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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일지4] 걷고 또 걷고...

14일 대장정 네번째 날의 행진,
대야 농민회에서 보령까지 왔습니다.
영진상 강의를 들으신 분의 소개로 하루밤 묶어가게 된 곳이죠.

오늘은 처음부터 긴장된 분위기로 시작했습니다.
40키로를 하루에 걸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지도부(지도를 보고 우리의 길을 알려주는 사람들, 대략, 영진상과 현과 민과 몽사와 추장과 곰)는 지도를 들추고 머리를 맡대고 내일 가야 할 길을 체크했습니다.
산을 넘어 넘어 갈 것이냐, 21번 국도를 타고 쭉 갈 것이냐!
21번 국도를 쭉 타고 가기로 했습니다.
모두 약간 긴장된 모습이었죠.
더구나 그 전날 이미 컴배트 팀은 가장 넘기 힘들다던 3일째 고비를 넘고 있었거든요.
(다리를 내밀고 손을 내밀고 심지어 누구는 배를 내밀고 침을 맞았죠. 종민님의 생맥산에 이어 침이 여럿 살렸습니다)

# 아침 7시 반: 멀고 먼 행진 시작

약간 습했지만, 그다지 푹푹 찌진 않았죠.
산과 풀이 많은 곳이라서 그런지, 더워도 금방 상쾌한 바람이 땀을 식혀줍니다.
오늘의 길잡이는 늘 그렇듯, 만세와 현민. 깃대는 현민과 성국. 길을 지켜주고 선두의 보조를 정하는 건 영진상과 곰. 선전선동은 몽사. 이렇게 되었죠.
오늘은 모두들 “걷기”가 어떤 것인지 절실하게 느끼는 날이 될 게 분명했습니다.
시작부터 속도가 무척 빨랐습니다. 50분 걷고 10분 쉬는 규칙도 오늘은 적용되지 않거든요.
시간이 아니라 거리로 쉬는 시간을 정하기로 했습니다.
지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이차선 도로가 사차선으로 바뀌면 쉽니다”
--;; 그러나 아무리 가도 가도 사차선은 나올 생각을 않더군요.
이런 상태에선 도저히 생각을 할 수도, 구호와 노래에 집중하기도 힘듭니다.
더구나 보령가는 국도는 왜 이리도 꾸불꾸불하고, 오르막길이 많고, 또 온통 시멘트로 발라져 있는 것일까요?
꾸불꾸불하면 앞 사람과 적절한 간격을 맞추기가 어렵습니다.
오르막길은 정말 숨이 찹니다. 아무리 완만한 오르막길이라고 해도, 종아리에 힘을 빡 주고 걸어야 하죠. ^^
흙바닥으로 가면 물집이 별로 잡히지 않습니다. 다양한 크기의 돌과 흙, 무엇보다 듬성듬성난 풀들이 완충작용을 해주거든요. (오늘 걸은 대부분이 발바닥에 커다란 물집이 잡혔어요.) 아스팔트는 대개 논 바로 옆까지 말려 내려가듯 덮혀져 있어서 도저히 어찌할 바가 없었죠.,
아침이라서 조금은 조용하게 걸었죠. 물론 쉴 때마다 외치는 구호는 여전했지만요.

# 대략 11시: 불교 세미나팀원들이 도착!
오르막길을 열심히 오르고 있을 때였어요.
많이 보던 옷을 입은 사람들이 봉고로 한 차가 지나가더니, 곧 붉은 옷을 입은 불교셈나팀과 상봉했습니다.
(아... 우리는 불교팀과 만나면 잠시라도 쉬게 해줄 줄 알았죠... 켁!)
불교팀은 완벽한 대오를 갖추고 와서 바로 행진을 계속했습니다.
그래도 행진대열이 늘어나니 힘이 번쩍 나기 시작했습니다.
걸을 때는 함께 걷는 사람이 가장 중요합니다.
앞 사람의 발을 보고 걷고, 주변 사람의 목소리를 따라서 소리를 내기 때문이죠.
그래서 최대한 지치지 않은 듯이 걸어야 하고, 적절한 간격과 속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속도는 너무나 빠릅니다. 구호를 하거나 노래를 하는 경우는 언덕을 올라 갈 때 깡으로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지쳤다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 민가를 부르며 서로 격려하는 편이 힘이 납니다.

# 대략 12시 : 우리의 돌땡이 지도부, 홧팅!

큰읿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해지기 전에 들어가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영진상이 서두로서 속도를 조절하기 시작했죠.
거의 1시간엔 6키로 정도를 걷는 강행군이었죠.
사람들의 “언제쉬어요.” “얼마나 남았어요”
보채는 소리에도 굳건히 속도와 거리를 지켜냈습니다.
그것도 안정봉을 휘드르며 길을 잡아 주면서 말이죠.
어쩌면 그렇게 미동도 없이 빨리 걷느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어요.
“마음으로 걷는 거 아니야, 마음으로” 영진상은 결국 몸살에 걸렸습니다. ㅜㅜ;

만세는 계속해서 지도를 붙잡고 다녔습니다.
현민이와 성국이가 깃발을 들고 만세와 의논을 했죠.
계속해서 차 안의 채운 언니와도 연락을 했습니다.
그래도 걸어가면서 동시에 앞으로 걸어갈 길을 동시에 생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단지 걷는 것 만으로도 구호조차 못할 만큼 힘든 순간이 자주 찾아오거든요.
우리의 지도부는 걸어가면서 먼저 달려가 길 알아보고, 찻길에서 건너주고, 대오 정리해 주고 정말 힘을 필요로 하는 일들을 했죠.
그러니 잠시 있었던 데쟈뷰 현상 정도는 “죄송합니다!” 하지 않아도, 이미 온마음으로 이해하고 지지를 보내고 있었죠. 더구나 차가 씽씽 달리는 차도로 친구들을 인도하지 않으려는 마음씀 때문이었는 걸요.
아시다시피, 삼일간은 너무나 순탄했고, 심지어 지름길을 발견하기도 했잖겠습니까!
“조직이 시키면 우리는 한다”는 우리처럼 이쁜 지도부를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바꾸어서 외쳐야 합니다. “지도부가 뻥쳐도 우리는 한다”-;;

우리의 선동대장 몽사는 전감과 마이크를 서로 차지하려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선동대장만큼 힘이 필요한 일도 드믑니다. 노래를 하면 가사 불러 줘야 하고, 구호 생각해야 하고, 간격이 떨어지면 격려하면서 대오 정리해야 하죠.
그러나 그보다 더 훌륭한 건, 노래, 구호, 침묵, 독창, 파도타기 등을 적절하게 배치할 수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사람들이 그것을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역할은 지도부 만큼이나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특히 오르막길을 갈 때 노래와 구호를 하는 투쟁의 의지가 돋보였습니다.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사람들을 이끄는 우리의 지도부(지도를 보는 부) 홧팅!

대략 12시 30 : 고전학교에서 준비해 온 점심을 먹다.

워낙 먼길에 약간의 실수가 겹쳐지니 엄청난 속도로 걸었고, 쉬는 시간도 없었거든요. 결국 우리의 지도부 영진상은 몇명을 골라, 점심 먹는 곳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그때만이라고 타라고 하셨어요.
도착하니, 불교 셈나의 점심식사 준비로 배를 든든하게 채웠습니다.
김밥과, 음료수와 호도과자와 과일 모두 모두 감사히 먹었습니다!
(실은 그 전에도 쉬는 시간마다 채운의 버라이어티한 간식을 끊임없이 먹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우리 금강의 노래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를 금강 앞에서 선보였습니다.
그 노래는 우리가 가는 곳마다 점점 가사가 늘어나 벌써 5절이 덧붙여졌답니다.
가사도 멋지고, 행진할 때 리듬도 맞고, 배우기 쉽고, 외우기 쉽고, 가사를 붙이기도 좋아서 정말 훌륭한 노래입니다. 곧, 뜰 것 같습니다. ^^


1시 30부터: 자기 자신과의 투쟁, 속력이 빠른 행진이 시작되다.

중간 중간 차를 얻어탄 사람도 아마 오늘이 가장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힘든 코스였죠.
추장의 말처럼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야 했습니다.
근육통은 기본이고 물집이 잡히고 몸살까지 걸린 사람도 있죠. 그러나 그런 것들은 아마 금방 나을 겁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완주이건 아니건 모두 정말 열심히 걸었다는 것이죠
40 키로미터를 함께 걸어 보령에 도착한 거죠! 그것도 해가 있을 때.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 분명한 일이었지만, 혼자였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지금 걷는 것이 상당이 불편하게 되었지만요. (오늘은 또 어케 걷는다~!)

6시: 황해숙 박문호 선생님 방문
황해숙 선생님께서 호화판 저녁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전복죽은 맑은 국물에 전복을 30마리나 넣은 것이었죠.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우리 호강했습니다.
곰숙씨는 “아니, 이렇게 잘 먹어서 투쟁이 되겠어요?” 하셨습니다. 오.. 특히 잡곡 넣은 누릉지에 수많은 반찬들... 피곤이 한꺼번에 날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도 재윤이가 놀러왔죠. 재윤이는 정말 말을 잘합니다. 이를테면
“추워? 내가 안 춥게 해 줄게. 춥다고 생각하면 정말 춥고, 안 춥다고 생각하면 안 추운 거야” ^^; 정말이지 박문호 선생님의 따님이라 아니할 수 없죠. ^^

7시40분: 각자의 자리에서 싸우자.
지식인과 실천이라는 문제로 성환선배가 써온 길을 읽고 토론회를 시작했습니다.다들 너무 지친 탓에 길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죠.
성환선배의 글은 “지식과 윤리”라는 주제로 ‘공부’가 단지 글자로 책 읽는 것만이 아님을, 자기를 넘어서고, 삶의 깨달음을 얻는 순간임을 이야기했습니다.
지식인에게 ‘현장’이 무엇인가를 다시 질문했는데요. 몰라서라기 보단, 여전히 ‘공부’가 어떤 경계가 있다는 생각에서 쉽게 벗어나 있진 못한 것 같습니다.
새만금이 새만금에만 대추리가 대추리에만 공부가 공부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선인들의 ‘공부’에 대한 의미가 전해 지지 못한 결과 나타난 현상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문제건 그 문제를 자기 자신의 문제로 제기하고 끊임없이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문제를 이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죠.
그 외에도 박문호 선생님의 자연과학적 입장에서 볼 때, 인문학적인 경우와는 달리, 어떤 점에 중점을 두게 되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인문과학에서 자기를 버리고 비우는 일이 바로 자기극복이라면, 자연과학에서는 오히려 어떤 지식들을 쌓아가는 과정이 어떤 천리를 깨닫는 일이 된다고 하셨죠.
새만금의 이야기를 하면서 강한 말과 울림이 있는 말은 삶 속에서 나오고, 소수자되기의 중요한 것은 공감의 능력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추장님은 요즘 관심을 가진 테크노트라트 문제를 ‘사회과학 지식인’의 탄생과정과 관련해섬 말씀하셨는데요. 골자는 이제 지식인은 그 자체로 권력이 되었다는 것이죠. --;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하루가 저물어갔습니다.
오늘은 많이 힘든 날인 만큼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아,,, 마지막으로.
걷으면서 질문한다는 것에 대해.
걷는 데 집중하면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생각을 하면 걷는 데 집중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건 언제건 생각하지 않을 때 조차 강하게 우리를 붙드는
단순하고 강한 질문을 갖고 있는 것이겠죠.
그건 아마 이렇게 걷고, 새만금이나 농민의 현실을 몸으로 체험하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가능해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매번 새로운 현실을 만날 때마다 질문을 더 강렬하게 서로 다듬고 교차시켜 가는 것이겠죠.
어디에서나 우리의 현실과 우리의 질문이 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고 가게 되길 바라고 있어요.

연구실에서 수고하는 홈키파와 에프킬라님들도 화이팅.
홈키파가 바로 콤배트고 에프킬라가 바로 콤배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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