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不亦快哉行 二十首 - 정약용


* 마음이 답답할 때 가끔 읽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시 입니다. 출처는 창작과비평사의 "茶山詩選"(송재소 역주)입니다.


통쾌한 일



1




달포 넘어 찌는 장마 퀴퀴한 냄새

아침저녁 사지가 맥없이 노곤터니




초가을 푸른 하늘 맑고 더 넓어

해맑은 하늘에 구름 한점 없어졌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2




산골짝 푸른 시내 흙과 돌이 가로막아

가득히 고인 물이 막혀서 돌아들 때




긴 삽 들고 일어나서 일시에 터뜨리니

우뢰처럼 소리치며 쏜살같이 흘러간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3




푸른 매 날개 묶여 오랫동안 굶주리며

숲 속에서 나래 치다 기진하여 돌아갈 때




때마침 북풍 불어 끈을 풀고 훨훨 나니

바다 같은 푸른 하늘 마음껏 날아가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4




나그네 돛단배 갠 강에 둥실 뜨니

넘실넘실 물결 위에 물새 쌍쌍 날아든다




내려 쏟는 여울목에 배가 이르니

시원한 바람 불어 뱃전을 씻어가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5




지팡이 지쳤어라 높은 산에 올랐더니

구름 안개 겹겹이 눈 아래 막고 있네




이윽고 서풍 불어 맑은 햇볕 내려쬐니

만 골짜기 천 봉우리 일시에 드러나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6




지친 말 절름절름 험한 바위 지나가니

돌부리 나뭇가지에 옷자락이 찢어진다




말 내려 배를 타니 앞길이 평탄한데

석양에 순풍 따라 돛을 높이 달았으니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7




낙엽이 소리 없이 강 언덕에 떨어지고

황혼녘 하늘빛이 흰 파도를 걷어찰 때




옷자락 휘날리며 바람 속에 섰노라니

내가 마치 선학(仙鶴) 되어 흰 날개 씻겨진 듯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8




이웃집 처마 끝이 앞마당을 가로막아

가을날도 바람 없고 맑은 날도 그늘 지네




백금(百金) 주고 그 집 사서 당장에 헐어버려

먼 산 봉우리가 눈앞에 보인다면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9




기나긴 여름날 무더위에 시달려서

등골에 땀이 흘러 베적삼 축축할 때




상쾌한 바람 불어 소나기 쏟아지니

단번에 얼음발이 벼랑에 걸려 있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0




맑은 밤 산골짜기 소리 없어 적막한데

산귀신도 잠이 들고 새 짐승 기척 없네




집채만한 큰 바위를 번쩍 들어 뒹굴리니

천길 낭떠러지 우뢰 같이 울리누나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1




성(城)에 싸인 서울 땅서 기 못펴고 지내기가

병든 새 조롱 속에 갇힌 것 같더니만




말 채찍 울리며 성 밖으로 나아가니

아득한 산과 들에 야색(野色)이 깔려 있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2




펼쳐놓은 큰 종이에 취중시(醉中詩)가 더디더니

우거진 초목에 후두둑 비 오길래




장대같이 큰 붓을 손에 가득 움켜잡고

크게 한번 휘두르니 먹물 뚝뚝 떨어지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3




장기 바둑 승부를 내 일찍이 모르노라

바보같이 옆에 앉아 구경만 하고 있네




한 조각 여의철(如意鐵)을 가만히 흔들어서

단번에 판 위를 쓸어 없애 버린다면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4




대수풀 외로운 달 밝은 저녁에

고요한 초당에 술병과 마주 앉아




백잔을 들이키고 싫도록 취한 후에

호기롭게 노래 불러 근심 걱정 씻었노라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5




하늘 가득 눈보라 북풍이 차가운데

껑충껑충 여우 토끼 숲 속으로 뛰어 든다




긴 창, 큰 화살에 털모자 눌러 쓰고

생포한 놈 끌어당겨 말안장에 달아맨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6




평화롭게 노니는 푸른 물결 고깃배가

바람 이슬 삼경인데 취해 아니 돌아가네




기러기 우는 소리 놀래어 잠을 깨니

갈대 이불 싸늘한데 초승달이 걸려 있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7




집안 세간 모두 팔아 행장을 꾸리고서

구름처럼 유유하게 타향에서 떠돌다가




뜻 잃은 옛 친구를 길에서 상봉하여

주머니 털어내어 열냥 돈 주었노라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8




가지 끝에 맴돌면서 어미 까치 급히 운다

비늘 달린 시꺼먼 놈 둥지로 기어드네




어디서 호령하며 목 긴 새 날아들어

범 울 듯이 달려들어 머리통을 쪼았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19




거문고 둘러메고 보름밤에 손 왔는데

보람 없이 먹구름이 온 하늘을 덮었어라




시름겨워 옷 여미고 자리에서 뜨려할 때

홀연히 숲 속에서 아리따운 달이 뜨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20




타향땅 귀양살이 대궐 생각 그지없어

등잔불 앞에 앉아 잠 못 이뤄 하는 때에




홀연히 금닭[金鷄] 울어 기쁜 소식 전하려나

집에서 보낸 편지 내 손으로 뜯어보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