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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선생의 염원과 한국사회의 오늘 - 곽노현

* 아래의 글은 방송대 법학과 곽노현 교수님의 글 입니다. 출처는 분명하지 않으나 "사랑방시평"으로 표시가 되어 있던 것으로 보아, 인권운동사랑방의 간행물에 게재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작성시기는 1997년 3월 15일인데, 약 8년전의 시평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변함 없는 우리 사회 기득권세력의 일면 등을 엿볼 수 있어 옮겨 봅니다.



김구선생의 염원과 한국사회의 오늘

                      
곽 노 현
                          

  며칠전 친구의 후원회 모임에 가기 위해 처음으로 지하철 5호선을 타보게 되었다. 지하철 5호선은 90년대의 경제력을 반영하듯 다른 지하철 노선보다는 훨씬 번듯하고 쾌적했다. 여의도역을 빠져나와 길 양측에 늘어선 고층빌딩군을 지나면서 그날따라 자꾸만 김구선생의 말씀이 기억났다. 군사력은 국토를 방위할 만하면 되고 경제력은 먹고 살만하면 되지만 문화만은 세계일등이 되었으면 한다는 취지의 말씀이 그것이다. 저마다의 특색을 뽐내는 고층빌딩들이 숲을 이룬 것을 보면서 나라의 부가 이만큼 쌓였으니 이제 무턱대고 성장에만 힘 쓸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며 균형과 조화를 꾀하는 일에 보다 신경을 써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에 필요한 정치도덕성과 문화능력을 기르기만 하면 지속적이고 인간중심적인 경제성장도 절로 될 것만 같았다.

  문제는 한보사태나 김현철 사태에서 보듯이 우리에게 이러한 능력이 한참 결여되었다는 데 있다. 사실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 사회의 경우 정치력, 경제력을 막론하고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된 반면 그에 대한 감시와 통제장치는 지극히 미흡하다는 데서 연유한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대통령은 그야말로 제왕적 권력을 누린다. 헌법재판소장과 대법원장을 임명하고 감사원장과 안기부장을 임명하며 총리와 장관, 기타 고위 공무원을 임명한다. 여당몫인 국회의장 및 국회 상임위원회 위원장도 실질적으로는 임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밖에 대통령이 임명하는 각종 위원회와 국영기업체 임원도 부지기수다. 대통령은 이러한 임명권을 행사하면서 인사청문회 한 번 거치지 않는다.

  한편 국회는 평균 재산신고액이 33억원에 달하는 부자 국회의원들로 구성돼있다. 평균재산액으로 치면 우리 국회는 국내에서 재벌단체인 전경련 다음으로 부자클럽일 것이고 세계의 의회중에서 최고로 부자일 것이다. 이렇게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부자 국회가 법을 만드니 법은 자연히 부자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 반면 근로서민대중의 권익을 보호하는 노동조합의 힘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우선 공무원, 교사등은 노조결성권이 없다. 그나마 노조결성권이 있는 일반근로자들중 15%만이 간신히 노동조합에 가입해있을 뿐이다. 그것도 강력한 산업별 노동조합에 속해있는 것이 아니라 기업별 노동조합으로 갈갈이 찢겨져있다. 더욱이 이들중 30% 가까이는 공익사업장에 속해있어 단체행동을 할 수 없는 반쪽 노조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공직후보 지원이나 정치자금 제공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이렇듯 각종 악법으로 얽어매고도 안심이 안돼 정부는 뒷돈을 대주며 한국노총을 어용화하고 조강지처로 삼아왔다.  

  이런 기본적 구도가 바뀌지 않는 이상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며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일은 지난하다. 지금 거론되는 종합과세논쟁은 이 점을 잘 말해준다. 종합과세제도는 은행이자소득이 연간 4천만원을 넘는 경우에만 적용된다. 은행이자소득이 연간 4천만원에 달하는 수준이면 총재산이 최소한 30억원 이상은 된다. 현재 약 4만명 정도가 대상이라고 한다. 금융실명제 때문에 못살겠다고 하소연하는 이들도 이 사람들일 것이다. 이들은 최근 종합과세기준을 올리고 금융실명제를 완화하라고 한목소리로 요구하고 있다. 4천만명의 다른 국민들은 모두 조세정의 확립과 부정부패 방지 차원에서 종합과세의 확대 및 금융실명제의 유지를 바라고 있는데도 4만명에 불과한 이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법과 정책이 백팔십도로 바뀌고 마는 현상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30여년만에 찾아온 작년의 노동법 개정국면은 이른바 3금으로 대표되는 노동악법체제를 철폐함으로써 이러한 비민주성을 극복해나가는 제도적 단초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었다. 그러나 이번 노동법 개정의 실제내용을 살펴볼 때 노사정 간의 세력불균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공무원, 교사의 단결권은 여전히 부정되었으며, 노동조합의 정치활동금지 역시 여전한 상태다. 오히려 대체근로 허용등 노조의 교섭력을 현저히 약화시키는 조항들이 대거 삽입되었다. 그렇기에 김구선생의 인간적이기 그지없는 염원이 달성되기에는 여전히 요원한 상태다. 하지만 어쩌랴. 이만큼 쌓았으면 이제 더쌓기 위해서라도 ‘나누는 도덕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으니! 갈길이 멀어도 믿음과 소망으로 꾸준히 나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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