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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농촌 이주여성노동자 저스민씨를 만나다

주원(NGA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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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간 동물의 생(生)과 연대하는 마음으로 비거니즘을 지향하게 되면서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 작물이 둘 있다. 바로 콩과 버섯이다. 나를 위해 한 끼 요리가 된 콩과 버섯. 그런데 정작 나는 이 작물들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키워지는지에 대해 관심 가져본 일이 없었다. 내가 먹는 모든 끼니를 가능하게 하는 노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막연히 ‘농산물’은 ‘농부와 농민’에 의해서 키워지리라 생각했을 뿐이다. 나의 빈약한 상상 속에서 ‘농부와 농민’은 햇볕에 그을린,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힌, 중장년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지난겨울, 한파 속에서 차갑게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던 캄보디아 이주여성 노동자 속헹 씨의 소식을 접했다. 당시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적어도 이주노동/자에 무지하지는 않다고 자부하던 나조차 이주여성의 노동을 돌봄 노동에 국한 지어 이해했고, 좀처럼 농촌에서 일하는 이주여성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상상 속에서 그녀는 농부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나의 매끼 식사는 속헹 씨를 비롯한 그녀들의 노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느덧 속헹 씨의 죽음도 약 10개월이 지났다. 우리는 다시, 아주 자연스럽다는 듯, 이 죽음으로부터 무뎌져 가고 있다. 그래서였다, 이번 웹진에서 나는 농업에 종사하는 이주여성을 만나야만 했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는 듯 발화되지 않는 이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난 8월 22일 아침, 경기도 이천시 소재의 버섯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이주여성을 만났다. 서울에서 출발해 시외버스를 타고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 유독 아시아 마트와 국제 통신 상점이 눈에 띄었다. 도시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생소한 풍경이 농촌에 줄지어 있었다. 도시의 무관심과 위탁 속에서, ‘농촌’과 ‘이주노동’의 불편한 동거는 꽤나 오래되어 보였다. 출발한 지 2시간여 즈음 되어 네팔 여성 저스민 씨를 만났다. 그녀는 네팔에서 함께 이주한 자신의 애인 이만 씨와 함께했다. 어느 오두막 쉼터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더듬더듬, 때로는 번역기의 힘을 빌려 가며 천천히 대화를 시작했다.

***아래의 인터뷰는 본래의 의미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일부 수정 및 재구조화되었습니다. 한편 저는 ‘기울임체’로 표기한 부분을 통해 저스민 씨와의 만남에서 느낀 개인적 소회를 담고자 노력했습니다.

 

주원: 안녕하세요 저스민 씨,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저스민: 안녕하세요. 저는 네팔에서 온 32살 저스민입니다. 우리는 (한국에) 돈 벌려고 왔어요.

 

주원: 이곳 이천에서 일한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저스민: 이천의 버섯 농장에서 일한 지는 7개월 되었어요. 지금 3년 비자 그리고 1년 코로나 비자 받았어요. 먼저 네팔에서 올 때는 청주에서 농장일을 했어요. 청주에서는 음성으로, 음성에서 이천으로.

 

주원: 한국에서의 생활은 어떠하신가요?

저스민: 한국 괜찮아요. 우리는 일 하러 왔어요. 그러니까 열심히 일하고 싶어요. 그런데 열심히 일할 때, 사모님과 사장님 요구 있어요. “빨리빨리 해.” 그럴 때는 힘들어요. 일을 잘 하더라도 자꾸 “안 돼요, 안 돼요”라고 하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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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저스민 씨는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한 사람이다. 열심히 일하고, 그에 따른 정당한 임금을 받아 경제적 소득을 얻고자 하는 저스민 씨, 자신의 일에 관해 말하는 그녀는 매우 강단졌다. 하지만 매 순간 이주노동자를 감시하는 농장주의 지나친 통제와 간섭은 그녀를 지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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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 저스민 씨의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시나요?

저스민: 월요일부터 토요일, 아침 7시 30분부터 일을 시작해요. 점심시간은 12시 30분에서 1시 30분까지. 오후 4시에는 15분 휴식해요. 이때를 제외하고는 휴식 시간이 없어요. 그러고서는 6시 퇴근해요. 일이 많을 때는 오후 6시 이후에도 일하는 때가 있어요. 그리고 일요일도 (매주 돌아가면서) 아침 8시부터 11~12시까지 일해요.

 

주원: 일을 쉬는 날에는 무엇을 하시나요?

저스민: 쉬는 날엔 계속, 여자들에게 “코로나 걸려요”라며 밖에 못 가게 해요. 남자들은 어디어디 가도 말 없어요. 그런데 여자들에겐 “가면 코로나 있어요, 가지 마요”라고 해요. 마트도 가지 못하고, 음식물을 사러 갈 수도 없어요. 그것 때문에 힘들어요. 남자들은 어디 가도 아무 말도 안 해요. 그런데 여자들 밖에 가면 마트도 못 가게 하는 거예요. 나가도 ’가지마‘라고 하면서 계속 스트레스 주는 거예요. 사장님보다 우리(여성 노동자)에겐 사모님이 계속 “밖에 나갈 사람은 가. 대신 나갈 거면 (다신) 오지 마”라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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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전해준 일과를 계산해보면, 그녀는 월평균 250시간이 넘는 노동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제아무리 농업의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심각한 장시간 노동이었다. 한 달에 며칠 되지 않는 휴일에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을 빌미로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조차 박탈된 채 숙소에 머물러야 했다. 여성 이주노동자에게는 더욱 엄격한 몸의 통제가 이루어졌고, 따라서 숙소 밖을 나서는 것조차 쉽게 ’허가‘되지 않았다. 농장주 내외의 감시 속에서 그녀의 몸은 그녀의 것일 수 없었다. 한편 쉴 틈 없이 계속되는 노동 속에서 몸이 성할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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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 몸이 아플 땐 일을 쉴 수 있나요?

저스민: 몸이 아프거나 다치더라도 일해야 해요. 병원 가더라도 15분 지나면 바로 돈을 잘라요. 일할 때 아프다고 말해도 결국 (사장님과 사모님은) “일해야 해요”라고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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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보여준 월급명세서에는 ‘177만 5천 원’이 찍혀 있다. 숙식 제공 명목으로 12만 원이 제해진 금액이었다. 그녀가 수행하고 있는 노동 강도를 고려할 때, 턱없이 낮은 금액이다. 이는 몸이 아플 때조차 최소한의 휴식을 취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버텨내 겨우 얻는 임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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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 현재 농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는 몇 명인가요?

저스민: 외국인은 18명 있어요. 여자는 11명, 남자가 7명. 14명이 네팔 사람. 캄보디아 사람 4명.

 

주원: 이주노동자 간에는 모두 월급이 같나요?

저스민: 자기 월급만 알고, 다른 월급은 모르겠어요. 월급명세서가 나오지만 서로 전혀 몰라요.

 

주원: 그래도 출신 국가가 같으니 대화가 잘 통할 것 같아요. 함께 노동환경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한국어가 서툰 저스민 씨를 곁에서 도와주던 이만 씨가 혹시 자신이 말해도 되겠냐며 답했다)

이만: 노동자끼리 서로 말이 안 맞아요. 일하는 사람들도 나쁜 사람이 있어요. 사모님, 사장님한테 이렇게 말을 왔다 갔다 (전)한다든지. 그것 때문에 없어요, 안 돼요. 그리고 어떤 사람은 어디 가도 돼요, 상관없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밖에 나가지도 못해요, 쉬는 날에도 나가지도 못해요. 바깥에 가도 들어오면 방에 와서 눈치를 주는 거예요. 나는 (내부의 차별을) 다 알아요. 왜 다른지는 몰라요. 같은 직원들, 같은 일하는 사람들도 왜 (처우가) 다른지 몰라요. (추측해보자면) 농장에 조금 먼저 들어온 사람과 뒤에 들어온 사람 간 차이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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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저스민 씨가 일하고 있는 사업장에서만 하더라도 18명의 이주노동자가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60%의 노동자가 여성이다. 하지만 같은 일을 하는 동료 노동자 간에도 서로의 임금을 전혀 알 수 없는 구조 속에서, 이주노동자 간 연대가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주노동자 내부에서도 각각 농장주와의 관계맺음 양상이 다르기에, 이는 노동자 내부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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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55fc291c.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602pixel, 세로 451pixel

 

주원: 저스민 씨의 꿈은 무엇인가요?

저스민: 여기에서 농장일을 잘 배워서 네팔에 가서 농장을 경영하고 싶어요.

 

이주노동자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과 부당대우를 폭로하던 저스민 씨는 당차게 자신의 꿈을 말했다. 훗날 농장 경영을 꿈꾸는 그녀에게 한국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준비 공간이다.

문득 이 만남의 시작을 떠올린다. 만남 약속을 잡기 위해 저스민 씨와 처음으로 유선으로 대화하던 날, 내게 저스민 씨의 목소리는 언짢은 기색이 역력하게 들렸다. 나는 내가 저스민 씨의 한국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여 그녀를 언짢게 했으리라 걱정했다. 그런데 그녀를 만나 직접 대화를 나누고, 그녀가 구사하는 네팔어를 듣고서야 그간의 내 무지를 깨닫고 부끄러워했다. 그녀가 구사하는 한국어의 어조가 네팔어 고유의 어조와 꼭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어 모국어 화자가 한국어 억양이 담긴 외국어를 구사하는 것처럼, 그녀는 그저 자신의 모국어 억양이 담긴 한국어를 구사했을 뿐이었음을.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한 시간여의 만남, 하지만 그 만남이 서로 사이의 벽을 허물어낸다. 이 땅에 살아가는 다양한 역사를 가진 사람들, 우리는 우리 사이의 벽을 허물고 서로를 대면할 수 있을까. ‘꿈’이라는 이름 아래 부당한 일이 일어나는 공간, 한국에서 살아가는 저스민 씨를 진심을 다해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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