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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변의 여인>


 

(엔키노 사진)

 

위 장면이 그래도 가장 로맨틱했었던.

그렇다고 이 영화에서 로맨틱함을 찾거나 기대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외의 로맨틱한 부분, 반가움. <오,수정>에서도 잠깐 그랬던 것 같아. 거기도 해변이었었어. 아니, 강변이었었나.. 정보석과 이은주가 껌종이를 발견하고 둘이 살짝 입맞춤을 했었었지.

 

저 위 장면에서 문숙은 그런다.

"우주에서 의식이 있는 종이 정말 우리 밖에 없다면, 우리가 이렇게 우주를 바라봐주니 우주는 얼마나 고맙겠어요. 우주는 외롭지 않아."

"제가 믿는 것은, 제가 정말정말 믿는 것은, (쉬고) 별이에요."

홍상수도 가끔 이런 귀여운 대사를 쓴다.

결국 김중래는 문숙을 끌어안고 키스를 하는데, 이것은 분명 홍상수의 어느 키스였을 것이다.

여자는 술에 취해 그렇게 귀여운 대사를 하고, 홍상수는 참지 못해 키스를 하였다.

참지 못하겠다는 느낌이 어찌나 컸던지 우악스러운 키스를 한다.

남자가 키스를 한다고 새삼 몸을 뺄 연륜도 아니면서도 여자는 몸을 흔든다.

키스가 너무 우악스러워서였다.

결국 귀엽고 로맨틱한 저 장면은 우악스러운 키스 때문에 왈칵 질리고만다.

저런 우악스러움을 마구 퍼붓는 키스에 대해 문숙 정도 된 여자라면, 왜 이렇게 난리야(혹은 지랄이야)?라고 한 번 어이없는 표정도 해주면 왈칵 좋았을텐데, 역시 홍상수는 남자라 그의 한계다.

 

 

내가 홍상수가 변했다고 느낀 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였던가.

그 영화 즈음에서 홍상수가 너무 귀여워졌다고 난리난리했던 기억이 난다.

홍상수가 변했다고 좋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해말길.

나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다 좋았다.

그런데 <해변의 여인>을 보고나니, 홍상수가 그 무렵에 변하면서 귀여워진 것이 아니라, 원래 저렇게 귀여운 사람이었다,라는 걸 이제서야 알겠다.

<해변의 여인>을 보니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원래부터 그런 사람인데 드러나는 부분이 영화만큼이라 조금씩조금씩 알게되었던 것. 그러고보니 이제 꽤 그 사람을 알고있는 느낌. 길거리에서 만나면 친한 척이라도 해야할 듯.

 

<해변의 여인>도 변함없는 홍상수표.

재미도 변함없이 만점.

쌍쌍을 이루면서 일어나는 사건이란 형식도 여전하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강원도의 힘>에서는 주인공 남자가 설악산으로 갔는데, 그 사실을 모르는 여자도 설악산으로 가고, 남자와 스쳐갔던 여자가 실족해서 죽는다는 것을 주인공여자가 경찰에 신고하고... <생활의 발견>에서 예지원과 추상미의 의도적인 쌍쌍대비나..)

그것은 작위적이란 느낌이 들 법한데도 여전히 속아넘어가주게 되는 건, 카메라가 너무 솔직해서인가. 그의 영화를 보고있으면 옛날의 무슨 영화를 보고있는 느낌. 썰렁한 해변에 덜렁 서있는 남녀들-잘 모르지만 에릭 로메르의 무슨 영화를 봤을 때도 저런 장면이 있었던 것 같고-, 그러다가 앉아서 술먹는 장면, 가운데 테이블, 등장인물들을 고루 배정한 화면, 그러다가 누군가 말을 하면 그 사람을 쭈욱 줌 인해서 클로즈업. 이 웬 솔직한 카메라란 말인가.

이 카메라만으로도 참으로 정겨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홍상수만의 주장이 아닐 것이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란 어찌나 기기묘묘한지, '기적'과 같아서,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의도한 것이든 내 외부에서 다른 식의 변주를 타고 다시 내게로 돌아와 한 쌍을 이룬다.

 

이를테면, 나는 오늘 아침 화장실에서 금요일 신문을 읽고있는데, 거기엔 내가 10년 전에 만났었던 인물이 실려있었다. 에스에프의 대부가 되었다. 내가 10년 전에 그를 만났을 때도 에스에프때문이었다. 그를 만나서 나는 알 수 없는 에스에프계의 용어를 잔뜩 듣고 마치 잠시 외국에라도 나갔다온 듯한 느낌을 받았었었다. 그 후 화장실에서 나와 나는 에스에프 영화비디오를 하나 본다. 그것은 내가 외국에 나갔다가 헌 비디오가게에서 싸길래 사왔던 것이다. 영화를 보는 도중 나는 갑자기 이 에스에프영화를 10년 전의 그 남자에게 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가 꽤 희귀한 것이라서. 그래서 만난다.

음, 후지군.

예를 들어보려했는데, 어렵다.

 

 

그래도 바로 전의 영화<극장전>이 너무 훌륭해서 그것보다는 실망했었다.

<극장전>은 지나가는 대사들, 지나가는 인물들이 다 극적이면서, 뭔가 암호라도 되는 것 같아 죄다 기억에 남는,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처음부터 끝까지 죄다 의미심장하다고 느끼면 의미심장하고 죄다 코미디다 느끼면 죄다 코미디같은 훌륭한 영화였었다.

이번에는 지나가는 대사들, 지나가는 인물들은 다 그냥 지나가는 대사와 인물 같았다.

똘이를 둘러싼 헤프닝은 쓸 데 없어 보이기도 했다.

선희랑 그녀 친구의 조깅도 그렇고.

아, 또, 처음 갔던 횟집에서 종업원이랑 싸웠던 것도.

 

 

훌륭했던 것 중 하나, 고현정의 연기.

그 여자가 그렇게 연기 잘 하는 줄은 몰랐었네.

도마뱀,도마뱀,어쩌구저쩌구노래를 부르며 수풀 사이를 걷는 것, 그리고  얼굴이 좋아요,라는 말에 고마워요,라고 대꾸할 때, 오 너무 잘해.감탄, 감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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