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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영{NGA 인턴)
팬데믹. 코로나19 바이러스(이하 코로나)의 세계적인 유행에 대해 온종일 매체에서 떠드는 소리를 듣는다. 그럼에도 또다시 팬데믹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팬데믹이라는 용어가 익숙해진 만큼 코로나로 인한 전염병 관리 체제가 ‘일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해외여행과 같은 가시적인 것을 넘어서서, 우리의 삶에서 보다 근본적인 요소를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인류가 탄생하기 전부터 존재해왔던 바이러스에 맞서는 방법은 사람들과의 접촉을 차단하는 것이다. 대면 접촉을 줄이고, 공공장소 대신 집과 같은 사적 공간에서 지내야 하며, 특정 시간대 이후의 이동이나 공간의 점유는 제한된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에게, ‘사회적 거리두기’만큼 이질적인 단어들의 결합도 없을 것이다. 거리를 둔 채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한가. 몸은 멀어도 마음은 가까운 게 가능한가. 신체란 무엇인가. 관계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너’가 없는 ‘나’란 무엇인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이례적인 상황은 여러 물음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당연하게만 여겨졌던 ‘관계’에 대해 재사유해보게 된다. 그럼에도 인간은 적응하고 진화한다. 홀로 고립되어서는 존재할 수 없는 우리는 팬데믹 상황에서도 나름의 대안을 찾아낸 듯하다. ‘언택트(Un-Contact)’라는 용어의 쓰임처럼, 화상으로 회의를 하거나 ‘랜선’ 모임을 하는 등 접촉하지 않은 채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사람과 마주하지 않은 채 만들어가는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지만, 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보다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타인과 직접 대면하고 관계함으로써만 이루어지는 움직임, 즉 ‘연대’를 핵심으로 하는 움직임은 현재 코로나 시대에서 어떻게 제한되고 있으며 그 전망은 어떠한가? 제도권 정치에 편입되지 않은 목소리들은 거리에 직접 나서고 연대의 형태를 띰으로써 정치적으로 세력화한다. 이러한 집회나 시위 등을 ‘거리의 정치’라고 칭해본다면, 사람들의 이동을 제한하고 공간의 사용을 규제하는 팬데믹 하에서의 방역 정책은 거리의 정치를 강하게 제약한다. 서울시는 2020년 8월부터 1년 가까이 10인 이상의 집회를 전면 금지해왔고, 이후 전국적으로 적용되는 새로운 거리두기 단계 중 4단계에서는 1인 집회만 허용된다. 이로 인해 방역 조치가 집회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과도하게 제한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문제는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특히 인권단체연석회의 공권력감시대응팀은 지난 8월, “이슈보고서: 코로나19와 집회시위의 권리”라는 보고서의 발표를 통해 다른 활동과 달리 집회 및 시위의 경우, 코로나 확진자 수의 추이와는 무관하게 지자체의 자의적인 행정 명령으로 집회 금지가 유지됐음을 밝혔다.
혹자는 모두의 안전이 위협받는 팬데믹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집회나 시위가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전염병의 확산을 막아야 하는 특수 상황에서는 공중 보건을 위해 행동의 규제가 이루어질 수 있고, 시민들은 협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이고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뺏는 사회는 어떠한 모습일까? 정치학자 발리바르(Balibar)가 지적하듯, 법을 통해 제도화되는 특정 권리는 언제나 ‘우리’의 범주의 밖에 존재하는 이들을 배제한다. 따라서 누구에게나 자신이 배제되었음을 말하고 이에 저항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며, 이것이 금지된 사회는 결국 죽은 사회일 수밖에 없다. 또한, 우리는 지난 2년간의 팬데믹 상황을 통해 질병은 동등하게 찾아왔지만 ‘재앙’은 동등하게 발생하지 않았음을 확인해왔다. 재택근무가 불가능한 노동은 감염의 위험에 더욱 취약하며, 누군가는 감염으로 인해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 찍힌다. 팬데믹 상황이기에 말하기를 멈춰야 할 것이 아니라, 팬데믹 상황이기에 더욱 말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운동은 함께 모이고 거리에 나섬으로써 특징화된다.
서울퀴어문화축제를 통해 본 ‘거리’의 의미
6월마다 찾아왔던 서울퀴어문화축제 또한, 모이고 거리에 나서기를 멈추지 않았다. 작년에는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9월로 연기되고 전면 온라인 행사로 진행되었지만, 올해에는 온라인뿐만 아니라 퀴어퍼레이드 및 소규모의 행사가 방역 지침을 준수하며 대면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지난 8월,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 조직위원장 홀릭님과 서울퀴어퍼레이드집행위원회 집행위원장 강현주님을 만났다.
장소와 재정의 문제로 인해 매년 퀴어문화축제의 개최 가능성은 불투명하지만, 그럼에도 늘 해내왔고 또 해내야만 한다고 말하는 홀릭님은 코로나 상황으로 인한 축제의 취소는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성소수자임을 드러내는 것이 안전하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퀴어문화축제 및 프라이드 퍼레이드의 날은 ‘나’를 드러낼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많은 이들이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고, 연초에 마음 아픈 소식들도 연이어 들려왔기에 축제는 열어야만 했다.
특히 작년과 같이 전면 비대면으로 진행하지 않고 소규모의 형태라도 대면 행사를 계속했던 이유에 대해, 강현주님은 두 가지를 들여 설명해주셨다. 첫째는 ‘집’이라는 공간이 모두에게 안전하기만 한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외출을 자제하고 집에만 있을 것을 요청받지만, 같이 사는 친권자 혹은 이웃으로부터 위협을 받는 이는 더욱 극심한 고립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온라인적 환경에서는 온전히 구현될 수 없는 사람 간의 ‘만남’이 주는 느낌이 있다. 한 공간에 함께 모이고 같은 에너지를 받으면서 ‘취하는 게’ 있다.
퀴어문화축제의 ‘꽃’인 프라이드 퍼레이드(pride parade) 또한, 비록 예년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계속되었다. 작년에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여섯 장소에 한 명씩 깃발을 드는 형태였고, 올해에는 참여자를 미리 모집하여 9명이 한 조가 되어 행진하였다. 다른 행사들이 온라인 환경에서도 비슷하게 구현될 수 있다면,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오프라인적 속성이 강한 움직임이다. ‘나’를 드러낸 채 거리를 걷는 행위는 그 자체로 수행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올해의 서울 시장 선거 과정에서도 명백히 드러났듯, 서울 광장이라는 공공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당연하게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들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 혹은 ‘보지 않을 권리’가 언급되는 이유는, 그들의 존재를 금지하고 배제하는 방식으로 특정 공간이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리를 걷는 행위는 ‘이성애규범성’이 적용되는 공간을 다른 방식으로 전유한다. 퀴어(queer)한 존재들이 금지되었던 공공 공간은 다양한 존재들이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공간으로 변형된다. 거리를 걷는 이들은 규범을 거스르고 그 변형을 자신의 신체로 직접 체현해내는 직접적인 수행자이다. 또한, 거리에서의 행진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비록 인원 제한으로 인해 적은 수의 사람만 직접 프라이드 퍼레이드에 참여할 수 있었고, 비가 오면서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참여한 사람들이 너무 행복해했다고 홀릭님은 말씀해주셨다. 사람과 사람 간의 만남에는 분명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쉽게도 온라인으로만 참여했던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 분들이 전문 방송인이 아니기에 송출 상의 지연이 있었지만, 지연되었던 그 순간마저도 사람들은 온라인이라는 공간에서 댓글을 통해 소통하며 놀고 있었다고 한다. 온라인이더라도 그 공간은 퀴어한 존재들이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었고, 거리를 걸으며 공공 공간을 점유했던 것처럼 이들은 온라인에서도 자신들의 공간을 창조해낸 셈이다. 이렇듯 팬데믹 상황이 그 고안을 요구해낸 온라인을 통한 연대의 방식에는 분명한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시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서 많은 이들이 함께할 수 있다. 또한, 대면 행사에서의 아웃팅의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람도 온라인을 통해 행사를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점에 두 분은 공통된 의견을 보이셨다. 한 공간에 함께 있는 집단 경험이 가져다주는 집중도와 에너지는 비대면의 방식을 통해서는 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나’를 드러내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성소수자들은 고립감을 느끼기 쉽기에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만나는 경험’이 중요하다. 신체를 매개로 한 공간에 공존하고 함께 거리를 걸으며 연대를 이루던 기존의 방식이 온라인으로 온전히 대체될 수 없는 이유다.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우리’
결국, 퀴어문화축제를 통해 진행되는 퀴어 운동이 ‘거리’에 나서는 것은 공적 공간의 규범을 변형하고 ‘나’라는 존재를 가시화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또 한 편으로는, 함께 있음으로써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연대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가 만들어나가고자 하는 ‘안전’한 사회, ‘나’임을 당당히 드러낼 수 있는 사회는 서로의 존재가 존중되고 특정 존재가 배제되지 않는 사회다. 코로나로 인해 무대에 설 기회가 사라진 퀴어 예술인 및 일반 창작자들에게 무대를 제공하기 위해 대면 행사를 기획하고, 온라인 행사에서 수어와 문자통역을 동시 진행하며 기존 행사가 진행되었던 광장에서도 장애인 쉼터를 고려하고자 했던 점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집회 및 시위가 금지되고, 모여 있는 것에 제약을 받으면서 희미해져 버린 감각은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이다. 그러나 서로의 존재를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각 존재가 삶을 영위해나갈 수 있는 더 나은 사회를 함께 외치고 만들어나간다. 그렇기에 거리의 정치는 팬데믹 상황에서도 계속되어야 하고 계속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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