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이 답답할 때 가끔 읽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시 입니다. 출처는 창작과비평사의 "茶山詩選"(송재소 역주)입니다. 통쾌한 일1 달포 넘어 찌는 장마 퀴퀴한 냄새 아침저녁 사지가 맥없이 노곤터니 초가을 푸른 하늘 맑고 더 넓어 해맑은 하늘에 구름 한점 없어졌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2 산골짝 푸른 시내 흙과 돌이 가로막아 가득히 고인 물이 막혀서 돌아들 때 긴 삽 들고 일어나서 일시에 터뜨리니 우뢰처럼 소리치며 쏜살같이 흘러간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3 푸른 매 날개 묶여 오랫동안 굶주리며 숲 속에서 나래 치다 기진하여 돌아갈 때 때마침 북풍 불어 끈을 풀고 훨훨 나니 바다 같은 푸른 하늘 마음껏 날아가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4 나그네 돛단배 갠 강에 둥실 뜨니 넘실넘실 물결 위에 물새 쌍쌍 날아든다 내려 쏟는 여울목에 배가 이르니 시원한 바람 불어 뱃전을 씻어가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5 지팡이 지쳤어라 높은 산에 올랐더니 구름 안개 겹겹이 눈 아래 막고 있네 이윽고 서풍 불어 맑은 햇볕 내려쬐니 만 골짜기 천 봉우리 일시에 드러나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6 지친 말 절름절름 험한 바위 지나가니 돌부리 나뭇가지에 옷자락이 찢어진다 말 내려 배를 타니 앞길이 평탄한데 석양에 순풍 따라 돛을 높이 달았으니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7 낙엽이 소리 없이 강 언덕에 떨어지고 황혼녘 하늘빛이 흰 파도를 걷어찰 때 옷자락 휘날리며 바람 속에 섰노라니 내가 마치 선학(仙鶴) 되어 흰 날개 씻겨진 듯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8 이웃집 처마 끝이 앞마당을 가로막아 가을날도 바람 없고 맑은 날도 그늘 지네 백금(百金) 주고 그 집 사서 당장에 헐어버려 먼 산 봉우리가 눈앞에 보인다면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9 기나긴 여름날 무더위에 시달려서 등골에 땀이 흘러 베적삼 축축할 때 상쾌한 바람 불어 소나기 쏟아지니 단번에 얼음발이 벼랑에 걸려 있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0 맑은 밤 산골짜기 소리 없어 적막한데 산귀신도 잠이 들고 새 짐승 기척 없네 집채만한 큰 바위를 번쩍 들어 뒹굴리니 천길 낭떠러지 우뢰 같이 울리누나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1 성(城)에 싸인 서울 땅서 기 못펴고 지내기가 병든 새 조롱 속에 갇힌 것 같더니만 말 채찍 울리며 성 밖으로 나아가니 아득한 산과 들에 야색(野色)이 깔려 있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2 펼쳐놓은 큰 종이에 취중시(醉中詩)가 더디더니 우거진 초목에 후두둑 비 오길래 장대같이 큰 붓을 손에 가득 움켜잡고 크게 한번 휘두르니 먹물 뚝뚝 떨어지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3 장기 바둑 승부를 내 일찍이 모르노라 바보같이 옆에 앉아 구경만 하고 있네 한 조각 여의철(如意鐵)을 가만히 흔들어서 단번에 판 위를 쓸어 없애 버린다면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4 대수풀 외로운 달 밝은 저녁에 고요한 초당에 술병과 마주 앉아 백잔을 들이키고 싫도록 취한 후에 호기롭게 노래 불러 근심 걱정 씻었노라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5 하늘 가득 눈보라 북풍이 차가운데 껑충껑충 여우 토끼 숲 속으로 뛰어 든다 긴 창, 큰 화살에 털모자 눌러 쓰고 생포한 놈 끌어당겨 말안장에 달아맨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6 평화롭게 노니는 푸른 물결 고깃배가 바람 이슬 삼경인데 취해 아니 돌아가네 기러기 우는 소리 놀래어 잠을 깨니 갈대 이불 싸늘한데 초승달이 걸려 있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7 집안 세간 모두 팔아 행장을 꾸리고서 구름처럼 유유하게 타향에서 떠돌다가 뜻 잃은 옛 친구를 길에서 상봉하여 주머니 털어내어 열냥 돈 주었노라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8 가지 끝에 맴돌면서 어미 까치 급히 운다 비늘 달린 시꺼먼 놈 둥지로 기어드네 어디서 호령하며 목 긴 새 날아들어 범 울 듯이 달려들어 머리통을 쪼았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9 거문고 둘러메고 보름밤에 손 왔는데 보람 없이 먹구름이 온 하늘을 덮었어라 시름겨워 옷 여미고 자리에서 뜨려할 때 홀연히 숲 속에서 아리따운 달이 뜨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20 타향땅 귀양살이 대궐 생각 그지없어 등잔불 앞에 앉아 잠 못 이뤄 하는 때에 홀연히 금닭[金鷄] 울어 기쁜 소식 전하려나 집에서 보낸 편지 내 손으로 뜯어보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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