니 부모님이 조금 더 늦게 들어오셨다.

 

그래서 어딜 다녀오시냐고 여쭈었더니,

 

워낭소리를 보고 오셨단다.

(읍네 새마을금고에서 밀양영화학교 주관으로 무료영화상영을 하고 있다. 거기에 다녀오신 것이다.)

 

며칠 전 아버지께서

"워낭소리 재미있냐?"

 

난 "아뇨. 재미없어요. 보지 마세요."

 

"니는 보고 왔으니 재미없다고 말하지-. 왜 다들 재미있다던데."

 

결국 오늘 보고 오신 것이다.

"우찌. 재미있섭디꺼?"

"우와- 워낭소리 재미없더라."

"거 보세요. 재미없다고 했잖아요."

"재미있는 줄 알았지. 피곤해서 보다 좀 잤다. 놈놈놈은 재밌나?"

"그건 재미있을거라예."

 

좀더 늦게 어머니께서 들어 오셨다.

"워낭소리 재미있섭디꺼?"

"그냥 할배할매 사는데 소 키우고 소꼴 뜯고 그런 얘기데. 그냥 할배할매 나와서 할배가 소꼴 뜯고, 밥 주고 일하고, 그러다 소가 죽더라."

"저도 봤습니더."

"그랬나? 할배들이 보고 한심스럽다 카더라-."

"누가예? 영화가예? 그 할배들이예?"

"그 할배들이."

"영화는 재미있습디꺼?"

"아니. 그저그렇더라. 재미없더라. 집으로는 어떻노?"

"그것도 촌에 할매, 손자 얘깁니더."

"그렇나? 내나 똑같겠네."

 

이상이 부모님가 내가 나눈 대화다. 부모님께서 영화보는 눈이 나빠서 영화가 재미없는 건 아닐테다. 내나 촌에서 옛날에 경험한 얘기인데, 무어 재미있을 것이 있겠는가? 뭐 다른 것이 있겠는가? <워낭소리> 속 할배와 동네 할배의 삶은 유독 소를 사랑했다는 것 빼놓고는 그리 큰 차이가 없다. 과대선전의 피해자가-비록 공짜지만- 된 셈이다. 나 역시 보고 좀 심드렁한 기분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내 친구는 보고 금방 눈물이 쏟아지더라던데 나는 별로였다. 그만큼 회자되고 극찬할 만큼의 영화는-다큐로서도- 아니었다. 범작 수준? 아니면 B급 정도?

 

영화는 인간과 동물의 우정을 놓고 보았을 때, 동물농장이나 주주클럽 딱 그정도다. 딸랑거리는 워낭소리가 주구장창 대리선동을 하여 오히려 기분이 나빠질 정도다. 애써 눈물을 쥐어짜내려는 삼류멜로처럼.

 

<워낭소리>는 '신-구문명의 충돌과 구문명의 패배'의 관점으로 보면 그나마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영화가 된다. (이렇게 보면 위 어머니와의 대화 중 동네 할버지들의 한심스럽다는 말은 중의성을 띤다. 불편하고 좁은 의자에서 애써 시간을 내 저딴 영화를 보는 자신들이 한심스럽다는 것과 구문명의 실질적인 패배자로서의 한심함이 그것이다.)

 

늙은 소와 할배와 고된 노동은 전통-구-문명을 대표하고, 젊은 소와 할배할매의 아들딸들과 석유 때는 농기계는 현대-신-문명을 대표한다. 할매는 중간자적 입장에서 현대문명을 옹호하는 역할을 한다. 시종일관 영화는 전통문명을 고된 노동과 골병을 반복해서 부정적으로 보여준다. 그나마 인간과 동물을 우정이라는 포장을 통해 긍정적 감성을 자극한다. 마찬가지로 현대문명에 대해서는 매정함을 보여준다. 늙은 소를 여물통 밖으로 몰아내는 젊은 소, 농삿철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여가삼아 내려와 고기를 구워먹으면서 '소팔라!'라고 외치는 자식들. 그들은 농삿일을 돕지도 않거니와 병원 한번 모시고 가지 않는다.

 

늙은 소와 할배는 할매의 끊임없는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전통을 고집스럽게 고수하지만, 추수철 콤바인에게 한 번 도움을 받고, 소팔라는 자식들 소리에 좌절하고, 늙은 소가 노사하면서 할아버지는 만신창이의 몸으로 '아파!'라고 외치고, 한편으로는 워낭소리를 딸랑거리며 마침내 패배를 선언한다.

 

이렇게 <워낭소리>는 '전통문명의 마지막 장, 패배 선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다큐란게 원래 그렇고 그래서는 안 되는 건지는 모르지만, 영화는 어떠한 희망이나 대안도 보여주지 않는다. 즉 자기 목소리라는 것이 없다. 이 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희망과 대안을 보여주지 않았으니,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못하니 우리가 찾아야 한다. <워낭소리>를 본 그 수많은 도시 사람들이 그 희망과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 이것에도 나는 부정적이다.



이와 관련해 떠오르는 사건이 있다.

 

남대문 방화사건.

 

난 그 때 뉴스를 보면서, 불타버린 남대문을 보면서, 사람들의 외침, 절규와 그들의 눈물을, 생방송으로 보면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정말로 빵 터졌다. 어찌나 웃기고 역겹던지.

 

그들은 남대문이 불타버린 것이 대한민국 전통문화의 크나큰 상처, 손실로 보았는데, 그것이 같잖았다.

 

남대문 물론 국보 1호로 대단한 문화유산이다. 그것도 유형의.

하지만 서구문화를 동경해 한시빠비 전통문화를 내팽겨치고 없애버린 그들이, 소젖보다 Milk를 좋아하는 그들이. 외국에 팔거리-관광상품-가 아니면 돌보지 않는 그들이. 좋은 것을 보러 유럽으로 날아가는 그들이. 동강이 아니라 세느강과 허든슨강을 사랑하는 그들이. 남대문을 빙 둘러싸고 남대문이 탄다고 민족의 자존심이 탄다고 슬퍼하고 있다. 발을 동동굴리며 오열하고 있다. 이 얼마나 쓰디쓴 유머인가? 뉘라손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닥종이, 전통 나룻배, 가산오광대 등-이 밖에도 무진장 많다- 무형문화재는 후계자가 없어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있다. 그들의 죽음에는 조문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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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내느냐는 친구의 말에.

 

무지개님(http://blog.naver.com/tensiyun)의 그림을 펐다.

 

-패러디 되긴 했지만-그랜져 광고다. 예전부터 보였는데 아직까지도 이걸로 선전되고 있다.

 

만약 내 친구가 저 지랄을 한다면,

 

나는 "넌 이제 내 친구 아냐! 개장간장국간장아!"라고 외쳐 버릴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광고는 어쩌면 현존 사회 이데올로기의 친숙함과 신선함에 의탁한 유목적적 표현일텐데, 다시 말해 우리나라에서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의 의식을 반영한 산물일텐데, 이 광고를 보면 너무 슬프다.

 

나와 너의 한 모습.

 

'세바퀴'에서 본 건데, 우리나라 20, 30대 여성이 바라는 최고 조건은 "돈"이란다. 그 현실.

바라지는 않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현실.

 

우리의 모습이다.

 

어제 본 '얍! 활력천국 시즌2'에서 본 남해군 남면 홍현마을의 한 할아버지의 멘트.

"지금은 돈세상인데. 나는 돈이 없어 활동을 못 한다."



아무래도 그림을 퍼온 무지개님의 멘트가 마음에 걸린다.

 

"아직도 차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대변한다는 조금은 유치한...ㅋㅋㅋ"

 

그리고 댓글 중에

 

"아직까지도 차가 사회적 지위와 자존심을 나타낸다는 분위기를 조장하는 광고죠. ㅎㅎ"

 

내 생각에는 이 광고는 조장하는 것도 아니고 유치한 것도 아니다.

 

조장하다는 것은 네이버 국어사전에

[명사]도와서 자라게 . 주로 부정적인 의미쓴다.

로 나온다.

 

조장하는 광고는 공익광고이다. "흡연은 죽을 죄입니다!" 이런 식.

 

하지만 상품광고는 다르다.

상품광고는 내밀한 욕망을 집어내어 펼쳐 보여 주면서 상품을 사면 그것이 실현되리라는 기대를 심어준다. 그 내밀한 욕망이 의식하기 어려운 것일수록 광고는 더욱 참신함을 갖추게 된다. 그 욕망을 꼭 집어내어 상품과 연결시키는 작업으로 인해 욕망이 드러나기 때문에 조장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욕망은 광고를 통해 면죄부를 부여받는다. 이 부풀어진 욕망이 지갑을 열게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서울우유였던가? 미스유가 나오는 광고가 있다. 두 개가 제작되었는데, 하나는 학생보다 키작은 선생이 나오고, 또 하나는 동창보다 늙어 보이는 아줌마가 나온다. 키 크고 싶다는 열망, 젊고 예쁘게 보이고 싶다는 바람이 이 특정한 상표의 우유로 인해 충족되라는 내용이다. 이런 두 가지의 욕망이 여기서 조장되는 것은 아니며, 단지 그런 욕망이 보편적인 것임을 확인하는 동시에 긍정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광고가 욕망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꼬집어 내어 상품과 연결하는 것일 뿐이며, 그 내밀한 욕망은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진 것이어야 한다. 몇몇만 특수하게 가진 욕망으로는 당연히 돈벌이가 안 될 것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한 사회의 일반적이고 내밀한 욕망을 광고를 통해 확인할 수가 있다.

 

위 그랜져 광고에 이러한 확인 작업을 해 보면,

 

친구가 안부를 즉 현재 상태를 물어봤는데 다른 친구는 그랜져로 '삐빅'거린다. 현재 상태가 그랜져라는 것이다. 자신의 현재 상태는 '애가 인제 갓 말을 하기 시작하는데, 아빠라는 소리가 너무 듣기 좋고, 아내 생일을 까먹어서 집안이 아직 저기압이고, 이것 때문에 이런 고민이 있고, 저것 때문에 저런 생각이 든다." 따위가 아니라, "삐빅"이라는 것이다. 즉 나의 상태는 이 그랜져가 말해준다는 선언이다.

 

이제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것은 소유하고 있는 재화의 양과 질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치한 것이 아니라 무서운 것이다. 이제 우리는 소유하고 있는 물건의 목록을 적은 종이를 유대하고 하고 다니다가 자기를 소개할 때 그 종이를 척!하고 보여주면 되는 세상이다.

 

이것은 단순히 "차가 사회적지위를 나타내주는 지표에요."를 넘어서는 일이다. 이미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욕망-소유로서의 자기소개-은 돈많은 몇몇, 혹은 특수사회의 것이 아니라 보통의 일반적인 욕망이다. 점심먹고 스타벅스 테이크아웃컵을 자랑삼아 들고 다니는 20, 30대의 커리어우먼층, 혹은 그런 모습을 열망하는 일부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과 관련하여 심각하게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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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GE AGAINST THE MACHINE RNC

 

지난 9월인가 미국의 미네소타주 한 도시에서 공화당 전당대회가 벌어지고 있었고

가까운 곳에서 음악 페스티벌 비슷한게 열리고 있었다.

 

거기에 등장한 밴드가 렙 메탈의 전설인 Rage Against The Machine !!

하지만 전투경찰들은 전당대회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무대 전원을 차단시키고 무대를 철수시켜버린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인가?

 

자신들은 그들이 두렵지 않고 다만 그들이 자신들을 두려할뿐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사회부조리를 날카롭게 꼬집는 행동파 밴드의 참모습이 아니던가!!

 

곡 순서

1. Bulls On Parade

2. Killing In The Name

[출처] RATM 거리공연 - Rage Against The RNC|작성자 이동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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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재결합 소식에 대한 정확한 기사가 없을까 하여 공식 홈피를 들렀다가,

NEWS에 RNC 영상이 있다길래 네어버에 검색해 관련 블로그의 글을 찾았다.

드라로차의 첫 마디-"Rage aginst the machine is Back!"-에 어찌나 설레이던지. 너무 좋다.

그들은 함께 해야 한다.

영상은 조금 감동적인 면이 있다. 영어라서 당최 모든 멘트를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근데 이게 지난 9월 영상이니까. 도대체 최근 소식은 어디에 있을까나?

공식 홈피에서도 이 뉴스가 3월 8일자이니 원.

음반 잡지를 끊은 지 오래되어 이런 저런 소식을 접할 구멍을 찾기 힘들구나.

난 공부를 해얄 텐데 원.

앨범이 기다려진다. 기다려도 되는거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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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수업의 결과로 희망사항.

내가 만약 운이 좋아 교사가 되어 수업을 했다면,

 

그리고, 그 수업을 받은 학생이 집에 가서 어머니와 대화를 했다면,

 

 

엄마 : "얘야 학교 갔다 왔니? 그래, 오늘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니? 선생님이 무엇을 가르쳐 주던?"

 

학생 : "응? 학교에서 배운 거? 없어-. 선생님은 아무 것도 가르쳐 준 것이 없어."

 

엄마 :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수업을 안 했니?"

 

학생 : "응. 수업은 했는데, 죄다 내가!-자랑스럽게- 그리고 우리가 알아낸 거야. 선생님은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질 않고, 그냥 이것저걱 물어보기만 해. 우리 반 아이들은 선생님보다 더 똑똑한 거 같애."

 

엄마 : "저런, 원 나쁜 선생님이구나! 그래 너희들이 뭘 알아 냈는데?"

 

학생 : "응, 이거랑 저거랑. 그런데 이건 좀 어려워서 내가 책을 좀더 찾아 봐야 할 것 같애."

 

 

이런 대화였으면 좋겠다. 내가 가진 대단한 희망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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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교사에 대한 반감.

나는-대한민국 교사가 되길 바라면서도- 대한민국 교사에 대해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먼저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 글이 나 자신만이 옳고 나머지는 모두 그릇되었다는 주장을 하려는 글이 아니다, 또한 우리나라에는-그래도- 좋은-나름대로 애쓰는- 선생님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교사에 나는 왜 반감을 가지는 것인가라는 것을 스스로 납득하고자 쓰는 글이다.)

 

지금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일제고사 때문에 불거진 교사들의 비겁함이 반감의 원천일까? 그들은 대한민국 공무원으로서 교사이며 제도에 대해 약간의 반발을 하지만 생계 즉 돈 때문에 적극적 목소리를 내지 못 하는 그들의 상황을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당장 짤리면 뭐해서 먹고 살 것인가? 이것 때문만을 아니다.

 

그럼 지식-권력 구조를 지지하고 재생산하는 그들의 역할 때문일까?

 

국어 교사이면서 교과서와 관련된 책 이외의 다른 문학 작품을 읽지 않는 그들의 나태함 때문일까? 등등.

 

모든 것이 반감의 이유가 되겠지만, 그 근본적인 원천은 무엇일까?

 

언젠가 교사가 된 지 3, 4년이 된 동기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그녀의 말인 즉, 무능력한 교사들이 많다는 것이다. 왠고 하니 자신은 교육과정에 맞춰 학습목표를 만들고 내용을 선정하고, 학습활동을 조직하고 평가도 최대한 애를 써서 만드는데 그렇지 못한 교사들이 많다는 것이다. 학생들을 위해 -교육과정에 충실하도록- 수업연구를 열심히 하는 듯 보였다. 그/그녀는 말하자면 능력있고 애를 쓰는 교사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나라의 국민기본공통교육과정 그 자체에 의문이 든다. 그 교육과정 내용 하나하나를 따져서 그 부분에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문제제기가 아니다.

 

푸코에게 이런 용어가 있다. ORF, PRF. official recontextualizing field는 교육과정의 공식적인 재맥락화 단계이고, pedagogic recontextualizing field는 교수를 위한 재맥락화 단계를 말한다. 무엇인고 하니 공식적인 재맥화 단계는 각종 학문에 의해 생산된 지식을 국가 이데올로기에 맞추어 교육과정으로 만드는 단계이고, 이것을 이용하여 교육현장의 틀에 맞게 재구화하는 것이 교수를 위한 재맥락화 단계이다. 위에서 언급한 친구가 애쓰는 일은 ORF에 맞추어 PRF를 제대로 구현하는 일이다.

 

이것이 과연 옳은가하는 의문이 든다. 현재 유능한 교사는 PRF를 제대로 실행하는 교사이며, 무능한 교사는 그것을 제대로 할 능력이 모자라는 교사이다.

 

교사는 근본적으로 학생을 기르는 일을 한다. 교사는 전적으로 자신의 일이 학생의 지식에 관련된 것 뿐만 아니라 학생의 삶에 총체를 신경써야 하며, 학생은 교사의 지식 영역 뿐만 아니라 전인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 볼 때 교사의 수업행위는 학생의 삶-현재와 미래-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PRF가 그런 것일까? 일제고사가 그런 것일까?-일제고사는 입시위주, 삶의 경쟁장에서 역설적으로 도움이 된다- 국민기본공통교육과정에 짜맞춰 학생을 양산시키고, 장차 사회의 경쟁의 장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튼튼한 전사를 배출하는 것이 학생의 삶을 위한 것일까?

 

현재의 신자유주의적인 논리에 맞추자면 딴은 옳다. 그것은 학생의 삶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일제고사도 국가와 학생을 위한 것이다. 경쟁을 하려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시 된다. 일제고사를 거부하면서 대학입시교육을-지식나열과 문제풀이 수업- 하는 것은 모순적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입시제도를 거부하면서 ORF와 PRF를 긍정하는 것은 모순적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학생을 잠재력을 개발하여 전투에 능한 전사를 키우는 동시에 학생의 삶을 위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스스로가 경쟁의 장에서 피터지게 싸운 영광으로 교사가 되고 난 뒤에 학생들을 경쟁으로 모는 것을 부당하다고 볼 능력이 있을까? 없을까?

 

점점 내가 가진 반감의 원천은 오리무중으로 빠진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 혼자가 아니라 모든 것과 연결되어 그물을 이루는데 그 그물코 하나를 내가 정확히 지적하는 것이 가능한지 의문이 든다.

 

결론적으로 대한민국 교사의 유능함, 빗나간 열정, 나태함, 비겁함, 그들이 가진 다양한 모순 등의 재료를 잘 섞은 비빔밥의 맛을 나는 '반감'이라고 느끼는 듯하다. 딴은.



사실은 나의-내 친구가 지적한 관상학적으로- 반골상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ㅋㅋ

 

그리고 나의 반국가적인-반단일체제의- 대안적 삶이 가진 세계관에 기인하는 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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