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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 제1분책』의 「서문」

『정치 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 제1분책』의 「서문」- 김태호 번역 2003
 
 나는 부르주아 경제의 체계를 다음과 같은 차례로 고찰한다. 자본, 토지 소유, 임금 노동, 국가, 대외 무역, 세계 시장. 앞의 세 가지 표제에서 나는 근대 부르주아 사회를 이루고 있는 세 개의 커다란 계급들의 경제적 생활 조건을 연구하고 있다. 다른 표제 세 가지의 연관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을 다루는 첫 책의 첫 편은 아래의 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1. 상품, 2. 화폐 또는 단순 유통, 3. 자본 일반. 앞의 두 개의 장이 본 분책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전체 자료는 내게 각론의 형태로 있는데, 그것들은 꽤 띄엄띄엄 떨어진 시기들에, 출판을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자기 이해理解를 위해 적어놓은 것들이며, 제시된 계획에 따라 그것들을 서로 연관지어 다듬는 것은 외부 상황에 달려 있다.
 
 대충 써 두었던 일반적인 서설은 발표하지 않을 것인데,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증명되어야 할 결론들을 앞당겨 보여 주는 일 하나 하나가 내게는 [서술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고, 더욱이 어쨌거나 나를 따르려는 독자는 개별적인 것으로부터 일반적인 것으로 오르기를 결심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고유한 정치-경제학 연구의 행보에 대한 약간의 암시가 오히려 여기에서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나의 전공은 법률학이었는데, 하지만 나는 그것을 철학과 역사 외에 부차적인 학과로 행했다. 1842년과 43년에『라인신문』편집자로서 나는 처음으로 이른바 물질적 이해 관계에 대해 한마디해야만 하는 곤경에 처했다. 목재 절도와 토지 자산 분할에 관한 라인주 의회의 심의, 당시 라인주 주지사였던 샤퍼 씨가 모젤 지역 농민들의 상태와 관련하여『라인신문』과 시작한 직무상의 논쟁, 끝으로 자유 무역과 보호 관세에 관한 토론 따위가 경제 문제에 내가 몰두하게 되는 최초의 동기를 제공했다. 다른 한 편, “앞으로 나아가려는” 선의가 여러 모로 전문 지식에 필적하는 일이 잦았던 그 시절에, 프랑스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를 약간 철학적으로 채색한 메아리를 『라인신문』에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러한 서투름에 반대한다고 언명했지만, 동시에 『아우크스부르크종합신문』』과의 논쟁에서 나는 그때까지의 나의 연구로는 그 프랑스 사조들의 내용 자체에 대해 어떠한 판단도 감히 내리지 못하겠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기도 했다. 나는 신문의 논조를 누그러뜨림으로써 그 신문에 떨어진 사형 선고를 되돌릴 수 있을 것이라 믿던『라인신문』재정 지원자들의 환상을 도리어 기꺼이 이용하여, 공개된 무대에서 연구실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내게 밀려들던 의문의 해결을 위해 착수한 첫 번째 작업은 헤겔의 법철학에 대한 비판적 검토였는데, 1844년에 빠리에서 발간된『독일 프랑스 연보』에 서설이 실린 그 작업이었다. 나의 고찰은 다음과 같은 결과에 이르렀다. 법 관계들 및 국가 형태들은 그것들 자체로부터 또는 인간 정신의 이른바 일반적 발전으로부터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적 생활 관계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 즉 헤겔이 그 전체를 18세기의 영국과 프랑스의 선행자들을 따라 “시민 사회”라는 이름 아래 총괄했던 물질적 생활 관계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 그렇지만 시민 사회의 해부학은 정치 경제학에서 찾아져야만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 정치 경제학의 탐구를 나는 빠리에서 시작했다가 브뤼셀에서 이어갔는데, 나는 기조 씨의 추방 명령 때문에 그곳에 이주해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 분명해졌고 또 일단 얻어지자 나의 연구의 길잡이 역할을 했던 일반적 결론은 다음과 같이 짧게 정식화될 수 있다. 자신의 생활의 사회적 생산에서, 인간은 특정한, 필연적인, 자신의 의지로부터 독립된 관계들에 들어서는데, 물질적 생산력의 특정한 발전 단계에 조응하는 생산 관계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생산 관계들의 전체가 사회의 경제 구조, 진정한 토대를 이루는데, 일종의 법률적이고 정치적인 상부 구조가 이 토대 위에 서고 특정한 사회적 의식 형식들은 이 토대에 조응한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 방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 과정 일반의 조건이 된다. 인간의 의식이 그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 의식을 규정한다. 일정한 발전 단계에 오면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기존의 생산 관계, 또는 그 생산 관계의 법률적 표현일 뿐인 소유 관계와 모순에 빠지는데, 그 생산력은 이제까지 그러한 관계들 내부에서 운동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관계들은 생산력의 발전 형식에서 생산력의 족쇄로 돌변한다. 그때 사회 혁명의 시대가 찾아온다. 경제적 기초의 변화와 함께 거대한 상부 구조 전체가 서서히 또는 급속히 전복된다. 이러한 전복을 고찰할 때는 언제나 구분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경제적 생산 조건들에서의 물질적인, 자연 과학적으로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전복과 인간이 이러한 갈등들을 의식하게 되고 싸워 해결하게 되는 법률적, 정치적, 종교적, 예술적, 또는 철학적 형태들, 간단히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적 형태들에서의 전복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개인이 어떠한지를 그 개인이 자부하는 것에 따라 판단하지 않듯이, 그러한 전복의 시기는 그 시기의 의식에서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적 생활의 모순에서 나오는, 즉 사회적 생산력과 생산 관계 사이의 현존하는 갈등에서 나오는 의식에서 판단될 수 있다. 한 사회 구성체는 그 구성체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생산력이 모두 발전하기 전에는 결코 몰락하지 않으며, 새로운 더 높은 생산 관계들은 그 생산 관계의 물질적 존재 조건들이 낡은 사회 자체의 품에서 터져 나오기 전에는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류는 늘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과제만 제기하는 셈인데, 그 이유는 더 자세히 고찰해 보자면, 과제 자체는 그것의 해결의 물질적 조건들이 이미 현존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형성의 과정 중에 있다고 파악되었을 때라야 생길 뿐이기 때문이다. 커다란 윤곽만 보자면, 아시아적, 고대적, 봉건적, 현대 부르주아적 등의 생산 방식들이 경제적 사회 구성체의 순차적인 시기들이라 할 수 있다. 부르주아 생산 관계가 사회적 생산 과정의 마지막 적대적 형태이고, 적대적이라 함은 개인적 적대의 의미가 아니라 개인들의 사회적 생활 조건들에서 싹트는 적대라는 의미인데, 하지만 부르주아 사회의 품에서 발전하는 생산력들이 동시에 이러한 적대의 해결을 위한 물질적 조건들을 창조한다. 따라서 이 사회 구성체와 함께 인간 사회의 전사前史는 종결된다.
   
 나는 경제적 범주들에 대한 프리드리히 엥엘스의 천재적인 개설이 (『독일 프랑스 연보』에) 실린 이래로 그와 지속적으로 글로 생각을 교환해 왔는데, 그는 다른 길로 (그의『잉글랜드 노동 계급의 처지』를 참조) 나와 똑같은 결론에 이르렀으며, 그리고 1845년 봄에 그 역시 브뤼셀에 정착하자 우리는 독일 철학의 이데올로기적 견해에 대한 우리의 견해의 대립점을 함께 완결시킬 것을, 사실상 우리의 예전의 철학적 양심을 청산할 것을 결의하였다. 기도企圖는 헤겔 이후의 철학에 대한 비판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두꺼운 두 권의 8절판의 원고가 베스트팔렌의 출판 장소에 도착하고 한참이 되었을 때, 우리는 사정이 바뀌어 출판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가 원고를 쥐들이 쏘는 비판에 기꺼이 내맡길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우리의 주요한 목적에 다다렀기 때문인데, 그 목적이란 자기 이해理解였다. 우리가 당시 이러저러한 측면에서 독자들에게 내놓은 견해들은 여러 저작들에 흩어져 담겨 있는데, 나는 그 가운데서 엥엘스와 내가 공동으로 작성한 『공산주의 당 선언』과 내가 발표한 「자유 무역에 관한 연설」만을 언급하도록 하겠다. 우리의 견해의 결정적인 논점들이 비록 논쟁적이긴 해도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제시된 것은 1847년에 푸르동을 겨냥하여 나온 나의 저술 『철학의 빈곤...』이다. 내가 브뤼셀독일인노동자협회에서 같은 문제를 놓고 행한 강연을 한데 엮은 것인 “임금 노동”에 관해 독일어로 씌어진 논문은 2월 혁명으로 때문에, 그리고 그로 인해 일어난 벨기에로부터의 나의 강제적인 추방 때문에 인쇄가 중단되었다.
  
 1848년과 1849년의 『신라인신문』 발간과 그 뒤에 일어난 사건들이 나의 경제학 연구를 중단시켰는데, 그 연구는 1850년에서야 런던에서 재개될 수 있었다. 대영박물관에 쌓여 있는 정치 경제학의 역사에 관한 방대한 자료들, 부르주아 사회의 관찰을 위해 런던이 충족시켜 준 유리한 입지, 끝으로 캘리포니아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금 발견과 함께 부르주아 사회가 진입한 것처럼 보인 새로운 발전 단계 따위가 나로 하여금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것과 새로운 자료를 비판적으로 독파할 것을 결심하도록 만들었다.
 이 연구는 부분적으로는,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학과들을 다루기도 했는데, 그로 인해 나는 짧건 길건 지체해야만 했다. 그러나 특히 내가 뜻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 것은 영리 활동의 전횡적인 필연성 탓이었다. 8년 동안 이루어진 제일의 아메리카 영자 신문 『뉴욕 트리뷴』에 대한 나의 기고는, 내가 본래적 의미의 통신원 기고에 관계한다는 것이 특별한 일일 수밖에 없었던 탓에, 연구의 심한 분산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잉글랜드와 대륙에서의 두드러진 경제적 사건들에 관한 기사들이 나의 기고문의 주요 부분을 이루었기 때문에, 나는 정치 경제학이라는 본래의 과학 영역의 바깥에 있는 실제적인 세부 사항들에 정통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치 경제학 분야에서의 나의 연구 경과를 이렇게 개괄한 것은, 사람들이 나의 견해를 어떻게 판단하고 또 그것이 지배 계급의 이해 관계에 따른 선입관과 아무리 덜 일치한다 해도 나의 견해가 과학적이고 장기간에 걸친 연구의 결과임을 증명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과학의 입구에는 지옥의 입구에 그렇듯 다음과 같은 요구가 내걸려야 한다.
 여기서 너는 일체의 의심을 죽여야 한다.
 어떠한 비겁도 여기서 스러져야 한다.
 Qui si convien lasciare ogni sospetto
 Ogni vilta convien che qui sia morta.

 - 1859년 1월 칼 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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